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과 김현이 함께 쓴 <한국 문학사>를 읽은 것은 대학 1학년 때였다. 고교 시절 문예반에서 "문학의 밤"을 열었을 때 김현은 우리들을 위해 그 자리에 와주었다. 파격적인 출현이었다. 돌아보면, 흐른지 40년이 가까운 소년 시절의 추억이다.
김현, 그는 당시 이미 명성이 높은 30대 문학 평론가였고, 쉬지 않고 뛰어난 평론을 쏟아내고 있었기에 문학 좀 한답시고 폼을 잡던 치기어린 우리들의 "인기 선생님"이었다. 그런 그의 평론집이나 문학사 저작이 "창비"와 더불어 인문학의 양대 산맥으로 우뚝 섰던 "문지"로 불린 <문학과지성>에 나오면 그건 곧바로 화제가 되고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시대였다.
김현은 1990년, 48세의 젊은 나이에 무수한 아쉬움을 문단에 남기고 이승을 훌쩍 떠나고 만다. 그 이듬해, 김현 문학 전집 간행위원회가 3년에 걸쳐 자료집까지 포함한 열여섯 권의 전집을 문학과지성사에서 완간하게 된다. 그러고 보면, 지금 서평을 쓰려고 하는 이 전집의 1권인 <한국 문학의 위상/문학사회학>(문학과지성사 펴냄)도 벌써 20년이 지난 책이 되었다.
마르크스주의를 기반으로 문화사회학의 영역을 끊임없이 넓혀온 테리 이글턴은 그의 저작 <이론 이후(After Theory)>(이재원 옮김, 길 펴냄)의 첫 대목 "망각의 정치(The Politics of Amnesia)"에서 거장들의 시대가 지나간 것을 토로한다.
문화 이론의 황금기는 이미 오래 전 지났다. 자크 라캉,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루이 알튀세르, 롤랑 바르트, 미셀 푸코 등 선구적 업적과 성취는 어느 새 수십 년 전의 일이 되어버렸다. 이들보다 전 세대인 레이몬드 윌리엄스, 루스 이리가레, 피에르 부르드외, 줄리앙 크리스테바, 에드워드 사이드 등의 한 시대를 구분 짓는 파격적인 저작들도 예전의 사건이 되었다.
더는 새로운 이론이 나오지 않고 새로운 시대를 조명할 수 있는 질문과 방법론이 등장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대한 이글턴의 조사(弔詞)같은 탄식은 우리의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한 시대의 내면을 어둠 속에 불쑥 나타난 섬광과도 같은 회중전등을 들고 조목조목 밝히면서 문학의 자리를 비추고, 현실의 좌표를 그려나가는 평론의 힘을 보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그런 평론의 대상이 될 만한 작품이 손꼽을 만큼 없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성립하기도 하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평론과 문학 이론의 역할은 중대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문제의식을 갖고 수십 년의 세월을 지나 다시 읽어보기 시작한 김현은 경이롭고 뜨거웠다.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김현의 목소리
그렇지 않아도 파주 북소리에 찾아온 영국 헌책방 도시 헤이온 와이의 창시자 리차드 구스는 "지나간 시절의 훌륭한 책을 다시 찾고 간행하는 일의 소중함"을 일깨웠는데, 김현의 문학 전집은 바로 그런 의미의 실체를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의 유작 읽기는 그가 언젠가 그의 책의 제목에 붙인<행복한 책 읽기>처럼 행복했다.
▲ <한국 문학의 위상/문학사회학>(김현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
30대 중반에 불과했던 시절의 그가 이토록 많은 글과 문학적 통찰력 그리고 지적 축적을 했다는 사실은 놀라울 지경이다. 뿐만 아니라 그가 직면했던 질문들은 우리의 근대 경험을 압축한 것들이라는 점에서도 주시된다. 여기에는 그의 개인적 탁월함도 있고 그가 청장년의 시대로 살아갔던 1960년대와 1970년대가 집단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그로 하여금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한 사회적 구조가 또한 있다.
그런데 김현의 탁월함은 이 사회적 구조를 철저하게 자기 질문으로 붙잡고 문학 전체의 과제로 설정해나간 대목이다. 더군다나 그는 하나의 현실을 이해할 때 그것을 둘러싼 전체의 연관관계를 구축하고 파악해 들어가는 방법론이 얼마나 중요한지 명확하게 깨우치고 있었다.
과거의 집적물을 전체로서 파악하고, 그 전체를 이루는 부분부분들을 관계 가치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분은 그것 자체로서 가치를 갖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과의 관계로서만이 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 모든 것은 다른 것과의 관계를 통해 그것의 진정한 가치를 얻는다. 부분과 부분과의 관계를 통해 의미망이 형성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가 쉽게 경험하고 알고 있는 바대로, 총천연색 필름은 흑백 사진의 존재와 대비되면서 아름답고, 총천연색이 대세가 된 현실에서 흑백 사진은 그 관계망의 변화로 해서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문학의 역사와 그 역사 속에 숨어 있는 생각의 변화를 치밀하게 추적해 나간다.
한국 문학은 무엇과 대치해야 하는가?
그는 한국 문학이 주변적 위상을 극복해야 한다면서 그것이 곧 서구의 우월함에 빨려 들거나 이식되어온 문화를 학습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모순과 대치하면서 형성되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를 그는 "굴절"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문화의 교류와 융합, 변화의 과정에서 주체의 가치를 주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 외국의 문물을 수입한다는 것은 오히려 자기 사회의 모순을 은폐하는 제도적 함정이 될 수 있다. 서구라파의 문화는 그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극복하려는 자체 내의 힘에 지나지 않는다. (…) 문학에서의 영향이란 그렇게 직선적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빚과 같아서 그 빛을 받아들이는 물체에 따라 굴절한다. 그 굴절은 한 문화를 수용하는 토양의 성질에 따른다.
(…) 한국 문학 연구가로서는 서구라는 변수를 한국 문학에 강력한 영향을 준 것으로 이해해야지 그것을 한국 문학의 내용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서구화를 근대화로 보는 미망에서 벗어나, 자체 내의 구조적 모순과 갈등을 이해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정신을 근대 의식이라고 이해하지 않는 한 한국 문학 연구는 계속 공전할 우려가 있다.
이러한 논의는 이제 오래 전 일단락되었다고 여길 수 있으나 문학이 당대의 절박한 현실과 만나서 의미를 창출해내는 힘을 역동적으로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안타까움을 갖게 되는 오늘의 시점에서 지속적인 일깨움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까닭에 그는 문학이 어디에 쓸모 있느냐고 하는 세태 앞에서 문학을 권력이 함부로 써 먹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되받아 친다. 그러고 나서 문학의 역할을 이렇게 정의한다.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은 그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고, 그래서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기만을 날카롭게 고발한다.
그런 까닭에 김현은 대중들의 재미를 중심으로 문학하는 것을 전면적으로 질타하고 있지 않지만, 그 초점은 달리 출발해야 한다고 문제 제기를 한다.
문제의 초점을 재미에 두는 한, 공식 문화. 대중화 현상 등의 현대 소비 사회의 중요한 문제들과 맞부딪칠 가능성은 전연 없다. (…) 나는 재미있게 쓰겠다는 의도 밑에 쓰인 것의 상당수는 그것을 낳은 사회의 모순이나 갈등을 고발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거기에 영합하거나 인간의 욕망을 과장하여 거짓 욕망을 만들어 내는 것들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어지는 그의 "문학사회학"은 당시로서는 첨단의 지적 성취였고, 충격이었다. 루카치를 비롯해서 프랑크푸르트학파 등을 아우른 그의 서구 문학 이론의 섭렵과 정리는 치열하고 성실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서구 문학 이론과 사회학적 접근의 접목에 대해서 그 자체로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한국 문학의 길과 관련시켜 고민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에도 요구되는 문학의 전략이란?
이는 오늘날 데리다, 들뢰즈, 라캉 등 무수한 이론들이 수입되어 번역되고 해석되는 와중에 우리 현실의 모순과 대치하는 전선을 만들어내는 힘은 부족하거나 없거나 하는 것과 대조된다. 그는 문학사회학의 역할과 관련해서 "문학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질문은, 결국 인간은 어떻게 행복하게 그러면서 의미있게 살 수 있는가를 되묻는 것에 다름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이를 위해 선택하는 문학의 전략은 무엇이겠는가?
우상 숭배는 억압의 정체를 보지 않아도 되게끔 인간을 가짜로 위로시킨다. (…) 우상을 파괴해야 한다는 높은 소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억압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아도르노의 표현을 빌면 파괴 그 자체가 됨으로써, 문학은 우상을 파괴한다. (…) 최인훈이나 이청준, 김수영이나 황동규, 정현종의 형태 파괴적 노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것 때문이다. 우상을 파괴하지 않는 한, 억압은 없어지지 아니한다. 그러나 그 파괴는 우상을 파괴해야 한다는 주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 그 파괴의 징후가 됨으로써 이루어진다.
(…) 감히 말하거니와 긍정적인 가짜 화해로 끝나는 고통의 제스처보다는 끝내 부정적인 행복스러운 고통을 우리는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고통의 제스처는 추하다. 그것은 결국에 가서는 불화를 가짜로 해소시키기 때문이다. 저급의 참여 소설에 나타나는 저 가짜 소영웅들을 상기하기 바란다. 그러나 부정적인 고통은 역설적이게도 행복스럽다. 자신이 고통이 됨으로써 그 부정적인 고통은 모든 거짓 화해와 거짓 고통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결국은 인간이 행복스럽게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테리 이글턴의 말대로 현실은 우리를 끊임없이 망각의 정치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만든다. 가짜 화해의 전술을 구사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미 문제의 해결을 본 듯이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고통은 은폐되었을 뿐 사라진 것이 아니다.
오늘의 시대에 김현을 다시 읽는 것은, 문학 이론의 황금기를 애써 기억하려는 행위로서가 아니라 억압과 기만을 고발하고, 우상의 지배를 끝내며 가짜 행복의 기반을 파괴해버리는 길을 묻기 위함이다. 문학이 이렇게 자기 현실로 확고하게 돌아올 수 있다면, 우리는 또다시 문학의 전성시대와 의식이 풍요해지는 인문학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김현, 그를 다시 찾아 만난 것은 억압을 은폐하는 권력의 솜씨가 보다 정교해진 지금 하나의 날카로운 필력을 얻은 감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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