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지금 다케우치 요시미를 주목하는 까닭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지금 다케우치 요시미를 주목하는 까닭은…

[동아시아를 묻다·11] 사상의 계승에 관하여

사상의 계승에 관하여

1

말씀처럼 근대 문명의 뿌리는 유럽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여러 문명 간의 협력 관계에서 기원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말씀처럼 '초기 근대'가 지닌 가능성을 복기해야 할지 모릅니다.

다만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지난번 대화에서 다케우치 요시미의 사상 혹은 근대 인식을 주제로 삼은 이유는 무엇이었던가요. 지금 우리 대화의 초점은 무엇인가요.

이병한 님의 이번 글은 동의하거나 배울 바가 많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다케우치 요시미가 언급된 이유를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달리 말해 다케우치 요시미가 굳이 거론되지 않더라도 이병한 님의 글은 변할 내용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저 그릇된 근대 인식의 소유자로 잠시 등장했을 뿐입니다. 물론 그에 관한 평가야 갈릴 수 있겠죠. 그런데 이병한 님의 글을 읽고 저는 다케우치 요시미의 근대 인식에 관한 내용으로 대화를 이어가야 하는지, 근대 인식 일반론으로 받아야 하는지 혼란스러웠습니다.

이것은 다케우치 요시미의 근대 인식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만 그 전에 내재적 독해가 필요합니다. 비판이더라도 내재적 비판이 되어야 합니다. 내재적 비판과 외재적 비판이라는 말은 저의 구분법입니다. 외재적 비판이 바깥의 척도와 배경 지식을 가지고서 대상을 평가하는 방식이라면, 내재적 비판이란 그 대상의 문제의식을 파고들어 그 문제의식으로부터 대상이 내딛지 못한 다음의 일보를 비판자가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저는 다케우치 요시미가 과거의 사상가들을 계승하는 모습에서 배웠습니다. 계승한다는 것은 답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재적 비판을 요구합니다. 이병한 님은 어떠신지 모르겠지만, 제가 다케우치 요시미를 읽는 까닭은 그의 문제의식을 계승하기 위함입니다.

2

▲ 다케우치 요시미(1910~1977). ⓒ프레시안
"근대란 무엇인가." 지난 시간, 제가 정리했던 다케우치 요시미의 텍스트 제목이기도 하며, 이병한 님의 이번 글의 기본 화두이기도 하죠.

만약 일반론으로 "근대란 무엇인가"를 물음으로 꺼낸다면, 저는 답할 수 없습니다. 잘 모릅니다. 이병한 님은 역사의 종축과 횡축을 크게 아우르며 동양과 서양을 오가고 수세기를 오르내리며 근대에 관해 논했지만 저는 따라가기 버겁습니다. 다만 근대 논의는 사회, 경제, 정치, 예술, 문명 영역에서 다른 양상으로 회자되고 있으며, 이병한 님께서 말하는 '초기 근대'도 오늘날의 근대 인식이 지닌 소실점에 근거해 구성된 시간이니 그것을 '초기 근대'라고 명명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따로 검토가 필요하리라는 짐작입니다. 다만 그 시간을 '초기 근대'라고 부르는 데는 이병한 님의 이유가 있을 테니, 그 점에 관해서는 기회가 닿는 대로 질문을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저는 이병한 님에게 다케우치 요시미적 근대 인식으로 한정해 논의를 전개하기를 재차 청하려고 합니다. 달리 표현한다면 루쉰적 근대, 저항적 근대에 관한 다케우치 요시미의 인식이 옳다/그르다 이전에 그 인식이 지니는 생산성/비생산성은 무엇인지를 함께 검토하고 싶습니다.

이병한 님은 일전의 대화에서 다케우치 요시미를 함께 다루자고 제안했으며, 저는 이를 위해 '근대란 무엇인가'라는 텍스트를 정리해 "다케우치 요시미의 동양을 어떻게 동아시아로 번역해낼 수 있을 것인가. 전후 동양의 근대와 저항에 관한 인식을 탈냉전 시대 동아시아의 근대와 저항으로 번역해내려면 다케우치의 근대 인식은 어떤 전환의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인가. 다케우치의 근대 인식 가운데서 무엇을 비판하고 또 계승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아직 물음에 관한 응답은 돌아오지 않았다는 인상입니다.

3

그 전에 다루고 싶은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사상의 계승'에 관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다케우치 요시미는 전후 사상계에서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를 잠시 복기해보겠습니다. 지난 글에서 말씀드렸듯이 '근대란 무엇인가'는 전후 직후인 1948년에 작성되었습니다. 당시 다케우치는 이러한 사상사적 상황은 속해 있었습니다.

일본은 서구 제국주의 식민지가 되지 않으려 나섰던 길에서 아시아의 제국주의자가 되고, 제국주의에서 벗어나자마자 다시 미국의 (준)식민지가 되었습니다. 패전으로 승자인 미국에게 종속되면서도 그것을 부정할 도덕적 정당성을 상실했습니다. 또한 자신이 따라온 서구산 가치 판단에 의해 자기가 고발당했습니다(패전과 도쿄 재판).

그리고 사상계의 분위기는 이러했습니다. 일본은 패전 후 대부분의 식민지를 포기하고 연합국에 의해 국경이 정해졌습니다. 사상계의 정신적 향방도 정치적 조건에 규정당해, 지식인들은 식민지에 관한 사고를 방기하고 전후에 정의된 '일국' 일본의 테두리 안에서 사고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또한 사상계는 서양 사상에서 반성의 자원을 구했습니다. 전후 사상계에서는 근대주의나 국제주의의 조류가 유행했습니다. 아시아에 대한 전쟁 책임을 생각할 때 이런 태도는 큰 문제를 배태하고 있었습니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전쟁의 끔찍한 기억을 머금고 있기에 제국주의로까지 치달은 민족주의를 경계해야 하지만, 동시에 비틀린 조건 속에서 민족의 주체성을 세워야 하는 이중적 조건 속에 놓였습니다. 따라서 그의 과제는 비판과 건설의 이중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기서 다케우치는 서양 문화를 숭배하는 일본의 심리 구조를 따지며, 동시에 중국의 시야를 도입함으로써 일본의 사상 구조를 심층으로부터 변혁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 한 가지 결과물이 '근대란 무엇인가'입니다.

4

아울러 다케우치는 내셔널리즘을 불변하는 전제로 간주하여 절대화하거나 거꾸로 억압하지 않았습니다. 내셔널리즘은 혁명과도 반혁명과도 결합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민족 감정을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의 한 가지 구성 요소로 보고 내셔널리즘을 사회 변동의 한 가지 축으로 여긴다면, 제국주의로 기울어간 과거의 내셔널리즘을 단죄하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거기서 현재 되살릴 수 있는 생산적인 자원을 발굴해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과거의 사상을 유산으로 삼기 위해 "불 속에서 밤을 줍는"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바로 반동 속에서 혁명적 계기를, 복종의 교설 속에서 반역의 실마리를 찾아내고자 한 것입니다.

그는 '근대란 무엇인가'를 쓴 이후로도 이 작업에 천착합니다. 만년인 1970년의 <예견과 착오>라는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1959년에 '근대의 초극'을 썼는데, 국민 문학론 소동에 실망을 느껴서였습니다. 과거의 유산을 좀 더 착실히 정리해야겠구나 싶어서 한번 씨름했던 것이 '근대의 초극'인데, 그것을 끝내고 나서는 조금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이것은 재작년 일입니다만 '아시아주의'를 연구했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국민 문학론은 1948년에서 1954년 사이에 벌어진 한 가지 논쟁인데, 자세한 내용은 미뤄두겠습니다. 다만 여기서는 그가 과거의 유산을 정리하고자 '근대의 초극'과 '일본의 아시아주의'를 집필했다는 사실만을 확인해 두겠습니다. 그리고 다케우치에게 '근대' 인식은 '아시아' 사고와 접목되고 있음을 강조해 두겠습니다.

먼저 '근대의 초극'부터 들여다보겠습니다. '근대의 초극'은 전시기인 1942년 잡지 <문학계>에 실린 좌담회의 제목이자 전시기 사상계의 한 가지 화두였습니다. 전후에 '근대의 초극'은 파시즘에 활용당한 이데올로기라고 지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지탄에는 전후 사상계 인사들의 깊은 회환이 묻어났습니다.

따라서 좌담회 '근대의 초극'은 지나간 사건이지만, 사상으로서의 '근대의 초극'은 아직 정리가 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사상으로서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이유 중 하나는 거기에 묻어 있는 기억이 아직 살아남아 곳곳에서 원한과 회고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케우치는 '근대의 초극' 논의를 전쟁 이데올로기라고 내치는 게 아니라 전후에도 정리되지 않은 감정의 응어리가 '근대의 초극' 논의에 얽혀있는 만큼 그 사상적 무게가 시대 분위기에 씻겨 내려가지 않도록 붙들고자 했습니다. 사람들이 애써 외면한다는 것은 아직도 환기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근대의 초극'에 사상적으로 다가서기 위해 그는 원한과 회한으로 얼룩져 있는 그 무게를 정면으로 받는 데서 출발해야 했습니다.

5

그러나 지금 여기서 전체 내용을 살피기는 어려우니 '근대의 초극'에서 한 문구만을 인용하고 의미를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근대의 초극'은 일본 근대사 아포리아의 응결이다. 복고와 유산, 존왕과 양이, 쇄국과 개국, 국수와 문명 개화, 동양과 서양이라는 전통의 기본 축 위에 있던 대항 관계가 총력전 단계에서 영구 전쟁의 이념적 해석을 강요하는 사상 과제를 목전에 두고 일거에 문제로 폭발한 것이 '근대의 초극' 논의였다.

이 문구는 '근대의 초극'에서 가장 잘 알려진 대목이며, 자주 인용되는 문구입니다. 그러나 다케우치의 진의와는 다소 동떨어져 인용되곤 합니다. "아포리아의 응결"이 결국 '근대의 초극'이 다다른 곳이라며 '근대의 초극'을 전반적으로 평가내릴 때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입니다. 다케우치는 "아포리아의 응결"에서 출발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그 응결을 풀어내고 거기서 사상적 자원을 발견해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종종 아포리아라는 말에 "모처럼의"이라는 수식어를 답니다. 아포리아는 대립하는 요소가 한데 엉켜야 생깁니다. 그런 만큼 역사의 무게를 지닙니다. 과거의 사상 속에서 되살릴 만한 요소를 찾아 나설 때, 아포리아의 무게로 생긴 뒤틀림은 바로 그 과거로 진입하는 틈새를 내줍니다.

만약 사상에서 창조성을 회복하려면 이 동결을 풀고 다시 한 번 아포리아를 과제로서 설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동결을 어떻게 풀 것인가. 이를 위해서는 "복고와 유산……"으로 시작하는 저 여러 대립 관계가 당시에는 전후의 관점에서 이해하듯 자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적극적 협력, 단순한 편승, 소극적 방기를 엄밀히 구분하기 어려운 이삼중의 굴절된 과거 속에서, 그리고 이데올로기로 치부된 것들 가운데서 사상의 요소를 섬세하게 가려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저는 여기서 또 한 대목을 주목하겠습니다. 도입부입니다. 다케우치는 '근대의 초극'을 작성할 때는 '근대'라는 말을 설명하지 않고 넘어갔습니다.

개념 규정에서 출발하는 방법을 피하고자 근대라는 용어가 지닌 애매함은 그대로 남겨둔다.

그 사정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여러 설로 근대를 운운하는 일은 무척 중요한 이론적 문제처럼 보이지만, 곧 지엽적인 논의로 빠지거나 논쟁의 싹을 엉뚱한 곳에서 틔우곤 합니다. 다케우치에게 관건은 근대 일반에 관한 평가 내지 이해가 아니라 일본 근대가 지닌 뒤틀림을 어떻게 해부할 것인가였습니다.

6

다음으로 '일본의 아시아주의'입니다. 이 글은 아시아인을 향한 연대 의식을 한편에 두고 출현한 아시아주의가 지배 권력에 이용당해 결국 대동아 공영권으로 치달았지만, 그 비참한 경과 속에서도 사상적 자원을 이끌어내고자 작성된 논문입니다. '근대의 초극'이 그러하듯 아시아주의도 '사상'으로서는 유효 기간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근대의 초극'처럼 정면대결이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아시아주의'는 '근대의 초극'과 닮은 시도입니다.

그러나 방법이 달랐습니다. '근대의 초극'의 경우와는 달리 '일본의 아시아주의'에서 다케우치는 아시아주의를 정의 내리려는 데서 출발합니다.

아시아주의를 말하려면 먼저 '아시아주의'가 무엇인지를 정의해야겠다. 민주주의나 사회주의처럼 보편적 개념이라면 얼마간 공통된 이해가 있을 테니 굳이 개념을 정의하는 데서 출발하는 수고를 들이지 않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도 되리라. 그러나 아시아주의는 특수하고 또한 놀랄 만큼 다의적이다. 사람마다 그 함의가 다르다. 그러니 아무래도 잠정적이나마 의미를 제한해두고 논의를 시작해야겠다.

다케우치가 아시아주의를 정의하는 데서 시작한 까닭은 아시아주의라는 말의 용도가 너무나 다양해서 사상의 대상으로 움켜쥐려면 그 말의 윤곽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익에서 좌익까지 국가주의에서 국제주의까지 침략주의에서 연대주의까지 그렇듯 상반되는 진영에서 아시아주의는 다채롭게 회자되었습니다.

다케우치 자신도 아시아주의는 메이지 초기의 국권론과 민권론 그리고 서구화와 국수의 대립 풍조 속에서 발생했다고 보았습니다. 다케우치는 그렇듯 아시아주의의 넓은 외연을 확인하고 나서, 지나치게 품이 넓은 아시아주의를 어떻게 정의해야할지 묻습니다.

그러나 그가 내놓는 대답은 아시아주의는 너무 다의적이라서 여러 정의를 가져와본들 현실에서 기능하는 사상은 쥘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시아주의는 자립한 사상이라기보다 다른 사상에 부착되어 기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상황을 벗어나서는 아시아주의를 정의할 수 없"으며, "아시아주의를 범주로 고정하려는 시도는 반드시 실패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가 아시아주의를 정의 내리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밝혔다고 해서, 아시아주의를 규명하는 일마저 손에서 놓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상으로 아시아주의가 얼마나 정의하기 어려운지를 장황하게 늘어놓았지만, 아무리 정의내리기 어렵다고 해도 아시아주의 말고는 달리 부를 도리가 없는 어떤 심적 분위기 그리고 이를 토대로 구축된 사상이 일본의 근대사를 가로지르며 면면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7

'일본의 아시아주의'의 첫째 절 '아시아주의란 무엇인가'에서 아시아주의를 정의 내리는 작업이 지난하다고 밝혀둔 까닭은, 그래서 아시아주의를 자칭하는 주장들 가운데서 사상에 값하는 요소를 골라내는 작업은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다케우치가 상정한 그 요소란 "아시아주의 말고는 달리 부를 도리가 없는 어떤 심적 분위기"입니다. '아시아주의란 무엇인가'에 이어지는 둘째 절은 '자칭 아시아주의의 비사상성'인데, 여기서 "자칭 아시아주의"란 무엇보다도 '대동아 공영권' 사상을 가리킵니다. 만약 아시아주의가 실체를 지닌 사상이어서 그것이 메이지 초기 발생 이후 역사적으로 이어져왔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쇼와기 '대동아 공영권' 사상으로 귀착될 것입니다. 그렇게 아시아주의는 패전과 함께 소멸했습니다. 이게 확실히 일본의 아시아주의를 다루는 일반적 도식입니다.

그러나 다케우치는 '대동아 공영권' 사상과 사상에 값하는 아시아주의를 구분해냈습니다. '대동아 공영권' 사상은 일체의 사상을 압살한 위에 성립된 거짓 사상입니다. 쇼와기의 '동아' 사상은 전쟁의 확대와 함께 점차 이것저것 주워 담더니 결국 '대동아 공영권'에 이르러서는 실질적인 내용을 잃고 말았습니다.

허울만 좋은 '대동아 공영권' 사상은 개화하면서 다른 사상을 짓눌렀다. 먼저 자유주의를, 이윽고 우익마저 탄압했으며, 동방회도 동아연맹도 교토학파도 시련을 당했습니다. 따라서 '대동아 공영권' 사상은 '자칭' 아시아주의이나 사상에 값하지 못하니 유산 목록에 오를 수 없습니다.

이제 이어지는 절에서 다케우치는 개별 단체나 사상가들의 아시아주의를 검토합니다.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은 오오이 겐타로, 사이고 다카모리, 오카쿠라 덴신, 다루이 도키치, 미야자키 도텐, 오오카와 슈메이 등이며 단체로는 주로 현양사, 천우협, 흑룡회 등이 거론됩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는 다케우치가 그들이 지닌 아시아주의자의 면모라며 전거로 활용한 내용들이 흥미롭습니다. 보통이라면 아시아주의의 논조가 담긴 그들의 주장을 인용으로 끌어들이게 마련일 텐데, 다케우치는 주로 그 인물의 됨됨이나 행적을 보여주는 내용들을 골랐습니다. 사람됨이 어떠했는지, 어떤 환경에서 아시아를 사고하게 되었는지, 어떤 시행착오를 겪고 어떻게 좌절했는지 등등.

그는 그렇듯 선명하게 드러난 주장보다는 동기와 행동, 그리고 결과의 복잡한 조합을 세심히 다뤘습니다. 한 개인이 지닌 동기는 바깥의 힘에 의해 굴절됩니다. 시대와 환경의 제약으로 한 개인의 고투는 기대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하고 그 개인의 시도는 현실에서 뒷걸음질 치게 되지만 그런 까닭에 역사의 무게를 지닐 수 있습니다. 개체는 부자유하나, 부자유하기 때문에 개체의 선택은 선택으로서의 진정한 의미를 지닙니다. 다케우치는 바로 역사적 인물의 의도가 굴절된 자리를 과거의 아시아주의로 진입하는 창구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학문으로는 글러먹은 말일지언정 "심경으로서의 아시아주의"를 내놓습니다. 그는 가령 동아협동체론, 동아신질서론, 대동아공영권론이라는 식으로 유형을 나눠 아시아주의를 검토하지 않았습니다. 복잡한 역사적 상황 아래서 침략과 연대를 쉽게 가를 수 없다는 전제 아래 동기와 행동과 결과의 복잡한 조합을 파헤치고, 한 사상가가 지닌 심경과 논리 사이의 분열을 주목했다. 그러면서 정치적 단죄보다는 사상적 전통을 형성하는 일에 힘을 쏟았습니다.

이상으로 '근대의 초극'과 '일본의 아시아주의'를 정리해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다케우치 요시미는 일반론을 꺼내고자 근대를 사고하지 않았으며, 그는 학적인 개념 규정보다 문제 상황으로의 진입에 관심을 두었다는 점. 따라서 다케우치 요시미의 근대 인식의 함량은 '옳다/그르다'를 초과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 과정에서 다케우치 요시는 과거의 사상, 사상가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려 했다는 점, 따라서 다케우치 요시미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그가 보여주었던 태도를 우리가(혹은 제가) 그에게 되돌려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