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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섬 길바닥, '욕'과 '눈물'이 넘치는 이 곳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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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섬 길바닥, '욕'과 '눈물'이 넘치는 이 곳에서…

[현장] <길 위의 신부 문정현 다시 길을 떠나다> 출판기념회

"오늘 저녁 일곱 시, 중덕 삼거리에서 문정현 신부님 이야기 책의 출간을 축하하는 출판기념회가 열립니다. 마을에 계시는 여러분 모두 참석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오늘 저녁 일곱 시…"

지난 17일 붉은 노을이 '범섬'의 등허리까지 내려앉은 이른 저녁, 이곳 골목 어귀마다 설치된 작은 스피커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생물권 보호구역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주민들이 자부심을 가질만한 풍부한 표정을 간직한 동네.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강정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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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위의 신부 문정현 다시 길을 떠나다>(김중미 지음, 낮은산 펴냄). ⓒ낮은산
인천 만석동 달동네에 있는 공부방, '기찻길 옆 작은 학교'에서 온 네 명의 대학생들이 이 소박한 방송에 웃음을 지었다. 열 살 때부터 공부방에서 함께 지내왔다는 이들은, 이들 중 한 명인 최단비 씨의 어머니이자 <괭이부리말 아이들>(창비 펴냄)의 작가 김중미 씨가 최근 출간한 책의 출판기념회 참석차 이곳에 왔다. 물론 아름다운 구럼비 앞바다를 다시 한 번 눈에 새기고, 마을 주민들의 해군기지 건설 반대 투쟁에 힘을 보태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이번 방문이 성사된 것은 김중미 씨의 새 책이 2011년 8월 현재 이곳 강정 마을에서가 아니면 만날 수 없는 문정현 신부의 삶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제목은 <길 위의 신부 문정현 다시 길을 떠나다>(이하 <길을 떠나다>, 낮은산 펴냄). 지난 7월 초부터 강정 주민이 된 문정현 신부는 출판기념회를 열자는 출판사의 제안에 "나는 절대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고 못 박았다. 출판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 저희가 가겠습니다."

'길 위의' 출판기념회

일곱 시가 되자, 중덕 삼거리에는 나이도 주소지도 제각각인 수십 명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누구는 원래 마을 사람이겠고 누구는 투쟁을 지원하러 온 '외부세력'이겠지만, 바다를 지키느라 새까맣게 되어버린 건강한 그 얼굴만은 같다. 섬사람들은 두툼하게 썬 돼지고기를 접시에 담아 내밀고, 뭍사람은 막걸리 통을 기울이며 자연스레 잔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출판사에서 준비한 작은 현수막만이 이날 행사의 정체를 말해줄 뿐, 값비싼 한정식집이나 프레스센터에서 이뤄지는 보통 '출판기념회'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출판사 낮은산 관계자들은 "이런 출판기념회는 생전 처음 본다", "나중에 다른 책 출판기념회를 열게 되더라도 길 위에서 하자"며 웃었다.

중덕 삼거리엔 컨테이너 박스 한 개와 천막, 의자 몇 개와 돗자리 따위가 얼기설기 농성장으로서의 구색을 갖추고 있을 뿐이지만, 이들이 반대하는 으리으리한 해군기지보다 강인한 힘이 응집된 곳임에는 틀림없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추억들이 서려 있는 곳이다. 그걸 생각하면 여길 떠날 수 없다"고 말하는 주민 김미랑 씨는, 이날 낮 4시께 급습한 해군의 차량 앞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급박했던 그 순간으로부터 겨우 반나절이 흘렀을 뿐이지만, 그는 피곤한 기색 없이 투쟁 기금 마련을 위한 '강정 친환경 티셔츠' 판매에 여념이 없었다.

이윽고 흰 수염과 검게 탄 피부의, 주인공 문정현 신부가 도착했다. 그 역시 이날 낮에 있었던 해군·경찰과의 대치에서 고래고래 욕을 퍼부어가며 싸웠고, 김중미 작가 일행을 맞느라 겨우 생긴 휴식 시간도 기꺼이 포기했다. 앞서 아침 10시부터는 강론과 미사 진행도 있었으니 숨 가쁜 하루였다. 쉬어버린 그의 목소리를 듣자 문득 상투적인 질문이 떠올랐다. 그는 왜 늘 힘든 길을 택하는가? <길을 떠나다> 속 매향리에 있던 문정현, 대추리에 있던 문정현, 용산에 있던 문정현이 떠올랐다.

▲ 평화운동가·가수 조약골 씨(오른쪽)가 '평화가 무엇이냐'를 부르고 있다. ⓒ박대성

"작은 신부님, 더 크게 욕해주세요!"

벌레들이 어둠을 피해 조명 밑으로 모여들 즈음 기념회가 시작됐다. 문 신부와 마찬가지로 얼마 전부터 이곳에 내려와 살고 있는 평화운동가 겸 가수 조약골 씨의 노래가 크게 울려 퍼졌다. "두꺼비 맹꽁이 도롱뇽이 / 서식처 잃지 않는 것이 평화 (…) / 군대와 전쟁이 없는 세상 / 신나게 노래 부르는 것이 평화" 조약골 씨는 문정현 신부의 연설을 듣고 이 노래 '평화가 무엇이냐'를 만들었다고 한다.

기념회 진행을 맡은 주민대책위원장 고권일 씨가 천주교 제주교구의 고병수 신부에게 마이크를 건넸다. 고 신부는 1990년 드러난 국군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문건에 적혀 있던 '문정현' 항목을 읽으면서 축사를 열었다. 국가 감시기관이 기록한 문정현은 "외고집, 타협할 줄 모르며 신도로부터 존경받고 있으며 금전에 관심이 없고 (…) 깡패 신부라 불린다". 고 신부는 이에 대해 "강정 주민들이 해군 앞에서 표현하지 못하는 응어리진 한을 문 신부가 대신 터트려 준다"며 "저들이 봤을 땐 깡패 신부겠지만 우리 입장에선 가장 고통 받는 사람들의 마음 속 한을 풀어주는 대변자"라고 말했다.

▲ 문정현 신부 ⓒ박대성
그는 이어 "문 신부가 강정에 온다고 했을 때, 너무 큰 인물이라 강정 분들이 기가 눌릴까봐 걱정이 됐지만 곧 그게 아님을 깨달았다"며 문 신부가 자기 의견을 내세우기보다, 그저 한 명의 주민으로서 고통당하는 쪽에 서 있다고 말했다.

마을회장 강동균 씨 역시 문 신부가 "남들이 말하는 '높으신 분', '큰 분'이 아니라 키도 요만큼 밖에 안 되고 나보다 몸무게도 덜나가는 평범한 할아버지였다"고 말해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다. 강 씨는 "그러나 우리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주고 계신 분"이라며 "그가 우리를 지지해준다는 사실이야말로 정말 큰 힘이 된다"고 강조했다.

미 공군 폭격장 폐쇄 운동에 몸담았던 매향리 주민대책위원장 전만규 씨도 이날 연대 투쟁을 위해 강정을 찾았다. 전 씨는 "매향리 주민들에게 문 신부는 그야말로 구세주 같은 존재다. 그가 아니었다면 주민들이 용기를 내서 세계 최강 군대인 미군을 몰아낼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년간 미군을 상대로 싸워 온 전 씨는 힘겹게 싸우고 있는 강정 주민들에게 큰 위안이 되는 존재다. 그는 "과거 엄마가 아이한테 젖을 먹이는 것조차 고통이었던 매향리는 이제 지극히 평온한 동네가 되었다"면서 "하늘이 만들어준 듯한 자연, 돌멩이 하나하나, 순박한 주민들까지 강정은 우리 매향리를 생각나게 한다. 여러분은 반드시 위대한 승리를 할 것이란 느낌이 든다"고 주민들을 응원했다.

ⓒ프레시안(최형락)

"강정 파묻으면 너희는 성할 것 같으냐!"

전만규 씨는 5년 전 제주를 찾았을 때, 당시 해군 전용 부두 건설 부지로 거론되던 서귀포시 화순에 공사가 진행되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이 일이 잘 해결된 줄만 알고 있었다며 "마음이 불편했고, 강정 사람들에게 미안했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대로 강정은 화순, 위미리에 이어 2007년부터 국방부의 표적이 됐다. 2007년 4월 강정마을 주민 1900여 명 가운데 단 87명이 참석한 총회에서 그야말로 벼락같이 해군기지 유치 결정이 내려졌고, 국방부와 제주도지사는 환경영향평가 등 적법 절차를 무시한 채 속도를 냈다. 주민들은 국가와 국방부 장관을 상대로 법률 싸움에 뛰어들었지만 패소했고, 지난한 길 위의 싸움이 시작됐다. 2009년 1월, 국방부는 국방·군사시설 사업을 승인하고 기본 설계 실시에 들어갔다.

철조망이 생명을 위협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는 문 신부 역시, 3년 전부터 강정마을을 마음에 두고 싸움을 돕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마침 '용산 참사'가 일어났고 그는 남일당에서 11개월을 보내게 된다. 이후엔 명동성당에 들어가 모진 취급을 받으면서 253일간의 기도 여정을 이어간다. 그러는 동안, 마음에선 한시도 강정이 떠나지 않아 괴로웠다고 한다. 그는 기도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강정으로 이사를 해 버렸다.

"출판기념회를 허쟤. 내가 잠깐 나가 있는 동안 경찰들이 여길 장악해버리면 워쪄. 즐때로 안 돼. 나가 절대 못 올라간다고 헜지." 문 신부가 특유의 억양으로 오늘 행사가 강정마을에서 이뤄진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책을 쓴 김중미 씨와 자신의 투쟁 현장을 사진으로 기록한 사진작가 노순택 씨에게 감사를 전하면서도, 감회를 묻자 "나에 대해 있는 거 없는 거 (기록들) 다 불태워 버렸으면 하는 바람"이라며 "이런 자리가 송구하고, 몸 둘 바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반쯤은 쉰, 반쯤은 악에 받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은 문 신부의 말투 그대로 전할 수밖에 없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구럼비가 볼수록 신기혀. 여기 바다는 찬물을 먹고 싶으면 차고 따뜻한 게 있으면 좋겠다 싶으면 따뜻한, 그야말로 살아있는 바다여. 근디 여기다 콘크리트를 부어? 에라이, 그건 강정 주민을 죽이는 거다. 파묻는 거다. 강정 주민을 파묻어? 이런 역적이 어디 있어!

가는 데마다 주민을 괴롭히는 이런 놈의 경찰이 어디 있어! 삼성물산 대림건설(해군기지 공사업체), 더 올라가서 대통령, 다 무어하는 것들이야. (나는) 여기 계속 있으면서 야 파묻어라! 강정 주민 파묻어라! 할거야. 그럼 너희들 성할 것 같으냐, 성하지 않다 이거야! 그렇게 파묻을 자신 있으면 파묻어 보라 이거야!"


ⓒ박대성

이날 행사에선 지역 노래꾼 최상돈 씨의 축하 공연과 제주작가회의 김경훈 시인의 시 낭독, 그리고 한 초등학생 자매가 투쟁 지원을 위해 꽉꽉 채운, 송아지 모양 저금통의 전달식도 있었다. 기념회와 촛불문화제는 끝났지만, 사람들은 투쟁의 고단함을 내려놓고 밤늦도록 술잔을 채웠다. 주민들은 마이크를 들고 "강정, 사랑하는 내 강정 둘도 셋도 넷도 없는 내 강정~"(이자연 '당신의 의미' 개사), "해군기지는 아무나 하나~"(태진아 '사랑은 아무나 하나' 개사)를 목이 터져라 불러댔다.

문 신부는 이번 행사에 대해, 계속 "고맙지만 나는 그냥 여기 주민 한 명인데, 부끄럽지 않겠냐"고 말했다. 하지만 강정마을에서 만난 수많은 이들이 들려준 대로, 문 신부의 존재는 조금 특별하다. 그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자신의 투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며 외롭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책의 저자이지만 너무도 기꺼이 이날 '주인공' 자리를 문 신부에게 돌린 김중미 씨는 "(책을 통해) 독자들이 그가 서 있는 길이 힘들거나 외롭지 않았음을, 그리고 우리가 서야 할 길이 어딘지를 알게 된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외롭지 않은, 틀리지 않은 '길 위의 밤'이 깊어갔다.

ⓒ박대성

"나는 김중미가 작간지도 몰랐어"

김중미 씨가 문정현 신부를 처음으로 직접 만난 것은 2000년의 일이다. 문 신부가 언젠가 회의 때문에 인천에 왔을 때 만석동의 '기차길옆 작은학교'에 갑작스레 방문했고, 김 씨는 그 짧은 순간을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다. 얼마 흐르지 않아 두 사람은 '대추리 5·29 평화대행진' 등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반대 투쟁을 통해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2008년, 김 씨는 "무작정 문정현 신부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어진다. 김 씨의 멘토이자 스승, 문 신부의 신앙적 동지인 한현 씨를 통해 다시 연결된 두 사람은 그때부터 오랜 시간을 들여 꼼꼼한 기록 작업에 들어간다. 문 신부와 가장 가까운 이인 오두희 씨가 인터뷰를 맡았고 그 구술을 김 씨가 글로 옮겼다. 글은 지난해 <한겨레>에 연재됐고, 지난 9개월 간 다듬는 과정을 거쳐 16일 드디어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18일 중덕 해안에서 미사를 마친 문정현 신부와 김중미 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길 위에서, 낮은 곳에서 맺어진 두 사람의 인연은 이곳 강정에서, 또 책을 통해서 계속 풍성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 김중미 작가(왼쪽)와 문정현 신부 ⓒ박대성

김중미 : 신부님을 강정에서 두 번째 뵙네요. 지난달 18일에 왔을 때보다 더 까매지신 것 같아요. (웃음) 사실 저는 이 책 쓰면서 가장 의문이었던 게, 신부님이 현장으로 달려갈 때 늘 아무런 유보가 없다는 것이었어요. 강정뿐 아니라 매향리로, 대추리로, 용산으로 달려가실 때 인간적으로나 신앙 면으로나 갈등이 있었을 것 같은데 정말 없는 거예요. 연재 할 때도 그랬고 출판사에서도 정말 이랬냐고, 조금 밋밋하다고 할 정도였어요. (웃음) 그런데 그게 신부님인 거예요. 이미 그분들의 고통을 체화하고 있고, 연민을 느끼시면 바로 달려가시는 거죠.

문정현 : 나는 처음에 김중미가 작간지도 몰랐어. 그냥 착한 아줌마라고 생각했지. (웃음) 사실 처음 만났을 땐 김중미 개인 보다는 기차길옆 작은학교에 매력을 느꼈어. 어려운 가운데서 꾸려나가는 공부방, 일방적인 공부가 아니라 스스로 인간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공부방, 모든 아이들을 내 피붙이처럼 대해주는 공부방…. 대단하지 않아? 거기 들어가면 사람이 순화될 수밖에 없어.

물론 작가로서의 대단함도 알지, 알아. 베스트셀러 작가잖아. 뒤늦게 책을 읽으면서 기지촌에서 자란 배경을 알았고, 이런 사람이로구나 싶었지. 특히 <거대한 뿌리>(검둥소 펴냄)가 인상 깊었어. 그런데 어떻게 해서 내 얘기를 신문에 연재하게 된 거더라?

김중미 : 제가 어린이 책으로 나온 <신부님 평화가 뭐예요-길 위의 신부 문정현>(김평 지음, 우리교육 펴냄)을 보고 신부님 일생을 청소년이나 어른들이 보는 책으로 만들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한현 선생님을 통해 연락을 드렸었죠.

문정현 : 맞아. 우릴 이어준 사람 중에 한현이란 분이 있는데 신앙생활에 있어서 서로 깊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야. 내 신앙은 부모님 그리고 이런 사람들로부터 오는 게 반 이상이거든. 책상 앞에서 암만 공부해봤자 안 되는 거야. 김중미 작가도 그분한테 영향을 많이 받았지. 그래서 우리가 자주 못 만나더라도 얘기가 통한 거고. 그리고 또 내가 가는 데마다 기차길옆 작은학교 아이들을 데려오지 않았겠어? 오면 또 내 새끼처럼 챙겨주었지.

김중미 : 신부님이 강정으로 이사한다고 하셨을 때, 그전부터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 모습이 떠오르니 다시 가슴이 미어지더군요.

문정현 : 사실 요즘 몸이 엄청나게 피곤해. 사람들이 강정에 오면, 안 만날 수 없잖아. 이곳저곳 소개도 해 주어야 하고. 물론 행복한 비명이지. 난 누구든 꼭 와서 이 모습을 봐야 한다고 생각해. 신문 읽고 그런 걸로는 진짜 현장을 알지 못해. 일단 와 보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가 보일 거야.

나도 사실 그래. 원래 여기 주민들하고는 교류가 오래 됐어. 그런데 용산, 명동에 있느라… 일찍 내려와 살지 못했지. 그동안 강정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어. 여러 사람들이 직접 찾아오기도 했고. 아주 미칠 뻔했지. 기도가 끝나고 얼마 안 되어 바로 강정에 달려갔어. 그런데 미안해서 얼굴을 못 들겠더라고. 그래서 그날은 그냥 하룻밤 자고 돌아갔어.

그리고 어떻게,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했지. 일단 그 전에 갈치 장사로 번 돈 1300만 원을 여기 투쟁에 보탠 적이 있는데, 그 경험을 토대로 '강정 평화 상단'을 꾸려 젓갈, 소금, 다시마 등을 팔기로 했지. 또 하나는 내가 직접 몸을 대는 일이야. 그래서 바로 이곳 주민이 된 거고.

김중미 : 사실 제가 이 책을 '지금' 써야만 했던 이유도 그래요. 신부님이 여전히 현장에서 활동하고 계시고, 또 관련된 사실들 가운덴 다른 인물들과 얽혀 있는 것도 많아서 혹시나 누를 끼치지 않을까 하는 부담감에도 불구하고요. 저는 책을 통해 조심스럽게나마,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연민이란 걸 발견하게 하고 싶었어요.

신부님을 존경하는 사람들도 그의 행동에 대해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잖아요? '분노의 신부님', '투사 신부님'이라면서. 하지만 그 안에 있는 건 분노보다는 연민입니다. 그게 바로 그를 움직이게 하는 힘 같아요. 거창한 사회의식, 역사의식 이전에 약하고 가난한 사람,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있어요. 그래서 그걸 따라가다 보면, 누구나 갖고 있는 자기 안의 연민을 발견되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나도 그 길을 따라가는 동안 힘들었다기보다 유쾌했어요. 절대 외롭지 않은 길입니다. 그 점을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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