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유럽
오스발트 슈펭글러가 "서구의 몰락"을 예감했던 것은 1917년이었다. 이성과 자유를 근간으로 하는 고전 문명의 축이 동요하고 있다고 본 그는 서구 문명의 생존력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되었다. <서구의 몰락(The Decline of the West)>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온 그의 저작이 출간된 지 거의 1세기 뒤, 유럽은 지금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 속에 흔들리고 있다.
유럽은 과연 어디로 갈 것인가? 지난 1000년의 시간 속에서 축적해온 문명의 저력은 이 위기를 이겨낼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주저앉아 문명의 침체기 속으로 빠져들 것인가? 유럽의 운명은 단지 유럽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리적 개념을 넘어선 인문학적 개념으로서의 유럽은 우리들에게도 중요한 지적 원천이자 문명적 진보를 위한 기초이기도 하다.
그런 까닭에 유럽의 문명사를 점검하는 것은 21세기 지구촌의 운명을 가늠해보는 작업과도 직결된다. 이런 즈음에 나온 두 권의 책은 우리에게 역사를 보는 시선 그리고 그 역사를 정리해 내는 능력에 대해 많은 충격과 지적 자극을 준다.
유럽 문명사의 고전 그리고 이주와 발전의 논리에 대한 연구
크리스토퍼 도슨의 <유럽의 형성>(김석희 옮김, 한길사 펴냄)은 원저가 1932년에 나온 이후 유럽사 연구에 고전적인 위치를 차지해온 책이다.
▲ <유럽의 형성>(크리스토퍼 도슨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 펴냄). ⓒ한길사 |
유럽의 탄생과 그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히더의 책을 우선 읽고 그 토대 위에서 도슨의 저작을 독파하면 전체적인 구조가 만들어질 것 같지만. 순서를 그 반대로 잡는 편이 이 두 책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최대한 종합할 수 있는 방법이 된다. 이유는 명확하다. 도슨의 <유럽의 형성>은 로마 제국의 붕괴와 함께 전개된 고대 세계의 해체 이후 만족의 등장과 지중해 패권의 변화, 비잔틴 제국, 이슬람 제국, 카롤링거 왕조 체제를 통한 유럽의 형성이라는 전체 역사의 줄기를 치밀하게 잡아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초 위에, 히더의 책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만족의 이주와 그 내적 동력의 변화, 제국과의 상호 관계에서 어떻게 이들 만족이 지배하고 있는 유럽 대륙의 정치 경제적 근거지가 만들어지게 되었는지를 보다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물론 두 책이 유럽사를 보는 관점이 같거나 저술 의도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도슨이 유럽사의 내면을 관통하는 정신사에 대한 기술에 초점을 맞춘 한편, 히더는 유럽 문명의 계승자로 등장하는 만족의 실체와 이들의 이주, 자체적 발전의 동력에 관심을 두었다는 점에서 두 책은 의미 있는 하나의 체계로 기능할 수 있다.
중세 역사 해석의 탁월한 명저
크리스토퍼 도슨은 아널드 토인비, 슈펭글러와 동시대 인물로서 이들과 마찬가지로 서구 문명의 과거와 미래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중세 역사를 파고들었다. 그의 책은 한 마디로 탁월하다. 중세 역사 전체를 조감하는데 이만한 저서가 있을까 싶게 그는 유럽 역사의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 어떤 관련을 가지고 등장하고 소멸하면서 유럽의 문명적 토대를 만들었는지 능수능란하게 다루어 나간다.
그는 "유럽이 오랜 세월에 걸쳐 진행된 역사적 진보와 정신적 발전 과정의 결과물"이라면서 특히 기독교와 이슬람의 역할에 주목한다. 이는 그가 가지고 있는 종교에 대한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과거의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일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는 논지에서 이런 접근을 시도한다.
그래서 그는 지중해의 전체 문명권이 어떻게 라틴적 요소와 그리스적 요소로 분할되어 갔고, 기독교와 게르만적 요소가 결합되어 갔는지를 종횡무진으로 분석, 정리해준다. 이와 함께 이슬람의 등장에 대해서도 비잔틴을 중심으로 한 서구 헬레니즘의 지배에 대한 동방의 응답이라고 압축한다. 그런 까닭에 이러한 그의 문장은 의미심장하다.
"이슬람의 출현은 동방과 서방 사이에서 1000년 동안 계속되어온 상호 작용의 마지막 행위였고 셀레우코스 왕조가 몰락한 이후 차츰 헬레니즘 세계를 잠식해온 오리엔트 정신의 완전한 승리였다. 무함마드는 서방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도전에 대한 동방의 응답이었다."
크리스토퍼 도슨의 책은 이 시기 유럽이 가지고 있던 동방에 대한 편견이 존재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서로마 제국의 전통만 고집한 채 비잔틴 문명을 배제해버렸던 과오도 저지르지 않는다. 그는 이슬람의 정신적 저력에 대해 깊이 주목하고, 비잔틴 문명의 그 격렬한 변천의 역사를 서유럽과 이슬람, 슬라브의 움직임과 함께 생동감 있게 펼쳐낸다.
그래서 그의 책을 읽고 나면 머릿속에서 문명의 인문 지리가 명료해지는 지적 즐거움을 얻게 된다. 또 그렇기 때문에 그의 책 내용을 압축해서 정리하는 일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워낙 방대한 지적 자산을 풀어내고 있기 때문에 일독을 권하는 방법 외에는 없다. 이런 그의 유럽 문명사에 대한 해석의 핵심은 이렇게 표현된다.
"유럽 문화는 더 발달한 이슬람 문명의 그늘에서 성장했고, 중세 기독교 세계는 비잔티움 세계보다 오히려 이슬람 문명을 통해 그리스 과학과 철학의 유산 가운데 자기 몫을 되찾을 수 있었다. 십자군 시대가 끝나고 몽골족의 침입이라는 대참사를 겪은 뒤인 13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유럽 기독교 문명은 이슬람 문명과 비교적 대등한 지위를 얻기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는 유럽의 기독교 세계가 문명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을 자연의 법칙처럼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유럽이 문명의 주도권을 획득한 것은 르네상스가 시작되고 유럽 국가들의 해상 활동이 크게 팽창한 14세기가 되어서였다."
이와 같은 그의 관점은 이슬람 문명사의 대가 마셜 호지슨이나 13세기에서 14세기 사이에 이슬람 문명권이 세계 체제에서 차지했던 구조에 대한 뛰어난 연구를 내놓은 자네트 아부-루고드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그리고 로마 제국의 몰락과 고대 세계의 종언을 만족의 침입이 개시된 5세기가 아니라, 이슬람과의 관계에서 유럽의 중심이 지중해로부터 유럽 대륙으로 옮아간 것이 7세기로 보는 앙리 피렌의 역사 해석과도 일치한다.
변방의 문명사적 역할에 대한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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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제국과 유럽의 탄생>(피터 히더 지음, 이순호 옮김, 다른세상 펴냄). ⓒ다른세상 |
로마 제국의 붕괴와 만족의 침략, 그에 따른 고대의 해체와 중세의 시작이라는 도식은 대체로 이렇게 정리되어 왔다.
"1000년기 중반 게르만족의 이주민이 로마 제국을 무너뜨렸다. 그 과정에서 각 나라의 선조격인 국가들이 출현했다. 뒤이어 또 다른 게르만족이 이주에 동참했고 슬라브족은 특히 유럽 국가들의 조각 그림 맞추기에 현저한 기여를 했다. 그러다 1000년기 말 스칸디나비아와 스텝 지역의 이주민이 나타나 유럽의 조각 그림 맞추기가 마침내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만족의 이주와 그 과정에서 나타난 약탈적 침략만으로는 로마 제국 붕괴 이후 이들이 문명의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하는 것을 설명하기 어렵게 된다. 이주와 함께 "만족 유럽의 내부에서 진행된 정치, 경제, 사회적 변화"를 함께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 서서 피터 히더는 만족들이 로마 제국의 부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때로는 약탈, 때로는 제국 내부에 주거 요구 때로는 제국의 문명에 의한 만족 체제의 변화를 가져온 것을 설명한다.
한편, 피터 히더의 책은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유럽 만족의 역사를 상당한 비중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읽기 부담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동아시아의 중국과 주변 유목 기마 민족의 관계를 떠올려 읽게 되면 훨씬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이는 중원과 유목 제국의 상호 관계를 다룬 토마스 바필드의 <위태로운 변경>과 상당히 유사한 논리와 접근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동과 서, 모두 제국과 그 주변의 역사적 관계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를 가능하게 해줄 수 있지 않은가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그는 훈족의 침입과 같이 이주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이주와 함께 로마 제국의 문명과 접촉하고 제국의 압박 아래 만족들이 자체적인 역량을 길러낸다는 점에서 만족내부의 발전이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제국의 변화와 만족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결론짓는다.
"제국적 힘을 행사하면 그 영향을 받은 종족도 그에 상응하는 반작용을 일으켜, 종래에는 제국의 칼날을 무디게 할 정도로 스스로를 재편성하게 된다는 논리다."
이는 마치 토인비의 "문명의 프로데타리아" 이론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문명이란 결국 한때 중심적 패권을 지닌 세력이 있는가 하면, 그 변방에서 새로운 힘을 축적해서 중심에 나서는 세력이 있게 마련이다.
지금의 거대한 전환기에서 읽는 문명사의 의미란?
오늘날의 세계는 지난 500년간 유럽의 문명적 패권이 중심이 되어 전개되어 온 결과였다. 그러나 유럽 문명의 변방이라고 여겨진 지역과 세력은 새로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으며 그것은 이제 다른 세계에 대한 갈망과 요구로 집약되어가고 있다. 지금 유럽의 동요와 미국의 충격적 위기는 이러한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크리스토퍼 도슨은 그의 책을 마무리하면서 이렇게 희망한다.
"서유럽 문명의 통일성이 지난 4세기 동안의 세속 문화와 물질적 진보에만 전적으로 의존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히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유럽에는 그보다 더 깊은 전통이 있다. 유럽의 형성에 이바지한 근본적인 사회적, 정신적 원동력을 찾아내고 싶으면, 우리는 인문주의 이전으로 돌아가서 현대 문명이 거둔 피상적인 승리의 이면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에게는 이것이 초대 교회를 전승한 수도원 전통을 가진 기독교다. 그러나 그가 모든 인류 문명의 정신적 자산이 여기에만 국한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어느 한 쪽으로만 질주해오면서 그것을 발전이라고 여기는 생각에 제동을 걸고, 자신들이 망각해버린 정신적 자산을 발견하라는 것이다.
주류 문명권의 변방에 존재하면서 도리어 새로운 발전의 동력을 축적해가는 문명의 역사는 오늘도 되풀이 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인류의 운명을 감당할 수 있는 문명적 자산의 공급을 요구하고 있는 중이다.
유럽과, 그 유럽의 자식인 미국의 흔들리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문명적 대안을 이뤄내야 할 것인가? 실로 중대한 지점에 우리는 와 있다. 지금은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거대한 전환의 국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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