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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올해의 책'이 아니다!

[2011 올해의 책] 정영문의 <어떤 작위의 세계>

'프레시안 books' 송년호(71호)는 '2011 올해의 책' 특집으로 꾸몄습니다. '프레시안 books'가 따로 '올해의 책'을 선정하는 대신, 1년간 필자·독자·기획위원으로 참여한 12명이 각자의 '올해의 책'을 선정해 그 이유를 밝혔습니다. 다양한 분야, 다양한 장르의 이 책들을 2011년과 함께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벌써부터 나른한 기분이다. 그러니까 <어떤 작위의 세계>(정영문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라는 제목을 가진 어떤, 소설이라고 부르기는 조금 힘들지도 모르지만 달리 부를 말이 없어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는, 그렇기에 다른 어떤 소설보다 더욱 소설다운 책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곤한 졸음이 밀려온다. 뜻 모를 이국의 관념어들로 가득한 철학책이 선사하는 피로와는 다르다. 어느 따듯한 봄날, 들판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반쯤 감은 눈으로 하늘을 떠도는 뜬구름을 바라보는 것처럼, 퍽 기분 좋은 나른함이다. 자신의 소설을 뜬구름에 비유한 것은 바로 작가 자신이다.

이 소설은 서울에 있는 대산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2010년 봄부터 여름까지 샌프란시스코에 머물며 쓴 것으로, 내게는 샌프란시스코 표류기에 더 가깝게 여겨지는 샌프란시스코 체류기이다. 이 글에는 샌프란시스코에 관한 이야기도 있지만 이 도시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나는 이 도시에 머물면서 되도록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려 하지 않았는데 특별히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고 싶은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그냥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고 느껴지는 대로 느끼고 어쩔 수 없이 경험되는 대로 경험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니, 그보다는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들리는 대로 듣지 않고 느껴지는 대로 느끼지 않고 경험한 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가 마음대로 뒤틀어 심하게 뒤틀리기도 한 이야기들이 있는 이 글에는 지극히 사소하고 무용하며 허황된 고찰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시도, 혹은 재미에 대한 나의 생각, 혹은 사나운 초록색 잠을 자는 무색의 관념들, 혹은 뜬구름 같은 따위의 부제를 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작위의 세계> 서문)

그렇지만 곤란하다. 이 지면은 돗자리가 아니고(신문이라고는 하지만 깔고 누울 수는 없고), 나는 지금 소풍을 나온 게 아니다. 좋은 걸 단지 좋다고만 말하고 끝낼 수 있는 독자의 사치를 부릴 처지가 아닌 것이다. 줄거리를 적당히 요약하고, 몇몇 구절들을 먹기 좋게 썰어 발췌한 후 몇 스푼의 분석과 감상(기호에 따라서 서평자 본인의 개인사를 함께 넣으셔도 좋겠다)을 버무린다는 일반적인 '레시피'도 통하지 않는다. 뜬구름을 요약(혹은 요리)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 <어떤 작위의 세계>(정영문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우리는 기껏해야 구름을 닮은 솜사탕을 조금 떼어내, 마치 그것이 무척이나 의미 있는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한참을 만지작거린 후, 더 이상 솜사탕이라고 부를 수 없을 그것의 잔해를 조금의 아쉬움도 없이, 그렇다고 어떤 후련함을 느끼지도 않으면서, 어딘가로 튕겨 버리는 정도의 일밖에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구차한 변명. "따라서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무의미한 일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자유 연상의 핵심적 사유를 이루는 것, 몇 가지를 파편적으로 지적하는 것으로 그치기로 한다"(<문학동네> 2011년 겨울호, 645쪽)는 평론가 이도연의 문장은 같은 변명의 조금 덜 구차한 버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소설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여기 몇 가지 단서가 있다. 1) 뜬구름 2) 표류기 혹은 체류기 3) 지극히 사소하고 무용하며 허황된 고찰로서의 글쓰기에 대한 시도 4) 재미에 대한 그의 생각. 더없이 적확함에도 불구하고 1)의 비유는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은 이들에겐 말 그대로 뜬구름 같은 이야기로, 어떤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2) 또한 작품의 탄생 배경에 대한 부족함 없는 설명이지만 그것이 작품을 더 잘 이해하게 하지는 않는다. 3)은 정영문이라는 작가의 DNA를 이루고 있는 어떤 근본적인 충동으로 그의 모든 작품에 대해, 구체적으로는 전작 <바셀린 붓다>(자음과모음 펴냄)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니 문제는 4)다. 재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그는 이렇게 쓴다.

잠시, 내가 재미있게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재미없게 생각하는 것들을 들면, 모든 종류의 소음, 거의 모든 음악, 폭력적인 것, 우울, 전통적인 소설, 시대를 반영하는 소설, 상처와 위안과 치유에 대해 얘기하는 소설, 등장인물의 생각보다 행위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소설, 거창한 소설, 감동을 주는 소설(그런 소설들에 낯간지러운 찬사를 늘어놓는 평론가들이 얼마나 재미없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약간은 재미있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재미없으니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비결은 평론가로서 소양이 없거나 한 인간으로서 위엄과 자존이 없거나 두 가지 다일 거라는 얘기만 하도록 하자), 성장 소설, 심각하기만 한 소설, 자의식의 과잉이 묻어나지 않는 소설, 잠언 풍의 시, 상식적인 것, 뻔한 수작(을 부리는 사람), 구김살이 없는 사람, 묘한 구석이 없는 사람, 권위를 온몸으로 풍기는 사람, 부지런하고 의욕이 넘치는 사람들, 사회에 기여하고자 하는 사람들, 구름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 단순한 사람들, 말이 많은 사람들, 욕심이 너무 많은 사람들, 유머는 알지 못하고 우스개밖에 모르는 사람들, 뭐라 말할 수 없게 말할 수 없이 재미없는 사람들(이들은 정말 재미없다) (…) (94쪽)

목록은 끝없이 이어진다. 그러니 우리는 <어떤 작위의 세계>를 두고 "전통적이지 않은 소설, 시대를 반영하지 않는 소설, 상처와 위안과 치유에 대해 얘기하지 않는 소설, 등장인물의 행위보다 생각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소설, 소소한 소설, 감동을 주지 않는 소설(그런 소설들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평론가들이 얼마나 재미없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약간은 재미있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재미없으니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비결은 평론가로서 소양이 없거나 한 인간으로서 위엄과 자존이 없거나 두 가지 다일 거라는 얘기만 하도록 하자), 반(反) 성장 소설, 심각하기만 하지는 않은 소설, 자의식의 과잉이 묻어나는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당신은 물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그 소설이 뭔데? 좋은 질문. 그것은 바로 이런 것들로 채워진 소설이다.

그림자, 구름, 바람, 안개, 어떤 이유로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세상의 모든 물고기들, 땅속에 굴을 파고 사는 모든 동물들, 짝짓기 철이 되어 예민해진 동물들, 날씨, 나무들, 주정뱅이(이들은 재미있기도 하고 재미없기도 하다), 어린 개구쟁이들과 어른이 되어서도 개구쟁이 같은 데가 있는 사람들, 욕심이 없는 사람들(이들 가운데는 재미없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동냥에는 별 관심이 없는 거지들, 꿈이 너무 크지 않은 아이들, 나체주의자, 여자에게 퇴짜 맞거나 퇴짜 놓은 기억들, 복수에 대한 어떤 생각들, 말로 하는 놀이, 말하는 것이 거의 없는 시와 소설, 너무 고통스럽지 않은 병, 가난(부유함이 재미있을 수도 있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게 하지만 그 자체는 재미없는 데 반해 가난은 가난해서 떨 수밖에 없는 궁상으로 인해 재미있을 수도 있다), 잔뜩 게으름 피우기, 자유자재로 말들을 갖고 놀 수 있는 경지에 오르는 것, 근거가 전혀 없거나 상당히 근거 없는 생각들, 아무것도 아닌 뭔가에 대해 혼자만의 이론을 펼치는 것, 혼자서 세상의 이런저런 것들을 조용히 비웃으며 험담하기, 그리고 뭔가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을 때까지 생각하기와 같은 것들 (…) (95쪽)

분명 이것은 당신이 생각하는 '소설'이라는 것과는 상당히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소설이고, 다른 어떤 소설보다 더욱 소설답다. 이 글의 첫머리에서 나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책의 뒤표지에 적힌 "세계의 무의미에 예술의 무의미로 대적하는 것은 이 세계가 무의미하며 그 무의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출구가 전혀 없다는 권태롭고 절망적인 인식에 도달한 작가가 택할 수 있는 마지막 비타협적 저항의 방법일 것이다. 정영문은 진정한 무와 무의미의 원천으로서 유아적 세계관과 상상력에 기대어 세상이 강요하는 가짜 의미들과의 대결을 시도한다"는 평론가 김태환의 문장은 비슷한 말의 평론가 버전이다.

문제적 자아와 거대하고 또 무자비한 세계의 대결. 그것이야말로 근대 문학의 골수가 아니던가. 물론 이건 오해의 여지가 있는 표현이고, 나는 그것에 선뜻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그건 또 다른 문제로, 아마 책 한 권을 써도 모자란 이야기겠지만, 나는 그런 책을 쓸 생각이 없다. 그건 내 능력을 벗어나는 일인 동시에 무척이나 재미없는 일이 될 것이 분명하고, 그런 일을 자진해서 하는 능력과 인내가 있는 사람들을 나는 존경하지만 재미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냥 이렇게 말할 생각이다.

나는 여전히 이 책에 대해 쓰고 있고, 그렇게 여전히 쓰는 데에는 이유 같은 것이 있어야만 할 것 같았고, 그래서 이유를 찾으려 했지만 이유 같은 것은 없다. 거의 늘 내가 별 이유 없이 뭔가를 쓰거나 쓰지 않거나 하며, 무엇을 어떻게 쓰면 좋을지 알 수 없는 상태에 있고, 그런 상태는 내게 아늑함을 주기도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번에는 약간 난감하다. 문득 어떤 누군가가 숲 속에서 난감해하는 장면이 떠올랐는데, 그는 정영문이 쓴 어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그 장면을 마음속으로 떠올리며, 지금 나와 비슷한 상태에 처한 소설 속 인물의 심리에 좀 더 다가가 보려 했지만 그 인물이 느꼈을 난감함만 다시 느꼈다. 정영문은 이렇게 썼다.

나는 계속해서 가만히 서 있었고, 그렇게 가만히 서 있는 데에는 이유 같은 것이 있어야만 하는 것 같았고, 그래서 이유를 찾으려 했지만 이유 같은 것은 없었다. 거의 늘 내가 별 이유 없이 뭔가를 하거나 하지 않거나 하며,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는 상태에 있고, 그런 상태는 내게 아늑함을 주기도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번에는 약간 난감했다. 문득 어떤 누군가가 숲 속에서 난감해하는 장면이 떠올랐는데, 그는 내가 쓴 어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었다. 그 장면을 마음속으로 떠올리며, 지금 나와 비슷한 상태에 처한 소설 속 인물의 심리에 좀 더 다가가 보려 했지만 그 인물이 느꼈을 난감함만 다시 느꼈다. (187쪽)

나는 계속해서 내가 읽은 것들에 대해 두서없는 생각을 했는데, "그러고 나자 점차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잠시 멍한 상태에 있었고, 그런 상태에 있을 때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마치 모든 생각을 씻어버린 것처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고, 아무런 할 말도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할 말을 잃은 것처럼 있었고, 그런 상태에 빠지기를 내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잠시 생각한 후 다시 아무 생각 없이 있었다. 그런 상태로 한동안 있는데, 조금씩 어떤 불편한 생각이 들었다. 그 모든 것이 대단히 작위적으로 여겨졌다. 그 순간에도 이 경험을 어떤 식으로든 글로 옮기려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 순간의 경험을 글로 옮기기에 유리하게 조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89쪽) 바로 지금 이 순간 내가 나의 독서 경험을, 그로 인해 발견한 그의 문장을, 다시금 이 글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처럼. 굳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정영문은 계속 쓴다.

언젠가부터 그런 식으로, 어떤 순간을 순수하게 경험하기보다는 그 순간을 글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의식하며, 의식과 감정까지 조작하며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어떤 잘못처럼 여겨졌고, 나 자신이 위선적으로 느껴졌다. 내가 뻔한 수작을 벌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들이 나쁘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편안함은 내가 어떤 작위의 세계 속 한가운데 있기에 주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오래도록 너무도 작위적인 삶을 살아왔고, 이제는 작위적인 것이 내게는 자연스러웠다. 내가 작위적인 삶을 산 것은 삶의 그 무엇도 사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았고, 그에 따라 삶에 진지할 수 없었고, 삶의 어떤 사실들이 아니라 그 사실들에 대한 생각들에만 관여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이것이 나의 삶의 가장 큰 실질적인 어려움이기도 했다.

완벽한 작위의 세계가 그 숲 너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고, 작위를 통해서만 가 닿을 수 있는, 막연하고 난처하고 혼란스러우며, 부자연스럽고 어둡고 가망이 없지만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세계가, 깊어지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았고, 작위로써 완성해갈 수밖에 없는 삶이 내 앞에 가로놓여 있는 것 같았다. 의미와 무의미가, 존재와 비존재가, 우연과 필연의 차이가 사라져 경계가 모호한 그 작위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맥락이 없었고, 뭔가가 일어나도 그만이고 일어나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그 세계는 이상한 무위의 허구의 세계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자 완벽한 작위의 세계가 그 숲 너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이미 내가 그 세계 속에서 지내온 지 너무도 오래되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190쪽)

결국 이것은 우리가 만들었고, 스스로 갇혔으나 이미 익숙해졌기에 편안하고 자연스러우며 그 바깥을 상상할 수 없는 어떤 삶에 대한, 세계에 대한, 그 모든 작위에 대한 이야기다. 그렇다고 이것을 흔한 자연 예찬/문명 비판 따위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작위적인 세계를 작위적으로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닿을 수 있는 이중의 작위이고, 그에게는 더 이상 작위가 아닌 듯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역설적 작위이며, 아직은 완벽하지 못한 어떤 작위다. 결국 그것은 그가 쓰고 또 추구하는 소설의 세계, 부당하고 또 무거운 의미들이 사라진 가벼운 언어들의 세계다(그리고 이것은 할 말이 떨어진 궁한 서평가가 억지로 조립한 문장의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다름 아닌 뜬구름이고, 이제 우리는 1)로 돌아올 수 있다. 정영문은 이렇게 썼다.

(나는 이 마지막 장은 오직 구름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지만 어떻게 하다가 결국에는 딴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장도, 이 소설 전체도 사실은 구름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한데, 그것은 이 소설이 뜬구름 잡는 것에 관한 뜬구름 잡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는 뜬구름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은 내 생각에 자연계의 모든 것 중에서도 그 안에 핵심이 없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뜬구름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생각과 말의 어지러운 장난에 지나지 않는 이 소설이 뜬구름처럼 아무런 핵심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270쪽)

이것은 다름 아닌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고,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지만, 가장 중요한 질문이 아직 남아있다. 여기까지 읽은 당신이 반드시 던져야 할 그런 질문이다. "좋아, 필사적으로 말하는 당신의 성의를 봐서라도 이 소설이 뜬구름 같은 소설이라는 건 인정해주겠어. 그런데 이봐, 이 자리는 단순히 책을 소개하는 자리가 아니잖아. 2011년 '올해의 책'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에 혹해서 이 지루한 글을 끝까지 보고 있는 거라고. 도대체 이 책이 올해의 책이라는 근거가 뭐야?"

사실 당신보다는 내가 더 지쳤다. 때론 엉터리 같은 글을 쓰는 일이 더 힘든 법이다. 그러니 이쯤에서 나는 '적절한 권위에의 호소'라는 비장의 무기를, 여전히 효과적이고 어쩌면 작금의 현실에서야말로 진정으로 효과적인 '기계 장치의 신'을 꺼내들 작정이다. 당신도 좋아하고 나도 좋아하고 (직접 물어본 바에 의하면) 정영문도 좋아하는 박민규의 말이다. 2010년 출간된 <바셀린 붓다>의 추천사를 박민규는 이렇게 썼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지금 당신의 손에 들려진 이 책이 단순한 한 권의 소설이 아님을 알아주길 바란다. 이것은 정영문의 소설이고, 지금 당신은 정영문과 함께하고 있다. 대체 한국 문학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던 게야! 훗날 분통을 터트리는 누군가가 있다면 우리는 말없이 정영문의 소설을 그에게 내밀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정영문은-지금 이 순간-결정적인 -많은 판결을 뒤엎을 만한-한국 문학의 '알리바이'다.

이것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나는 당신이 '정영문'의 목격자가 되어주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또 바란다. 그때 나는 정영문을 읽었어, 라고 언젠가 당신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프랑스며 일본이며, 단체 여행 사진을 잔뜩 늘어놓은 자리에서 난 모로코를 다녀왔어, 라고 말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모로코라고? 바셀린처럼 끈적한 누군가의 질문을, 혹은 부러움을 당신은 분명 받게 될 것이다. 잘 짜인 인생의 알리바이란 모쪼록 그런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잠깐, 그래 나도 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작'에 붙여진 추천사라고. 비록 권위로 치자면 박민규의 발톱의 때 속에 살고 있는 미생물 무리에서 가장 작아 왕따를 당하곤 하는 한 불행한 친구의 몸통에 돋은 작은 돌기에도 미치지 못하겠지만,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어떤 작위의 세계>가 <바셀린 붓다> 보다 더 '재미'있다고. 박민규의 생각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저 추천사를 다시 한 번 쓰는 일을 반대하진 않을 거라고. 다 떠나서, 이런 소설을 읽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당신의 불행이라고. 물론 이 책의 매력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은 순전히 나의 무능이다. 그리고 정영문은 당신의 불행과 나의 무능에는 아랑곳 않고 자신만의 속도로, 그러니까 조금 느린 걸음으로, 어떤 작위의 세계를 계속해서 걸어갈 것이다.

사실,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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