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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소설'이 필요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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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소설'이 필요한 시간

[프레시안 books] 제임스 우드의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언젠가 발터 벤야민은 이렇게 썼다.

책 안에서 열리는 세상과 책 자체는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라 완전히 하나였다. 책이 있으면 그 내용과 그 안의 세상이 손에 잡힐 듯 단번에 내 앞에서 나타났다. 그래서 그 내용과 책 안의 세상은 책의 모든 부분을 변용시켰다. 즉 그것들은 책 안에서 불타올랐고 책으로부터 빛을 내보냈다. 책의 내용과 그 안의 세상이 표지나 그림들 안에 깃들어 있을 뿐 아니라 각 장의 제목들, 첫 번째 글자들, 문장과 단락도 그것들을 담은 상자가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살았다. 즉, 우리는 책의 행간에 거주했던 것이다. 잠깐 쉬다가 다시 책을 펼치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이 멈춰 섰던 자리를 찾아내면서 스스로 놀란다.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베를린 연대기>(윤미애 옮김, 길 펴냄), 234쪽)

책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각각의 세상에 대한 한 독서광의 예찬. "어떤 도시에서 길을 잘 모른다는 것은 별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곳에서 마치 숲에서 길을 잃듯이 헤매는 것은 훈련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던 남자에게, 수잔 손택의 표현대로 책이란 그가 그 안으로 들어가 헤매 다닐 수 있는 또 하나의 공간이다.

물론 책을 세상, 혹은 세계에 비유하는 일은 흔하다. 그다지 열성적인 독자는 아니었던 롤랑 바르트 또한 그것이, 특히 (리얼리즘) 소설이 만들어내는 것이 하나의 세계라는 사실에 동의한다.

이 자급 자족적 세계 자체는 그 나름의 차원들과 한계를 만들어 내고 그 나름의 고유한 시간·공간·인구, 그 나름의 수집된 대상들과 신화들을 소유한다. ('소설의 글쓰기', <글쓰기의 영도>(김웅권 옮김, 동문선 펴냄), 31쪽)

하지만 바르트의 생각은 다르다. 소설의 세계란 "던져지고 진열되고 제시된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구축되고, 공들여 구상되었으며, 부각되고 의미적인 행들로 귀결된 어떤 세계"이고, 따라서 그 "뒤에 항상 숨어 있는 것은 신이든 서창적 내레이터든 조물주 같은 존재"이다. 바르트는 그런 작가들이 하는 일이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경험의 실존적 뿌리로부터 떼어내 정교하게 구축된 언어 안에 가두는 일, 부조리하고 때론 비참한 삶의 참모습으로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게 만드는 일이라고 말한다. 리얼리즘은 현실(reality)을 지시하지 않음에도, 그럴 수 없음에도, 단어가 그 지시 대상과 투명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리얼리즘의 신화가 도처에 만연해 있는 탓에, 우리는 기꺼이 그것에 속아 넘어갈 뿐만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르주아 계급의 안녕에 기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말을 이해하느니 차라리 사회 지도층의 안녕에 기여하고 말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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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제임스 우드 지음, 설준규·설연지 옮김, 창비 펴냄). ⓒ창비
제임스 우드의 <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설준규·설연지 옮김, 창비 펴냄)는 바르트의 공격에 맞서 벤야민이 예찬한 세계를 지켜내려는 중견 평론가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벤야민이 예찬한 것은 소설이 아니었고, 또한 그가 리얼리즘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지만, "그러므로 소설은 중요하다. 소설이 누군가의 운명을 아마도 교훈적으로 우리에게 제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이방인의 운명이 그의 운명을 타오르게 하는 불꽃으로 인하여 우리 자신의 운명에서는 전혀 끌어 내지 못하는 따뜻함으로 우리를 굴복시키기 때문이다." ('스토리 텔러', <문예 비평과 이론>(문예출판사 펴냄), 112쪽)와 같은 문장에서 유추할 수 있는 그의 태도에서, 무엇보다 그가 사용한 '책'이라는 단어가 소설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소설이라는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요소들이 작동하는 방식과 그것의 발전사를 살핌으로써, 허위의 양식으로, 낡은 관습으로 비난받는 리얼리즘의 올바른 자리를 되찾아주려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뻔한 프로파간다로 빠지는 우를 범하지는 않는다. 그는 리얼리즘은 리얼한가, 성공적인 은유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캐릭터란 무엇인가, 세부 사항의 훌륭한 사용이란 어떤 것이며 시점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낯익은 질문들을 다시 던지고, 여러 소설가의 소설에서 찾아낸 자신의 대답을 들려줄 뿐이다.

그가 소환하는 작가들의 면면 또한 무척이나 화려해서, 귀스타브 플로베르, 도스토예프스키, 제임스 조이스 등 각종 소설론의 단골손님은 제쳐두고라도, 제발트, 코맥 매카시, 존 쿳시, 토마스 핀천, 존 르 카레, 미셸 우엘벡, 제이디 스미스, 메릴린 로빈슨 등의 이름을 한 권의 책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독자들을 황홀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하다(몬티 파이슨, 케네스 브레너, 리키 저베이스의 이름은 보너스다). 그리고 이런 취향을 가진 남자를 미워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그는 소설의 요소들이 발전해 온 과정을 새롭게 구성하며 리얼리즘의 복권을 선언하는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 걸음으로 치면 가벼운 산보 정도 될까. 싱싱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나무들이 늘어선 공원을 거닐 듯, 그가 인용하는 작품들을 음미하며 그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책의 막바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그곳에서, 그는 말한다. 리얼리즘이 원하는 것은 진실이며, 그것은 허구이지만 삶을 닮은 무엇이고, 그렇기에 리얼리즘은 하나의 장르가 아닌 소설, 그 자체의 기원이라고.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낡아버린 관습이요, 그것에 안주하는 매너리즘이지 리얼리즘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의 선언은 제법 감동적이지만, 냉정히 바라보면 조금 고개를 갸웃하게 하기도 한다. 그의 논리는 세부 사항에 충실하지만, 과연 그것이 바르트의 비판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인지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나의 인상으로, 읽는 이 각자가 판단해야 할 몫이다.

난해하지 않고 매끄러우며 때론 우아함까지 느껴지는 서술이 무척이나 매력적인 책이다. '평범한 독자'를 염두에 두었다는 그의 말처럼 현대 소설 이론에 대한 입문서로 모자람이 없다. 현학과 비약과 장광설에 빠지지 않는 이론서(특히 번역서)는 그리 흔하지 않은 법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미덕은, 비록 저자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할지라도, 우리를 다시금 개별적인 작품들로 돌아가게 한다는 점이다. 그가 세심하게 선별하고 있는 소설의 목록은, 종종 책에 대한 집중을 방해할 정도로, 우리의 독서욕을 집요하게 자극한다. 현실에, 타성에, 권태에, 피곤에, 그 밖의 시급하고 또 구차한 많은 일에 지쳐 책을 놓는 우리들에게 소설의 세계가 얼마나 매혹적인지, '그것이 어떻게 빛나는지를' 새삼 일깨우는 것이다. 우드는 말한다.

문학과 삶의 차이는 삶이 두루뭉술하게 세부 사항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우리를 그 세부 사항에 주목하도록 거의 이끌지 않는 반면, 문학은 우리에게 세부 사항을 알아차리는 법을 가르쳐준다는 점이다. (…) 문학이 우리를 좀 더 삶을 잘 알아차리는 사람으로 만들면, 우리는 삶 자체에서 실습하게 되고, 그리하여 이것이 우리를 문학의 세부 사항을 좀 더 잘 읽는 독자로 만들면, 그것이 이번에는 우리의 삶을 좀 더 잘 읽는 사람으로 만든다. 이런 과정이 이어지는 것이다. 문학을 가르쳐보면 젊은 독자들 대부분이 삶을 알아차리는 능력이 형편없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20년 전 학생 때 마구잡이로 주를 달아둔 내 옛날 책을 보면서 알게 된 것인데, 그 당시 나는 지금에 와서는 진부하다고 느껴지는 세부 사항들, 이미지, 은유 따위에 마음에 든다는 표시로 줄곧 밑줄을 치면서도, 지금 굉장해 보이는 것들은 아무 생각 없이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독자로서도 우리는 성장 과정을 겪거니와, 스무 살배기들은 상대적으로 철딱서니다. 그들은 문학을 읽는 법을 문학에서 배우기에는 읽은 문학작품이 아직 충분하지 않다. (76~77쪽)

아마 당신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말은, 우리가 여전히 소설 속에서 얻을 것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철딱서니지만, 좀 더 나은 철딱서니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는 것이다. 소설이 우리 곁에 존재하는 한. 그러니 이 책에서 정답을 찾을 필요는 없다. 다만 책이라는 세상 속에서 길을 잃는 법을, 기꺼이 헤매는 법을 배우는 것으로 족하다.

벤야민은 언젠가 이렇게 썼다.

"책들이 그 주인 속에서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주인이 책들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벽돌 대신에 책으로 그가 거주할 집을 여러분 앞에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사람은 가장 어울리는 일인 양 그 안으로 사라지려는 것입니다." ('나의 서재를 정리하며', <문예 비평과 이론>, 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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