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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거리의 노숙인을 혐오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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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거리의 노숙인을 혐오하는가?

[도시 주인 선언·7] 거리 노숙인, 공공 공간, '도시에 대한 권리'

"신은 자연을 만들었고, 사람은 도시를 만들었다."

도시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고,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에 의해 끊임없이 변모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이 만든 도시는 과연 사람을 위한 곳인가? 도시를 만드는데 기여한 사람은 정작 도시가 제공하는 편익을 제대로 누리고 있는가?

<프레시안>은 진보적 도시 연구 집단 한국공간환경학회와 공동으로 '도시 주인 선언' 기획 연재를 진행 중이다. 현재 시민 열 명 중 아홉 명이 도시에서 거주하고 있다. 도시에 거주하지 않는 나머지 시민도 도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다. 이 기획은 도시의 거주자와 이용자는 누구나 차별 없이 평등하게 "도시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우리에게 아직 생소한 개념인 "도시에 대한 권리"에는 도시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평등하게 누릴 권리, 도시 공공 공간에 대한 자유로운 이용권, 도시 행정에 대한 참여권 등 도시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권리들이 포함된다. 또 이 안에는 자유롭게 무선 인터넷에 접속할 권리 등 최근에 새로 포함되었거나 되어야 할 권리도 있다. 다른 나라의 도시에서는 시민들의 당연한 권리로 인정되고 있는데도, 아직 우리의 도시에서는 생소한 권리도 있다.

매주 화, 금요일 두 차례씩 이어지는 이번 기획 연재를 통하여, 지금 대한민국의 도시에서 도시의 주인이어야 할 시민들이 과연 적절한 수준의 권리를 누리고 있는지, 당연한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침해받거나 무시되는 권리는 없는지,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배제되거나 소외되는 사람들은 없는지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기획을 통해 우리의 도시에서 도시 거주자나 방문자가 당연하게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양적으로, 질적으로 더 확장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편집자>


요즘 같은 가을밤
서울역 광장에서
우리는 아침을 기다리며
서로의 집이 되고 싶었다

대합실 안으로 들어가
한기를 피하고
온갖 부끄러움 감출 수 있는
따스한 방이 되고 싶었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도
우리는 날이 밝을 때까지
서로의 집이 되고 싶었다

(유창만, '밤이 되고 싶었다')


2010년 12월 세상을 뜬 거리 노숙인, 유창만의 시다. 노숙인의 애환이 그대로 느껴지는 이 시에서, 우리는 너무도 자명한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노숙인은 말 그대로 '거리'에서 서로를 다독여가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거리에서 노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정부에서 규정하는 노숙인은 "일정한 주거 없이 상당한 기간 거리에서 생활하거나 그에 따라 노숙인 쉼터에 입소한 18세 이상의 자"다. 그리고 시민단체가 주장하는 '넓은 의미의 노숙인'은, 정부가 규정한 범위에 "주거가 불안정한 모든 자", 즉 장기 거주 시설로 적당하지 않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나 친척·친구 집에 임시로 사는 사람 등을 추가로 포함한다.

그러나 노숙인의 범위를 어떻게 규정을 하든, 어느 정도로 확장을 하든, 가장 열악한 형태의 노숙은 역시 '거리 노숙'이다. 전국적으로 거리 노숙인의 수가 약 150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지금, 과연 '거리'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안에 있는 만남의 광장은 서울역, 회현역, 영등포 일대와 더불어 서울에서 거리 노숙인이 가장 밀집해 있는 대표적 공간이다. 그러나 서울메트로가 지하상가 개발의 일환으로 지난해 11월부터 공사를 시작하면서, 만남의 광장은 번듯한 공연장, 그리고 카페와 같은 상업 시설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이곳에서 생활하던 150여 명의 거리 노숙인은 주변으로 밀려났고, 종교 단체가 광장에서 급식을 나눠주던 모습도 서서히 사라져갔다. 게다가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 심야 시간에는 을지로입구역 지하 통로를 폐쇄하는 방안까지 추진함에 따라, 역 내에 노숙인이 상주하는 자체가 원천 봉쇄될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을지로입구역 안에는 "시민을 위한 공간입니다"라는 문구가 보란 듯이 걸려있다.

2010년 정부의 대대적 홍보가 있었던 주요 20개국(G20) 정상 회의의 여파는 거리로까지 이어졌다. 거리 노숙인을 표적으로 한 불법적 불심 검문은 기본이었고, 수많은 경찰들이 지하철역에 상주하며 공안 분위기를 조성했다.

게다가 보건복지부는 임대주택을 매입해 '그룹홈'을 제공하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른다. 아마도 G20 정상 회의를 통해 국가의 위상이 높아지는 과정에서, 거리 노숙인은 상당한 걸림돌이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인권 단체들이 비난했던 대로 G20 정상 회의가 '빈곤 감축'이 아닌 '빈곤 감추기'로 둔갑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공공 공간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 한겨울 서울역 대합실에서 추위를 피하는 노숙인. ⓒ뉴시스

거리는 공적인 공간, 즉 '공공 공간'이다. 다시 말해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이 바로 공공 공간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공공 공간이 갖는 기본 속성을 통해 이를 살펴보자.

공공 공간에는 공공성 담론이 녹아있다. 이때 공공성이라 함은 시공을 초월한, 그래서 보편타당한 개념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실제로 공공성 담론은 시대나 사회에 따라 끊임없이 변해온 개념이다.

가령 로마 시대의 공공 공간은 여성과 노예 계급을 제외한 소수의 시민들에게만 열린 공간이었고, 중세 시대 말 서양의 공공성은 부유한 시민사회에게만 보장되는 개념이었다. 요컨대 공공성 담론은 철저하게 사회적으로 '생산'되는 '유동적' 개념이었던 것이다.

공공성 담론이 갖는 속성에는 '편 가르기와 제재'가 있다. 공공성은 일차적으로 '우리'와 '그들'을 구분한다. 즉 공공성은 '공공'이라는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나눈다. 그리고 공공의 범주에 해당되지 못하는 '그들'을 '배제'함으로써, '우리'의 영역과 정체성을 공고히 한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에서 우리와 그들의 경계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바로 '자본'이다.

자본주의 담론이 글로벌 차원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지금, 도시 공간은 철저하게 '교환 가치'로 돌아간다. 공공 공간 역시 마찬가지인데, 자본주의 시스템에 일조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원으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만이 공공 공간에서 공공성을 담보 받을 수 있다. 그래야만 사회의 '우리'에 포함될 수 있고, 정당하게 '권리'를 내세울 수 있다.

이 때 노동 인구로 존재하지도, 그렇다고 소비 인구로 존재하지도 않는, 게다가 '사용 가치'로 공간을 전유하려는 거리 노숙인은 '타자(other)', 즉 '그들'로서 공공 공간에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이들은 공공성을 보장받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 해당하는 시민들에 의해, 그리고 시민들을 위한 공공성 담론에 의해 공공 공간으로부터 '배제' 당한다.

물론 이때 '거리 노숙인은 자본주의 시스템에 충실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시민들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에 배제당하는 것이다'라는 반박이 있을 수 있다. 일견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내가 지적하고 싶은 건, '거리 노숙인은 시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존재'라는 인식이 어디서 시작되었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평범한' 차림에 '평범한' 행동을 하고 있는 거리 노숙인이 거리에 있다면, 시민들은 이를 보고 어떻게 반응할까? 아마 대부분의 시민은 그들이 노숙인이라는 인식조차 하지 못한 채 곁을 스쳐지나갈 것이다. 시민들의 인식 속에 거리 노숙인은 '더럽고 위협적인 존재'인데 그들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거리 노숙인은 사회적으로 '생산'되고 '구성'된 개념이라는 것을. 즉 '거리 노숙인은 시민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명제가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 이미 사회가 바라보는 거리 노숙인은 '시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존재'다. '거리 노숙인은 시민들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에' 공공 공간으로부터 배제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사실은 '시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자가 바로 거리 노숙인이기 때문에 이들을 배제해야 한다'라는 말로 바뀌어 주장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애초에 노숙인이 시민들에게 분명 피해를 줬고 이것이 고정관념처럼 박힌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선후 관계를 떠나 이러한 인식이 자리 잡는 과정에 자본주의 논리가 강하게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 이 글의 핵심이다. 요컨대 노숙인은 자본주의 시스템에 동화되지 못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불필요한 존재'로 각인됐고, 이것이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양상이다. 결국 거리 노숙인이 자본주의 사회의 공공 공간으로부터 끊임없이 배제당하는 건, '그들의 특정 행위가 잘못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그들이 노숙인이었기 때문'에, 나아가 '자본주의 사회의 불청객'이었기 때문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시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거리 노숙인의 행동을 방치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주류 사회가 '시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거리 노숙인만'을 전략적으로 생산해냈고, 그 결과 '거리 노숙인은 곧 시민들에게 피해를 주는 존재, 혹은 잠재적 범죄자'라는 공식이 사회적으로 '구성'되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처럼 시스템을 견고하게 유지 및 강화시키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지속하려는 주류 사회에 의해, 공공 공간은 전체성과 통일성을 강요하는 영역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거리 노숙인은 자본주의 사회의 미덕을 해치기 때문에 부정되어야 하는 존재, 따라서 공공 공간으로부터 은폐되어야 할 대상이 되어버렸다.

어떤 주체가, 사회가 지향하는 시스템에 부합하지 않는다 하여 공공 공간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배제되고, 또한 이것이 굉장히 합리적이고 타당한 것으로 비춰지기까지 하는 체제라면, 이는 분명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다름(difference)'이 '틀림(wrong)'이 되어 버리는 현대 도시 공간에 대한 비판이다.

'도시에 대한 권리'를 외치다

앞서 살펴봤듯 도시 공공 공간은 권력성을 갖는다. 그렇다면 이에 맞설 수 있는 권리 담론이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인권'은 거리의 노숙인에게 부여될 수 있는 가장 근본적 권리이자, 그들의 삶을 지지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권리 담론으로 제시되곤 한다. 그렇다면 실제로 공공 공간에서 살아가는 거리 노숙인에게 인권 담론은 얼마나 유용하게 작동하고 있을까? 이에 대해 나와 친하게 지내는 서울역의 한 노숙인은 이렇게 말한다. "인권? 개나 줘버려"

노숙인이 실제로 거리에서 살아가는데 인권 담론이 주는 함의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구체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일반 시민과 달리 거리 노숙인은 공공 공간에서 모든 생활을 영위해 나간다. 이는 비(非)거리 노숙인이 사적 공간에서 해결할 일을 거리 노숙인들은 모두 공적 공간에서 이행해야만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시민들과 달리 그들은 공공 공간을 '사용 가치'의 측면에서 이용한다. 그러나 앞서 밝혔듯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공 공간은 '교환 가치'로 점철되어 있고, 따라서 (인간으로서 누려야할 기본적 권리인) 인권은 '공공 공간 전유의 권리'라는 측면에 민감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인권 개념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실제로 사회관계 속에서 작동되고 수행되는 형태가 그러함을 의미한다.

언뜻 합당한 사회를 위해 일조할 것 같은 인권 담론이, 사실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결부된 채 실현되어 왔을 뿐더러, 공공 공간에서의 일상을 지지할 수 있는 아무런 공간적 근거를 갖지 못한 채 유지돼 왔던 것이다. 결국 거리 노숙인과 같은 소수자에게도 실효성을 담보해줄 수 있는, 그리고 그것이 일상이라는 구체적 차원에 실천적 동력을 부여해줄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권리 담론이 요구된다.

1968년 프랑스의 철학자 르페브르가 처음 제창했던 '도시에 대한 권리'는 현대 도시 공간에서 요구되는 새로운 권리 패러다임을 사유하는 데 중요한 함의를 준다. 르페브르의, '도시에 대한 권리'가 갖는 가장 중요한 속성 중 하나가 바로 '차이에 대한 권리'이다.

다시 거리 노숙인 사례로 돌아가 보자. 자본주의 시각에서 봤을 때 거리 노숙인은 분명 주류 사회와 '다른' 집단이다. 이때 지배 사회는 노숙인이 스스로의 차이를 드러내지 못하도록 제재하고, 공공공간으로부터 은폐한다. 주류 사회의 입장에서 노숙인은 '다른 존재'가 아니라 '틀린 존재'였고, 따라서 그들의 행위 역시 '다른 행동'이 아니라 '틀린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차이에 대한 권리'는 바로 이 부분을 해체시킬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요컨대 '차이에 대한 권리'는 거리 노숙인과 같이 주류 사회와는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다름'을 자유롭게 표현하는데 있어, 그리고 그러한 그들이 공공 공간을 전유해 나가는 데 있어 다른 이들로부터 제재와 강요를 당하지 않을 권리다. 다시 말해 '우리는 틀린 게 아니라 다를 뿐이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권리다.

다르다는 이유로 불합리한 처우를 받지 않을 공간이라니, 어떻게 보면 지극히 이상적인 얘기로만 들린다. 그러나 미셸 푸코가 헤테로토피아 개념을 언급하며 상생의 가치를 지적했듯, 이는 마냥 유토피아적인 공간이 아니다.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드러날 수 있고, 또 실제로 드러나고 있는 공간이다.

가령 성적 소수자나 이주 노동자와 같은 집단이 점차 한국 사회의 음지에서 양지로 드러나기 시작했던 것도 결국 '차이에 대한 권리'를, 나아가 '도시에 대한 권리'를 이들이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가능했다. 다만 거리 노숙인과 같이 사회의 특정 소수자들에게는 이러한 파괴력이 아직 뚜렷이 나타나고 있지 않을 뿐이다.

입체적 공공 공간을 위하여

'도시에 대한 권리'는 개념의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추상적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것이 '도시에 대한 권리'가 갖는 가능성이기도 하다. '상상'이라는 요인을 중요하게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이때 상상이란 '현실의 구체적인 한 지점과 결합될 수 있는 차원'에서의 상상이다. '도시에 대한 권리'는 어느 한쪽의 승리를 요구하지 않는다. 모두가 상생함으로써 '다름'을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을 지향할 뿐이다.

'도시에 대한 권리'는 거리 노숙인과 비거리 노숙인 모두가 주장할 수 있는, 아니 그래야만 하는 권리다. 요컨대 어느 한 쪽의 목소리가 일방적으로 묵살당하지 않는 사회를 위해 '도시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자는 것이다. 좀 더 입체적 공간, 입체적 사회를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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