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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 혁명 100년, 중국만의 기념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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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 혁명 100년, 중국만의 기념일이 아니다!

[동아시아를 묻다·10] '거대한 뿌리'를 찾아서

다시, '근대란 무엇인가'

근대는 유럽에서 기원한 것이 아닙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근대는 유럽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대항해 시대 등 모두가 그러합니다.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을 추동한 인쇄술은 중국에서 전래된 것이지요. 더불어 나침반과 화약도 전해졌습니다. 중국에서는 나침반으로 묘지를 구했고, 화약으로는 불꽃놀이를 했습니다.

그 화약이 이슬람에서 전수받은 화학과 결합되어 폭탄으로 되돌아 온 것이 아편 전쟁입니다. 나침반은 동방의 식민지를 개척하는 항로의 길잡이가 되기도 했지요. 즉, 가깝게는 서아시아에서 과학 지식이. 멀게는 동아시아의 문명 유산이 유럽으로 흘러들어가 근대를 촉발한 것입니다.

게다가 로열티라고는 한 푼도 받지 않고 전해진 것이지요. 애당초 인류의 문명적 자산이란 널리 나누어야 할 '공공재'이지 배타적 소유권으로 귀속될 성질의 것이 아니었던 까닭입니다. 따라서 근대 문명의 '지적 재산권'을 유럽에만 부여하는 발상부터가 이미 근대적 가치에 깊이 침윤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근대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여러 대륙과 다양한 문명 간의 교류와 소통의 산물로 이루어진 전 인류의 합작품임을 명심합시다. 근대 문명의 뿌리를 유럽의 내부에서만 구하며 그 다기했던 협동의 기원을 은폐하는 것이야말로 거대한 기만에 다름 아닙니다.

그리하여 유럽의 근대는 자기 인식으로부터, 아시아의 근대는 강제와 패배로부터 산출된다는 다케우치 요시미의 견해는 그 전제부터가 그릇된 것입니다. 물론 다케우치를 탓할 일은 아닙니다. 그도 읽었을 법한 헤겔도, 마르크스도, 베버도 그러한 허구를 반복해서 읊었으니까요. 일종의 근대판 주술(mantra)이었던 셈이죠.

오히려 다케우치와 같은 착시야말로 20세기가 공유했던 세계관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말씀하신 바대로 근대의 '담론적 구성물'에 포박되어 있던 것이지요. 허나 그 강력했던 주술의 마법적 효과는 이미 사라지고 있습니다. 담론의 허위를 깨부수는 것은 역사의 실체입니다. 캘리포니아학파를 비롯한 세계사 다시 쓰기의 성과가 만만치 않게 축적된 것이지요. 이들은 세계사의 실제 경로를 생생하게 보여줌으로써 근대적 담론의 몽매로부터 해방될 수는 풍부한 단서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가령 어찌하여 동아시아와 남아시아,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의 문명적 자산이 유럽 문명과 조우하여 근대를 촉발할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는 유라시아 대륙을 석권했던 몽골 세계 제국의 기여가 뚜렷합니다. 몽골 제국 이전에 세계는 각각의 지역에서 개별적인 문명권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동시대의 로마 제국과 한(漢) 제국이 서로 직접적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었죠. 그러던 차에 몽골 제국이 건설되면서 유라시아의 동서를 막론한 광대한 교역망이 구축된 것입니다. 동아시아, 중앙아시아, 서아시아의 통합이 촉진되었고, 내륙과 해상을 잇는 국제 네트워크도 형성되었지요. 이 초원길과 바닷길을 따라서 유라시아 단위의 물류(物流)와 문류(文流)가 활짝 트인 것입니다.

유럽인들이 이슬람 넘어 인도와 중국, 일본을 인지하고, 동방인도 유럽과 아프리카에 대한 구체적인 상을 확보하게 된 것이지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나 <이븐 바투타 여행기>가 대표적인 사례일 것입니다. 1402년 조선에서 만들어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아프리카가 담길 수 있던 이유이기도 하고요.

나아가 정화의 대원정(1405년)이나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1492년) 또한 몽골 제국이 산출한 거대한 세계관 전환의 산물이라고 하겠습니다. 문자 그대로 세계가 '세계화'된 것이지요. 즉, '유럽의 자기 운동'으로 근대가 개시된 것이 아니라, 세계화가 '유럽에서도 근대를' 자극했던 것입니다. 지중해 도시 국가들의 번영에 동방 무역이 있었음을 실감나게 그려낸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1600년)이야말로 진실의 일단을 말해준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몽골 제국의 해체 이후를 지구적 수준에서의 근대 개막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는 명·청 제국이, 중앙아시아에는 티무르 제국이, 남아시아에는 무굴 제국이, 서아시아에는 오스만 제국이 등장하던 그 무렵이 근대의 여명기였던 것입니다. 유럽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제국으로 웅비하던 바로 그 시점입니다.

따라서 영국이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했던 사건(1588년)과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던 사건(1592년)은 근대의 파랑을 예고하는 동시대적 현상으로 접수할 일입니다. 다만 작금의 자본주의 세계 체제와 구별 짓기 위해서 '초기 근대(early modern)'라는 명명이 한층 적절할 수도 있겠습니다.

허나 이 '초기 근대'가 '근대'의 전 단계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각 문명권에서 싹텄던 '초기 근대'는 오늘날의 '근대'와 대립적이고 모순적이기까지 합니다. 비유럽 지역에서 자본주의(적 착취)와 국민 국가(의 폭력)로 구성되는 세계 체제란 매우 낯설고 이질적인 것이었으니까요. 나아가 작금의 근대는 타자들의 '초기 근대'만이 아니라, 서구의 '초기 근대'에서 노정되었던 다른 가능성들을 억압한 위에서 실현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아편 전쟁은 단순히 영국과 청조라는 동서양의 두 제국이 충돌한 사태로만 갈음할 수 없습니다. 혹은 마르크스처럼 상업·산업 혁명에 기반을 둔 개방적 근대 국가와 아시아적 생산 양식의 정체된 전통 제국의 충돌도 아닙니다. 3세기에 걸쳐 전개된 아프리카-유럽-아시아-아메리카의 전 지구적 교류와 교역이 끝내 자본주의 세계 체제로 수렴되느냐 마느냐의 최종적 분기점이었던 것이지요.

그 전쟁에서 대영 제국이 승리함으로써 자본주의적 근대가 세계를 석권하게 된 것입니다. 문화적, 정치적 지배를 수반하지 않았던 기존의 연결망이 해체되고 서구가 폭력적 특권을 행사하는 '자본주의적 개항'이 동아시아에도 본격화되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이러한 세계 체제로의 귀결은 각 지역에서 전개되던 '초기 근대'의 역사 경로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일탈'이자 '이탈'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도처에서 그토록 격렬한 저항이 광범위하게 분출되었던 것이지요. 즉, '저항의 근대'란 '초기 근대'라고 하는 역사적 실체에 그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있던 것입니다. 다케우치가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독자적인 그 무엇'이 엄연했던 것이지요. 이를 가리켜 김수영은 '거대(巨大)한 뿌리'라고 절묘하게 표현했던 바 있습니다. 과연 시인 특유의 직관이 빛을 발하는 근사한 통찰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저는 문화적 되감기를 통하여 서구의 가치를 보편화하는 것이 아시아가 수행해야 할 '저항'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역사의 결을 솔질하며 거슬러 올라가(발터 벤야민) 자본주의적 근대가 삭제한 다양한 '초기 근대'의 가능성을 복기하는 작업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달리 말해 '저항'의 실체를 역사의 구체성으로부터 발굴하자는 것입니다.

이는 전통을 복원하고 과거를 향수하는 복고적 작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임계점에 달한 근대 문명의 병폐를 해결할 수 있는 자원을 탐사하는 '역사의 천사(Angelus Novus)'-뒤를 돌아보며 앞으로 전진하기-를 실천하자는 것입니다. 더 직접적으로 말해 영국의 산업 혁명과 미국의 소비 혁명이 천하(天下)를 통일한 지구촌에서 비상구를 찾기 위해서 '초기 근대'의 다양성에 착목하자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패배한 것은 비단 동양 혹은 아시아가 아닙니다. 동서를 막론하고 자본주의로 하나가 된 근대 세계 자체가 패배한 것입니다.

따라서 재발견되어야 할 것은 근대의 여명기에 잠류하고 있었던 다른 역사적 경로의 가능성들입니다. 그 '가지 못한 길'을 환기하고 정성스레 되살려 가는 역사의 되새김질이야말로 21세기에 부합하는 '저항'이 아닐 런지요. 이는 서구의 자기 독백이자, 근대의 '뒷담화'에 그쳤던 탈근대론(post-modernism)과는 질적으로 상이한 차원에서, 근대 이후(After-modern)를 일구어가는 전 인류의 협동 사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동학(東學)의 어법을 빌자면 개량과 개혁을 넘어선 지평에서의 개벽(開闢)이라고나 할까요.

▲ 지난 10월 9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신해 혁명 100주년 기념 대회. ⓒ뉴시스

신해 혁명 100년 : 중화연방공화국의 꿈

역사의 결을 거슬러 솔질하는 '저항'의 하나로 신해 혁명을 반추해 보고 싶습니다. 올해가 마침 100주년이 되는 해일뿐더러, 지난 10월 10일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에서 진행되었던 기념행사를 흥미롭게 견주어 보기도 했습니다. 나아가 21세기의 동아시아를 궁리하는 데도 유력한 단서를 제공해 주는 대목이 있기에 거듭 되새겨 보는 것이지요.

타이완의 총통 마잉지우는 신해 100년을 대만/중국은 물론 세계 각지의 화인들이 함께 기념할 사건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양안 공동의 기억과 자산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민족 영웅으로 거론한 이들도 광동, 후난, 저장, 복건, 대만 등 그 출신이 다양하더군요. 그러면서도 대륙을 향해 자유와 민주, 균부의 국가를 수립하고자 했던 손중산의 건국 이상을 잊지 말 것을 촉구합니다.

중화인민공화국에 대한 일정한 비판을 담고 있는 것이지요. 나아가 대륙에서 실현할 수 없었던 건국 이상을 타이완은 완전히 실현했다고 자부합니다. 즉, 중화민국은 신해 혁명의 적통일 뿐만 아니라, 자유와 민주라는 생활 모델이기도 하다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그는 '중화민국 만세'와 더불어 '대만민주 만세'도 힘껏 외쳤습니다.

그 맞은편 대륙의 주석 후진타오는 무어라고 했을까요. 그는 중화 민족의 위대한 부흥으로 가는 일대 이정표로써 신해 혁명을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신해 혁명의 이상은 10년 후 1921년에 탄생한 중국공산당이 계승했다고 말하지요. 신민주주의, 사회주의, 개혁 개방을 통해 전대미문의 번영을 성취해가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신해 혁명의 이상을 실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광범위한 애국 통일 전선을 강조했습니다. 양안이 중화민족의 부흥이라는 공동 목표를 향해 함께 분투해가자는 것입니다. 이른바 '제3차 국공 합작'을 촉구하는 메시지라 하겠습니다.

이처럼 타이완은 민주를, 대륙은 부흥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대륙이 애국 통일 전선을 논했다면, 타이완은 구동존이, 호조합작에 기반을 둔 평화를 요구했습니다. 이 통일 전선과 구동존이는 어떻게 합류할 수 있을까요? 민주와 부흥은 또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까요? 즉,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은 어떠한 방식으로 재결합해야 할까요?

그리하여 저는 마잉지우도 후진타오도 언급하지 않았던 신해 혁명 100주년의 또 다른 의미를 되새겨보고 싶습니다. 각자 국민 국가적 발상에 갇혀있는 구도에서 벗어나, 신해 혁명의 역사적 실체에 육박해 감으로써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구해보자는 것입니다.

신해 혁명은 유럽의 근대를 모방한 것이 아닙니다. 아시아 최초의 공화제라고만 하기에는 몹시 부족한 것이지요. 그렇다고 유럽의 근대에 저항한 것이라 하기도 어렵습니다. 모방/저항의 구도로는 포착되지 않는 중국 내부의 독자적 역사 운동에 주목해야 하는 까닭입니다. 즉, 신해 혁명은 중앙 정부를 전복시키고 새로운 권력으로 그 중심을 대체한 혁명이 아닙니다.

지방의 각 성들이 중앙 정부에 대항하여 각자의 독립을 선포하는 형태로 일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중국의 지방과 민간 역량은 명·청조를 거치며 꾸준히 증대되어 왔습니다. 국가 간 관계인 조공 무역과는 상이한 민간에서의 호시(互市) 무역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남방과 동부 연안 등지에 자율적 역량이 점차 강화되었던 것이지요.

유라시아 단위의 교역 망이 산출한 '초기 근대'가 지방의 자치 능력을 꾸준히 증대시킨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중앙 권력을 대체하는 성 단위의 독립 형태로 발현된 역사 운동이 신해 혁명입니다(미조구치 유조). 즉, 중앙-지방의 협력과 갈등이라는 고유한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중국의 독자적인 근대가 형성된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좌우의 협소한 이념적 구도로는 그 실상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청조의 이민족 정권을 전복시킨 혁명이라는 한족 중심의 민족주의사관(국민당)이나, 자산가들의 불철저한 혁명이었다는 계급 중심의 마르크스주의사관(공산당)이나 근대의 주술에 사로잡혀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착시가 유럽의 근대를 기준으로 삼아서 빚어진 촌극인 것입니다. 이처럼 중국의 근대를 유럽과의 조우를 넘어선 장기적 지평에서 고찰하는 것, 즉 '거대한 뿌리'와 다시 접속하는 것이야말로 다케우치의 '저항'을 관념론에서 끌어내려 역사의 실체에 착근시키는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내친김에 청년 마오쩌둥의 중국론도 소개하고 싶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아버지임에 분명한 그 또한 애초에는 중앙 집권 국가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의 고향이었던 '후난 공화국'의 건설을 위하여 정력적으로 활동했던 논객 가운데 하나였지요. 중국의 재건을 위해서는 기초부터 변혁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각 성이 자치를 추진하는 방편이 좋다고 여긴 것입니다.

1920년 6월 11일 상하이의 <시사신보(時事新報)>에 발표한 '후난인, 한 걸음 더 전진하라', 6월 18일에 투고한 '후난 인민의 자결' 등이 대표적인 문헌입니다. 창샤(長沙)의 다른 신문에는 14편의 논설을 게재하여 '후난 공화국' 구상을 구체화하기도 했습니다. 후난성에서의 헌법 제정 운동을 촉구한 것이지요. 중국의 건설은 국부(局部), 즉 지역(local)부터 착수해야 한다는 자치주의의 신념이 도저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27개의 소중국론'도 주장합니다. 중국 고유의 22개 행정성에 세 개의 특구와 두 개의 번지(藩地)를 합하여 지방민에 의한 27개 국가를 건설한다는 구상입니다. '기초가 없는 대중국을 타도하고, 많은 소중국을 건설하자'는 것이지요. 지방에 거점을 둔 중국 개조론이라 하겠습니다. 이처럼 '선지방, 후국가(先邦後國論)'의 연방제 건설에 기초하고 있었기에, '중국해산론'까지도 제기하게 됩니다.

이처럼 청년 마오의 중국론에는 강렬한 지방 자치 의식, 중앙 집권에 대한 저항, 지방으로부터의 국가 건설이라는 특징이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각 성의 독립으로 분출한 신해 혁명의 유산을 '후난 공화국' 모색으로 계승하고 있는 셈이지요. 그렇다면 신해 혁명의 적통은 현재의 중화민국도, 중화인민공화국도 아닌 '후난 공화국'의 꿈에 있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신해 혁명 이후의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청년 마오의 꿈도 실현될 수 없었지요. 열강의 분할 정책이 중국의 영토를 잠식해갔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티베트로, 러시아는 신장으로, 일본은 만주로 진격하면서 각 성의 독립적 지향은 곧 망국의 지름길이 되었던 것이지요.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마키아벨리적 마오쩌둥은 그리하여 탄생한 것입니다(1927년).

국민당도 공산당도 모두 강력한 중앙 집권적 통일을 지향했던 까닭이기도 하고요. 1930~40년대는 일본과 1950~60년대는 미국/소련과 대결하는 전시 체제가 지속되면서 중앙의 권력은 갈수록 비대화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즉, 서구와 일본으로 상징되는 '근대'의 압박 속에서 지방자치 역량의 지속적 확대라는 중국의 '초기 근대'의 역사 운동이 심하게 굴절되고 만 것입니다.

허나 역사는 돌고 도는지라, 오늘날 유럽과 일본은 물론이요 미국도 '먼로주의'로 후퇴 중입니다.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총본산인 월스트리트가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미국의 청년들에게 점령되기에 이른 것이지요. 그만큼 중국에서 중앙 권력의 구심력을 강화시켰던 외부로부터의 압박은 약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20세기와는 전혀 다른 21세기가 열리고 있는 것이지요. 그에 따라 지난 세기 '저항의 소산'이었던 당국 체제(party-state system) 또한 점진적으로 완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개혁 개방의 활력이 각 성의 자율성과 독립성의 보장에서 비롯되었음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21세기의 '저항'이란 결국 이러한 것이 아닐까요. 서구 근대의 문화적 되감기가 아니라, 다양한 문명권에서 실현될 수 없었던 대안적 역사의 가능성을 비판적으로 회고하고 재차 실천하는 것입니다. 전쟁과 혁명으로 점철된 '극단의 20세기'를 거슬러 올라가 '거대한 뿌리'에 가닿아 대안적 상상력을 길어 올릴 일입니다. 일종의 '溫故而知新'이지요.

동아시아의 공진화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지혜로운 통합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아름다운 재회와 연동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애당초 중국공산당의 승리(1949년)가 한국 전쟁(1950년)의 후폭풍을 낳았고,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중화민국은 기사회생할 수 있었지요. 그만큼 양안과 한반도의 운명은 깊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지속되고 있는 냉전/분단 체제의 창조적 해체를 위해서도 서로간의 지혜를 결집해야 하는 것이지요. 나아가 전후 일본의 성취가 오키나와의 군사 기지 외에도 후쿠시마의 '에너지 기지'의 희생에 기반을 두고 있었음이 3·11 사태로 분명해진 마당입니다. 즉, 국가와 국제라는 이항 구도에서 벗어나 지방(local)과 지역(region)을 보태 '지방 자치'의 확대와 '지역 협력'의 심화로 동아시아의 뼈대를 다시 세워야 할 때입니다.

홍콩과 타이완, 티베트와 신장, 오키나와와 홋카이도, 남북한을 아우른 집합적 청사진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 차원에서도 신해 혁명의 실상과 청년 마오쩌둥의 이상을 되새기는 작업은 일국적 차원에서는 국민 국가 이후를, 지역적 차원에서는 대국-소국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창발적 모델의 단서가 되어줄 수 있습니다.

오키나와-타이완-제주도를 잇는 비국가적 공동체의 중층적 형성과, 연방제와 연합제를 비롯한 국민 국가의 재구성 작업이 공진화(co-evolution)할 때, 우리는 전근대의 중화질서도 아니요, 근대의 국민 국가 체제도 아닌, 기존의 논리와 언어로는 쉬이 설명할 수 없는 '만국대동(萬國大同)'의 신세계에 가닿을 법합니다.

마침 내년은 동아시아의 전면적인 권력 재편기입니다. 미국, 한국, 북조선, 중국, 타이완, 러시아 모두가 새로운 출발을 모색하게 되겠지요. 9·11(2001년)로 출발해 3·11(2011년)로 마감한 지난 10년이 20세기의 살풀이였다고 한다면, 이제야말로 21세기의 주춧돌을 다져가는 중차대한 시기라고도 하겠습니다.

'아랍의 봄(Arab Spring)'으로 시작해 '뉴욕의 가을(American Fall)'로 저물고 있는 2011년을 돌아보건대, 조심스러운 낙관을 해보게도 되는군요. 세계 체제의 지각 변동이 낳고 있는 이 새 기운을 이어받아 동아시아의 집합적 지혜를 모으는 2012년이 되기를 간곡히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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