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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쁜 서평'을 옹호하는 까닭은?

[1주년 특집] 최수태, 서평을 전복하다

'좋은 서평'과 '나쁜 서평'

나는 양보할 수 없는 전제를 가지고 서평을 쓴다. 서평을 읽은 독자가 그 책을 읽게 만들거나, 내가 그 책을 비판하는 전제 혹은 논리를 제공하고 있는 또 다른 책을 읽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이 점을 밝혀야만 하겠다. 나는 어찌되었건 책을 읽게 만드는 서평을 쓰고자 노력한다. 이 글의 나머지는 그 이유와 방법에 대한 설명이 될 것이다.

'좋은 서평'을 쓰는 방법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우선 책의 내용을 충실하게 소개한다. 소설이면 줄거리를 요약하고, 비소설이면 핵심적인 논증이나 강조되는 문장과 논리 구조 등을 추려낸다. 그런 것들을 최대한 맛깔나게 옮겨놓은 후, 필요하다면 독자로서 아쉬운 점이나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 등에 대한 짤막한 언급을 하면서 마무리 짓는다. 일반적인 서평은 대체로 이런 공식 하에 작성된다고 할 수 있겠다.

방금 작은따옴표로 '좋은 서평'이라는 개념을 강조한 것은 결코 비아냥거리거나 반어적인 효과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서평이 저러한 방식으로 작성되며, 나 역시 그렇게 쓰인 서평들로부터 새로 나온, 혹은 예전에 나왔지만 내가 알지 못하던 책들에 대한 정보를 얻고 찾아서 읽는다.

문제는 세상이 그렇게 소개될 수 있는 책으로만 가득 차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어떤 책들은 소개되어야 하지만, 어떤 책들은 소개되면서 또 비판되어야 한다. 첫 번째의 책들은 앞서 말한 '좋은 서평'의 대상이 될 수 있고 그래야 마땅하다. 하지만 두 번째의 책들은? 나와는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혹은 특정한 문제를 바라보고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나로서는 비판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두 편의 서평만으로 간단히 매도되어서는 안 되는 그런 책들은 어떻게 다루어져야 하는가?

편의상 후자에 속하는 서평을 대조적인 차원에서 '나쁜 서평'이라고 해보자. '나쁜 서평'은 '좋은 서평'과 같은 방식으로는 쓰일 수 없다. 왜냐하면 비평을 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기 때문에, 주어진 지면 안에서 책의 내용을 충실히 소개한 후 한 두 마디 첨언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쁜 '좋은 서평'일 뿐, 좋은 '나쁜 서평'은 되지 못한다. '나쁜 서평'은 대상이 되는 책에 대해 비판적이기에, '좋은 서평'보다 훨씬 더 그 책의 본질에 다가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종류의 것은 훨씬 더 쓰기 어렵다. 명백히 서평자가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음에도 굳이 그런 노력을 기울이기까지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았기 때문에, '나쁜 서평'을 쓰고 싶었던 것 같지만 '좋은 서평'에 안주하는 경우를 우리가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는 것도 그것 때문이다. 가령 프레시안북스 제49호에 실린 장정일의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엄기호 지음, 푸른숲 펴냄)에 대한 서평을 예로 들어 그 사례를 검토해보자.

▲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엄기호 지음, 푸른숲 펴냄). ⓒ푸른숲
다독가이며 서평가로 유명한 장정일은 자신의 서평에서 그 명성 그대로 책의 내용을 충실히 전달한다.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대목에서 틈틈이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집중력을 유지하게 만드는 능력은 역시 명불허전이다. 하지만 그 서평의 마지막 문단에 다다르면 독자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떠나지 않았던 한 가지 불만은, 혹시 엄기호가 청년 세대의 언어에 귀 기울이는 것만으로 기성세대의 책임을 면피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아닌가, 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가르치고 꾸짖는 엄한 '아버지 모드(mode)'에서, 아이의 말을 잘 들어주는 자애로운 '어머니 모드'로의 전환이 세대론의 해결이요, 청년 세대의 고민을 덜어주는 것이라는 순진 소박한 환상이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에 깔려 있지는 않았을까?

이 "한 가지 불만"은 이 책의 구도 전체를 허물어뜨릴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지적이다. 엄기호의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는 이른바 '20대 논객' 따위가 아닌 평범한 대학생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실천하는 책이다. 하지만 그 목소리를 수집하고 전달하는 저자 엄기호 자신 역시 '평범한 20대'는 아니다. 즉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는 스스로의 지향점을 배신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책이기도 하다.

기성세대에 속하는 엄기호가 '귀 기울여주는' 방식으로 젊은이들에 대한 기성세대의 책임을 대속하고 있는 것은 아니냐는 질문을 통해 장정일은 바로 그 지점을 지적한다. 장정일의 이와 같은 비판을 받아들인다면, 엄기호는 학살당하는 원주민의 토착 언어를 연구하는 백인 선교사가 되어버린다.

더구나 이 질문은 '말하는 자'와 '말하여지는 자' 사이의 간극이라는, 대단히 보편적이고 중요한 문제를 그 배경으로 깔고 있기도 하다. 그 어떤 경우에도 '말하는 자'는 그가 타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한, 혹은 스스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을 타자화하는 한, '말하여지는 자'를 대변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입장을 견지할 때, 억압받는 주체들의 진정한 (특히 언어적) 해방은 한없이 지연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문학 활동은 사르트르가 냉철하게 자아비판하였듯이 한낱 '중간계급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전락한다는 비판 역시 가능하다.

물론 그 누구도 장정일에게 이런 논점에 입각하여 서평을 쓰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이와 같은 선택의 기로에서 '좋은 서평'을 쓰고 그 뒤에 한 마디의 아쉬움을 덧붙이는 글쓰기 방식을 '옳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기회의 낭비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독자들을 더 깊은 논의의 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기회, 엄기호라는 저자와 장정일이라는 서평가가 정신 대 정신의 충돌을 통해 또 다른 불꽃을 뿜어낼 수 있는 기회가 '좋은 서평'의 형식 아래에서 낭비되고 있는 것이다.

왜 '나쁜 서평'인가?

우리는 맥락이 실종된 사회에 살고 있다. 오늘은 이런 이슈가 뜨고 내일은 이런 화제가 묻혀버린다. 기자들은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순위를 보고 기사를 쓴다. 그 기사를 읽는 누리꾼들은 '언론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이렇다'고 자신들의 경향성을 재확인한다.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는 이슈를 검색하는 것이 아니라 검색을 이슈화한다. 그 어떤 논쟁과 사회적 담론도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3시간 이상 지속될 수 없다. 사회적 담론의 맥락은 여자 아이돌의 하의와 함께 아찔하게 실종되어버린다.

그래서 서평이 중요하다. 특히 '나쁜 서평'을 잘 쓰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왜냐하면 좋은 '나쁜 서평'은 잘 쓰인 '좋은 서평'과 마찬가지로, 결국 독자들이 책을 읽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동시에 '나쁜 서평'은 서평자 스스로의 개인적 시각과 입장을 명확하게 드러내고, 그 책과의 대립각을 잃지 않는다. 다소 과격하게 말하자면, '나쁜 서평'은 모든 맥락이 0과 1로 분해되어 인터넷에 흩뿌려지고 있는 지금,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담론 형성의 방식이다.

지금보다 조금 앞선 시대에는 영화 평론이 주로 그런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이, 기껏해야 다운로드 받은 영화를 두고 '스포일링' 당하기 싫다며 20자 평을 제외한 그 어떤 해설도 읽지 않으려 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보다 전에는 이른바 사회과학의 시대가 있었다고 하나, 그것이 어떤 형태였을지 현재를 살아가는 나로서는 도저히 실감하지 못하겠다. 그 시절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맥락마저도 지금의 내게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잘 편집되고 제본된 한 권의 책보다 단단한 것은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은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서평은 글을 쓰는 이가 글을 읽는 이와 최소한의 공통된 맥락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으로 남은 분야다. 독자가 그 책을 읽었거나 읽게끔 한다면, 바로 그 한 권의 책을 통해 그와 나는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서평을 바라보는 이와 같은 시각은 이른바 기존의 '좋은 서평'과는 다른 차원을 형성한다. 특히 서평자와 저자의 위상에 큰 차이가 있다. 어떤 책을 소개하고자 할 뿐이라면 나는 굳이 그 저자의 사고의 심층까지 들어가 봐야 할 필요가 없다. 그저 좋은 책을 좋게 설명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책을 독자들에게 소개하면서 동시에 비판하고자 한다면, 나는 '좋은 서평'을 쓸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어야만 한다.

'서평자는 책을 읽고 느낀 바를 솔직하게 전달하면 된다'거나, '독자들이 새로운 책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나는 그런 입장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 역시 '나쁜 서평'보다는 '좋은 서평'을 통해 더 많은 정보를 얻곤 한다. 대부분의 경우 '나쁜 서평'은 그냥 나쁘다. '좋은 서평'은 못해도 중간은 간다.

가령 어떤 책 한 권을 모셔놓고 정작 그 책의 내용도 제대로 이해하고 설명하지 못했으면서 자신만의 인생철학을 늘어놓는다거나, 흔히 말하는 '주례사 비평'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억지로 뭔가 꼬투리를 잡고 있는 티가 난다거나, 저자의 논점을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독자라는 지위를 이용해 훈계를 하고 있을 때, 그런 '나쁜 서평'들은 그냥 나쁜 서평일 뿐이다. ('프레시안 books'에 이런 서평들이 적지 않은 것은 반대로 이 매체가 새로운 서평과 담론을 위한 실험의 장이라는 뜻으로 좋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좋은 서평'들은 어쨌건 정보 전달의 기능만큼은 비교적 확실하게 수행하므로 평균적으로 볼 때 더 낫다.

하지만 담론계 혹은 담론이 오갈 수 있는 공통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에서, 앞서 언급한 장정일의 것과 같이, 분명 '나쁜 서평'을 잘 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서평'의 형식 속에 안주하는 것은 일종의 직무유기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쓰인 '좋은 서평'들은 더 이상 좋은 서평이 되지 못한다.

이미 독자들은 그 서평에서 어딘가 그 책의 핵심을 건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하지만 서평자는 그에 대한 추가적인 논의 없이, 그저 '이러저러한 점이 아쉽다, 의문이 있다'면서 슬쩍 지나가버린다. 이와 같이 작성된 서평들은 최악의 경우, 독자로 하여금 본인이 읽지도 않은 책을 읽은 것 같은, 읽지도 않은 책을 심지어 반박까지 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출발 비디오 여행> 같은 TV 프로그램에서 영화의 결말까지 모두 보아버린 주말의 시청자가 그 영화를 '안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자신의 글을 읽은 이가 어떤 '실천'을 한다는 상상은 모든 필자들을 흥분시킨다. 서평을 접한 독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일단 그 책을 찾아서 읽는 것이다.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지점을 발견해놓고도 살짝 '아쉬움'만 남기는 방식, 독자에게 그 책을 읽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대신 그저 서평자와 저자 간의 감정 싸움으로 귀착되고 마는 그런 방식으로는 그 어떤 '실천'도 이끌어낼 수 없다.

'좋은 서평'은 좋다. 하지만 나쁜 '좋은 서평'은 독자를 소외시킨다. 한편 그에 대한 반발로 쓰인 '나쁜 서평'들은 대부분 실패한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어떻게 '나쁜 서평'을 제대로 쓸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해보아야 한다.

'나쁜 서평' 방법론

책은 언어를 담는 그릇인데, 서평도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아무리 짧게 요약하고 핵심만을 추려낸다고 해도 서평을 읽는 경험은 책을 읽는 것에 비교하면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대부분의 서평자들은 자신이 최선을 다해 책을 읽고 표현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 서평은 어쨌건 논의의 대상이 되는 책에 대해 종속적이며, 부수적이고, 책의 내용을 전부 전달하지 못한다.

만약 누군가가 '좋은 서평'을 쓰고자 할 뿐이라면 이와 같은 제약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좋은 책이 존재한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알리는 것이 관건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그 짧은 서평에 다 담기지 못한 다른 내용들을 궁금해할 것이고, 그래서 책을 손에 들고 읽기 시작할 것이며, 서평자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하지만 '나쁜 서평'을 쓸 때에는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특히 신간을 다룬다면, 서평자는 독자가 읽지도 않은 책을 독자에게 소개하면서 그것을 비판하는 자신의 논리마저 납득시켜야 한다. 스스로의 서평이 일방적인 매도 혹은 왜곡이 되지 않도록, 자신이 허수아비 논증을 하는 누군가가 되어버리지 않도록 역동적인 균형감각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그런 서평을 쓰기 위해 노력해왔다. 단순히 책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책의 싸움을 보여주고 어느 한쪽의 편에 서게 함으로써 독자들이 진정으로 개입(engagement)하게 만드는 서평이 가능한지, 그 가능성을 실천적으로 입증할 수 있을지가 나의 관심사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결과는 때로는 만족스럽고 때로는 그렇지 않기도 하다.

여기서 스스로 생각하는 '잘 쓴 서평' 같은 것을 거론하는 것은 다소 지나친 자만심의 발로로 여겨질 수 있을 것이므로 생략하기로 하고, 대신 내가 생각하는 '나쁜 서평'의 작성 원칙만을 설명하기로 한다. 한 문장으로 요약해서 말하자면, 서평자는 코끼리를 더듬는 장님이다. 그리고 '좋은 서평'을 쓰는 사람과 달리, '나쁜 서평'을 쓰는 사람은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설명한 후 그 급소를 찔러야만 한다.

문제는 그 코끼리를 설명하는 형식이다. '좋은 서평'과는 달리, '나쁜 서평'은 긴 분량을 할애하여 책의 내용 전체를 그려낼 수가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책 전체의 내용을 소개해버리면 책 전체를 반박해야 하기 때문이다. 책은 거대하고 복잡한 지적·언어적 구조물이다. 한 권의 책을 제대로 논박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책 한 권, 혹은 그 이상이 필요하다. 적어도 하나의 서평에서 수행할 수 있는 작업은 아니다.

그래서 '나쁜 서평'은 곧 그 책을 최대한 꼼꼼하게 읽고 '급소'를 찾는 작업과 직결된다.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바로 그 논점을 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책의 주제의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어떤 문장, 단어, 문단, 혹은 논증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책을 읽는 것이다.

우리는 코끼리에 대해 모든 것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코끼리는 긴 코를 가진 동물이기 때문이다. 하마는 큰 입을 가지고 있고, 기린은 목이 길다. 물론 그렇게만 이야기하는 것은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지만, 그 도약을 하지 못한다면 나의 혹은 당신의 서평을 통해 독자와 저자가 만날 수 있는 가능성도 사라진다. 내가 저자와 만나 대화하고 갈등하고 화해하는 모든 과정을 연속극처럼 보여줄 수는 없다. 일종의 '영화적 순간'을 연출해 내느냐 아니냐에서 좋은 '나쁜 서평'과 나쁜 '좋은 서평'이 나누어진다.

성공적으로 쓰인 '나쁜 서평'은 바로 그렇게 담론의 장을 열어낸다. 비단 그 한 권의 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담론적 갈등에서 언제나 드러날 수밖에 없는 지점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작은 노력들이 겹겹이 포개져, 언젠가 모든 사람들이 안심하고 발 디딜 수 있는 담론의 장이 형성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나는 서평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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