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디로 '난리'가 났다. 쉽게 말하자면 과거 교사들이 학생들을 때리는 걸 금지했던 '선진국 영국'도 이제 그 한계를 절감하고 체벌을 허락한다고 하니 한국도 영국을 본받아 학생들을 때려야 한다는 것이다.
"英, 학생 체벌 전면 금지 '노터치 정책' 포기"(<동아일보>), "영국 13년 만에 학생 체벌 허용"(<중앙일보>) 등 마치 영국 교육계에서 학생들을 때리기 위해 '혁명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제목을 달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는 보수 언론의 새빨간 거짓말이다. 아니, '담대한 거짓말'이다. 거짓말이 아니라면 기자의 수준이 시궁창에 처박혀서 그런 거다. 영어 번역도 제대로 못하는 수준인 것이다.
교사가 학생을 때리다니
이번 영국 교육부의 결정은 오는 9월부터 교사에게 '적절한 힘(reasonable force)'의 사용을 허락한 것이다. 영국에서는 교사의 체벌, 성희롱 논란 때문에 교사와 학생 간의 신체 접촉을 일체 금지하는 정책을 유지해왔다. 그래서 학생들끼리 싸워도 교사의 호통만으로 말려야 했고 싸움이 심해지는 경우 경찰을 불러야 했다. 음악 악기를 가르칠 때나 운동을 가르칠 때는 물론 사고가 났을 때도 학생들에게 손을 대는 것은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근 영국에서 학생들 간 놀림과 폭력의 문제가 심각해지자 교사들에게 문제 학생들을 다스리기 위한 힘의 사용을 허락한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제멋대로 구는 학생을 교실에서 내보내기, 학생이 마음대로 나가는 것 막아서기, 다투는 학생들 사이에 서서 제지하기, 다투려는 학생의 길을 가로막기, 다른 학생 공격하려는 학생 팔로 억제하기 등이다. 이와 함께 학생의 손을 잡는 것, 힘들어하거나 침울해하는 학생들의 어깨를 팔로 감싸거나 등을 두드려 주는 것, 체육 시간에 운동을 가르치기 위해 손을 대는 것도 허용키로 했다.
동시에 영국의 교육부는 교사들의 권리와 이들에 대한 보호를 위한 조치도 동시에 내렸다. 학생에 의한 거짓 주장이나 그 가족들에 의한 비난이나 고발이 있더라도 교사는 즉각 징계 당하지 않도록 보호키로 했다. 문제가 생길 경우 교장은 3개월 이내에 혐의에 대한 조사를 마쳐야 하고 허위 주장일 경우 이를 학교 및 교사의 기록에 남기지 않는 것을 명문화 했다. 또 교사가 무고를 당하는 경우 경찰을 부르는 것을 권하고 특히 허위 주장을 하는 학생의 경우 정학, 퇴학은 물론 형사 처벌이 가능토록 했다.
그런데 교권의 확립과 교실의 질서 유지를 위해 제시된 이 '새롭고 분명하며 세밀한 지침'에 체벌을 허용했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체벌은 물론이고 '간접 체벌'을 허락한다는 이야기도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영국인들의 머릿속엔 '체벌'이란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교사가 학생을 때린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인 것이다. 영국에서는 교사가 학생의 몸에서 상처를 발견하는 경우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 만약 부모가 자녀를 때린 것이 확인될 경우 그 부모는 처벌 받는다.
▲ 한 학생이 찍은 학교 체벌 현장. ⓒ뉴시스 |
그들이 너무나도 '저질'인 이유
이번 '영국 노터치 정책 폐기' 오보는 언론의 왜곡, 호도, 거짓의 좋은(?) 사례라고 말하고 넘어가기엔 그 내용과 의도가 너무 저질이다. 이 왜곡 기사들의 진짜 의도는 체벌 전면 금지를 정책으로 내세운 진보 성향의 교육감들이 취임 1년에 즈음하자 이들을 때리기 위한 것이라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진보와 보수가 싸우는 것에 대해서는 말릴 생각 없다. 하루 이틀 싸웠나.
문제는 진보 성향의 교육감을 때리기 위해서라면 학생들, 어린 아이들이라도 때려야겠다고 나서는 저 어른들의 꼴이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교총)는 11일 이 기사들이 나오자 다음날 '짜고 치는 고스톱'이 연상될 만큼 잽싸게 성명서를 냈다. "학생 인권 조례 및 체벌 전면금지를 시행하는 진보 교육감들은 세계 교육 흐름에 역주행하는 부분에 크게 자성하고 체벌금지 정책을 폐기한 영국 교육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선생의 탈을 쓰고서는 '학생들을 때릴 법적 권리'를 줄기차게 주장해왔던 교총의 어처구니없음과 뻔뻔스러움을 익히 보아왔기에 이번 주장에 크게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학생들을 구타하는 것이 자신의 권리라고 주장하는 이들 교사 집단을 바라보면서 우리나라가 제대로 되려면 참 멀긴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 가짜 기사에 놀아나 아이들을 기어코 때려야겠다고 나서는 것은 교총뿐만이 아니다. 한나라당도 때려야겠단다. "좌파 교육감들의 비뚤어진 교육 철학에서 탄생한 '체벌 금지 정책'"은 "교육 현장을 황폐화시키고, 교권을 추락시켰"기 때문에 "영국의 교육 정책 전환은 우리나라 좌파 교육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것이다.
국회 안에서 주먹질 하고 밖에서 맥주병 던지는 것까지는 '원래 그런 사람들이지' 하겠는데 아이들까지 때려야 한다는 데엔 내 짧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엉터리 저질 번역 기사의 선율에 맞춰 우리나라의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과 50만 교사를 대변하는 교총이 철퍼덕 끌어안고 브루스를 춘다. 그 이름도 희한한 '매질 브루스'를.
우리나라의 교육이,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이 또 우리나라의 언론이 한 세트가 되어 이처럼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 솔직히 믿겨지질 않는다. 21세기 들어선 지금, 교육자들이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을 때릴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또 진보 교육감 엿 먹이기 위해서라면 기필코, 그 어린 아이들을 꼭 때리고야 말겠다는 언론인과 정치인들이 있다. 이들은 우리 사회 최고의 엘리트들 아닌가. 인간들이 어쩌면 이렇게 저질스러울 수가 있는가.
지난 12일 이들 '저질 기사'를 접한 나의 반응은 '이게 말이 돼?'였다. 그래서 영국에 거주했던 지인에게 "영국에서 선생이 학생 때립니까?" 물었더니 간단히 "아뇨"라고 답하는 것이었다. 며칠 후 "'영국 체벌 허용' 보도 사실 아니다"(<경향신문>), "심각한 오보"(<미디어오늘>) 등의 기사가 나왔다.
영국 교육부 홈페이지에 "벌을 주기 위해 물리력을 사용하는 것은 언제나 불법(It is always unlawful to use force as a punishment)"이라는 규정까지 찾아서 보도하면서 시비가 일단락되는 느낌이다. 그러나 왜곡 기사만 보고 이를 기정사실화 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아님 말고'식의 저질 기사가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자가 아니라 예술가?
우리는 언론을 통해 세상을 본다. 그러나 사건, 사고가 있을 때 언론을 통한 이의 '완벽한 재생'이란 불가능하다. 기자의 시선과 입장과 태도와 경험이 사건의 서술에 개입하기 마련인 것이다. 그래서 똑 같은 사건에 대해 때로 언론사마다 관점이 다른 기사가 나오기도 하고 또 이 때문에 언론사 또는 기자로서의 자질 시비가 일기도 한다.
그런데 이번처럼 전혀 엉뚱한 내용을 창조해서 기사로 내보내는 경우는 그 자격이 심하게 의심된다. 사실 <중앙일보> 등이 인용한 기사는 영국의 <데일리 메일>의 것인데 이 신문사는 이번에 도청 파문으로 폐간된 루퍼트 머독 소유의 <뉴스 오브 더 월드>와 별다를 바 없는 황색 언론, 흔히 말하는 '찌라시 언론'이다.
그런데 이른바 '정론지'라고 우겨대는 우리나라의 신문들이 영국의 찌라시 언론의 번역 기사를 내면서 이것마저 왜곡한 것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이들 '정론지'들의 수준은 영국의 '찌라시'보다도 못하다는 것이 이번에 밝혀진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이들 '정론지'들은 제목도 과감(?)하다. "다시 사랑의 매 드는 영국 교사들"(<국민일보>)에서는 사명감과 감동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런 가짜 기사에 놀아나 "학생 체벌 금지 정책 폐기"(YTN)라는 헛발질을 한 방송사도 있다. 특히 <중앙일보>에 나는 감탄했다.
"문제 학생 '적절히 때리기로'"(중앙일보 인터넷판)라는 제목을 보라. 왜곡에 상상력을 더해 거짓말이라는 침으로 버무린 후 이걸 다시 뒤집어 튀겨서 기사로 내 놓은 것이다. <중앙일보>의 창작력은 한마디로 발군이다. 그 예술적 생산력은 놀랍기만 하다. 깡통 스프 쌓아놓은 모습을 예술 작품이라고 내놨던 앤디 워홀을 감탄케 할 반전의 파격이다. 4분 33초 동안 피아노 의자에서 앉아 미동도 않다가 일어서는 피아노 연주곡 '4분33초'를 작곡한 미국의 작곡가 존 케이지가 극찬해 마지않을 '작품'이다.
'체벌'이 아니라 '폭행'이다
▲ 인천의 한 초등학교에서 초등학교 2학년 학생이 교사에게 폭행을 당했다. 이것이 '사랑의 매'가 남긴 피멍이다. ⓒ프레시안 |
상당수 교사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폭행'을 '체벌'이라 주장하면서 이는 '올바른 교육'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고 마지막 수단이라고 강변한다. 그리고 그들의 '폭행'을 '사랑의 매'라고 강변한다.
어디에서 가져온 논리인지 모르겠으나 '사랑의 매'란 존재하지 않는다. 혹시 변태성애자들의 논리인가. 사랑하는데 따귀를 왜 때리나. 사랑하는데 왜 비명 지르는 아이를 빗자루로 매질하고, 주먹으로 때리고, 교실 바닥에 머리박기 시킨 후 발로 차 뇌진탕 일으키게 하는가. 집에서 '가족 사랑'도 그런 식으로 하는가.
때리지 마라.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그냥 외워라.
'사랑의 매'가 아닌, '사랑'으로 가르쳐야
학생을 가르칠 때 교사에게 필요한 것은 매질이 아니라 사랑이다. 동아대학교 임석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존경(respect)이란 쌍방향이어야 하는데 우리나라 학교에서는 언제나 일방향이었다. 교사가 학생들을 존중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에 대한 존경만 강요해왔다. 학생을 존중하지 않으면 학생도 교사에 향해 존경심을 가질 수 없다."
오랜 세월 학생들이 교사들에 대해 보였던 존경심도 사실은 권력을 가진 쪽이 교사였기에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한 방편일 뿐이었는데 계속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복종만을 강요한다면 이들 간의 관계는 개선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주변엔 존경할 수밖에 없는 선생님들이 있다. 학생들과 항상 웃으며 대화하고 어린이날엔 직접 만든 무언가를 아이들에게 일일이 선물하며 스승의 날엔 편지도 마다하는 선생님들이 있다. 그런 선생님들께 나는 그저 감사하며 한없는 경의를 표하게 된다.
선생은 '사랑의 매'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사랑'으로 가르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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