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 앞서 가며 뿌린 씨, 그리고 거기에서 피어난 꽃은 가장 마지막에 걸어가는 철학자에 의해 이름이 붙여진다. 철학자는 이렇게 시 앞에 몸을 낮추어 사랑을 고백했다. 2010년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동녘 펴냄)에 이어, 더욱 절실해진 제목의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동녘 펴냄)으로 시를 들려주는 철학자 강신주의 말이다.
지난 25일,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카페 커먼(Cafe Common)에서 네 번째 '어쿠스틱 인문학'이 열렸다. 소설가 김언수, 교육방송(EBS) PD 김진혁, 소설가 김연수에 이은 이번 주인공은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과 철학자 강신주다. 어쿠스틱 인문학은 KT&G 상상마당 아카데미와 <프레시안>이 함께 만드는 저자와의 대화 행사로, 도서평론가 이권우의 사회로 진행된다.
▲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강신주 지음, 동녘 펴냄). ⓒ동녘 |
장자와 노자에서 철학적 여로를 시작한 강신주는 <철학이 필요한 시간>(사계절 펴냄), <철학 VS 철학>(그린비 펴냄) 등에서 서양 철학으로 그 사유의 지평을 넓혔고, '철학적 시 읽기' 시리즈를 통해 시에 대한 내밀한 사랑을 읊어왔다. 올해 말엔 그가 시를 좋아하게 된 계기인 시인 김수영에 대한 책도 낼 계획이다.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에는 열네 명 시인과 열네 명 철학자가 등장한다. 가족을 "정든 유곽"이라 이르며 그 질서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던 이성복을 통해 라캉이 말한 신경증을 극복할 단서를 얻고, 다양한 감각을 동원해 몸으로 시를 썼던 백석에서 나카무라 유지로의 '공통감각론'을 발견한다. 철학자들의 사유를 통해 시 읽기는 한층 더 깊어진다.
강신주가 연애를 찬양하는 이유?
자본주의와 가족주의, 미디어와 대중문화 등 철학자 강신주의 사유가 머무르는 문제는 다양하지만. 책 전체를 관통하는 열쇳말은 단 하나, '사랑'이다. 이권우가 이 책에 유독 사랑 이야기가 많은 이유를 묻자 강신주는 "모든 사람은 연애할 때처럼만 살면 된다"고 답한다. 그는 연애 시기만이 남녀가 대등한 관계로 존재할 수 있으며 상대방에 대해 민감한 감수성을 유지할 수 있는 때라고 믿는다.
"저는 우리가 말하는 소위 대안이 연애와 사랑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를 존중할 수 있는 실마리라는 거죠. 그 관계는 '당신은 언제나 나를 떠날 수 있다는 걸 감당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강신주는 연애 중인 사람에게는 결혼을 하지 말라고, 결혼한 사람에게는 아이를 낳지 말라고, 아이 셋을 낳은 사람에겐 아이 넷은 낳지 말라고 말한단다. 그가 이런 조언을 통해 강조하는 건 연애로 가능해지는 수평적인 관계가 다시 가족이란 수직적 구조로 편입되는 상황에 대한 경계다.
"가족이 아버지를 정점으로 하는 수직적인 억압 구조로 기능한다면, 사랑의 관계는 주체와 타자 사이의 수평적인 긴장 구조로 작동합니다. 수평적인 구조에 한 발을 내딛지 않으면, 우리는 수직적 구조를 성찰할 수 있는 거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29쪽)
강신주가 사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촉각'이다.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속에서도 "사랑은 외모나 분위기에 끌리는 것으로 시작되지만, 최종적으로는 서로의 몸을 탐닉하는 촉각의 세계에 이르게 된다"며 촉각의 심층성을 강조했다. 그는 "사랑은 '보고 싶다'가 아니라 '만지고 싶다'는 감정"이라고 말한다.
▲ 철학자 강신주. ⓒ프레시안(최형락) |
강신주가 책에서 백석을 불러낸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시인 이성복이 "백석은 우리와 다른 아가미로 호흡했다"고 말했을 정도로 그의 시는 컬러텔레비전 세대인, 즉 "육감 중 오감이 살해되는"(함민복의 '우울氏의 一日 10') 세계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에게 풍성한 감각의 세계를 전해준다. 철학자는 이 옛 시인에게서 현대인이 잃어버린 감각을 복원할 방법을 발견한 것이다.
강신주는 진정한 사랑에 가까이 가기 위해선 라캉이 말한 '강박증'과 '히스테리'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 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라캉에 따르면 대부분의 남성은 '상대방에게서 금지된 욕망의 대상만을 찾는' 강박증에, 대부분의 여성은 '타자가 욕망하는 대상이 되고자 하는 욕망'인 히스테리에 지배된다.
강신주는 "남자는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억눌러야 하고, 여자는 자신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며 이러한 노력이 견고한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적극적 거부 행위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타자의 욕망에 자신을 완전히 맞추려 하지 말고, 동시에 자신의 욕망에만 매몰되지도 않아야 합니다. (…) 오직 그럴 때에만 사랑이란 위태로운 감정에 잠시라도 머물 수 있는 법입니다."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42쪽)
벽에 부딪치지 않은 자, 자유를 얘기하지 말라.
그렇게 균형을 맞춰 가다 보면 강박증도 히스테리도 극복할 수 있겠지만, 강신주는 "우리가 사는 동안엔 겨우 5퍼센트 정도만 치유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를 신경증에 머무르게 하는 사회 구조가 단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 테마는 그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짓, '자유'다.
이권우가 "어느 정도 '구조'를 고민하게 된 사람이 거기서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란 질문을 던지자 다음과 같은 대답이 이어졌다.
"허용된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는 자각에 이르러야 합니다. 우리가 자유롭나요? '자유롭다'란 착각을 할 뿐이죠. 우리는 이 공간 안을 돌아다닐 수 있고 저 문을 통해 바깥으로 나갈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 문이 아닌 곳으로는 나갈 수 없어요.
모든 체제는 원래 '정해진' 출구를 만들어 놓는 법입니다. 하지만 그 출구가 아닌 곳, 가령 벽을 뚫고 나가려고 하는 사람들은 욕을 먹어요. 왜 거기로 가냐고. 하지만 정해진 문을 통해 나가는 건 똑같은 구멍으로 뽑아져 나오는 가래떡과 다를 바 없어요. 길들여지는 거예요."
강신주는 "허용된 자유가 허구적인 이유는, 끝까지 가다 보면 허용이란 경계선에 도달하기 때문"이라며 거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고민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제 몸으로 벽을 확인해 본 사람만이 자유를 이야기할 수 있기에, 부딪치지 않은 사람들에겐 자유라는 말보다 먼저 '갇혀 있다'는 자각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는 또 "시인들은 그 벽 앞에서, 굴복할 것인가 뚫을 것인가의 경계선에서 시를 쓰고 있다"며 "그래서 제대로 된 시는 구조적 한계와 뚫고 나가려는 순간의 좌절을 동시에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책에서 다룬 시인들은 모두 그 벽에 부딪친 사람들이고, 부딪쳤을 때 꽥 소리를 지른 것이 바로 시"라고 덧붙였다.
ⓒ프레시안(최형락) |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건…
하지만 견고한 벽, 즉 구조와 체계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는 생각은 결국 혼자서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체념과 좌절로 이어지기 쉽다.
이권우는 "(개별 인간의 주체적 존재성을 강조하는) 실존주의 철학 하에서는 혁명이란 게 적어도 '가능'할 것 같았는데, (개인의 행위를 규정하는 총체적 구조에 대한 탐구를 지향하는) 구조주의가 득세한 뒤로 그런 생각 자체가 어려워지고 있다"고 물으며 이 문제를 지적했다. 또 "(구조주의를 비판하며 등장한)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도 자유에 대한 열망까지 심어주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싸워야 할 적에 대해 아는 건 정말 중요한데 구조에 대한 냉정한 진단이 우리를 질리게 하죠. 앎이 강하면 감당이 안 되는 것, 이게 바로 구조주의가 갖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문제의 초점을 나의 실존 조건이 아니라 구조의 폭력에 맞춰 보고, 그 경험을 '함께' 이야기하다보면 의외로 실마리가 나옵니다.
언젠가 삼사십 대 남성들이 모인 자리에서 '왜 우리는 모두 아버지한테 구타당했나'란 주제로 이야기를 했어요. 모두 같은 경험이 있더라고요.
그때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단결해서 도왔을 텐데, 우리는 옆집 애들은 모두 행복한 줄 알았거든요. 한 명도 저항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게 '나'의 유년기의 고유한 상처, 고유한 폭력이라고 정당화 할 게 아니란 겁니다. 같은 구조 속에서 고통 받았던 사람이 정말로 많았던, 구조적인 문제였단 거예요. 어려운 시절 태어나 독재 시대에 교육을 받고, 가부장적 가치관에 대해 전혀 의심할 기회가 없었던 아버지 세대의 문제라는 거죠.
물론 어린 나이에 혼자, 전체 구조를 다 봐 버리면 좌절하겠죠. 그러니까 우리에게 필요한건 친구고 이야기할 사람입니다. 한 줌 밖에 안 된다고요? 모든 혁명적 사유의 출발은 '한 줌 밖에 안 되는 것들이…'였습니다. '이 문제로 인해 나만 상처 받았다'가 아니라 '이 사람도 상처 받았다', '이 사람의 상처는 나의 상처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 게 아닐까요. 그래서 전 (모든 것이 구조의 문제라 바꿔볼 여지가 없다는 입장이) 너무 시니컬해진 지식인 몇 명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난 아무것도 망치지 않아'
미래 세계, 독재 정권 하의 혁명을 다룬 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주인공 브이가 예언했던 날 국회의사당이 폭파되고 모든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정권을 무너뜨리는 장면에서 끝이 난다. 일견 통쾌하지만 현실적 눈을 가진 관객들에겐 불완전한 판타지로 읽힌다. 혁명에 성공했지만, 그 다음은?
혁명의 현실성을 거론할 때마다 나오는 질문이다. 역사 속에서 구조에서 해방된다는 것은 또 다른 체제와 구조로의 편입을 의미했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들은 궁극적으로 체제 자체를 없애야 하며, 그래도 인간이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이권우의 마지막 질문은 바로 이 상황을 묻고 있었다. "구조에서 벗어난 이후 새로운 체제가 필요한가, 체제 자체를 거부해야 하는가가?"
"민감한 질문인데요.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제가 정치적으로 아나키스트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하고 싶은 걸 했을 때 가장 자유로운 공존의 구조가 있다는 걸 생활에서 많이 경험해 봤거든요. 자유로운 공동체가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사실 그게 목적이 아니라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죠.
모세 같은 대장은 필요 없다고 봅니다. 누군가에게 정치적으로 기대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대신 한 사람 한 사람이 고유한 메시아가 되면 사회는 구원받을 수 있어요. 제가 시인들을 사랑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시인은 결코 앞선 사람들과 같은 길을 가지 않잖아요.
모두가 자유로워지면 방종이 될 거라고, 남을 해칠 거라고 생각하는데 전혀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패닉의 '왼손잡이'라는 노래 아시나요? 거기에 '난 아무 것도 망치지 않아'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자유를 노래했던 김수영이 박정희를 정면 공격했다는 얘기는 들어봤어도, 옆집 아저씨를 들이받았단 얘기는 못 들어봤습니다. '방종'으로 흘러갈까 걱정하는 것은 권위자들이예요. 학교에서 어떤 아이는 시를 읽고 어떤 아이는 줄넘기를 하면 선생님에겐 권위가 없어지잖아요."
ⓒ프레시안(최형락) |
끝으로 강신주는 "자유에 사랑이 있다면 여하한 행동도 방종이 될 수 없다"는 김수영의 말을 인용하며, 그 '사랑'은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모든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가 될 필요가 없고, 모든 꽃이 향기로운 장미가 될 필요가 없다"며 "지금 여기 계신 한 분 한 분은 1000년 전에도 없었고 1000년 뒤에도 없을 고유한 개체"라고 말했다.
그의 마지막 조언은 바로 그 자신이 진정으로 고유하게 될 수 있도록,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라'는 것이었다.
"인간의 가장 큰 단점이 '신 포도'예요. 여우가 자기 손이 안 닿는 포도에 대해 '분명 실 거야'라고 믿듯 자신이 갖지 못한 것,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합리화하는 태도 말이죠.
하지만 무엇이 시고,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허용된 범위 바깥에서 하지 말라는 것도 다 해보세요. 내가 하고 싶은 걸 감히 누가 금지하나요. 노발리스는 '너를 주인공으로 만든 소설을 지어나갈 거냐, 조연으로 만든 소설을 지어나갈 거냐'고 말했습니다. 죽을 때 우리 삶이 내가 주인공인 드라마여야 합니다."
책을 둘러싼 강신주-이권우의 대담이 끝나고 상상마당에서 미리 받은 질문과 현장에서의 즉흥 질문이 뒤섞인 '강신주의 어쿠스틱 상담소' 시간이 마련됐다. <철학이 필요한 시간>, <상처받지 않을 권리>(프로네시스 펴냄) 등을 통해 '인문학 카운슬러'로 자리매김한 그이니만큼, 객석에선 솔직한 고민들이 터져 나왔다. 다음은 강신주만의 까칠함과 따스함이 돋보였던 질문과 답변의 순간을 번호로 정리한 것이다. 1. 자존감이 약하고 자주 열등감에 시달리는데 이 성격을 고치고 싶습니다. 선생님은 열등감에 시달린 적이 있나요? 철학을 공부하면 이겨낼 수 있을까요? 강신주 : 저도 열등감 많습니다. 집이 가난했어요. 서울에 처음 올라왔을 때 4~5일간 역에서 잤습니다. 주인집 딸이 날 때려도 어머니는 항의 한 번 못했고요. 사람보다 돈이 좋다는 걸 어머니가 가르쳐주셨어요. (웃음) 저는 그걸 극복하고 싶었고, 그래서 나보다 친구들을 먼저 챙기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어렵더라고요. 요즘에 와서야 드디어 조금씩 되어 가고 있어요. '인간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다짐하는 거죠. 더 사랑하는 것들을 찾아가면 돼요. 그런데 열등감이 어떤 열등감일까요. 열등감이 '제스처'일 뿐인 건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해요. '사람한텐 누구에게나 열등감이 있지', '나한테도 좋은 면이 조금은 있어' 이런 정도라면 '어정쩡한 기분'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갈 거예요. 열등감에 시달리는 상태로 사는 게 너무 추하다는 걸 자각할 정도로 바닥까지 응시해 봐야 알아요. 자신이 허접하다는 걸 직시하는 것보다 무서운 건 없거든요. '지금 여기'가 진짜 싫으면, 바깥에 폭풍우가 휘몰아치거나 수중에 돈 한 푼 없어도 다 버리고 떠나게 되어 있어요. 세상 어딜 가도 여기보단 낫다는 생각이 있어야 떠날 수 있는 것처럼, 바닥까지 내려가 봐야 그 열등감을 버릴 수 있는 겁니다. 2. 스물한 살입니다. 제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은데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기 힘들어요. 강신주 : 지금은 부모님이 생명줄이기 때문이겠죠. 매달 100만 원씩 꼬박꼬박 입금할 때가 되면 기대를 저버릴 수 있겠죠. (웃음) 경제적으로 독립하면 일단 집에서 나올 수 있잖아요. 하지만 마지막에 이런 생각이 여러분의 발목을 잡을 것입니다. '내가 이걸 하면 다른 사람이 상처 받을 거야, 누군가의 기대에 어긋나는 걸 거야'. 그런데 그게 세상에서 제일 비겁한 생각이란 걸 아셔야 합니다. 3. 인문학 공부를 하다보면 자연스레 사회의 부조리 같은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그 전엔 자본주의 사회니 가부장제 사회니 이런 것들에 대해 생각을 안 했는데요. 생각을 하며 살다 보니까 사는 게 너무 불편해졌습니다. 어느 정도 타협도 해야 하고 깨트려야 하는 부분도 있는데…. 강신주 : 타협이라고요? 타협은 불가능합니다. 타협하려면 저항하려는 대상이 가진 것에 맞먹는 힘이 필요하거든요. 그냥 아는 데 모르는 척 버티고 있는 게 타협으로 보이는 거겠지요. 우리가 싸울 수 있는 방법은 게릴라전 밖에 없습니다. 자본이니 거대 권력 앞에서 정규전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게릴라전으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뭐죠? 적의 무기를 충실히 이용하는 것, 그리고 푹 자지 않는 것입니다. 4. 가부장제 사회에 문제가 많다고는 생각하지만, 어쨌든 사람은 이성과 함께 살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강신주 : 전혀 그럴 필요 없어요. 혼자 살아도 되요. 성적인 부분이 문제라면 계속 연애를 하면 됩니다. 가부장제는 결혼할 때 관철되지, 연애할 땐 관철되지 않아요. 저는 미혼인 분들에겐 연애만 하라고 하고, 결혼을 했다고 하면 아이는 낳지 말라고 하고, 아이를 셋 낳았다면 넷은 낳지 말라고 얘기해요. (앞에 있는 연인에게) 이 분이 여자(남자)로 보이세요? 그렇다면 헤어져야죠. 사랑한다면 '여자' 혹은 '남자'가 아니라 'OOO'으로 보여야 하는 거죠. 이 분이 여자(남자)라는 사실이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많은 것들 가운데 차지하는 부분이 줄어들 때, 그 연애는 건강한 겁니다.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성적인 관계는 두 사람 사이의 아주 일부분이어야 하고, 나머지 부분의 교감이 더 중요하단 얘기예요. 한 사람 한 사람이 고유명사, 인문학적 주어로 있는 상태를 꿈꾸셔야 해요. 5. 뭔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은 많은데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을 때가 많아요. 강신주 : 왼발이 앎이고 오른발이 실천이라고 쳐봅시다. 제대로 '알면' 이쪽 발(실천)도 뒤따라가요. 반대로 그 행동을 이미 하고 있으면 앎도 자연히 따라오게 되어 있죠. 배를 타시는 분들이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쉽게 읽는 것처럼. 그런데 배우기만 하면? 두 발이 땅에 붙은 채 왼쪽 다리만 나가니까 다리가 찢어져요. 이게 사실 대부분의 한국 대학 교수들의 병폐입니다. 저도 실천 먼저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미 나아간 왼발만큼 오른발이 따라와, 다음 걸음을 걸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아는 것만큼 살게 될 것이고, 삶만큼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앎과 삶이 일치되는 순간, 즉 지행합일의 순간은 안 옵니다. 그렇다면 마치 '강시'처럼 두 발이 붙은 채로 나아가겠죠. (웃음) 사회과학 서적을 읽다가 등록금 투쟁에 나간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고, 반대로 애인을 사귀다가 사회과학 서적을 읽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걸어가는 가장 건강한 방법이 이겁니다. 책 읽고 고민하다 걸으시고, 걸으면서 여행하다 다시 책을 읽으세요. 그럼 길이 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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