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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집단 자결'의 역사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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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집단 자결'의 역사를 아십니까?

[동아시아를 묻다·7] 동요의 체험과 동아시아라는 실감

동요의 체험과 동아시아라는 실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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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말씀드리려던 것은 '통하지 않는다는 감각', '분절의 감각'의 중요성입니다.

그것이 동아시아에 관한 제 실감의 밑바탕을 이룹니다. 두 심포지엄의 참가의 기억을 꺼낸 까닭은 제가 알고 있다고 믿어온 것이 흔들리고, 제 문화적 아이덴티티가 심문받는 체험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편지에서 드렸던 말씀을 다시 꺼내겠습니다.

"당시 동아시아라는 말에서 제가 느낀 실감은 이것이었습니다. 즉, 저렇듯 다른 삼 항(한국-일본-미국, 한국-일본-자이니치)의 쉽사리 포개질 수 없는 관계. 연대가 외쳐지는 상황 속에서 늘 잠재하는 균열. 지식에 기대어 결코 말끔히 정리해낼 수 없는 유동적인 정체성과 감정의 틈새. 사실 제게는 여전히 동아시아 연대보다는 동아시아의 균열이 더욱 진실한 말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동아시아'를 입에 담는 까닭도 무언가 공동의 요소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쉽게 가시지 않을 균열과 적대감으로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실감을 물으셨기에 되도록 제 체험으로 바짝 끌어와 답하고자 했습니다. 체험으로 바짝 끌어와 답한다는 것은 상황 속에 자신을 담고 거기서 새로운 사고를 추출해 단련시킨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주입과 추출의 반복을 거쳐야 동아시아는 진정한 실감으로서 다가오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난번의 편지로는 충분히 전달된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서 작성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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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체류의 경험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2007년 봄부터 2년간 일본에서 체류했습니다. 일본어로 말하는 게 서툰 상태로 일본에 갔습니다. 이병한 님도 경험하셨겠지만, 외국어는 남을 흉내 내면서 익히게 됩니다. 처음에는 어떤 어휘나 표현을 흉내 내서 어색한 대로 사용하다가 이윽고 몸에 익혀 종종 꺼낼 수 있는 자원으로 삼습니다.

처음에는 그 발음의 울림이 영 불편하고 상대에게 온전한 의미로 전달될지 불안하지만 거듭 성공하면 원할 때 꺼낼 수 있는 어휘와 표현구가 됩니다. 점차 숙달될수록 그 어휘나 표현구가 처음에 안겼던 어색함은 사라집니다.

회화 공부에 관해 말씀드릴 생각은 아닙니다. 위상은 다르지만, 모국어라 할지라도 추상 개념을 사용하는 일은 이와 비슷한 구석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쥐어짜내야 힘겹게 전할 수 있었던 표현들이 어느새 몸에 익으면 외국어 실력은 붙은 셈이나, 외국어로 경험해야 했던 날 것의 피부 감각은 잊히고 맙니다.

일본 생활 초기에는 일본어로 수시간을 내리 떠들면 얼굴 근육에 경련이 일고, 힘이라도 부치면 혀는 헛돌고 이어나갈 다음 말은 영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 단계가 지나 문장을 떠올리려고 미간을 찌푸리지도 않고, 다른 사람이 느닷없이 말을 건네도 덜 긴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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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비슷한 경험은 개념으로 세계를 분절하고 구성하고 이해하는 학문의 영역에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요. 가령 애초 생경했던 어떤 개념은 점차 익숙해지면 이윽고 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는 무기가 됩니다. 하지만 저는 그 과정에서 따르는 의도치 않은 손실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만약 그 개념과의 긴장감을 잃어버려 그 무기가 사고를 다듬기보다 안이하게 만드는 데 쓰인다면, 오히려 그 무기는 결국 부리는 자를 상처 입힐지 모를 일이니 말이니까요.

모국어, 즉 한국어로 말할 때면 머리와 입과 몸짓 사이의 간극은 외국어로 말할 때보다 크지 않습니다.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표현을 구사하고 몸도 자연스럽게 반응합니다. 섣불리 말을 꺼냈다가도 주워 담을 수 있으며, 추상도가 높은 개념어를 활용해도 어렵잖게 공감대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외국어로 말할 때는 그렇지 않죠. 어떤 추상 개념을 알고 있더라도 그 개념의 언저리를 표현해내지 못한다면, 그 개념에 담으려던 제 감각은 상대에게 좀처럼 전달되지 않고 개념은 개념인 채로 공허해집니다. 더구나 배워둔 어휘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구사할 수 있는 표현이란 빈약한 어휘들의 조합이니, 말이 길어지면 비약도 쌓여갑니다. 한 번 시작된 말은 좀처럼 수습되지 않고, 알고 있는 단어들을 밟아 어렵사리 의미의 강을 건너가보면 애초 의도와는 다른 곳에 도달해 있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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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배우기가 어려웠다는 말을 늘어놓을 작정은 아닙니다. 오히려 언어 능력의 제약이 제게 안겼던 그 간절함, 상대에게 제 생각과 실감을 어떻게든 전하고자 애썼던 그 간절함에 비하건대, 익숙한 모국어를 활용할 때면 자신의 논리적 비약을 민감하게 의식하지 못하며, 적당히 표현의 관성에 맡겨도 상대에게 자기 생각이 전달되겠거니 여기는 어떤 사고의 안이함이 생기는 건 아닌지 묻고 싶은 것입니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방법으로서의 아시아'에서 베이징 유학 체험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20대의 다케우치 요시미는 중국어가 능통하지 않았나 봅니다.

"회화가 안 된다! 뭔가 거기에 자신의 문제, 여기서 자신의 문제라는 건 결국 문학의 문제라고 해도 좋겠습니다만, 그걸 푸는 열쇠가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 자기 이웃 나라에 자신과 비슷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많은데도 그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문제라고 느꼈습니다."

아시다시피 다케우치는 이 글의 말미에서 아시아를 지리적 실체가 아닌 '방법'으로서 내놓았습니다. 그런 발상에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작은 체험이 바닥에 깔려 있습니다. 다케우치의 그 체험은 제게 크게 와 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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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여러 곳으로 여행을 다녔습니다. 우리는 여행을 다닐 때 홀로 다녀도 날 몸으로 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나'라는 개체는 이미 기억과 경험 그리고 정보로 구성된 맥락의 덩어리입니다. 그래서 여행자가 여행지를 찾는다면 한 장소 위에 한 사람이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 장면은 이질적인 맥락들 사이에서 충돌과 교착, 교섭과 소통이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이 됩니다.

그러나 이 갖가지 반응들을 충분한 사색으로 우려내지 못한다면, 여행의 감상은 어쩌면 이국 취미로 회수되고 말겠지요. 낯섦을 그저 이국 취미의 대상으로 남겨놓지 않고 거기서 물음을 발견하려면 어떠한 사고의 절차가 필요한지 스스로에게 묻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여행지가 지닌 고유한 문화 논리로 들어서려는 노력이 실패하는 경우, 여행자는 곧잘 자신의 모어 문화를 퇴로로서 끌어옵니다. 지적으로 말하자면 '문화적 차이'이며, 속되게 말한다면 "쟤들은 우리랑 달라"겠죠. 물론 섣불리 파악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될 상대의 문화논리를 존중한다는 태도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간단히 모어 문화를 끌어와 '문화적 차이'라며 낯선 체험을 뭉뚱그린다면 두 가지 우를 범하기 십상입니다. 첫째는 '문화적 차이' 안에서 역설적이게도 상대 문화가 지닌 복잡함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인 채로 알 만해지는 것입니다. 둘째는 모어 문화를 가져와 상대 문화와의 차이를 부각시킬 경우, 모어 문화는 상대 문화와 대비되는 비교 항으로서 쉽게 절대화되고 분석할 수 없는 전제가 되어버립니다.

그리하여 저는 진정 좋은 여행이라면 여행하는 사회만이 아니라 모어 문화를 이해하는 감각도 연마시켜 주리라고 생각합니다. 쑨거의 표현인데 "통상 외국어 능력이 모어 활용 능력에 제약을 받듯" 여행지의 고유한 맥락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모어 문화에 대한 입체적인 이해가 요구됩니다. 여행의 진정한 미덕은 낯선 세계에 다가가는 만큼이나 자기 속으로 들어가도록 이끌어주는 데 있으며, 이 두 가지 일은 언제나 함께 발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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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여름 오키나와를 향했습니다. '아시아·정치·예술'이라는 행사가 오키나와에서 열렸습니다. 장소는 마루키(丸木) 미술관이었습니다. 오키나와를 무대로 활동하는 화가와 다큐멘터리 작가로부터 그들의 작품 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전시실에는 묘하게 금속성 느낌이 강한 추상화가 여러 점 걸려 있었습니다. 흙빛과 핏빛의 강렬한 색채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상영된 다큐멘터리는 오키나와 방언으로 가득해 좀처럼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는 것은 본행사가 끝나고 이어진 오키나와 전통춤 공연이었습니다. 일흔을 넘기신 어느 할머니가 청중을 가르고 무대 한복판으로 느릿느릿 걸어 나오시더니 오키나와 음악의 장단에 맞춰 춤사위를 펼치셨습니다. 한 번은 왼쪽, 한 번은 오른쪽으로 두 손을 모아 꺾어서 터는 동작과 할머니의 익살스러운 표정에 감상하는 동안 몇 번이나 웃었다. 아마도 오키나와의 해학성을 담은 춤이겠거니 짐작했습니다.

공연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할머니가 춤의 유래를 설명해주셨습니다. 말씀에 따르면 태평양 전쟁 당시 학도병으로 끌려간 오라버니가 전장에서 돌아오기를 기리는 춤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났지만 돌아오지 않는 오라버니, 예감 속에서는 이미 같은 세상에 있지 않을 그 오라버니를 기다리며 바닷가로 나가 수년을 수십 년을 춰온 춤.

그 말씀을 듣는 동안 몇 차례나 크게 웃었던 일이 너무나 민망해졌습니다. 제 웃음소리는 왜 그리도 큰지. 하지만 제가 본 할머니의 표정에는 분명히 어떤 해학성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민망함도 민망함이지만 전혀 헛것을 본 것인지가 궁금해서 망설인 끝에 질문을 드렸습니다. 할머니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신산의 세월, 슬픔만을 끌어안고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학생이 내 표정에서 본 것은 아마도 그 여러 감정의 한 가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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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나흘 일정으로 방문했지만, 행사가 끝나고 체류를 열흘로 늘렸습니다. 좀 더 머물러 할머니의 표정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구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오키나와를 여행하는 동안 미군 기지를 곳곳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알고 계시다시피 오키나와 본도의 20퍼센트 이상은 미군 기지로 덮여있습니다. 오키나와는 일본 전체 면적의 0.6퍼센트에 불과한 땅이지만 재일 미군 기지의 75퍼센트가 집중해 있는 기지의 섬입니다.

첫 번째 단서는 할머니의 공연을 접한 전시실에 있었습니다. 전시실 벽의 한 면을 거대한 <오키나와 전쟁의 그림>이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림 속의 죽은 자들, 죽으려는 자들, 죽음을 망설이는 자들 수십 명의 표정들이 전시실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 작품은 집단 자결을 주제로 삼고 있었습니다. 수십 년간 신산을 핥아온 할머니가 소녀였던 때, 태평양 전쟁 말기 오키나와에서는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1945년 3월 26일, 미군은 게라마(慶良間) 제도를 공략하기 시작해 4월 1일 오키나와 본토에 상륙했습니다. 6월 23일 총지휘관이었던 우시지마(牛島滿) 사령관의 자결로 전투가 끝나기까지 18만 미군과 7만 일본 수비대가 각지에서 격전을 벌였습니다. 사망자 수 24만 명. 다수의 오키나와 민간인이 학살당했습니다. 미군이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천황을 위해 옥쇄(玉碎)하라는 일본군의 강압으로 다수 주민이 집단 자결을 해야 했습니다.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오키나와의 일본 기지를 폭격하는 미국 전투기.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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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단서는 오키나와 평화기념관에서 만났습니다. 오키나와 평화기념관은 남부 이토만시(絲滿市)의 마부니(摩文仁)에 위치해 있습니다. 마부니는 수면에서 100미터 정도 솟아있는 절벽인데, 태평양의 푸른 바다와 하얀 파도가 내려다보입니다.

하지만 이곳은 우시지마 사령관이 자결한 장소이며, 또한 집단 자결이 일어난 곳이기도 했습니다. 전쟁에서 죽음이 어떠한 것인지 평화기념관의 한 영상물에서 보고 말았습니다. 그 장면을 대체 어떻게 촬영했을지.

카메라는 건너편 절벽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영상물 안에서 한 여성이 갑자기 절벽 위의 숲에서 뛰쳐나옵니다. 그 여성은 사력으로 달려 그대로 절벽으로 뛰어내렸습니다. 15분 간격으로 반복 상영되는 영상물의 한 장면이었습니다. 몇 번이나 그 장면을 다시 보았을까요. 그 수초의 장면이 안긴 충격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한 시간이 넘도록 같은 자리에 서있었습니다.

다시 그 여성이 숲에서 뛰쳐나오더니 바다로 떨어집니다. 절벽에서 뛰어내린 여성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처참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여성은 일순의 망설임도 없이 숲에서 뛰어나온 걸음 그대로 절벽에서 뛰어내렸습니다. 대체 그녀는 숲속에서 누구에게 쫓기고 있었기에 멈춰 서지도 못한 채 절벽을 뛰어내려야 했을까요.

아마도 미군에게 쫓기고 있었을 것입니다. 미군에게 잡히면 죽을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도망쳐 절벽으로 뛰어내려 죽었습니다. 앞에도 뒤에도 결국 죽음뿐인데 대체 미군이 얼마나 두려운 존재였기에 절벽으로 뛰어내리는 선택이 가능했을까요.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다만 그 장면에서는 미군이 오키나와에서 저질렀을 만행과 함께 일본군의 세뇌가 얼마나 지독한 것이었을지 알 것 같았습니다. 일본군은 정보가 새나갈 것을 두려워해 미군에게 잡히면 죽음보다 끔찍한 고초를 당할 것이라고 오키나와 인들에게 선전했다고 합니다.

오키나와 전투는 애당초 일본군에게 승산이 없었습니다. 일본의 패색이 짙어진 상태에서 오키나와는 시간을 벌기 위한 사석(死石)에 불과했습니다. 그 동안 할머니는 고향땅에서 숱한 이들의 죽음을 목격했고, 그 오라버니는 다른 전장으로 끌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할 넋이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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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 평화기념관과 박물관, 미군 기지처럼 오키나와의 과거와 오늘을 엿보고자 돌아다니기를 수일. 그 무게에 지쳐 한가로이 바다에 몸을 맡기고자 이도(離島)인 자마미(座間味)섬으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거기서도 집단 자결의 흔적과 마주쳤습니다. 마을을 구경하다가 한 초등학교 근처에서 집단 학살의 현장이 있다는 표지판을 발견했습니다. 산길을 따라 이십 분쯤 올라가니 위령탑이 나왔습니다.

내려와 끼니를 때우려고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옆 자리 앉은 할아버지께 들은 이야기인데, 2005년에는 자마미 섬의 '집단 자결'을 파헤친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를 향해 자유주의사관의 우익 단체가 '군명(軍命)'이 있었는지를 두고 소송을 걸었다고 합니다.

오키나와전의 집단 자결 혹은 집단 학살을 둘러싼 '실증성'의 논의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은 가족과 벗들의 죽음을 증언하기 위해 다시 쓰라린 과거를 떠올려야 하는 짐을 지고 있습니다. 오키나와에서 도쿄로 돌아온 지 한 달 뒤. 오키나와에서는 십 수만 명이 모인 항의 행동이 벌어졌습니다. 일본군이 강요하여 집단 자결한 오키나와 인에 관한 교과서 기록이 삭제된 것에 항의해 일어난 집회였습니다. 아울러 미군 기지를 향한 반대의 목소리를 드높인 항의 행동으로 오키나와-일본-미국의 부조리한 삼각관계가 드러났습니다.

<오키나와 전쟁의 그림>에는 숱한 주검들 곁으로 소도(小刀)를 들고 품에 있는 아이를 응시하는 어머니가 그려져 있습니다. 일본군의 협박으로 그림 속의 어머니는 자신이 죽기 전에 갓 태어난 아이의 목숨을 스스로 거둬야 했을 것입니다. 증언에 따르면, 실제로 어머니가 자식을 죽여야 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짧은 칼로는 쉽사리 사람을 죽일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증언에 따르면, 동굴 속에서 꼬챙이 하나 쥐고 자결해야 했던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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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오키나와의 신산을 알릴 목적으로만 오키나와 여행을 꺼낸 것은 아닙니다.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에 가서 조선인 위령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현지 분들이 도와주셔서 해노코와 미군 기지 근처에 가볼 기회를 얻었습니다. 또 한 카메라맨을 만나 미군 남성과 일본인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아멜라지안이라고 부릅니다-을 위한 학교를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혔습니다. 오키나와의 쓰라린 역사와 현실을 접해서 생겼다기보다 개인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비뚤어진 감정이었습니다. 아픈 역사와 현실을 마주하고도, 보고 있는 저 자신을 어디에 위치시켜야 할지 몰랐습니다. 오키나와의 무언가를 해석할 때 자꾸 한국의 상황에 이끌렸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그 이끌림에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특히 자마미지마에 갔을 때가 그랬습니다. 사전지식 없이 그저 오키나와의 이도를 여행하고픈 마음에 자마미지마로 향하는 배를 탔습니다. 돌아다니다가 한 초등학교 근처에서 집단 학살의 현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하루 일정으로 배를 타고 돌아와야 했기에 그 현장에 다녀오려면 다른 곳을 들러보는 일은 포기해야 했습니다. 망설이다가 결국 그 현장을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찾아가면서 생전 처음 가본 낯선, 그리고 아름다운 섬에서 쓰라린 상흔이 남아 있는 곳만을 찾아다니며 보고 돌아온다는 게 어떤 감각인지 곱씹었습니다. 쉽사리 정리할 수 없지만, 만약 그 장소에서 돌아와 누군가에게 그 이야기를 꺼내리라는 예감이 없다면, 무엇을 보고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섬의 아름다움에 빠지는 일이라면 그런 예감은 필요 없겠죠.

저는 상흔의 흔적들을 찾아다니며 그 예감의 목록을 작성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서툴고 고약한 문제 제기입니다만, 혹여나 저의 여정 속에는 은연중에 예상했던 충격을 가서 확인하고 확인된 내용을 한 가지 정보로 간직해두는 그런 패턴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습니다.

편지가 너무 길어졌습니다. 그 의미를 정돈할 생각은 아직 없습니다. 물음인 채로 남겨놓고자 합니다. 다만 그 물음이 지금도 저의 동아시아 실감이 응고되지 않도록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덧붙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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