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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 봤니? 공산주의 사회의 '소녀 시대'!

[프레시안 books] 마르제나 소바·실뱅 사부아의 <마르지>

다섯 시간을 기다리던 끝에 드디어 한 남자가 폭발했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 서기장을 죽이고야 말겠어"라고 외친 뒤 줄을 떠났던 그가 삼십 분 후에 풀죽은 모습으로 다시 돌아와 짧게 내뱉었다. "정말 재수 더럽게 없는 날이야. 그를 죽이려는 줄은 열 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되겠더군."

역사학자 임지현의 <바르샤바에서 보낸 편지>(강 펴냄)에 나오는 공산주의 체제 당시의 폴란드 농담이다. 폴란드 인민들은 필요한 물건을 사려면 물건이 들어오는 날 가게 앞에 진을 쳐야 했고, 그래서 위와 같은 풍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한창 경제 위기가 심각할 땐 배급표가 있어도 물건을 배급받는다는 보장이 없었기에 "폴란드식 샌드위치는 빵 배급표 두 장 사이에 낀 고기 배급표"라는 씁쓸한 농담까지 떠돌았다.

임지현의 글이 쓰인 시점은 동구 공산권 붕괴 이후, 그러니까 위의 풍경이 과거가 되어버린 1990년대 초반이다. 자본주의란 새 옷을 갈아입은 폴란드에 대해, 서유럽의 경제 전문가들은 구 사회주의 국가 가운데 시장 경제로 전환한 가장 성공한 사례라며 칭찬했다. 그곳에서는 이제 "소 내장 수프를 팔던 전통적 슬라브 식당들은 자취를 감추고, 담배를 차압이라도 하듯 금연 표시를 당당하게 내건 맥도날드가 시내 요소마다 들어서는" 실로 혁명적인(?)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80년대, 공산 폴란드에 산다는 것

'동구권 공산주의'는, 한 순간에 무너진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위와 같은 혁명적 변화가 초래된 것은, 비단 소련이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해 개입주의를 표방한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포기하고 각자의 독립 노선을 인정하는 '시내트라 독트린'(프랭크 시내트라의 노래 '마이 웨이'에 빗댄 표현)으로 전환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중부 유럽의 국가들은 길게는 수십 년에 걸쳐 '자체적인' 혁명의 토대를 마련해 오고 있었다. 그 가운데 폴란드는 1980년대 내내 가장 조직적이고 강력한 반공 투쟁의 역사를 이어 온 나라였다.

폴란드의 민주화 운동은 70년대 국가 주도의 급속한 산업 발전과 그것의 극적인 붕괴, 불평등과 공직 부패 등 누적된 사회 문제들 속에서 탄생했다. 1976년에도 대대적인 파업이 일어나긴 했지만 1980년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자유노동조합 운동이야말로 공산당 통치에 대한 광범위한 도전을 알리는 본격적인 신호탄이었다. 야루젤스키 정권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바웬사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을 체포하는 등 강경책을 펼쳤지만 시위는 계속되었다.

이런 억압 속에서도 자유노조를 중심으로 한 민주화 운동이 폴란드의 80년대 역사를 채웠고, 결국 89년, 정부가 바웬사에게 자유노조 합법화를 논의하자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제공한 모델인 '원탁회의'를 제안하기에 이른다. 원탁회의를 통해 폴란드 의회는 사회주의 관계 조항을 삭제하고 자유경제 조항이 삽입된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킨다. 곧이어 선거로 동구권 공산 국가 사상 최초로 비공산 내각을 출범시켰고, 바웬사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바야흐로, 바르샤바에도 "자유가 작동하기 시작한"(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표현) 것이다.

여기까지는 포털 사이트 백과사전이, 수많은 역사서들이 요약해 주는 얘기다. 그러나 바웬사나 교황, 혹은 야루젤스키가 아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이 시기를 보내왔을까? '폴란드인' 혹은 '노동자들'이라는 큰 이름으로 뭉뚱그려진 집합이 아니라, 그 집합 속에 있던 각각의 사람들에게 이 10년은 어떤 의미였을까? 억압되고 불편한 환경, 그러나 자유와 변화에 대한 꿈이 넘쳐났던 이곳에서 보통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평범한 폴란드 소녀의 이야기 <마르지>(김지현 옮김, 세미콜론 펴냄)는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르포 만화다. 전 4권. 최근 출간된 1, 2권엔 1984년부터 1987년까지가 담겼고, 추후에 나올 3, 4권엔 1988~89년의 모습이 나올 예정이다. 1979년 폴란드 스탈로바볼라에서 태어난 마르제나 소바가 유년기의 체험을 얘기했고, 일러스트레이터 실뱅 사부아가 그 고백을 그림으로 옮겼다.

▲ <마르지 1 : 공산 폴란드에서 보낸 어린 시절>(실뱅 사부아·마르제나 소바 지음, 김지현 옮김, 세미콜론 펴냄). ⓒ세미콜론
작가의 말에서 실뱅은 마르제나로부터 들은 유년기 이야기를 만화로 옮기고 싶다고 말했더니, 마르제나가 도무지 그 호기심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마르제나에겐 너무나 평범한 추억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뱅을 포함한 동시대 프랑스 친구들은 그토록 평범한 공산 체제 하의 폴란드에 대해서 완전히 무지했고, 따라서 작가는 내부인의 눈으로 그것을 기록하고 싶어졌다. 마르제나의 이야기엔 이국에 대한 호기심을 채워 줄 특수성과 함께, 체제와 관계없이 누구나 커가면서 잃어버리게 되는 유년 시절의 향수라는 보편성이 있었다.

하지만 이 '특수성'은, 우리가 폴란드란 단어에서 떠올리기 쉬운 아우슈비츠나 폐허가 된 바르샤바의 이미지, 혹은 '공산 폴란드'란 말에서 무심코 연상하는 어둡고 비극적인 서사완 거리가 멀다. '공산 폴란드에서 보낸 어린 시절'(1권), '우리는 체르노빌 세대'(2권)라는 자못 심각한 부제에, 표지엔 실루엣으로 표현된 군홧발 남성들이 그려져 있지만, 슬픈 얘기가 펼쳐질 거라고 지레짐작하지는 말기를. 이야기는 마르제나가 실뱅의 호기심을 의아해 했던 것처럼 너무나 담담하고 평평하다. 그러나 그 속엔 생필품을 사기 위해 엄청나게 긴 줄을 참아야 했던, 아빠의 퇴근 시간이 늦어지면 온 아파트가 긴장에 휩싸여야 했던 한 소녀의 유년기, 아니 한 시대 그 자체가 매우 세밀하게 녹아나 있다.

"사람들은 우리를 체르노빌 세대라고 부른다"

마르지는 눈이 크고 빼빼 말랐으며, 늘 토끼 인형을 안고 잠들며 엄마보단 아빠를 더 사랑하는 소녀다. 걸핏하면 눈물짓는 여린 성격이지만, 남자아이들처럼 뛰어 놀기를 더 좋아한다. 마르지의 주된 놀이터는 자기가 사는 HLM(서민용 임대 아파트)의 층계참으로, 여기서 이웃집 친구들과 엘리베이터를 위로 올라가도록 버튼만 누른다거나 남의 집 초인종을 눌러 놓고 도망치는 등 짓궂은 장난을 친다. HLM의 풍경은 한국의 80년대 시영아파트처럼 삭막하지만, 아이들의 표정은 마냥 밝고 정겹다.

마르지네 엄마는 유제품 가게 계산대에서, 아빠는 공장에서 일한다. 마르지는 삼촌이나 아빠가 미국에 가 있어서(이는 한국의 6~70년대 월남 갔다 온 삼촌, 중동에서 일하는 아빠와 비슷한 의미라 한다) 초콜릿 같은 좋은 물건을 가져다주는 집이나, 바비 인형을 가진 '고시아'네처럼 잘 사는 친구들이 부럽다. 마르지는 새 것을 사달라고 조를 때마다 엄마로부터 "우리는 넉넉하지 못하잖니" 소리를 듣는 게 슬프고 지겹지만, "아빠가 미국에 가는 건 싫다." 너무 멀기 때문이다.

설사 살림이 넉넉하더라도 물건을 사기 위한 '줄 서기'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일. 앞서 인용한 농담에서 알 수 있듯 기다림은 힘겹고 지루하며, 때때로 분노를 촉발시킨다. 일곱 살 난 마르지 역시 엄마가 "가게에 설탕이 들어왔대"라고 외치면 바로 튀어 일어나 세수만 하고 급히 길을 나서야 한다. 한 사람에 1킬로씩만 받을 수 있는 설탕 줄, 아빠를 앞에 두고 선 마르지는 사람들의 입과 코에서 나오는 허연 김을 바라보며, "뭐라도 살 게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을 나타내는 구름 모양 같다"고 생각한다. "가족을 먹일 작은 먹을거리를. 이 나라에서 사는 불편함을 누그러뜨리고 잊게 할 설탕이라도 말이다."

불편한 상황은 이뿐만이 아니다. 마르지 가족은 이동도 자유롭지 못하다. 기름 배급표론 한 달에 세 번 10리터씩밖에 주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날 마르지는 표 가져오는 것을 깜빡한 바람에 어떻게 기름을 좀 살 수 없겠냐고 통사정을 하게 된 아빠에게, 주유소 직원이 "자기 가족만 생각하고 나라와 다른 사람을 생각은 안 하는 거짓말쟁이, 도둑" 취급을 하는 걸 본다. 이런 요령부득의 사회는 마르지의 눈으로 이렇게 비판된다.

"기름이 귀하다 보니 사람들은 정말 필요할 때 쓰려고 모아둔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에서 탈출하고 싶을 때라든가."

ⓒ세미콜론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1986년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에서 터진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건에 대한 꼭지다. 친구의 '미국 삼촌'이 보내준 크림이 든 요상한 튜브(이는 치약으로 밝혀진다)를 먹으며 신나게 놀다 귀가한 마르지는, 갑자기 부모님이 불안한 얼굴로 자신을 차에 태우는 것을 보고 놀란다. 병원에 도착하니 날이 더워 숨 막힐 지경인데도 문과 창문은 모두 닫혀 있고 웅성거림 속에서 폭발, 히로시마, 나가사키와 같은 단어들이 들려온다. 이윽고 마르지네 가족에게도 약을 받을 차례가 왔지만, 약이 부족해 아이들만 먹고 어른들은 먹지 못한다.

"비가 오기 시작하면 거리는 텅 비고 사람들은 대피한다. 빗물도 독에 오염되었다. 시골에 사는 나우시아 고모는 소를 밖에 둘 수 없다. 땅도 오염되어 소가 풀을 먹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 그리고 버섯을 따러 가면 안 된다. 버섯이 방사선을 특히 많이 쬈기 때문이다.

86년도의 아이들은 어떻게 될까? 20~30년 후에 그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사람들은 우리를 체르노빌 세대라고 부른다."


"움켜쥔 손가락을 빠져나가는 모래가 더 고운 법"

아이의 눈으로 진행되는 이 만화는 당연히, 왜 이러한 불편과 불안을 겪어야 하는지, 어른들이 줄 설 때마다 비판하고 엄마 아빠가 밤마다 속삭이는 "이 따위 상황"의 실체가 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무지한 소녀의 표현 속에서야말로, 공산 체제가 저물기 시작하는 폴란드의 '혁명 전야' 기운이 여실하게 드러난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 마르지는, 전에는 숨어서 정부를 비판하던 어른들이 이제는 대놓고 비판한단 사실을 예민하게 포착한다. 세상은 변해가는 중이며, 일곱 살 어린아이에게도 보이는 것이다.

변화는 비단 마르지 외부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마르지는 갖고 싶은 걸 절대 손에 넣을 수 없는 사회에 대해 의문을 느끼며, 매우 솔직하게 속물적인 욕망을 고백한다. 2권 '소유냐 존재냐'라는 꼭지에서 마르지는, 가끔 부모님과 함께 가는 자본주의의 상징인 대형 마트의 원형으로 보이는 '페벡스'를 찬양한다. 가격이 비싸서 원하는 물건을 살 순 없지만 "인형처럼 멋지고 친절한" 가게 점원들과 깔끔한 내부 인테리어는 마르지를 진정으로 감동시킨다.

마르지는 우리 엄마 아빠도 일을 열심히 하는데 왜 자신에겐 청치마나 인형이 없냐며, 누구에게나 공평한 하느님이 계시다면 "지금 당장" 나를 도와달라고 소리친다. 일부 어른들이 가진 이상과 이념에 대한 고민과는 상관없이, 불평등과 물자 부족이 만연한 '현실'에서 자란 이 소녀는 자본주의적 가치를 알아서 체득하고 있다.

ⓒ세미콜론
<마르지>의 재미는 여기에 있다. 역사를 설명해 주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살아간 작은 인물의 삶과 세계관에 '스쳐 간' 사건의 파장들을 조립해 들려주는 것. 파업과 계엄령, 체포, 시위 등 폴란드를 뒤흔든 사건들의 중앙에 있진 않았지만 그것이 진행되는 양상을 목격하고 그 일들 때문에 일상에서 크고 작은 곤란을 겪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들 목소리로 직접 전해주는 것.

평범한 이들의 삶은 거대한 기류에 휩쓸리기도 하며, 이 거대한 변화를 만들기도 한다. 이들의 목소리로 육화된 역사는 더욱 강하고 질기며, 유의미하다. 임지현의 표현을 빌리자면, "움켜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는 주먹 속에 남아 있는 모래보다 더 곱게 마련이다."

또 하나. 평범하고 담담한 <마르지>가 '걸작 르포 만화'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산주의 시절의 폴란드 일상사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스스로 반공 '운동'을 할 때 정부로부터 일방적으로 반공 '교육'을 받아야 했던 우리에게 공산주의 사회란, 그것도 소련이 아닌 중부 유럽의 작은 나라란 존재하지 않거나 관심을 가져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던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사회주의가 실제 현실 속에서 어떻게 작동했는지 알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지>는 사회주의를 대안으로 외치는 사람에게도, 사회주의 체제 하의 삶이 우리가 겪은 삶과 아주 달랐다고 착각하는 사람에게도 중요한 고민거리를 던져 주는 자료가 될 수 있다.

급박한 내용이 전개될 3, 4권을 암시하듯, 2권의 마지막은 '솔리다르노시치(연대노조)'에 대한 얘기로 끝난다. 마르지는 1년 넘게 전개된 전시 상황 속에서 많은 공장이 파업을 했고, 그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감옥에 갇히거나 죽었다면서 사람들이 이제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다른 방법이 시위를 택했다고 말한다. TV 뉴스를 보지 않는 '침묵시위', 뉴스 시간에 30분 정도 바깥 산책을 하는 '산책시위' 등이다.

마르지는 사람들이 지금껏 참아왔던 생각을 드러내러 거리로 나간다며, 이제 세상을 바꿀 준비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콧수염 아저씨", "정부 사람들만 빼고 누구나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묘사와 함께 바웬사가 등장한다. 그가 외친다.

"우린 끝없이 긴 줄을 서는 것도 물자 부족도 텅 빈 냉장고도 이젠 더 이상 못 참는다. 우리에게 많은 것을 바라면서 해주는 것은 없는 정부에 반대한다. (…) 우린 단지 자유를 원한다! 우린 정상적으로 존엄하게 사고 싶다. 이게 지나친 바람인가?"

그 이후로 20여 년이 흐른 지금, 폴란드 사람들은 바웬사가 외친 대로 '존엄하게' 살고 있을까? 인민공화국 시절엔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실업'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됐고, 일차적인 물품이 지급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힘들어졌다. 그러나 경제 지표와 수치들을, 단순히 어떤 체제가 더 우월한지 혹은 무엇이 더 인간의 보편적 행복에 기여하는지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체제가 어떻든 인간의 삶이란 똑같은 거라고 냉소해서도 안 된다.

다만 어떤 '체제'에 대해서든 진짜 관심을 갖는 방법은 그 체제 속에서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결론은 내릴 수 있으리라. 특히 모든 종류의 작가들이라면 말이다. 우리 만화는 지금 어떤 목소리를 듣고 있는가, 어떤 기록을 남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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