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뱅 우주론에 대해서 열심히 강의를 하고 있을 때 곧잘 튀어나오는 질문들 중 하나다. 하지만 이에 대한 답을 잘하기란 사실 쉽지가 않다. 0.1초 만에 즉각적으로 '정답'을 말해주길 기대하는 참을성 없는 질문자의 마음과는 달리 이런 종류의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을 하기 위해서는 길고 긴 여러 단계의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마르틴 보요발트의 <빅뱅 이전>(곽영직 옮김, 김영사 펴냄)도 이런 질문에 대해서 현대 과학은 어떤 답을 제시하고 있는지를 알리려는 의도에서 쓴 책이다. 머리말에는 2008년에 "우주론을 가장 알기 쉽게 설명"하여 미국과학재단이 주는 상도 받았다는 보요발트의 자신감이 묻어나는 문장이 있다.
"만약 오랫동안 어려운 공부를 하지 않은 비전문가에게 설명하여 이해시킬 수 없다면 우리가 정말로 세상을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하고 있는지를 판명하는 진정한 시험은, 아무것도 예상하지 않는 열린 마음을 가진 비전문가에게 지식을 설명하여 이해시킬 수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 <빅뱅 이전>(마르틴 보요발트 지음, 곽영직 옮김, 김영사 펴냄). ⓒ김영사 |
'빅뱅 이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먼저 우주의 시작점 근처의 초기 우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빅뱅 우주론, 즉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우주론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한 사전 설명이 필요하다. 우주가 시작하는 빅뱅의 순간, 즉 아주 작았던 초기 우주에 대한 기술을 위해서는 양자 이론에 대한 설명이 필수적이다.
첩첩산중이지만 그도 별 수 없이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거쳐야할 이런 길고 평범한 통과 의례의 방식을 택했다. 사실 이 부분이 과학 문화 책을 저술하거나 대중 강연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나게 큰 딜레마 중 하나다. 현대 과학의 핵심적인 내용이나 최신의 결과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반 상대성 이론과 양자 이론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런데 일반인들은 물론 과학자들도 이에 대한 사전 지식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하나하나 차분하게 설명을 하자니 내용이 점점 길어지고 어려워져서 정작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을 꺼내기도 전에 독자들은 겁을 먹고 지쳐버리기가 일쑤다. 생략을 하자니 그 다음 이야기는 그야말로 이해할 수 없는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환영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보요발트는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해서 조근조근 잘 설명했지만 평범했다. 몇몇 구절에서 신선한 비유와 느낌이 있었지만 그 뿐이었다. 양자 이론 부분은 좀 나았다. 물론 그의 명성대로 평균 이상은 되었지만 기대가 컸던 만큼 아쉬움도 컸다. 그의 개념적이고 정성적인 설명은 명확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천재적이거나 획기적이지는 않았다.
여기까지의 내 관전평은 그의 설명은 평균 이상이었고 매력적이었으나 그에게도 모든 사람을 유혹시킬 수 있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딜레마는 수학의 사용이다. 수학을 사용하면 설명도 명확해진다. 물론 독자가 수학의 언어를 이해하고 있다는 비현실적인 가정이 통하는 경우에만 말이다. 그도 그런 유혹과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수학의 역할에 대한 간주곡 : 방정식 속의 세상"이라는 단원에서 수학의 중요성에 대한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과학 저술가로서 대중 과학 강연자로서 너무나 동감하는 내용이었다.
그러고는 (일반 상대성 이론에 의한) 빅뱅 우주론의 아킬레스건인 특이점 문제를 지적했다.
"빅뱅 모델은 공간과 시간 그리고 중력을 설명하는 데 필요한 일반 상대성 이론과 초기 우주를 구성하고 있던 물질의 성질을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양자 이론을 바탕으로 한다. (…) 우주의 시간적 진화에 대한 모델을 찾아내기 위해 일반 상대성 이론 방정식을 풀면 항상 우주의 온도가 무한대가 되는 빅뱅 특이점에 도달한다. (…) 그런 곳에서는 물리학 방정식들이 모든 의미를 상실한다. (…) 수학 방정식이 무한대의 값을 갖는 나타내는 시점이 시간의 시작(또는 끝)일 수 없다. 그보다는 이 이론이 한계를 드러내는 곳이라고 해야 적절하다."
'빅뱅 이전'에 대한 질문은 빅뱅 우주론의 이론적 바탕이 되는 일반 상대성 이론의 특이점 문제 때문에 오랫동안 금기시되어 왔다. 그러니 '빅뱅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가?'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이 질문이 '멍청한' 질문으로 분류되어 왔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금기시되었던 이 질문을 깨는 시작점은 당연히 특이점 문제의 해결에 있을 것이다.
"특히 일반 상대성 이론과 양자 이론의 결합 방법의 하나로 최근에 관심을 끌고 있는 루프 양자 중력은 특이점이 없는 빅뱅과 관련된 결과를 제공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우주는 빅뱅 이전에도 존재했다."
보요발트는 빅뱅 특이점을 해결할 수 있는 희망이 '양자 중력 이론'에 있다고 단언한다. 현재 몇몇 이론들이 이 분야에서 경합하고 있는데, '1차원 루프' 형태를 만물의 기본 단위로 하는 자신의 '루프 양자 중력'이 가장 진리에 가깝다고 역설하고 있다. 루프 양자 중력을 바탕으로 하는 '루프 양자 우주론'으로 빅뱅 특이점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따라서 이제는 '빅뱅 이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빅뱅의 특이점은 항상 인력으로만 작용하여 붕괴를 초래한 고전적 중력에 맞서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는 루프 양자 우주론의 새로운 반발력으로 막을 수 있다. 수축하는 우주의 붕괴에 의해 우주가 양자 이론이 활약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크기에 도달하면 우주는 우선 수축 속도를 늦추다가 일정한 시간 후에는 완전히 정지한다. 그리고 다시 팽창 상태로 돌입한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우주 역사의 일부를 대략 상상해 볼 수 있다. 빅뱅 이전에는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우주와는 반대로 수축하고 있었다. 붕괴에 의해 더 작아지고 뜨거워져 빅뱅 상태로 들어갔다. 그다음에는 양자 효과가 지배했다. 그리고 수축 속도가 줄어들다가 다시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팽창하는 우주가 나타났다."
요약하면, 루프 양자 우주론에 따르면 우주는 수축했다가 팽창하기를 반복하면서 무한히 순환하는 우주라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 팽창하는 상태에 있는 우주에 살고 있는데 '빅뱅 이전'에는 우주가 수축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보요발트의 문장 하나를 빌어서 일반화시켜서 다시 쓰면 이렇다.
"양자 우주론은 부분적으로 순환적인 우주론 쪽이다."
나의 중간 관전평은 일단 호의적이다. 내가 그동안 '루프 양자 우주론'에 대해서 알고 있던 것은 이 이론이 여러 양자 중력 이론 중 하나라는 것과 막연하게 1차원 루프를 기본 단위로 하겠거니 하는 것뿐이었다. 보요발트는 나 같은 문외한에게도 자신의 이론이 어떻게 '빅뱅 이전'에 대한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를 비교적 차분하게 잘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그의 이론을 수학을 통해서 접해보고 싶다는 욕망도 생겼다. 그런 면에서 그는 나를 그의 자기장 속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빅뱅 이전>의 하이라이트인 "양자 중력 : 모든 것의 결합" 단원 이후에는 '이게 뭐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글들이 이어졌다. 저자가 어려운 자신의 이론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해서 욕심을 좀 냈던 것 같다. 우주 탄생과 관련된 신화도 등장시키고 비유도 더 선보였고 좀 생뚱맞은 에세이도 몇 편 이어졌다. 사족이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그 모든 내용을 좀 더 냉정하게 다듬고 가지를 친 후 앞의 본문 중에 녹여 넣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그의 '빅뱅 이전'에 대한 이론적인 논리 전개는 아름다웠지만 현실이 아직 그를 포용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양자 중력 연구의 많은 분야는 아직 완성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일반 상대성 이론과 양자 이론이 발전하던 20세기 전반부와는 달리 양자 중력의 이론적 식들을 증명할 관측 결과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모든 종류의 특이점을 방지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강한 반발력이 루프 양자 중력의 일반적인 성질이라는 점은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 이 연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루프의 역학은 매우 복잡해서 아직 하나의 해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가까운 장래에 이런 상황이 바뀔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그의 말처럼 그의 이론은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 이 연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최종 관전평도 비슷하다. '우주론을 가장 알기 쉽게 설명'한다는 보요발트도 뾰족한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어려운 것은 어려운 것이다. 하나하나 차분하게 설명하는 길밖에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그는 나름대로 성공한 것 같다. '빅뱅 이전'이라는 화두가 갖고 있는 문제점과 그 이론적 해결책에 대해서 비교적 명확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빅뱅 이전>의 더 큰 미덕은 아직은 오리무중이지만 이제 막 '빅뱅 이전'이라는 성역에 도전하고 있는 따끈따끈하고 생생한 연구 현장을 생중계 하고 있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족
어느 책이나 오류는 있다. "고도가 낮을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43쪽)는 명백한 오류(또는 오타)다. "지구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높은 고도에서는 시간이 더 빠르게 간다"(51쪽)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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