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어두운 지하 실내에는 테이블 몇 개와 그보다 많은 수의 의자, 그리고 단골로 보이는 손님 몇 명이 있었다. 헌책방답게 낡은 책들이 특유의 종이 냄새를 풍기고 있었지만 통로마저 종이로 가득한 일반 헌책방과는 달리 탁 트인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어디서나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독서 논술 수업 중으로 보이는 어린 학생과 선생님의 진지한 토론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걸 읽을까. 가방 속엔 반쯤 읽은 <심야 책방>이 있었지만 책방에서 그 표지를 보이긴 민망했다. 평소 같으면 책을 들고 저자에게 친근히 다가갈 수도 있었겠지만, 그날은 어쩐지 그럴 수 없었다. 우연 한 번 요란스럽게도 신임 서울 시장 박원순이 자신의 집무실을 헌책방처럼 꾸미고 싶다며 이 책방 얘기를 공표한 바람에 아침부터 포털 사이트에 대문짝만하게 이곳이 실린 날이었기 때문이다. 취재 목적이 아니었기에 그 냄새를 맡고 온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기자란 직업이 들켜선 안 될 표식처럼 느껴졌다.
그날 사람들이 몰려들진 않았지만, 조용한 가운데서도 아침 기사로 인한 여파가 흐르고 있었다. 단골 지인들은 기사에 대한 이야기로 첫인사를 시작했고, 기자로부터 이런저런 전화가 쏟아지는 듯 했다. 심지어는 서울시 청사에 가구를 납품하던 업체로부터 어떻게 된 거냐며 전화가 온 모양이었다.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귀로 흘러드는 정보까지 막아낼 재간은 없었다. 그러고 나니 더더욱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기는 어려웠다. 네 권의 책값을 치르고 책방 문을 나설 땐 다른 신문의 기자가 인터뷰로 찾아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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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야 책방>(윤성근 지음, 이매진 펴냄). ⓒ이매진 |
하일지의 <새>와 마당문고 판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아버지와 아들>, 해문출판사 판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스즈키 쓰네카쓰의 <상해의 조선인 영화 황제>. 이 날 싼 가격에 구입한 책들이다. 어디선가 이 책 중 하나를 이야기하게 된다면 약간은 싱겁고도 비밀스런 이 일화를 떠올릴 것 같다. 특히 <새>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경우 <심야 책방>에서 꽤 자세히 소개된 영향으로 구입한 것이기도 하다. 윤성근은 값을 치르는 내게 "<새>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소설이예요"라고 말해주기도 했다.
별 것 아닌 일화지만 책을 만나는 순간이라곤 매주 신간이 '알아서 찾아오는' 경우나 필요할 경우 인터넷 서점에서 버튼을 누르는 것뿐이니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매주 서평이나 북 칼럼을 잔뜩 읽는 운명인데다가 장정일부터 요네하라 마리까지 '책에 관한 책'을 좋아하지만 실린 글에서 해당 도서를 만나게 된 경위까지 자세히 만나는 경우는 드물다. 사적인 이야기인데다 자칫하면 지적 허세로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재미있을 확률이 높지 않다. 사람의 첫 만남이 대개 예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책과 사람과의 만남 역시 그렇다. 인터넷 리뷰와 검색 기능이 큰 역할을 하면서 그런 경향은 가속화된다.
<심야 책방>이 다른 '책을 다룬 책'들과 달라지는 지점은 여기다. 2009년에 나온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이매진 펴냄)에 이은 '어느 지하 생활자의 행복한 책 일기' 시리즈 두 번째인 이 책은 모든 꼭지에서, 그 책과 마주하게 된 경위를 충실히 들려준다. 여간해서 재미있기 어려운 이 이야기가 본격적인 책 내용보다 기억에 남을 정도로 재미있고, 사람과의 만남을 꿈꾸듯 책과의 만남을 기대하며 헌책방을 찾게 만든다. 저자는 책방에 쌓여 있는 책을 우연히 집어 드는 순간에 대해 "그 순간 우주의 시작을 알리는 빅뱅에 버금갈 만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라며 "세상에는 책 한 권, 시 한 편을 통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고 말한다.
다소 과장된 표현 같지만, 실제로 책은 사람을 만나는 것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그리고 정해진 경로를 따르지 않는 헌책방은 이 우연한 만남을 배양하기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그곳엔 들어가자마자 눈을 사로잡아 구매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대형 배너나 같은 책이 잔뜩 쌓인 매대가 없다. 읽고 싶었던 책이 없을 경우 빈손으로 돌아가기 싫어서라도 한 권쯤 찾아보기 마련이고, 다양한 역자와 판본 사이에서 세심하게 갈등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어릴 때부터 지금은 사라진 동네 헌책방들을 구석구석 드나들고, 잘 나가던 회사를 그만둔 뒤로 헌책방 일을 시작해 급기야 직접 운영에까지 나선 저자이기에 읽을 책만큼 소개할 사연이 많을 수밖에 없다. 한자를 몰라 제목조차 제대로 읽지 못했던 1953년 판 <地球 幼年期(지구 유년기) 끝날 때>(아서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를 부끄러워 도망치듯 구입하고 나왔던 열세 살의 추억부터 추적이 불가능한 1950~60년대 책들을 내용까지 또렷이 기억하며 찾아 달라 메모를 쥐어주는 노신사까지, '그 책'을 꼭 만나려는 사연들이 책을 테마로 한 연작 소설처럼 자잘하게 펼쳐진다.
아니, 책에 실린 사연이 애틋한 것은 단지 저자의 독특한 이력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각각의 책 자체가 공산품으로서 갖는 생명이 생각보다 길지 않고, 그래서 그 짧은 만남에 대한 사랑 얘기가 많을 수밖에 없는 게다. 지금 시중에 몇 만 권씩이나 깔린 이 흔한 공산품들이 언젠가 소리 없이 사라질 수 있다니 믿어지지 않지만, 나 역시 편집국에서 지금은 절판된 '프레시안북' 책을 찾으려는 간절한 전화를 받은 적이 많다. (이 책들은 겨우 2007~2008년에 나온 것으로, 지금은 '프레시안북'이 없고 책의 판권은 다른 대형 출판사에 있다.) <심야 책방> 마지막에 실린, '책을 찾는 일, 사람을 찾는 일'이란 글을 읽다 보면 풋사랑처럼 책과의 그것 역시 이뤄지기 쉽지 않은 운명이란 생각이 강하게 든다.
어느 날 한 건장한 노인이 1962년에 나온 소설 <원형의 전설>(장용학 지음, 사상계사 펴냄)을 반드시 찾아달라며 거금의 돈을 주고 간다. 어르신이 청년 시절 활동했던 단체의 친구에게 빌려준 책이었는데, 갑자기 그가 행방불명된다. 그 책이라도 찾을 수 있으면 경찰에 붙잡혀 갔을지 모르는 친구를 향한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거라는 사연이다. 저자는 인터넷과 도서관, 주변 헌책방을 샅샅이 뒤져봤지만 결국 찾지 못해 반년 뒤 마음을 접는데, 그때 뜻밖에 책이 나타난다. 재개발 때문에 이사를 해야 한다며 1960년대 책들을 잔뜩 넘기고 간 옆 동네의 또 다른 어르신이 그 귀인이었다.
한쪽 다리를 저는, "나는 이름이 없는 사람"이라며 이름을 밝히길 꺼린 그 노인이 혹시 자신에게 책 탐정을 맡긴 건장한 노인의 청년 시절 친구는 아니었을까? 저자의 머리를 스치고 간 억측이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출간된 후 판매량이 신통치 않아 더는 찍지 않게 된 책들과 야속하게도 거기에 마음을 뺏겨버린 사람 간의 긴 애정과 집착, 그리움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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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데 누구나 하나쯤 이런 일들을 간직할 수 있겠지만, 이걸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만드는 역할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이 '메신저' 윤성근은 대단히 독특한 사람이다.
사실 <심야 책방>을 읽으면서 "책을 좋아한다"는 스스로의 판단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분명 책을 좋아한다. 싫어하면 이 일을 하고 있을 리가 없고, 어깨나 안구에 통증을 느끼면서까지 책을 사거나 읽는 뿌듯함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헌데 그렇게 따지면 책 안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사람을 한 명이라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드물듯 대개가 어찌되었건 한 권의 책이라도 좋아하게 되어있다.
나는 그 '대개'에 포함되는 꽤 평범한 사람이다. 그리고 저자에게는 '책을 좋아한다'가 아니라 좀 더 다른 층위의 설명이 필요하다. 활자를 사랑한다? (어린 시절부터 "오로지 그냥 글자만" 좋아해서 과거엔 글자보단 그림이 많이 실린 만화책조차 싫어했다고 한다.) 희귀 장서 소유에 애착이 있다? (같은 책도 초판을 모으려고 하며 루이스 캐럴의 희귀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책에 집착한다?
아니, <화성인 바이러스>에 나올 법한 괴짜로 만들어버려서는 곤란하다. 그를 포함한 책에 독특한 애정을 갖고 있는 이들은 장서 문화를 옮기는 유전자가 발달한 아주 소중한 인체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적합한 표현일지 모르겠지만,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는 긴 역사를 자신의 테두리 안에 머무르게 하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내용이 거의 같고 오히려 인쇄 상태가 훨씬 좋은 새 책도 있지만 그 책이 세상에 처음 나온 순간을 간직하기 위해 웃돈을 주고 초판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 "책에 관해서라면 평범한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일도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언제 흩어질지 모르는 책 고유의 역사와 거기 얽힌 이야기들이, 알알이 다음 순간으로 전달되는 게 아닐까.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은 "책방은 책을 가득 쌓아놓고 팔아서 돈을 버는 곳이 아니라 책 속에 담긴 가치를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곳"이란 저자의 철학이 지켜지는 곳이다. 그래서 이곳은 참고서부터 잡지까지 모든 종류의 중고 서적을 취급하는 일반 헌책방과는 좀 다르다. 전체 공간에 비해 책 두는 공간이 적고, 차와 담소를 즐길 수 있는 카페 형 공간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다. 거기에 루이스 캐럴 관련 용품과 비매용 책들도 전시되어 있으니 헌책방과 북 카페, 작은 박물관을 혼합해 놓은 공간이라고나 할까?
한쪽에 무대를 만들어놓고 노래 공연을 하거나 벽에 스크린을 만들어 영화를 보기도 한다니, 더 넓은 의미의 문화 공간이라고 봐도 좋겠다. 무엇보다 이 책방의 가장 큰 매력은 책 제목과 같은 '심야 책방'이 아닐까 싶다. 한 달에 두 번, 다음날 아침 6시까지 책방 문을 밤새도록 열어두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곳에 오는 손님들 중엔 그런 노력과 상관없이 "중고 책은 당연히 값이 싸야 한다"며 심지어는 폐지 정도 가격에 사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정가가 1000원이면 무조건 1000원보다 싸게 팔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손님에게 야단을 맞기도 하며, 레닌이나 마르크스의 책을 파는 걸 보고 '빨갱이 책'이라 지적하는 분들도 있다. 헌책방은 흔히 이야기되는 것처럼 그리 낭만적인 공간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마냥 낭만적이진 않은 공간, 사라지기만 할 뿐 새로 문을 여는 곳은 찾기 쉽지 않은 공간, "매일 아침 광약을 칠해 반질반질 윤이 나는" 요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공간. 모든 행위가 돈으로 환산되는 세상에서, 헌책방은 위태롭게 서 있는 존재일지 모른다. 헌책방을 이어가는 그들의 웅숭깊은 뜻을 알아 달라, 혹은 헌책방을 자주 찾아달라는 상투적 부탁을 건네기보다, 역설적으로 최신간인 이 <심야 책방>을 권하고 싶다. 이 책을 보면 실린 책 한두 권에 반드시 구미가 당길 터이고, 그러면 지금은 절판된 책들을 사냥하러 자연히 헌책방으로 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조금 어려울지 몰라도 꼭 중·고등학생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어느 한 가지에 빠진 사람들의 수집가적 기질이 엿보이는 글을 읽을 때마다 남몰래 질투해 왔고, 이 책은 그 주제가 책이기에 더했다.
나는 왜 어릴 때 '오타쿠'가 되지 못했을까? 그건 꽤나 큰 콤플렉스다. 무언가를 깊이, 오래 사랑한 흔적이 지금 내딛는 한발에 대단히 중요한 나침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추리 소설들을 섭렵하고 헌책을 찾아 서울 곳곳을 뒤졌다는 저자의 유년 시절이 부러웠다. 스무 살이 지나고 나서, 무언가를 '새롭게' 진심으로 좋아하기는 정말로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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