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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투쟁으로 후계 쟁취, '강성 대국' 꿈꿨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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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투쟁으로 후계 쟁취, '강성 대국' 꿈꿨으나…

[김정일의 삶] 핵실험 2회 감행하며 미국에 관계 정상화 압박

지난 17일 사망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삶은 아버지 김일성 주석과 마찬가지로 상당 부분 베일에 싸여 있다. 북한 당국의 공식 발표가 부정확한 게 많을 뿐만 아니라, 정보가 제한된 탓에 그의 사생활을 비롯한 삶의 곳곳이 공백이기 때문이다.

불우했던 '혁명가의 아들'

김정일은 1941년 2월 16일 당시 소비에트 연방 하바로프스크 인근의 바츠코예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 당국은 김정일이 1942년 2월 16일 량강도 백두산의 항일 빨치산 밀영에서 태어났다고 공식 발표했으나, 많은 이들은 이런 북한 당국의 발표를 부정한다.

김정일이 러시아에서 태어난 것은 그가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즐겨 사용한 아명 '유라'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그후에도 친지들에게 사진, 편지, 기념품 등을 선물하면서 이 아명을 자주 사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정일의 아버지는 주석 김일성, 어머니는 그의 첫 번째 처로 알려진 김정숙이다. 북한 최고 지도자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그의 유년 시절은 불행했다.

김정일이 일곱 살 때 어머니 김정숙이 난산 끝에 세상을 떠났다. 쌍둥이 동생 김슈라도 어릴 때 익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전쟁 때는 중국으로 피난을 가기도 했다.

김정일은 남산고급중학교를 거쳐서 1960년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고, 이듬해 7월 조선노동당에 입당했다. 대학 재학 중에는 소련, 중국, 폴란드, 동독 등 현실 사회주의 국가를 여행했고, 비공식적으로 미국, 프랑스 등 서방 국가도 방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권력 투쟁 불사하고 권력 장악

김정일이 대중 앞에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80년 10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제6차 당 대회에서 후계자 지위가 확정되면서부터다. 그러나 그 전에도 1964년부터 그는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 지도원, 조직지도부 부장, 중앙당 조직 및 선전비서, 당중앙위원회 비서 등 요직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김정일은 당시 권력 2인자였던 숙부 김영주, 이복동생으로 김일성의 신임을 받았던 김평일 등과 갈등하기 시작했다. 김정일은 이들과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해 1974년 2월 김일성의 공식 후계자로 내정됐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이를 놓고 "김정일은 아버지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았다기보다는 권력 투쟁을 통해 권력을 쟁취한 것"이라고 생전에 설명했었다.

1994년 집권한 김정일은 권력 투쟁을 했던 이들을 북한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했다. 현재 김평일은 외교관으로 사실상 국외 추방된 상태며, 김평일의 모친 김성애 역시 정치적으로 숙청되었다. 김영주도 북한 공식 행사 석상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김정일은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을 거쳐서 1991년 12월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직을 넘겨받고, 1992년 4월 조선인민군 원수 칭호를 받으면서 군권을 장악해 명실상부한 북한의 유일한 후계자로 자리를 확고히 한다. 김일성은 1993년 김정일에게 국방위원장 직을 공식 승계함으로써 권력 승계 절차를 마무리지었다.

▲ 17일 사망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프레시안

'고난의 행군' 그리고 '강성 대국'을 향한 안간힘

김정일은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북한의 유일 통치권자가 되었다. 그러나 김정일이 권력을 이어받은 북한의 현실은 참담했다.

북한은 1993년부터 자연재해,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붕괴, 서방 세력의 경제 봉쇄 등으로 심각한 경제난과 식량난을 겪었다.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이라고 부르는 약 6년간에 걸친 이런 위기 상황에 맞서서 김정일은 나진 선봉의 무역 지구 확대, 4개 경제 특구 지정 등 부분적인 개방 정책을 추진했다.

그리고 이런 개방 정책 행보는 1998년 11월 현대그룹 명예회장 정주영과의 평양 회담, 2000년 6월 당시 대통령 김대중과 남북 정상회담, 2000년 10월 미국 대통령 클린턴과의 정상회담 추진, 현대그룹의 금강산 관광 사업 허용, 2007년 10월 당시 대통령 노무현과의 남북 정상회담 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런 외교적인 노력은 만성적인 북한의 경제난, 식량난 타개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런 외교적인 노력의 한계는 결국 김정일을 핵 개발 추진으로 이끌었다. 북한은 플루토늄을 이용한 핵 개발을 추진해 2006년과 2009년 두 차례에 걸쳐 핵실험을 감행했고, 2009년부터 농축 우라늄에 의한 핵 프로그램을 공식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핵 포기를 협상 의제로 미국과의 양자 회담을 추진해 왔으나 결국 성사시키지 못하고 사망했다. '고난의 행군' 이후 '강성 대국' 건설을 목표로 했으나 결국 이루지 못한 것.

김정일은 영화배우 출신 성혜림(1남, 김정남), 김영숙(2녀, 김설송 김춘송), 재일교포 무용수 출신 고영희(2남 1녀, 김정철 김정은 김여정) 사이에서 총 3남 3녀의 자식을 낳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은 2008년 8월 뇌혈관계 질환으로 쓰러지고 나서, 2010년 9월 고영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김정은을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임해 공식 후계자로 북한 대내외에 알렸다.

참고 문헌

<곁에서 본 김정일>(정창현 지음, 토지 펴냄)
<현대 북한의 지도자 : 김일성과 김정일>(서대숙 지음, 을유문화사 펴냄)
<위키피디아(wikipedia.org)>(2011년 12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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