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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 대기자, enough is enough!"

[윤재석의 '쾌도난마'] 김영희의 <이 사람아, 공부해>

무릇 평전(評傳)이라면 한 인간의 일생을 평론하듯 써내려간 책이다. 특히 지은이가 대상 인물의 삶을 기술하되 자신의 생각 틀에 넣어 다시 찍어냄으로써(remolding), 대중으로 하여금 당해 인물을 재조명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행위다.

다분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사실(fact)을 왜곡한다거나, 뻔한 행적을 왜곡하거나 날조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세계 노동 운동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을 다룬 <전태일 평전>(조영래 지음, 사단법인전태일기념사업회 발행)이나, 우리나라의 대표적 매국노의 맨얼굴을 해부한 <이완용 평전>(김윤희 지음, 한겨레출판 발행)을 보자. 필자와 대상 인물 사이의 친소(親疎), 호오(好惡)에 관계없이 일정 부분, 가치 중립적인 객관적 천착을 위해 책의 주인공과 거리를 둔 흔적이 곳곳에 묻어난다.

그런 잣대로 <중앙일보> 회장을 지낸, 고(故) 홍진기의 삶을 다룬 <이 사람아 공부해>(김영희 지음, 민음사 펴냄)를 재단한다면, 이건 평전이 아닌 '유민(維民)어천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시종 종소리가 시끄럽다. 그것도 장중한 봉덕사의 종소리가 아니라, 딸랑딸랑 울리는 유아 손목의 요령(搖鈴) 소리.

사실 왜곡·허구 점철된 御天歌

▲ <이사람아 공부해>(김영희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그건 그렇다 치자. 더 고약한 점은 이 '평전'이 시종, 사실 왜곡과 허구로 점철돼 있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슬슬 보자. <중앙일보> 고문인 이어령은 발문(跋文)에서 <중앙일보> 창간 초기 논설 회의 풍경을 회상하며 당시 청년이었던 그가, 홍진기로 인해 기성세대에 대한 불신의 벽을 깨게 된 일화를 소개한다.

그러나 매일 아침 사장실에서 열리는 논설 회의에서 선생님을 직접 뵙고, 나서는 내 오만의 벽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창간 멤버로 발탁된 논설 위원진은 눈부셨다. 정치 평론가 신상초, 법학자 이건호……, 각계 최고 지식인 학자들이었다. 논설회의 자리에서는 지적대화들이 분출하듯 터져 나왔는데, 그, 비판적 담론들은 가히 밤하늘의 불꽃 쇼를 방불케 했다.

하지만 부싯돌처럼 내 가슴을 불꽃 튀게 한 것은 그 중심에 북극성처럼 앉아 있는 홍진기 사장님이셨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분야를 칸막이 없이 넘나드는 선생님의 그 넓고 깊은 지식,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독서량과 왕성한 지적 호기심은 무참히도 나의 오만을 압도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나의 콧대는 꺾이지 않았다.

(…) 하지만 그날만은 달랐다. 선생께서 논설 회의 도중에 '반물질'에 관한 낯선 화두를 던진 것이다.


"文社哲·數物化 달통한 鮮最 천재"

이어령, 이 영감탱이도 갈 데까지 간 것 같다. 스스로 당대 최고 지성을 '참칭'하는 자가, 홍진기를 가히 문사철(文社哲)·수물화(數物化) 전 분야에 막힘이 없는 '조선의 천재'로 고창(高唱)하고 있다.

하긴 언젠 한글을 비롯해 대한민국의 모든 것이 후진적이라고 부르짖더니, 이제 와선 대한민국의 모든 것이 세계 최고라고 여반장(如反掌)하는 인사니, 놀랄 일도 아니지, 뭐.

한데, 논설 위원 회의를 주필이나 논설 주간이 주재하지 않고, 법조인 출신 경영자가 했던 건 또 무엔가?

1960년대 중반,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 과학자들이 반물질의 존재에 대한 이론적 가설을 내기 시작한 것, 맞다. 그리고 근 반세기 뒤인 지난 6월 6일 드디어 반물질을 16분여 동안 잡아두는데 성공했다.

이어령은 홍진기가 당시 전 세계 5000여 명의 물리학자만이 알고 있던 반물질의 존재를 알고 있음에 포커스를 맞춰 유민어천가를 외치고 있다.

이어령의 발문은 홍진기에 대한 천재성 상찬(賞讚)의 전주곡이다. 상찬은 '1장 왕십리 천재'에 본격, 등장한다. 평전에 따르면, 홍진기는 조선 제일 명문인 경성제일고보에서 체조 과목을 제외한 전 과목 우등으로 재학 기간 내내 부조장(부반장)을 맡은 것으로 돼 있다. 그리고 그는 당시 조선 최고 엘리트들이 다닌다는 경성제대 법문학부를 졸업했다. 그 시절, 소설까지 쓸 정도로 문학적 소양까지 갖춘 전천후 인재였다. 이런 천재를 나 몰라라 한 우리 사회의 저급성을 개탄할 뿐이다.

친일파라니! 安重根도 울고 갈 '애국자'

▲ 법제관 홍진기. ⓒ민음사
이제 그의 이력을 보자.

그는, 태평양 전쟁 한해 전인 1940년 내지(內地)에서 실시된 일본국 고등문과시험 사법과에 재수 끝에 합격한다. 1942년 경성지방법원 사법관 시보로 법조인 생활을 시작한 그는, 전주지방법원 판사(1943년 10월)를 거쳐, 광복 후 미 군정청 법무부 법제관(1945년 9월), 정부 수립 후 법무부 조사국장(1948년 11월), 대검찰청 검사 겸무(1949년 6월), 법무부 법무국장(1950년 4월), 법무부 차관(1954년 2월), 법무부 장관(1958년 2월), 내무부 장관(1960년 3월) 등 수다한 요직을 거친다.

그런데 평전은 그를 일제 강점기엔 나라의 광복을, 광복 후엔 나라 세우기(nation building)에 골몰한 해방 공간의 애국자로 묘사하고 있다. 상세한 '주장'은 책을 사 보시라!

참고로 <중앙일보> 기자 출신의 친일·매국노 색출 전문가 정운현의 말을 들어보자.

"일제 강점기엔 3권 분립이 존재하지 않았다. 입법, 사법, 행정 전권이 조선 총독 휘하에 있었다. 따라서 조선총독부에서 일하면 친일이고 사법 쪽에서 일하면 아니라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따라서 홍진기는 성골(聖骨) 친일파다."

정운현의 평가에 대한 판단은 독자에 맡기고, 그의 승승장구 행적을 평전의 기술에 따라 계속 살펴보자.

그는 3·15 부정 선거로 촉발된 4·19 시민 혁명 후 이승만 독재 정권 단죄 과정에서 사형 선고(후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형 집행 정지로 나옴)를 받고 옥(獄)살이를 한다. 그러고 보니 이 집 범상치 않은 집안이다.

옥살이 동안에도 그의 학인적(學人的) 욕구는 멈추지 않았단다. 그 때 평소 공부하고 싶었던 프랑스어는 물론, 산스크리트어까지 섭렵했다지. 대단한 지적(知的) 탐심(貪心).

▲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와 홍진기. ⓒ민음사

시간 없으니 빨리 가자.

감옥을 나온 후 이병철과 호의적 관계를 맺은 그는, 잠시 동안의 훈수꾼 역할에서 본격적으로 삼성 전반에 걸친 영향력 행사한다. 그 구체적 행보 중 하나가 동양방송, <중앙일보> 창간과 경영 참여.

1965년 9월 라디오서울 사장에 취임, 그해 12월 동양텔리비전방송을 개국한다. 이듬해 3월 <중앙일보> 부사장에 취임, 그해 9월 22일 신문을 창간하고, 1966년 1월 라디오·TV 총괄 사장, 12월엔 <중앙일보> 회장 자리에 오른다.

이병철과 홍진기는 방송 신문의 창간 사유를 대한민국에도 제대로 월급 주는 그럴 듯한 미디어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실제론 1963년 발생한 이른바 '삼분(三粉) 폭리 사건'으로 혼쭐이 났기 때문임은 길가는 중학생도 다 안다.

삼분 폭리 사건은?

1963년 밀가루·설탕·시멘트 등 이른바 삼분 산업과 관계된 기업들이 가격 조작과 세금 포탈로 엄청난 폭리를 취하고 집권당인 공화당에 거액의 정치 자금을 제공한 사건. 밀가루, 설탕, 시멘트는 당시에 모두 국민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제품이었으나 기업들이 그해 발생한 식량 파동을 악 이용, 폭리를 취함으로써 전 국민의 분노를 샀었다. 현 CJ의 전신인 제일제당은 그 때 60퍼센트의 시장 점유율을 차지하던 회사로서 당시 돈으로 15억 원 이상의 부당 폭리를 취했었다.

신문과 방송이라는 무소불위의 칼 두 자루를 쥔 삼성이었지만, 불행히도 1966년에 저지른 '사카린 밀수 사건'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사카린 밀수 사건은?

1966년 삼성이 계열사인 한국비료공업을 통해 당분 원료 사카린을 밀수하려다 적발된 사건이다. 그해 5월 경상남도 울산(당시)에 공장을 짓고 있던 한국비료공업이 사카린 55톤(2260포대)을 건설 자재로 꾸며 들여와 파려다가 들통 났다. 뒤늦게 이를 적발한 부산세관은, 6월 1059포대를 압수하고 벌금 2000여만 원을 부과하였다. 삼성은 한국비료공업 공장을 짓기 위해 일본 미쓰이로부터 정부 지급 보증 아래 4000여만 달러의 상업 차관까지 들여왔다. 사카린 밀수를 현장 지휘했다고 밝힌 이병철의 장남 이맹희는 1993년 발간한 <회상록-묻어둔 이야기>에서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은 대통령 박정희와 이병철이 기획하고, 정부기관들이 적극 감싸고 벌인 엄청난 규모의 조직 밀수였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 사건이 국회에서 문제화하면서 블랙 코미디도 연출됐다. 김을동의 선친, 야당 의원 김두한이, 이와 관련한 대정부 질의 도중, 국무위원 석에 앉아 있던 국무총리 정일권, 부총리 장기영 등 당시 박 정권 핵심 각료들을 향해, 국민의 이름으로 인분을 투척한 것이다.

대단한 책사(策士) 마름

1967년 장녀를 삼성 가(家) 3남인 이건희에게 시집 보낸 후 홍진기의 파워는 더욱 강력해진다. 이젠 삼성의 미래 먹을거리에 대한 방향까지 제공한다. 다름 아닌 반도체 산업 투자다.

장녀 홍라희의 증언에 따르면, 이병철이 반도체에 관해 관심을 가지면서 홍진기에게 스터디를 종용하자, 홍은 밤을 패면서 반도체 공부에 몰두했다 한다. 홍의 탁월한 수물화(數物化) 감수성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1978년 삼성은 부실 기업인 한국반도체를 헐값에 사서, 이듬해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로 흡수한다. 근데, 이 부분은 이병철의 <호암자전(湖巖自傳>(중앙M&B 펴냄, 1986년)의 내용과 비교해 봐야 당시 정황의 근사치가 나온다. 아무튼 홍진기의 역할이 지대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국회 사무총장을 지낸 홍의 절친, 선우종원은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한마디로 현재 삼성그룹의 산업 포트폴리오는 홍 사장의 구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언론이 있어야 힘이 생긴다면서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을 만든 것도, 그리고 현재 삼성그룹의 간판 기업이 된 삼성전자의 반도체 부문 신규 진입도 홍진기 사장의 혜안을 이병철 회장이 인정하고 결단을 내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이병철의 재기발랄하고 충직한(brilliant & faithful) 책사 마름이었다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이 마름 양반, 아랫것들에겐 엄청 혹독했다. <중앙일보> 대기자 김영희가 책 제목으로 쓴 "이 사람아 공부해"는 그의 혹독한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평생 독서상우(讀書尙友)였던 그가 직원들, 특히 기자들에게 공부 많이 하라고 혹독하게 질타한 점은 미디어 경영자로서 당연한 자세.

하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홍의 저의(底意)를 한 번쯤 생각해 봤는가?

<중앙일보>가 20주년을 맞이한 1985년 11월, 그 때도 이따금 <중앙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간부들을 불러 그가 지적 사치를 즐기던 중 발생한 우울한 일화(blue episode)다.

하루는 한 편집국 부장이 얼굴이 벌개가지고 내려왔다. 보나마나 회장 주재 회의에서 엄청 깨지고 나온 거다. 내막인 즉, 이러했다.

요즘도 매년 11월 18일엔 프랑스 와인의 초벌구이 '보졸레 누보'가 출시된다. 지금은 이 싸구려 와인의 가장 손꼽히는 봉(시장) 중 하나가 대한민국이지만, 그 때만 해도 그게 무슨 특정 신체 부위를 지칭하는 단어인지 대부분의 백성이 잘 모르고 있던 시절.

근데 와인 깨나 좋아하는 이 간부가 회장의 타깃이 됐던 거다. 프랑스 출장을 자주 가는 회장과 이 자 사이에 와인을 놓고 누가 더 많이 아는 지 지식 경쟁을 하던 중, 이 자가 끝까지 답변을 하자, 회장님 심기 상당히 불편해지신다.

결국 finish blow 한 방. "와인 마실 줄 안다면 적어도 '보졸레 누보'는 알아야지."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다. 그 와인 전문가, 보졸레 누보를 알 턱 있나?

그 자 진짜 바보다. 회장님께서 질문을 하면 두세 번 쯤 대답하다가 다음엔 설사 알아도 "잘 모르겠습니다" 했어야지.

김영희는 홍진기 회장님을 "나는 읽기 위해 존재한다(Lego, ergo sum)"는 일생을 살아왔다고 한 접시 말아 올렸다.
나는 이렇게 말아올려드리고 싶다.
Crucio, ergo sum!
모르면 라틴어 사전 찾아보라!

이제 서평을 마치려 한다.
그 전에 저자 김영희(75)를 생각해 본다.

개인적으로 나는 선배 김영희를 좋아한다. 그가 편집국장 시절, 밑에서 일했다. 그는 말 그대로 자수성가 형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는 고교 졸업 학력으로 <한국일보>에 들어가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한국일보>는 학력을 따지지 않았다. 오로지 실력. 그리고 사주 장기영의 기자 사랑도 남달랐다. 전제는 실력 있는 기자. 그래서인가? <한국일보>는 5공화국 전까지 일류 신문이었다. <조선일보>, <한국일보> 발가락 근처에도 못 갔다.

다시 김영희로 돌아오자.

학벌은 미흡했지만, 사람은 똑똑했다. 열공자(熱工者). 기자로선 진정 학인(學人)이다. 영어, 무지 잘 한다. 쓰기, 말하기 모두 최상급. <중앙일보> 워싱턴 특파원, 나이롱뽕으로 딴 거 아니다. 대담까지 잘하니 국제 회의나 방송 좌담 단골 사회자다. 근데, 그는 입버릇처럼 말한다.

"내 영어 실력은 홍 회장(여기선 홍석현을 말한다)에 비하면 유치원 수준이지."

성성한 백발 날리며, 낼모레 희수(喜壽) 나이도 잊은 채 현역으로 뛰는 그는, 대부분 환갑도 못돼 퇴역하는 대한민국 기자들에게 로망이다. 기자들의 롤 모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저서(?)를 보면 한없이 슬퍼진다.

사랑하는 김영희 선배!

이제 enough is enough(많이 무읏다 아이가)!

부디 북망산(北邙山) 가실 때까지 '쟁이' 하쇼. 하지만 제발 누구 항문 닦기(학문 닦기의 오식이 아님) 하면서 구차한 타이틀 연명하는 건 어째 보기 민망하오.

당신의 이 못난 후배, 어여쁜 비서 달린 널따란 집무실이나 운전기사 달린 자동차는 없어도 '딸랑딸랑'하지 않아도 되니, 쟁이 생활할 만하오. 필요하시다면, PC 달린 책상 하나 내드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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