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포퓰리즘"은 1890년대 미국 중서부 농민들을 중심으로 한 인민 주권 운동이었다. 당시 농민 운동은 노동 운동과 결합하면서 기세를 올렸다. 19세기 미국의 정치가 철도와 금융 자본을 중심으로 펼쳐지자 이에 대한 저항이 일어난 결과였다. 정치가 보통 사람들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외침이 이 "포퓰리즘"이라는 단어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런 미국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정치적 권리 주장에 놀란 미국의 지배 계급은 이 "포퓰리즘"이라는 말을 서서히 오염시켜나가기 시작했다. 포퓰리즘은 원칙 없이 대중들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선동과 무책임으로 일관하는 정치라는 식으로 몰아세워 간 것이다. 이 전략은 결국 먹혀들었고, 오늘날 "포퓰리즘"은 진보 진영에서조차 폄하되고 있는 정치 단어가 되고 말았다.
"정치적 상식"이라는 말도 같은 운명에 처했다. 본래 이 상식이라는 말은 영어로 "common sense", 그러니까 보통 사람이면 누구나 다 감으로도 이미 알고 있는 바라는 뜻을 가진다. 보통 사람(common people, commoners)이 가지고 있는 정치에 대한 감이 귀족들이 내세우는 정치적 지식보다 낫다는 의미를 담아낸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상식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사실은 보통 사람들의 정치적 지혜 쪽에 가깝다.
"상식"이라는 말은 그런 각도로 보자면, 특권 또는 귀족 정치와 날카롭게 대립한다. 이 말은 미국에 널리 퍼뜨려 미국 역사의 진보에 기여한 토머스 페인은 영국의 명예혁명 이후 보통 사람들의 정치적 지위의 변화로 생긴 정치철학적 용어를 미국 혁명과 결합시켰던 것이다. 이 당시 "상식"이라는 말은 그래서 "인민 주권적 혁명"과 동일어가 된다.
그러나 이 역시도 지배 계급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 선전 도구와 장치를 통해 그 사회의 정치적 견해를 획일화시켜나가는 가운데 이걸 상식이라고 부르면서 상황은 역전되어 갔다. 정치적 상식은 지배 계급이 일반화해나가는 개념이 되어갔고,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쪽은 상식이 없는 자가 되고 만 것이다.
소피아 로젠펠드의 책 <상식의 역사>(정명진 옮김, 부글북스 펴냄)는 애초에 혁명적 담론이었던 상식이 어떻게 포퓰리즘과 결합해서 그 본질이 훼손되었는지를 밝혀나간다.
아쉬운 것은 그녀도 포퓰리즘에 대한 지배 계급의 상식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점이기는 하나, 그래도 이러한 탐구는 혁명의 열매가 어떻게 지배 계급에 의해 장악되고 거꾸로 민중을 겨누는 무기가 될 수 있는지 생각해보도록 만든다. 그렇지 않아도 2011년 서울 시장 선거에서 우리는 특권을 누려온 인물이 "사회적 약자를 위해서"라는 단어를 수없이 쓰고 있는 것을 본다. "복지"라는 말도 아주 손쉽게 사용하고 있다.
상식의 공화국, 혁명의 상식
▲ <상식의 역사>(소피아 로젠펠드 지음, 정명진 옮김, 부글북스 펴냄). ⓒ부글북스 |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상식은 엄연히 인민의 편이기 때문에 왕의 통치에 반대한다고 주장한, 18세기 토머스 페인의 목소리를 떠올려 보자. (…) 세계 곳곳의 민주주의 옹호자들이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이고 집단적이며 직관적인 판단의 가치를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전문가나 귀족 또는 지배 계급의 논리가 이로써 깨져나가는 혁명의 시대와 인민 주권의 역사가 열리게 된 것이었다. 이런 논리의 결과로 우리는 한나 아렌트가 공화주의와 상식이 하나가 된다고 하는 주장을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영국을 비롯한 유럽 대륙의 공화정 체제를 향한 역사적 열정이 "상식의 공화국"을 일정하게 성취하는데 성공했지만, 이것은 "계몽된 소수의 공적 정치철학"이라는 식으로 통용되는 흐름을 만들기도 했다. 상식의 생산자와 상식의 소비자가 나뉜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상식의 기만이 발생하는 위험성을 보게 된다. 상식의 생산자가 지배 체제를 위한 논리를 상식화시키는 경우, 사태는 애초에 상식이 가진 혁명과는 반대로 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상식이 보통 사람들의 정치적 사상적 문화적 창조력을 자극하는데 기여했다고 강조한 저자는 미국의 경우, 레이건 시대에 이 상식이 우파 이데올로기가 되었다는 점을 주목한다. 상식은 우파 포퓰리즘과 결합한 채 재앙적 현실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이 상식을 깨는 상식의 종언이 또한 필요하다는 주장을 한다. 이러한 논의의 중요한 경계선을 소피아 로젠펠드는 칸트로 꼽는다.
"경험에 근거한 판단을 즉각 내려야 할 때는 상식도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상식이 형이상학에서 할 수 있는 긍정적인 역할은 하나도 없다."
칸트는 인간의 오성으로 불리는 상식이 사실은 비판적인 지적 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이를 규명함으로써 전적으로 주체적이고 자율적이며 비판적인 개인의 출현을 갈망했던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관찰은 오늘날 대중사회에서 더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대중의 정치적 상식은 모두에게 받아들여지는 보편의 지식이나 깨우침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사실 누군가가 제작해서 유포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미디어의 주도권이 자본에게 움켜쥐어지고 있는 상태에서 이러한 문제제기는 절실하다.
아렌트가 말했듯이 "행위자들이 더 이상 옳은 것과 그른 것, 사실과 허구를 구별할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배 이데올로기는 상식의 옷을 입고 통계로 자신을 무장하고 여론의 포장을 통해 인민의 주체적 판단과 사고 능력을 침략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현실과도 결코 무관하지 않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정치적 상식은?
그런 점에서 대다수가 받아들이고 있는 상식이 가지고 있는 소통의 힘이 크면서도 그것이 가지고 있는 함정을 동시에 보지 못하면 저자가 언급하고 있듯이 "우리가 들을 수 있는 말과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을 제한 할 수 있게 된다." 피에르 부르디외가 이 상식이 지니고 있는 진부한 논리와 틀의 모순과 문제를 밝혀나간 것도 모두 이러한 논점과 통하는 것이다.
저자는 이 상식이 깨지는 창조적 발상과 논의가 요구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현대의 일부 개인들은 의식적으로라도 막강한 파워를 휘두르고 있는 상식의 밖에 서서 그 상식이 작동하는 복잡하고 막강한 과정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옳은 이야기다. 특권과 맞섰던 보통 사람들의 상식은 이제 통계와 대중매체에 의해 관리되거나 생산되고 있다. 이 상식과 모순이 생기면 그 주장은 소통의 힘을 잃게 되기 쉽다. 하지만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역사를 진정 바꿔나갈 수 있는 "상식"은 실종되고 만다.
칸트처럼 기존의 상식의 시대를 종식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상식의 세계를 펼쳐가 나도록 하는 일 또한 너무도 중요하다. 소피아 로젠펠드는 이 상식의 역사를 파헤쳐나가면서 유럽의 정치사를 점검해 나갔는데, 동일한 방법론을 우리의 근현대사에 적용한다면 그 시기마다의 상식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번 서울 시장 선거도 그런 의미에서 "냉전과 분단, 그리고 낡은 기득권이 지속적으로 생산해온 상식"과, "사회적 약자로서의 민중이 바로 세워야 할 상식"의 대결이다. 이와 함께 이 선거는 진짜 "포퓰리즘의 정치적 원리"가 복원되어 민주주의에 기초한 "상식의 공화국"이 세워지는 사건이 되어야 한다.
"상식", 보통 사람들의 정치적 지혜는 혁명의 철학이다. 기득권을 가진 자들은 이 혁명의 상식을 몰상식으로 만들고자 기를 쓴다. 그게 바로 몰상식이다.
아렌트가 쉬지 않고 역설했듯이 "공화주의와 정치적 상식의 결합", 우리의 과제다. 여기서 정치의 진정한 자유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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