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용 경상북도 도지사는 국제 과학 비즈니스 벨트 유치에 실패한 후 '원자력 클러스터' 추진을 '대안'으로 내세우고 있다. 2028년까지 포항, 경주, 영덕, 울진 등 경북 동해안에 12조7000억 원 규모의 원자력 관련 기관을 유치한다는 계획이다.
지난 6월 21일 열린 '경상북도 원자력 클러스터 포럼'에서는 이 사업에 대해, 생산 유발 23조7936억 원, 고용 창출 20만 명의 경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장밋빛 청사진을 내놓았다. 그런데 이 '원자력 클러스터'는 이름은 거창하지만, 사실은 핵발전소, 핵폐기물 처리장,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 시설 따위를 한데 모은 '핵 단지', '핵 벨트'를 경북 동해안에 건설하겠다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와는 별도로 영덕군과 울진군은 강원도 삼척시와 함께 2024년 이후 핵발전소 신규 부지 유치 신청을 이미 내놓은 상태이다. 지난 6월 30일은 정부와 한국수력원자력에서 신규 핵발전소 부지 선정을 확정 발표하기로 한 날이었다. 그런데 후쿠시마 대재앙으로 핵발전소에 대한 위험성이 확인되고 전 세계적으로 부정적인 여론이 확산되자, 부지 선정 발표를 연기하는 '꼼수'를 부려왔다. (그러나 부지 선정 발표가 임박했다는 여러 정황이 최근 포착되고 있어, 이 지역 주민들의 우려가 높다.)
한국 사회 언론들의 '업무 태만'과 '기본 책무 망각' 때문에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재앙이 불과 몇 달 사이에 우리의 시야와 관심에서 희미해져 가고 있지만, 문제의 심각성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렇기는커녕 재앙은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것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핵발전소 수로는 세계 5위, 밀집도로는 세계 1위의 '핵 발전 대국'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경상북도는 이미 전국에서 가장 많은 핵발전소(전체 21기 중 10기)가 밀집해 있고, 4기의 신규 핵발전소와 중·저준위 핵폐기물 처리장까지 건설되고 있는 '세계 최대 핵 단지' 지역이다.
'원자력 클러스터'를 추진하지 않더라도 이미 경북은 핵시설로 인해 방사능 오염과 해양 생태계 파괴, 주민 간 갈등으로 피폐해져 가고 있다. 나아가 물이 새는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 강행 등으로 동해안 일대의 핵사고 위험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미 버린 몸, 한탕 크게 하고 끝장을 보겠다"는 막가파식 발상인가.
이미 이런 지경인데, 일본과 프랑스 등 여러 나라가 이미 엄청난 시간과 돈을 들이고도 실패한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 시설'과 '고속 증식로'까지 떠안는 '원자력 클러스터'라니. 제 정신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참담한 발상에다가 어떻게 '경제 효과' 운운하는 포장을 덧씌울 수 있다는 말인가.
ⓒ프레시안(손문상) |
주민들의 외침
이에 분노한 울진, 영덕, 경주, 포항 등의 지역 주민들은 지난 6월 30일과 9월 7일, 두 차례에 걸쳐 경북도청에서 "원자력 클러스터 유치 철회"를 요구하는 기자 회견을 열고, 도지사 면담을 요청하였다.
"차라리 풀뿌리를 캐먹을지언정 핵발전소는 안 된다!" 지난 6월 30일 영덕에서 올라온 한 농민은 이렇게 외쳤다. 경북이 먹고살기 위해 '원자력 클러스터'를 추진해야 한다는 허황한 논리에 대한 민초의 엄중한 비판이다. 도대체 먹고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먹을거리의 유일한 토대인 땅과 바다가 단 한 번의 핵발전소 사고로 결딴나고 있는 저 일본 동북 지역의 생생한 사례를 눈앞에 두고도, "먹고살기 위해서"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우는 것은 경북도민들을 우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설령 그들이 내세우는 경제 효과의 10분의 1, 100분의 1이라도 기대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이 땅의 민초들을 오직 '돈'밖에 모르는 천박한 존재들로 취급하는 모멸적인 발상이 아닌가.
주민들은 "김관용 지사가 경북의 경제를 살리는 데 원자력 클러스터 말고 대안이 없다고 한다면, 지사직을 당장 내놓아야 한다"고도 외쳤다. 이것은 단순한 으름장도, 속이 빈 정치적 수사(修辭)도 아니다. 그 말 속에는 사실 '경제'와 풀뿌리 민주주의, 주민 자치에 관한 심각한 문제의식이 녹아 있다고 보아야 한다. 선거로 뽑힌 임기 불과 몇 년의 지방자치단체장이, 대대손손 민초들이 의지해 살아가야 할 땅과 바다를 더럽히고 생존의 토대를 짓밟으려 하는 것을 두고 본다면 그것이 어떻게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겠나.
두 차례의 도지사 면담 요구에도 경북도는 묵묵부답으로 대응했다. 주민들과의 대화 자체를 거부한 것이다. 생업을 잠시 접고 어렵게 모였던 울진, 영덕, 경주, 포항 등지의 주민들과 환경운동연합 등 시민단체들은 9월 7일 기자 회견 후 긴급 회의를 거쳐 '동해안 탈핵 연대'를 결성하고, 경북도와 공동으로 토론회를 개최할 것을 결의했다. 그 후 한 달이 넘는 지루한 '설득'을 통해 겨우 지난 10월 14일 오후, 대구 흥사단 강당에서 "원자력 클러스터, 경북을 살리는 길인가?"라는 제목의 토론회를 성사시킬 수 있었다. 한 달여의 설득 과정에서 경북도 측은 온갖 이유를 들어 토론회 참석 요구에 대해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오죽했으면 경북 도정에 관련된 이토록 중차대한 사안의 토론회를 도청이나 도의회가 아닌 시민단체 강당에서 어렵사리 열게 되었겠나. (☞관련 기사 : 원자력 클러스터, 경북을 살리는 길인가)
이 날 토론회에서 다루어진 쟁점들에 대해서는 추후 다른 필자의 연속 기고를 통해 좀 더 자세히 다루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고, 이 글에서는 토론회에 임하는 경북도의 권위적 태도와 철저한 주민 무시 행태에 대해 우선 지적하겠다.
주민들에게 호통 치는 경북도 공무원
토론회에는 경북도를 대표하여 성기용 에너지정책과장이 '발표자'로 참석했다. 그런데 그는 자신에게 20~25분의 시간이 할애되었는데도, 원론적인 취지만 간략하게 말한 다음 "자세한 내용은 자료로 대체하겠다"고 5분 만에 발언을 끝냈다. 발표 용 파일을 그대로 출력한 무성의하기 짝이 없는 자료로 '원자력 클러스터'의 자세한 내용을 파악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가 모를 리는 없었을 것이다.
주민들의 질문에 대해서도 그는 총체적인 내용을 조리 있게 설명하기보다는, 핵심을 교묘히 피해가며 참석자들의 맥을 빠지게 하였다. (만약 그가 자기 딴에는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공무원으로서의 능력과 자질이 참으로 의심스럽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에 화가 난 주민들이 목소리를 높여 따지자, 아예 그도 목소리를 높여가며 주민들에게 호통에 가까운 발언을 해댔다.
"그동안 왜 지역 주민들에게 제대로 된 설명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추진해왔느냐"는 항의(영덕군 현직 이장의 항의였다)에 대해 "반상회보도 제대로 보지 않는 주민들"의 괜한 트집이라는 식으로, "추후 지속적인 주민과의 대화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제안에 대해서는 "고민해 보겠다. 그러나 주민들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어렵다"며 소통 부재 상황의 책임을 주민들 탓으로 돌리기까지 했다. (그동안 쌓인 울분을 터뜨리는 주민들 앞에서 일부 언론이 "성숙하지 못한 토론 문화" 운운하는 것도 문제의 본말을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토론 참석자들을 더욱 분노케 한 것은 토론회 직후 접한 소식이었다. 뒤늦게 알고 봤더니, 토론회가 한창 진행 중이던 바로 그 시각(10월 14일 오후 4시경) <연합뉴스>를 시작으로 "김관용 경북도지사가 참석하는 '원자력 클러스터 포럼' 제2차 총회가 10월 17일(월) 오후 3시부터 서울 삼정호텔에서 열린다"는 보도를 내보낸 것이다. 경북도가 출연하고(결국 도민들의 혈세로 비용을 대서) 에너지경제연구원이 공동으로 여는 이 행사는 원자력 전문가와 기업인, 언론인 등 150여 명이 참석할 예정이라고 한다.
물론 지역 주민들은 이 포럼에 초대받지도 못했을뿐더러, 토론회가 끝날 때까지 그 누구도(시민단체 관계자를 포함하여)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토론회에 참석해 무성의하고 권위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성기용 과장이 바로 이번 포럼의 실무자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경북도가 지역 주민들을 얼마나 우습게 여기고 있는지 길게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토론회가 열렸던 대구까지 울진, 영덕, 경주, 포항에서 수십 킬로미터를 달려왔던 주민들(주로 농민들) 가운데 이 바쁜 추수철에 며칠 사이로 또다시 '원자력 클러스터 포럼'이 개최되는 서울까지 올라가 주민들의 목소리를 전달할 수 있는 여력 있는 이가 도대체 몇이나 되겠나.
서울이라는 지역도, 10월 17일이라는 날짜도, 참으로 절묘하다. 지나친 해석일지는 모르지만, 관료 집단과 핵 산업계, 소위 전문가들과 언론이 한 통속이 된 '핵 마피아' 집단의 노회한 수법을 이번 일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경북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여러 정황상 '원자력 클러스터' 추진이 경북도의 주도로 이루어진 계획이라기보다는 중앙 정부와 한국수력원자력 등 '핵 추진 세력'이 입안하여 추진해오던 것을 경북도가 떠안은 것(즉 위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겠느냐는 의혹을 저버리지 못하고 있다. 사실이 어떠하든, '원자력 클러스터'는 결코 경북만의 문제가 아니다. ('원자력 클러스터 포럼'을 지난 6월에 이어 이번에도 굳이 서울에서 개최하는 것이 이것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국비 80퍼센트, 지방비 20퍼센트로 추진될 이 사업의 목적은 경북도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아랍에미리트 원전 수주를 계기로 정부가 원전을 수출산업으로 육성하기로 함에 따라, 경북도가 원전과 방폐장 등 원자력 기반이 밀집된 동해안을 세계 원자력 시장을 공략할 전진기지로 구축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지난 14일 토론회에 참석했던 한국방송통신대 이필렬 교수와 그린피스 반핵캠페인 얀 베라네크 대표의 발표 내용을 참고한다면, "공략"해야 할 "세계 원자력 시장"은 20년 이내에 문을 거의 닫을 판이고, 그렇게 되면 엄청난 혈세만 낭비하는 '뻘짓'이 될 공산이 매우 크다. 더구나 그 실현 가능성이 검증되지도 않은 '고속 증식로 연구'가 앞으로 '황금알'을 낳을 것이므로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자하겠다는 논리는, 다시 떠올리기도 싫은 '황우석 사기극'의 재판에 불과하다.)
따라서 '원자력 클러스터'는 우리 사회가(우리 사회만) '원전 수출'과 '원전 확대 및 영구화'의 길로 갈 것인가, 아니면 후쿠시마 사태 이후 세계적 추세에 발맞추어 '탈핵'의 길로 갈 것인가를 가르는 중대한 기로에 다름 아니다. 특히 '원자력 클러스터' 계획에 포함되어 있는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와 '고속 증식로' 계획은 우리나라 핵산업의 새로운 국면을 예고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만에 하나 '원자력 클러스터' 추진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국 이 나라가 시대착오적인 '원자력 제국'으로 나아가는 것을 저지하기 어렵게 될 것이다.
핵 발전의 위험성과 '탈핵'의 정당성 및 실현 가능성은 이 지면에서 굳이 다시 길게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원자력 클러스터'의 문제를 더 이상 경북 동해안 주민들의 지칠 대로 지친 어깨에만 내맡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방폐장 부지 선정' 과정에서 영덕과 경주 지역 주민들이 입은 씻을 수 없는 상처와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지역 민심, 메우기 어려운 주민들 간의 감정의 골을 서울 시민들이 더 이상 나 몰라라 해서는 안 된다.
이미 6기의 핵발전소를 짊어지고 일상적인 방사능 오염과 거대사고 위험의 공포에 떨고 있는 울진(한 지역으로 따지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핵발전소가 있는 군이다) 주민들의 고통 역시 수도권과 대도시의 주민들이 더 이상 모르는 체해서는 안 된다. (바로 며칠 전에도 울진 핵발전소에서는 노동자들의 피폭 사고가 발생했다.) 우리가 지금도 아무 생각 없이 쓰고 있는 전기의 상당 부분이 바로 이 '상처받은 땅'의 핵발전소들에서 생산되고 있지 않는가.
진정으로 우리 사회가 '탈핵'과 재생가능 에너지로의 '전환'에 나서야 한다고 믿는 국민이라면, 그리고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국민이라면, 손쉽게 경북 지역의 '보수성'을 비난하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그러한 '보수성'을 낳은 중요한 원인 중 하나인 경북의 핵발전소들을 하루속히 멈추게 하는 데 연대해야 한다. 핵발전소와 민주주의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경북도청으로든, 조만간 신규 부지로 확정될 지역으로든, 전국의 시민들이 '탈핵 희망 버스'를 조직하고, '핵발전소를 점령하라'는 깃발을 치켜들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85호 크레인'이 부산 영도만의 것이 아니고, '강정 마을'이 제주도만의 것이 아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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