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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엔 없지만, 이스탄불엔 있는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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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엔 없지만, 이스탄불엔 있는 그것

[김민웅의 '리브로스 비바'] 오르한 파묵의 <이스탄불>

이스탄불의 몸, 보스포로스 해협

보스포로스 해협을 가로지르면서 알았다. 이스탄불은 단지 언덕 위 도시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스포로스는 그저 바다가 아니었다. 그건 이스탄불의 싱싱한 육체였다.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이 작은 바다 골짜기는, 곳곳의 이슬람 사원들이 만들어내고 있는 스카이라인과 함께 1500년 고도(古都)의 풍경과 역사 그 자체였다.

작가 오르한 파묵이 "이스탄불은 나의 운명이다. 이 도시에 내가 이토록 집착하고 있는 까닭은 이스탄불이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고백의 질감을 뚜렷이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이스탄불에 발을 딛고 나서다. 플로베르는 "이스탄불은 세계의 수도"라고 했지만, 파묵이 태어나 자라면서 경험한 이 도시는 정작 폐허와 오스만 제국의 비애가 스며든 뒤의 고독이 흔적처럼 남은 자리였다.

그에게 이스탄불은 제국의 영광은 이미 사라졌고, 다시는 되찾을 길 없이 귀중한 유산을 잃어버린 자의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가서 본 이 도시는 오르한 파묵이 안타까워했던 모습과는 판이했다. 이만한 아름다움을 지닌 도시가 있을까? 이만한 역사의 무게를 넉넉하게 감당하고 있는 도성(都城)이 또 어디 있을까? 파묵의 말이 진실이라면, 이전의 이스탄불은 얼마만큼의 아름다움의 극치를 지니고 있었단 말인가?

그러나 사실 파묵은 이스탄불이 드러내는 아름다움만이 아니라, 제국이 멸망해버린 후 지워져 버린 기억과 남겨진 폐허 그리고 가난과 우울한 뒷골목의 풍경도 함께 사랑하고 아낀다. 나무로 만들어진 오래된 집들과 낡은 거리, 그리고 지금은 볼 수 없는 이스탄불의 19세기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더는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의 지게꾼과 같이 등짐을 지고 오가는 사람들의 고생스러운 현실도 파묵에게는 이스탄불의 자화상이다.

이 도시는 그렇게 다채로운 표정과 역사를 갖고 있다. 비잔틴 제국의 수도,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역사를 교대해온 이스탄불은 그 안에 그리스 문명과 로마 제국, 기독교와 이슬람의 종교사를 간직하면서 코스모폴리탄적인 세계가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다.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 독일인과 프랑스인, 슬라브족과 유대인, 그리고 중앙아시아로부터 여기까지 이주해온 투르크족. 보스포로스 해협을 중간에 두고 유럽과 아시아 지역이 갈린 곳.

후마니타스 칼리지의 '이스탄불 프로젝트'

나는 지난 8월 중순 일주일 여정으로,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의 '이스탄불 프로젝트'의 인솔교수가 되어 지중해의 역사와 만나고 돌아왔다. 이 프로젝트에 선발된 학생들 10명과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동행한 감독 정지영을 비롯한 일행은 터키의 대부분이 있는 아나톨리아 남쪽 에페소부터 페르가몬 그리고 트로이를 거쳐 이스탄불에 들어섰다.

뜨거운 지중해의 태양 아래 매일 거의 하루 종일 걷는 강행군이었지만, 문명의 탄생을 압축적으로 읽는데 있어서 가장 분명한 메시지를 전해주는 지역들이었기에 여행은 참가자 모두에게 엄청난 인문학적 상상력을 안겼다. 선사 시대로부터 고대, 그리고 중세와 근세까지 하나로 겹쳐 지층을 형성하고 있는 지중해의 역사를 만나는 것은 황홀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문명과 도시의 관계에 대해 새삼 더욱 깊게 생각하게 한 시간이었다.

책을 통해 만나는 도시와, 그 도시를 직접 마주하면서 다시 책으로 돌아가는 과정은 역사를 입체적으로 복원시키는 감격을 주었다. 오르한 파묵의 <이스탄불>(이난아 옮김, 민음사 펴냄)은 그런 의미에서 이 고도(古都)가 거쳐 온 세월의 면모와 그걸 담아낸 흑백사진의 아련한 추억을 마치 나의 것처럼 만들어주는 힘이 있는 책이었다.

비애의 도시, 그 추억

지중해 동부의 세계를 장악해온 이 제국의 수도가 어느 날부터 "유럽의 병자"로 불리면서 겪어야 했던 그 역사의 급류는 이스탄불의 전통과 서구화를 향한 개혁의 충돌 지점을 만들어냈고, 그로써 어떤 아픔과 비애를 낳았는지 파묵은 전해주고 있다. 이때 그가 쓴 비애라는 의미의 단어는 '멜랑콜리'로 터키어로는 '휘진'이라고 한다. 도대체 그가 말하는 비애란 무엇일까? 그건 한 개인의 쓸쓸한 마음 속 풍경이 아니라 한 집단 내지 역사적 공동체의 외로운 통증이다.

파묵은 이 비애(Hüzün)를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에서 사용한 '슬픈(triste)'이라는 단어와 비교하고 있다.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그 멋진 책에서 설명한 슬픔은 열대 지역의 그 모든 가난한 대도시가, 무기력이, 인간 군상이 서양인들에게 느끼게 했던 감정이다. 그는 도시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정신상태가 아니라, 그곳에 도달한 서양인의 죄책감, 선입관과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 그리고 그가 느꼈던 동정심과 혼합된, 극도로 인간적인 고통을 설명하고 있다. 비애는 외부에서 보는 사람이 아니라 이스탄불 사람들이 자신의 상황에서 발전시킨 반응이다."

다시 말해 레비-스트로스의 슬픔이 식민지 지배를 해온 서구인들의 죄책감이라고 한다면, 비애는 제국의 문명을 상실해버린 채 유럽의 변방이 되어버린 이스탄불의 가난, 패배, 상실감이 된다. 오스만 제국이 무너진 뒤, 터키 공화국의 아버지 아타튀르크는 서구화를 변화의 방향으로 잡고 과거를 몰아낸다. 그러나 과연 그것은 이스탄불의 역사를 행복하게만 했을까?

공화국의 수도를 앙카라로 옮긴 아타튀르크는 이스탄불에 둥지를 튼 구세력을 청산하려했다. 그러나 모든 청산 작업은 몰아내지 말아야할 것도 도매금으로 역사의 쓰레기장에 넘기기 마련이다. 여기서 이스탄불의 비애는 피할 수 없게 된다. '보스포로스 문명'이라고까지 그가 언급한 이 이스탄불의 역사는 그 개혁의 와중에 외상을 입게 된다. 한때의 자존심은 유럽에 대한 열등감이 되고, 지난 역사는 지금의 상실을 가져온 책임을 모두 뒤집어쓰게 된다.

그렇게 해서 방치된 이스탄불의 구시가에는 이런 풍경이 남는다.

"나는 어둠이 일찍 깔린 저녁 변두리 마을의 가로등 밑에서 손에 비닐봉지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버지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지속되는 불황 이후 상점에서 하루 종일 추위로 덜덜 떨면서 손님을 늙은 기다리는 책방 주인, 불경기 때문에 사람들이 면도를 하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이발사, (…) 낡은 해안 저택의 텅 빈 보트창고, 실업자들로 가득한 찻집, (…) 비잔틴 시대 유적이자 폐허로 남은 도시의 수도교, (…) 사십년 동안 같은 장소에서 이스탄불 엽서를 파는 남자…."

미흐랍을 가진 도시

▲ <이스탄불>(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이스탄불>은 파묵이 다섯 살 때부터 그가 화가가 되려 했던 스무 살 무렵까지의 인생이 담긴 자전적 수필집이다. 그렇기에 그가 말한 그 비애의 장면은 오늘의 이스탄불에서는 이젠 사라진 추억의 흑백 사진첩이기도 하다. 지금의 이스탄불은 매우 떠들썩하고 활기차며, 비애의 그림자를 좀체 볼 수 없는 국제도시다. 그러나 그건 고층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선 국제도시가 아니라. 중세의 역사를 껴안고 현대를 사는 이들의 거처다.

굳이 비애를 짚으라면, 관광객들에게 손을 내미는 아이들과, 지친 표정의 여자들, 그리고 여전히 정치가 불만인 현실 정도일까? 이스탄불은 어느새 자존심을 많이 회복했고, 자신의 역사를 더는 상실할 수 없는 자산으로 여기고 있으며 어느 경우에는 고압적이기까지 하다. 유럽연합(EU)이 받아주지 않고 있는 현실에서 터키는 더는 이걸 속상해하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오랜 역사를 가진 공동체의 회복력은 생각 이상으로 강하다.

오스만 제국 이후 서구화는 이스탄불을 낡은 도시처럼 여기게 했으나 이제는 도리어 서구의 세계가 상실해버린 것이 무엇인지 일깨우는 현장이 되고 있다. 이스탄불은 더는 슬프지 않고 비애에 잠겨 있지 않다. 그래서 파묵의 책은 이스탄불에 대한 애정을 더욱 깊게 만든다. 이스탄불이 잃어버린 것을 기억해내고 그걸 사랑하는 파묵의 글에서, 우리 또한 상실해버린 것들이 무엇인지 일깨움을 받기 때문이다.

성 소피아 성당을 접수한 이슬람은 메카의 방향을 표시하는 미흐랍을 성당 내부에 만든다. 기독교 시대에 만들어진 교회가 이슬람 사원으로 변모할 때 이 과정은 언제나 있었다. 그것은 메카라는 문명의 방위를 가진 역사가 기존의 문명과 공존하는 방식이었다.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면서 이스탄불의 미흐랍은 프랑스 파리와 독일의 베를린이 되었고 그 뒤 미국의 뉴욕으로 변했다. 하지만 지금 그 미흐랍은 이스탄불 자신이 되고 있는 중이다.

"나를 만든 것은 이스탄불"이라고 말하는 오르한 파묵, 보스포로스 해협의 풍경 속에 녹아든 그의 문학 정신은 그래서 하나의 도시가 창조하는 상상력에 대해 생각하도록 만든다. 이스탄불은 파묵의 몸이다. 보스포로스는 그의 혈관을 흐르고 있다.

이 나라의 수도는 우리의 육체이고, 한강은 우리의 핏속에 흐르고 있는가? 아무리 거대한 건축물이 늘어서 있다 해도 문명의 상상력을 자극하지 못하는 도시는 품격이 가난한 도성일 뿐이다. 이스탄불과 서울의 거리는 단지 지중해와 동아시아의 거리만으로 확정되는 것은 아니다.

서울에는 문명의 방위를 표시할 미흐랍이 있는가? 파묵의 책을 읽으면서 다녀온, 후마니타스 칼리지의 이스탄불 프로젝트가 내게 던진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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