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천재 과학자를 키운 건 팔할이 ○○이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천재 과학자를 키운 건 팔할이 ○○이다!"

[이명현의 '사이홀릭'] 리처드 파인만의 <발견하는 즐거움>

고등학교 시절 내내 나를 괴롭혔던 것은 짝사랑하는 옆 동네 소녀도 아니었고 입시에 대한 중압감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단어 몇 개가 범인이었다.

나는 당시 시를 쓰는데 재미를 붙이고 있었는데, 멋진 단어가 떠오르거나 하면 그 단어와 이내 사랑에 빠져버리곤 했다. 대부분의 단어들은 내가 쓴 시 속에 새겨지거나 며칠을 못 넘기고 내 마음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그 중에서 몇몇 단어들은 그렇지 못하고 끈질기게 내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좋았다.

마음속에 쌓이는 단어의 수가 늘어가면서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버릴 수도 없게 이미 정이 들어버린 단어들에 대한 집착이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어떻게든 그 단어들을 시 속에 넣으려고 애를 쓰기 시작했다. 시를 쓰면서 그 단어들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단어들을 사용하기 위해서 시를 썼다. 주객이 완전히 전도된 것이었다.

좋아서 시작한 시를 쓰는 작업이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래도 마음속으로 찾아온 단어들을 버리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스운 일이지만 그 단어들을 속여서 떼어내려고 한 줄짜리 가짜 시를 (당시 썼던 시들이 모두 이 부류에 속하는 것이겠지만) 쓰기도 했다. 어쨌든 시 속에 넣어야만 이별할 수 있었다.

리처드 파인만의 <발견하는 즐거움>(김희봉·승영조 옮김, 승산 펴냄)의 첫 장을 넘기는데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 중 한 구절이 먼저 떠올랐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 <발견하는 즐거움>(리처드 파인만 지음, 승영조·김희봉 옮김, 승산 펴냄). ⓒ승산
파인만을 키운 건 팔할이 ○○이다, 이렇게 해놓으면 아주 멋진 비유가 될 것 같다고 자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책을 읽기가 힘들어졌다. 이 구절이 계속 눈에 밟혔고 마음속을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발견하는 즐거움>은 여러 차례 읽었지만, 이번처럼 어렵게 한 쪽 두 쪽 넘겨가면서 읽기는 처음이었다. 그 병이 다시 찾아온 것 같았다.

내가 처음 파인만을 만난 것은 대학교 1학년 때였다. 파인만의 물리학 강의 시리즈 책을 불법 복사한 것을 (당시는 원서를 구하기도 힘들었고 너무 비싸서 살 엄두도 내지 못했고 불법 복사가 판치는 세상이었다) 구해서 공부를 했다. 그의 물리학 개념 설명 방식에 매료되어 두근거리며 책을 읽어 나가던 기억이 난다.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일반인을 위한 파인만의 다른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발견하는 즐거움>과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전2권, 김희봉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를 거의 같은 시기에 읽었다. 과학책을 읽고 토론을 하는 수업을 몇 년 동안 진행하고 있는데 수업 시간에 읽을 책 목록을 정할 때면 이 두 권의 책을 놓고 늘 고민에 빠진다. 파인만의 책을 꼭 한 권 넣고 싶은데,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늘 고민이었다. 처음에는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를 주로 선택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발견하는 즐거움>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파인만 씨, 농담도 잘하시네!>는 가볍고 경쾌한 에세이 같아 보이지만 인간 파인만의 진면목에 깊이 빠져들게 하는 마력을 지닌 책이다. 반면 <발견하는 즐거움>은 다소 형식적인 편집과 내용의 중첩이 눈에 거슬리지만 파인만이 갖고 있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기에 안성맞춤인 책이다.

선택의 순간이 되면 자신의 전략을 구현할 '베스트 11'을 짜는 축구 감독의 심정이 되곤 한다. 최근의 선택은 단연 <발견하는 즐거움>이었다. 과학책을 (거의) 처음 만나는 학생들에게 파인만을 선보이려고 하니 여러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멀티플레이어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파인만의 다양한 면을 마치 무지개처럼 펼쳐 보여줄 수 있는 책이 바로 이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파인만을 펼쳐 보이는 무지개라는 주장은 편집자 서문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파인만이라는 신비한 인물을 이해하고 음미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이 책을 읽는 것이다. 이 책에서 여러분은 파인만이 폭넓게 펼쳐 보이는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다. 이 책에는 파인만의 깊은 생각과 매력적인 논의가 담겨 있다. 그가 누구보다도 더 잘 가르쳤던 물리학 얘기뿐만 아니라, 종교, 철학, 교육, 미래의 컴퓨터에 대한 얘기도 담겨 있다. 그가 선구적 기여를 한 나노테크놀로지, 인간으로서의 겸허함, 과학의 재미, 과학과 문명의 미래, 어린 과학 꿈나무들이 세계를 올바로 바라보는 방법 등에 관한 얘기가 담겨 있으며, 우주 왕복선 챌린저 호의 참사를 불러일으킨 관료주의의 비극적 맹목성에 대한 보고서도 담겨 있다."

▲ 리처드 파인만. ⓒ사이언스북스
<발견하는 즐거움> 속의 파인만의 무지개를 펼쳐놓고 보면 전체 색을 가로지르는 과학자 파인만을 만날 수 있다. 이제 나는 어렵게 다시 읽은 <발견하는 즐거움>의 내용을 '파인만을 키운 건 팔할이 ○○이다' 시리즈와 함께 이 글 속에 방사시켜놓고 내 마음속 고통을 떨쳐버리려고 한다.

"전체 사회의 관점에서, 지적 유희는 사사로운 개인적 즐거움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요? 천만에요! 사회 자체의 성립을 위한 가치를 고려하는 것도 하나의 사회적 책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사회는 사람들에게 즐길 거리를 마련해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만일 그렇다면, 과학의 즐거움은 여느 즐거움 못지않게 중요한 것입니다."

파인만을 키운 건 팔할이 '지적 유희'다.

"우리가 필사적으로 수수께끼에 매달려 밤 새워 답을 찾고, 또 다음 단계의 답을 찾기 위해 더없이 가파른 절벽을 기어오르는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짜릿한 발견의 순간, 발견하는 즐거움에 이르기 위해서라 이겁니다."

파인만을 키운 건 팔할이 '발견하는 즐거움'이다.

"우리는 실제로 불확실성 속에 살고 있음을 모두가 알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가 여러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값진 일이다. 이런 정신적 태도, 불확실성의 태도는 과학자에게 필수적인 것이고, 학생들이 가장 먼저 배워야 할 정신적 태도다. 이것은 사고의 습관이 된다. 일단 습관이 되면 더 이상 물러서는 일은 없게 된다."

"모든 것이 진실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가정하고 종교를 바라보세요. 그러면 그 순간 우리는 돌이키기 힘든 변화를 겪게 됩니다. 과학적 사고방식, 혹은 우리 아버지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우리는 무엇이 진실한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무엇이 진실할 수 있고, 우리는 무엇이 진실한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무엇이 진실할 수 있고, 무엇이 진실하지 않을 수 있는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의심하고 묻는 것이 아주 근본적인 내 영혼의 기능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한번 의심하고 묻기 시작하면, 믿는다는 것이 힘들어집니다."

"전문가를 의심해야 한다는 것을 과학에서 배우십시오. 사실상 나는 다른 방식으로 과학을 정의할 수 있습니다. 즉, 과학은 전문가가 무지하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파인만을 키운 건 팔할이 '불확실성의 태도와 의심하는 자유'다.

"아마 나는 성취감 때문에 눈이 멀었나 봅니다. 원폭 투하에 대해 내가 기억하는 단 한 가지 반응은, 사람들이 아주 흥분했고 의기양양했다는 것입니다. 술판이 벌어졌고 모두가 거나하게 취했습니다. 로스앨러모스와 히로시마에서 일어난 일은 정말 흥미로울 정도로 대조적이었지요. 나도 들뜬 분위기에 휘말려 잔뜩 마시고 취해서 지프 보닛 위에 올라가 드럼을 치며 로스앨러모스를 휘젓고 다녔습니다. 히로시마에서 사람들이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바로 그 순간에 말입니다."

"제가 결정할 당시에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 두 번 다시 생각하지 않고 계속해 나간다는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제가 한번이라도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계속하겠다고 결정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결정을 내리게 했던 당초 조건이 달라진 다음에도 돌이켜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실수였습니다."

파인만을 키운 건 팔할이 '성공과 고통'이다.

"아버지는 이름만 가르쳐주는 법이 없었지요. 아버지는 이름만 나는 것과 진짜로 아는 것의 차이를 알고 계셨어요. 덕분에 나는 그걸 아주 일찍 깨달을 수 있었지요. (…) 아버지는 온갖 예를 들어 설명하며 대화를 이끌어 가셨는데, 그 대화에 강요란 없었습니다. 오로지 흥미진진하고 사랑이 가득했습니다."

이런 과학자 파인만을 키운 건 팔할이 '아버지'다.

"제가 보기에 그 이론은 단지 난점을 깔개 밑에 쓸어 넣어버린 것입니다. 당연히 저는 그 이론을 확신하지 않습니다."

노벨상 수상식에서 파인만이 한 말이다. 여기서 '그 이론'은 바로 자신의 양자전기역학이다. 역시 그는 우리를 배반하지 않았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