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선거의 계절? 아니, 투쟁의 계절!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선거의 계절? 아니, 투쟁의 계절!

[철학자의 서재] 에이프릴 카터의 <직접 행동>

철이 없는 세상

2011년 가을은 좀 이상하다. 그래서 놀라는 일이 많다. 일단 날씨부터 좀 문제다. 11월이 되면 철을 마감하는 낙엽과 함께 찬바람에 코트 깃을 여미는 낭만적 행동이 남발되어야 할 법한데 낮밤의 기온이 늦은 봄 날씨의 그것을 상회하고 있으니 에어컨 바람이 없는 만원 버스와 지하철에서 쪽잠이라도 자려고 힘들게 앉아 있을라치면 철에 맞게 갖춰 입은 옷 덕분에 등줄기는 축축해지고 이마에는 어느새 땀이 맺힌다.

그뿐인가. 얼마 전에는 내년에 보기로 약정한 사과 꽃이 다시 피었다. 농민들은 내년 농사에 대한 걱정이 한 가득이다. 오늘도 학교 교정을 걷다보니 화단 옆의 목련나무에는 목련 꽃봉오리가 맺혀있더라. 이 대목에서 나는 한 번 놀란다.

그러다가 집에 와서 TV 뉴스를 보고 있으면 2008년에 보았던 정치권의 철없는 행보가 다시 반복되는 것 같아 다시 한 번 놀란다. 당시 국가 수장으로서 국민의 아무런 동의 없이 순식간에 미국으로 건너가 간이며 쓸개며 다 내준 대통령의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외교에 민심은 동요했고 쇠고기 파동으로 촉발된 촛불의 연대를 국가는 공권력으로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결국 대형 할인점과 음식점에서 꺼림칙한 미국산 소고기를 대하게 되는 지금 현실에서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국민의 동의를 얻지 못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하고 돌아와 또 한 번 예전에 했던 것과 같은 업적(?)을 자랑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명백하게 드러나는 바이기도 하지만 국가의 명암과 흥망을 좌지우지할 대사에 국민·시민들의 의사는 전혀 개의치 않는 태도이다. 지금 청와대를 비롯한 여당 지도부에서 항상 하는 말이 한미 FTA는 노무현 정부와 현재의 민주당 측에서 추진했고 지지했기에 지금 한미 FTA를 반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한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은 노무현 정부 당시에도 이 사안에 대해서 반대했다는 것은 모르는 것 같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척하는 것이 맞다.

검찰에서는 한미 FTA에 대한 괴담이나 유언비어를 퍼뜨릴 경우 구속 수사하겠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이것이 과거 유신헌법을 추진하면서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논의를 금지시키고, 일체의 집회 시위 및 정치 참여를 금지하게 한 긴급 조치 9호와 다를 바 뭐가 있을까.

진실에 대한 발언이 괴담과 유언비어가 되고 2011년의 실정이 2008년으로, 1970년대로 자꾸만 역행하는 현실은 철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철부지의 모습이다. 앞으로 이 시대는 아마 철부지의 시대로 명명될지도 모르겠다.

민주주의는 정말 '민주'하는가?

이런 현실을 두고 보면 국민이 정치의 주된 위치를 선점하고 있다는 민주주의의 기조가 무색해진다. 그리고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민주주의는 우리가 체화하고 있고 체화할 수 있는 대상이 맞는지, 아니면 국가의 교육에 의해 실체를 보지 못하고 착각하고 있는 허상인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민주(民主)'라는 말을 다시 상기해보자. 데모크라티아(demokratia)에서 유래한 것으로 백성(Demos)의 지배(kratia)를 의미한다. 이것이 초기 아테네 도시 국가 체제에서는 직접 민주주의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결론적으로는 소수 시민에 의해 지배되는 과두정치(寡頭政治)로 나타났고 보편적 인권의 개념도 존재하지 않았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개인이 정치의 주체로 인식되었으나 여러 가지 제한 여건상 대의 정치 제도를 택하게 되었고 대의 제도 역시 중세 유럽의 귀족들 사이에서 발전한 제도이다. 서구의 민주주의는 그 태생이 궁극적인 '민주'를 구현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고 서양의 정치 역사에서 확실한 기능을 유지했다고 보기 어렵다.

사실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나서 진행해온 일련의 정치 현실에서 국민이 주인으로 받들어지고 실질적 권리를 행사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었는가? 이것은 비단 한국의 경우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볼 수 있는 문제일 것이다.

미국의 경우 링컨이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언급한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의 진정성이 미국의 현실 정치에서 과연 얼마나 투명하고 명백하게 이루어졌는지는 의문이다.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신자유주의를 외치는 정치권 인사들이 모델로 삼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이미 자유로운 이성적 판단과 그에 따른 사회의 진취적 혁명성을 상실한 채 사회와 정치 체제가 보수 반동화(reaction)를 되새김질하는 반민주적 형태로 나가고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과거의 예로 1940년대 말부터 1950년대까지 미국의 대중을 히스테리 상태로 몰아넣은 매카시즘의 억압적 분위기는 수많은 인사들을 공산주의로 몰아 탄압하였고 나치의 폭압을 피해 미국으로 귀화하여 컬럼비아 대학 교수로 있던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나치보다 더 심각한 미국의 억압적 폭력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독일로 돌아가기도 하였다.

현재 미국의 대중들이 월가에서 벌이는 대규모 시위는 단순히 서브프라임 모기지 정책 이후 금융권에 대한 불만에서 촉발된 것만이 아닐 것이다. 계속되는 국가의 억압적 폭력, 시대가 앞으로 나가면서 함께 진보해야 할 사회적, 인간적 가치의 증대가 봉쇄되고 소수의 이익과 안위만이 보장되는 반민주의 현실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요 대중의 투쟁이다.

'직접 행동'은 정당하다

▲ <직접 행동>(에이프릴 카터 지음, 조효제 옮김, 교양인 펴냄). ⓒ교양인

미국 대중들의 월가 점령과 그 투쟁을 보면서 미국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해 왔고 따라가는 한국의 현실과 그 가까운 미래를 생각하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게 된다. 그리고 불완전한 현실의 민주주의를 완전하게 만들 방도를 강구하게 될 것이다.

에이프릴 카터는 <직접 행동>(조효제 옮김, 교양인 펴냄)에서 대부분의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는 대의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완전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다수에 의해 소수의 의견이 묵살되는 불합리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둘째, 민주주의 체제의 국가 권력과 정치에 있어서 실질적 지배 권력인 파워 엘리트를 양산해 내어 '민주'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셋째, 지배 엘리트들은 대다수 대중과 거리를 두면서 사회 전반의 이익을 독점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대의 민주주의는 민주 사회의 기치를 창달하는데 실패했고 사회 경제적 불평등 구조를 생산하여 지배력과 피지배력 사이에 힘의 불균형을 야기한다. 지배 세력은 이 구도에 탄력을 주면서 양자의 격차를 더욱 크게 만든다. 끊임없이 자기 지배력이 적용되는 범위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선점된 중심은 더욱 배타적이 되면서 민주주의를 철저히 파괴한다.

카터는 이런 현실의 타개를 위해 직접 행동을 말하고 그 정당성을 주장한다. 특히 직접 행동은 새로운 정치 모델을 창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기존 민주주의의 결손 부분을 보완하는 방책이라고 한다. 직접 행동은 민주주의를 바로세우는 노력이며 사회적 불의에 대항하는 정당한 행동이다. 그리고 이 행동의 주인공들은 '보통 사람들'이다.

직접 행동은 지배 엘리트 계층에 대해 자기 이익을 잘 반영하지 못하고, 별다른 정책 지렛대도 지니지 못한 사람들이 채택하는 방식이다. (43쪽)

억압적 체제에서 반체제 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흔히 진정한 민주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으면 조작된 선거에 의한 가짜 '민주주의'에 참여하는 수밖에 없다. (75~76쪽)

중심을 선점한 자들의 자기 보신주의는 대부분 온당치 않고 불법이다. 과거 역사에서도 중국에서는 춘추 전국 시대에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창궐하여 제후국이 천자국에 대해 시해와 난을 일으켰고 그리스에서는 과두정(寡頭政)과 참주정(僭主政)을 통해 정치권력을 불법으로 찬탈했다. 이후 서양의 민주 정치 사회나 동양의 유교 민본 정치 사회는 모두 추상론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었다. 현대 민주주의가 추상화되고 형해(形骸)만 남게 된 원인도 같은 맥락이다. 공적 사회 기조가 추상화된 사회는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기에 딱 알맞다.

정부가 개인의 자유를 위협할 가능성이 팽배한 상황에서는 법원의 힘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법원이 개인의 권리를 언제나 옹호해주는 것도 아니다. 정부가 개인 자유를 침해하는 것에 대항해 비타협과 시민 불복종을 벌이는 행위는 자유주의 원칙에 비추어 정당화될 수 있으며, 대중의 저항 의지를 북돋우는 데 효과적일 수 있다. (183쪽)

책에서 인용한 그람시와 토크빌의 말을 빌리면 시민 사회는 대중이 민주적인 공공의 영역에서 권력과 시장 경제의 위협을 견제하며 국가 통제를 받지 않는 자발적 시민의 결사체와 활동 공간이라고 한다. 그리고 카터는 대중 혹은 민중들은 이 공간을 기반으로 국가와 지역 내부의 운동이라는 한계를 벗어나 각 국가 대중 간의 연계를 통한 초국가적, 전 지구적인 직접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초국가적 사회 운동과 전 지구적 연대 투쟁을 통해서 신자유주의의 지구화에 따른 초국적 기업의 횡포, 국가 간 자유무역협정, 민영화, 탈규제, 전 지구적 빈곤, 환경 문제의 해결에 기대를 걸 수 있다. 필리핀의 사회학자 월든 벨로에 의하면 "전 세계 단일 모델형 처방"을 막아내는 것이 목적이다. 이는 또한 탈중앙화, 다원주의, 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를 뜻한다.

인간의 자유가 곧 민이 주인 되는 길

20세기의 탁월한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 체제에서 나타나는 불복종과 저항을 높이 평가했다. 아렌트에게 있어 인간의 본질은 '자유'였기 때문에 전체주의의 승리는 곧 인간성의 파괴를 의미했다. (393쪽)

직접 행동은 전체주의적 국가 폭력의 구도에서 개인과 인간의 보편적 자유를 옹호하고 다양한 사람들의 특성과 문화 양식을 존중하여 발양시키기 때문에 인간 집단의 테두리를 좀 더 밝고 활기차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 이런 경우에 이른바 시민 사회에서 능동적인 시민의 덕성을 가진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능동적인 시민들의 직접 행동은 부패하고 패퇴(敗頹)할 수 있는 법과 민주 제도를 항상 생생하게 만드는 근본이 된다. 또 자기 목소리를 내는 데 당당해져서 자존감과 자부심, 자기 존재의 존엄과 확신을 갖게 한다. 신자유주의의 경제 논리로 위축된 개인의 역량이 발휘되면서 민주적 참여의지와 주체성이 배가 된다. 민주문(民主門)에 진입하는 것이다.

<직접 행동>에서 논의하는 내용과 수많은 사례들은 모두 서양이 200년 넘는 민주주의 과정을 겪으면서 도출한 공과 실의 경험적 교훈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반면 서양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시민 사회 형성과 민주주의 역사가 짧은 우리는 국가적 억압과 폭력에 대항하고 궁극적인 인간의 자유를 염원하는 불복종 저항의 전통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직접 행동의 상상력은 과거 진보적 지식인들에 의해 이미 논의된 적이 있다.

아마 조선의 허균이 구분한 항민(恒民), 원민(怨民), 호민(豪民)의 이른바 호민론(豪民論)이 그것일 것이다. 법을 지키며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사람을 '항민'이라 하고, 권력에 시름하고 탄식하며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이 '원민' 그리고 사회에 관한 문제의식을 갖고 시대의 변고가 있음을 기다렸다가 편승할 시기가 오면 원민, 항민을 다 일으켜 무도한 인간들을 쳐 죽이는 데 선봉에 서는 '호민'이 있다.

물론 계속 언급한 직접 행동은 비폭력 저항의 효과와 효율을 폭력 저항보다 높게 본다. 허균 역시 호민이 창란(倡亂)하는 사회를 바람직한 사회로 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허균이 주장한 호민론은 당시 민본 정치가 선행되지 않은 사회에서 위정자들을 비판하고 제대로 된 민본의 기치를 세우려는 시대정신을 내포하고 있다. 합당하지 않은 사회의 불의와 싸우고 제대로 된 사회로 바꾸려는 호민의 모습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표출하는 상징이다.

지금 현대 사회를 말하면서 조선 사회를 빗대 말한다면 민주와 민본 사이의 간극을 무시하는 태도일 수 있지만 인간의 자유가 곧 '민주'라는 의미에서 비록 개념 간의 간극은 있다 해도 옛날과 지금 사람들이 모두 갈망하던 주인으로서의 삶은 아마 동일할 것이다. 우리는 이 주인의 삶에 대한 열망을 도덕과 윤리의 관념으로 포장하지 말고 현실 속에서 생생하게 풀어내야 한다.

과거나 지금이나 철부지들은 항상 자기의 이익을 최우선시하고 유아독존하려 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철부지들은 자신의 생존과 자본의 연결을 자신들 삶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유지하고 자신이 그 중심에 서있어야 안정된다.

그러면서 결국 호민들을 부채질하고 있다. 과거 부채질하던 자들은 이미 박제가 되어 대대로 지탄을 받고 있으니 그렇다 쳐도 박제된 표본을 보고도 지금 부채질하는 자들은 얼마나 철이 없는 자들인가.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