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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를 누가 좀먹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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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깊은 나무'를 누가 좀먹었나?

[김민웅의 '리브로스 비바'] 강재언의 <한국의 개화 사상>

조선 실학 사상사의 치밀한 탐구

1982년 출간된 재일 사학자 강재언의 <한국 근대사 연구>는 1970년에 일본에서 나온 <조선 근대사 연구(朝鮮近代史硏究)>의 번역본이다. 일본에서는 1979년에 나오고 국내에서는 1981년에 나온 <한국의 개화 사상>은 그 본래 제목이 <한국의 유교와 개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 출간에서는 순서가 바뀌었지만, <한국 근대사 연구>가 우리의 근대사 전개 과정의 역사를 서술했다면, <한국의 개화 사상>은 그 정신적 뿌리에 대한 탐색이다.

이 책 역시 지난 번 김준엽 선생의 <중국 최근세사>처럼 헌책방 순례의 과정에서 우연히 손에 들어온 책으로, 요즈음 조선 시대 후기 사상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때에 읽는다면 매우 흥미진진하게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놀라운 것은, 강재언이 일본에서 독자적으로 이만한 학문적 성취를 이루어냈다는 점이다. 국내 학자들의 경우, 그나마 서로 대화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장이 있는 반면에 강재언의 경우 그런 현장이 없는 조건에서 실학 사상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이토록 치밀하게 추적해내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가령 송시열과 윤휴의 대립이 낳은 당파적 갈등에 대한 연구가 최근 들어 나름 진전되고 있는데, 강재언의 경우는 이에 대해 매우 일찍이 주목하고 이 두 세력의 당쟁이 결과한 정치적 현실에 대해 깊이 파고들고 있다. 1659년(효종 10년)으로부터 무려 30년간에 걸쳐 이어졌던 당쟁과, 1730년 영조의 탕평책이 나오기까지의 세월을 합치면 60년 당쟁사는 결국 실학에 대한 절박한 요구를 낳은 셈이 되었다.

주자학의 교조주의와 도식주의에 대한 비판

그는 이렇게 송시열에 대해 말한다.

"송시열의 주자에 대한 교조적 자세는 율곡보다는 퇴계에 가까웠고, 조선 후반기의 유학계에서 송시열의 영향이 컸던 만큼, 또 정계에 있어서도 노론의 세력이 컸던 만큼, 사상-학문의 독창적, 다면적 발전은 곧바로 정치적 탄압에 직면할 위험성이 있었다. 또 송시열이 후세에 깊은 영향을 미친 사상으로서 존명배청적(尊明排淸的)인 '북벌론(北伐論)'이 있다. 그에게 있어서의 군신부자(君臣父子)란 명황제와 조선 국왕의 관계이며……."

학문의 폐쇄성을 심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겉으로는 국가적 자주성을 내세우는 것 같지만 결국 중국에 대한 종속을 심화시킨 노론의 정치는 바로 이렇게 주자학의 교조적 통치를 지탱했고, 이는 조선 후기의 역사를 질식시켜나간 실체이기도 했다. 바로 이런 기존의 사상 체계와 격투를 벌인 것이 실학이며, 그 뿌리에서 자란 혁명 정신이 개화 사상이고 이걸 기반으로 가지고 있는 나라였기에 일본은 물리적 병합은 가능했으나 "정신적 토벌"은 쉽지 않았다고 강재언은 증언한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의 근대적 각성과 변혁의 과정은 매우 주체적이었으며 이 역사를 망각하는 것은 자신의 사상적 뿌리를 상실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1870년 전후에 형성된 조선의 개화파는 동아시아, 특히 조선에 대한 구미 열강의 충격에 대응하여 자주적 개국과 개화를 지향하여 등장한 새로운 정치 세력이었다. 그 개화 사상의 핵은 해외 유학생들에 의하여 소개된 서양 사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조선의 전통 유교에 바탕하면서 그것을 지양함으로써 형성되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근대 개화 사상의 내재적 전제로서 존재하였던 것은, 18세기를 중심으로 하여 그 앞뒤 약 200년간에 걸쳐 형성, 전개된 실학 사상이었다."

경세(經世)의 철학으로

▲ <한국의 개화 사상>(강재언 지음, 정창렬 옮김, 비봉출판사 펴냄). ⓒ비봉출판사
실학이 그런 역할을 수행하려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지만, 그것이 극복하고 싸워나갔던 기존의 사상 체계가 어떻게 형성되고 모순을 만들어 냈는가는 잘 알려져 있지 못하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지는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시기에 치국(治國)의 원리로 받아들여진 주자학은 15, 16세기 성리학 전성기를 넘어가면서 예학(禮學) 중심의 논쟁으로 치닫게 된다. 민본주의에 따른 민생에 대한 책임보다는 사대부들의 권리가 기득권이 되고 정밀한 예학 논쟁으로 주도권을 잡으려는 상황의 결과였다.

말하자면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는 경세(經世)의 논리는 쇠락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반격으로, 주자학이 드러내고 있는 교조주의에 대한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비판은 새로운 시대가 예고되는 포성이기도 했다.

"한 자(字)만 의문을 달아도 망녕된다고 하고, 상하여 끊고 맞대어 검토하면 곧 죄라고 한다. 주자의 글에 대하여 이와 같으니 하물며 고경(古經)에 있어서랴. 이런 식이라면 조선인의 학(學)은 미련하고 거침을 면하기 어렵다."

이는 주자학이 교조화되고 도식주의에 빠져 학문과 사상의 발전을 가로막고 경세의 의지를 죽이고 있는 것에 대한 격렬한 성토였다. 이러면서 기존의 성리학과는 달리, 현실에 대한 철저한 논구와 경세(經世)의 책(策)을 내놓는 것을 목표로 삼는 새로운 학문적 경향이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6세기 말과 17세기 전반에 있어서, 왜란 및 호란에 잇따른 정치적, 사회적 혼란과, 그로 말미암아 생산력 발전의 싹이 부당하게 잘려 없어지고 무찔러지고 있던 현실 문제는 내팽개쳐 놓고, 조선 유학의 주요한 관심이 사단(四端) 칠정(七情) 이기(理氣)와 예론(禮論)에 편중되어 있었던 것은 지적 에너지의 낭비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당쟁과 결합되어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더욱 더 조장하였다고 하는 비난을 면할 수가 없다. 조선 유학의 이러한 경향에 대한 내재적 비판으로서 실학사상이 등장한 것은 역사의 필연이었고 시대의 요청이었으며, 그와 같은 혼란 속에서도 아직 건전한 지성이 존재하였음을 입증한 것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실로 그의 말대로 보자면, "동아시아의 유교 문화권 속에서 한국은 조선 왕조 500년간 송학=주자학만을 유일한 정학(正學)으로 고수하고 그 교의에 관한한 '옛것을 풀이하고 창작하지 아니하며, 믿어서 옛것을 좋아하는 것(述而不作 新而好古)'을 철칙으로 해온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자세는 다만 유학뿐만이 아니라 이후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기도 했다. 이는 오늘날 진보 진영 내부에서 피아(彼我)를 구별하는 과정에서 비판의 화살을 도리어 진영 내부에 쏘아대는 모습에서도 목격되는 자세다.

우리의 정신적 주체성

조선 후기 유학이 직면한 이러한 답보 상태와 정치적 수렁은 자신을 수양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으로 유학을 통일적 틀로 본 이이(李珥)나 전제(田制) 개혁에 힘을 쏟은 반계(磻溪) 유성원 등의 노력에 힘입어 경세치용(經世致用)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질적 대안의 구상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알고 있다시피 이러한 사상적 투쟁은 현실에서 좌절되고 만다. 강재언의 말을 빌자.

"학적 체계로서의 실학 사상은 18세기 후반(1670년에 <반계수록(磻溪隧錄)> 완성)에서 19세기 전반(1836년에 정약용 죽음)에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그 동안의 역사적 변동을 반영하여 시종 같은 성질의 것일 수는 없었다. 본래 실학 사상 속에는 상고(尙古)적인 것과 변통(變通)적인 것이 분화되지 않은 상태로 포괄되면서도, 경향으로서는 후기에 이를수록, 특히 18세기에 있어서의 사회 경제적인 변동이 반영되어 근대지향성이 현저하게 된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이 책의 중반부터는 개화파의 형성, 근대 사상과 제도의 확립, 조선 말기의 국권 회복 운동 등이 서술되어 있다. 조선의 근대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별로 낯설지 않은 대목들이다. 그런데 강재언의 특이함은 이런 일련의 역사적 전개 과정에서 실학으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정신적 주체성에 대한 주목이다.

"일본은 무력적 토벌에 의하여 한국의 식민지화를 완성하였으나 끝내 정신상의 토벌은 완수하지 못하였다. 병합 후에 있어서조차도 한국 민중의 정신적 고양(高揚)은, 일본의 무단적 통치로써도 말살할 수 없을 만큼 뿌리 깊은 것이었다는 점이다. 즉, 병합에 의하여 한국 민중이 질식하여 버린 것은 아니었다. 병합을 기점으로 하여 그 저항 전선은 해외로 확산하여 거점을 구축하고 안팎이 서로 호응하여 사상 활발, 행동 정확하게 더욱이나 신중하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3·1 운동에는 이미 이와 갈은 확고한 바탕과 만만치 않은 저류가 있었고, 그 위에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피압박 민족의 자결 운동, 러시아 10월 혁명, 고종의 뜻밖의 급사(일본에 의한 독살설)에 의한 반일 감정 등의 외적 요인에 촉발되어 국내외고 서로 호응하여 들고 일어났던 반일 봉기였던 것이다."


그래서 강재언은 이러한 역사 서술을 통해, 1910년이 단지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것으로 모든 것이 마무리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더욱 큰 사상적 저항과 혁명의 힘이 자라나는 매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강조한다.

"1910년-그것은 일본, 한국, 중국 각각에게 있어서, 1918년의 일본의 쌀 소동, 1919년의 한국의 3·1 운동, 중국의 5·4 운동으로 연결되어 가는, 동아시아 세계의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알리는 전조였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역사란 어느 한 순간의 격동이 아니라 오랜 세월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흐르고 축적되는 사상과 실천의 결과물인 것이다. 이 저력의 밑바닥에 뿌리 깊게 존재하는 우리 선조들의 사상적 격투의 내용물을 숙지하고 배우는 일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역사는 참으로 많은 것을 가르쳐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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