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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 속엔 아무런 철학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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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 속엔 아무런 철학도 없다!"

[변방의 사색] 슬라보예 지젝 등의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200년 뒤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한다. 인공 지능이 인간으로부터 독립했다. 인간은 기계와 전쟁을 치르게 되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기계의 에너지원인 태양을 차단하기 위해 하늘을 불태웠지만, 기계는 인간을 사로잡아 생체 에너지를 뽑아낸다. 이제 인류는 발전소 속 고치 속에 웅크려 잠든 '전지'가 되었다. 기계는 인간의 뇌 속에 1999년의 세상을 프로그래밍하여 주입했고, 그 속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어 놓았다. 이것이 매트릭스다.

토머스 앤더슨이라는 사람이 있다. 낮에는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하지만, 밤에는 '네오'라는 아이디로 해킹을 저지르고 다니며 누군가를 찾고 있다. 세상이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의심에 사로잡혀 있는 그에게 어느 날 모피어스 일당으로부터 연락이 온다. 그들은 발전소에서 깨어난 인간들이 지구 깊은 곳에 건설한 '시온'에서 파견된 전사들이다.

그들은 폐쇄된 기계 시스템의 미로를 몰래 떠다니는 시온의 전함 느부갓네살 호의 승무원들이며, 시시때때로 매트릭스 속으로 해킹해 들어와 구세주인 '그'(the one)를 찾고 있는 중이다. 바로 네오가 예언자 오라클이 말한 '그'인 것이다.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계속 잠들어 있을 것인지(파랑 약), 아니면 깨어날 것인지(빨강 약)를 결정하라고 한다. 네오는 주저 없이 빨강 약을 선택하고 그들의 동료가 된다. 그리고 훈련 속에서 서서히 놀라운 기량을 쌓아간다.

내부 반란도 있다. 사이퍼는 매트릭스로 되돌아가고 싶어 한다. 꿀꿀이죽 같은 식사와 죽음의 공포만이 남은 기약 없는 삶에 지쳐 버린 것이다. 뇌파 자극이 만든 환상일지언정 스테이크를 맛보며 인기 배우 '미스터 레이건'으로 살고 싶은 것이다. 대원 몇 명이 사이퍼에 의해 죽게 되고, 모피어스는 스미스 요원에게 넘겨져 고문당한다. 결국 네오가 모피어스를 구출하고, 네오 자신은 스미스의 총탄에 맞아 죽게 된다. 그러나 네오는 연인 트리니티의 간절한 입맞춤으로 죽음에서 부활한다. 드디어 네오는 진정한 '그'가 된다.

변수가 생겨난다. 스미스가 기계 제국으로부터 독립해 버린 것이다. 인간을 끔찍하게 혐오하는 것은 전과 다르지 않지만, 그는 인간의 자의식을 갖게 되었다. 스미스는 스스로를 무한 복제하면서 기계 제국과 인간 모두를 위협하게 된다.

부활한 네오는 숱한 난관을 돌파하여 매트릭스의 설계자를 만난다. 그는 매트릭스의 아버지 격인데, 거기서 놀라운 사실을 듣게 된다. 예언자 오라클 또한 매트릭스 프로그램의 일부이며, 매트릭스의 어머니 격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설계자는 네오에게 시온과 트리니티 중 하나를 택하라고 명령한다. 뜻밖에도 네오는 기계의 공격으로 위기에 빠진 시온 대신 연인을 구한다.

예언은 좌절되었고, 모피어스는 절망한다. 시온을 향한 기계의 공격은 더욱 강화되어 최후의 일전이 펼쳐진다. 결국, 네오는 기계 제국의 심장부로 찾아간다. 그리고 '이대로 가면 당신들도 결국 스미스들에게 패배할 수밖에 없다, 내가 스미스를 처단해 줄 테니, 시온에 대한 공격을 중단하라'는 요지의 협상을 한다. 마침내 네오는 스미스를 물리치고 자신은 죽는다. 시온은 살아났고, 인류는 해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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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트릭스로 철학하기>(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이운경 옮김, 한문화 펴냄). ⓒ한문화

1999년에 개봉되어 2003년 완결된 영화 <매트릭스> 시리즈의 줄거리이다. 노트를 옆에 두고, 비디오 플레이어를 수시로 중단시키며, 선문답 같은 대사를 옮겨 적어가며 영화를 보던 생각이 난다. 액션 영화를 싫어하지만 1편의 충격적인 발상과 철학적 구도는 매혹적이었다. 그런데, 2편에서는 더 난해하게 꼬아버리니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은 기분으로 보다가 3편에서는 결국 식상한 블록버스터가 되어버려 실망하던 기억이 난다. '사랑이 지구를 구한다'고, 겨우 이거 이야기하려고 이 난리였나 싶은 맘으로 씁쓰레하던 기억도.

<매트릭스>를 다룬 책이 몇 권이나 출간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굳이 읽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매트릭스>에 큰 영향을 끼친 <공각기동대>의 감독 오시이 마모루가 워쇼스키 형제를 만나고서 한 인터뷰를 읽고 나서 그런 생각이 더 굳어졌다. '그들은 영화를 비즈니스로 보고 있었고, 실제로 사업이야기에 더 열심이었다'는 것이다. 그럼 그렇지, 결국 돈 벌려는 수작이구먼, 하는 생각으로 나는 <매트릭스>를 마음속에서 지웠다.

2010년 말, 학교 아이들이 독서 토론 동아리를 만들어 내게 지도 교사 노릇을 부탁해 왔다. 요즘 같은 때 자발적으로 동아리를 만들다니, 신통방통한 노릇이어서 흔쾌히 응했다. 함께 책도 읽고 글도 쓰고 토론도 했는데, 토론만은 영 신통치 않았다. 열여덟 살이 되도록 토론이란 걸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좀 더 쉽게 이야기를 끄집어낼 거리를 찾다가 <매트릭스>를 생각해냈다.

나름 풍성한 이야기가 쏟아질 거라 기대했지만, 막상 토론 시간이 되니 '파랑 약과 빨강 약' 구도를 크게 넘어서지 못했다. 하나 같이 그 알약 이야기로 시종하기에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아이들의 지적 역량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이 영화에서 아이들에게 실감으로 육박해 오는 것이 이것 밖에 없었던 것이다(그러나 이건 얼마나 진부한 도식인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매트릭스로 철학하기>(슬라보예 지젝 외 지음, 이운경 옮김, 한문화 펴냄)를 살펴보게 되었다.

<매트릭스>가 흘려 놓은 철학적 파편들

확실히 영화 <매트릭스>는 지적인 것을 좋아하는 먹물들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하다. 특히 1편이 그렇다. 그리고 몇몇 대목은 오늘날 후기 자본주의적 삶에 대한 날카로운 비유로 뇌리에 박힌다. 이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충격적인 장면, 빨강 알약을 먹은 네오가 매트릭스에서 깨어나는 장면, 거대한 인간 발전소의 끈적끈적한 액체로 가득 찬 고치 속에서, 온 몸에 케이블이 꽂힌 채 웅크린 인간들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그것은 실은 자본주의 체제 속에 살아가는 오늘날 절대 다수 인간들의 모습이 아닌가.

<매트릭스>에는 온갖 철학, 종교에서 빌려온 명제와 은유들이 넘실거린다. 네오를 처음 만났을 때, 모피어스는 "너는 노예이며, 모든 감각이 마비된 채 감옥에서 태어났으며, 그것은 바로 '마음의 감옥'"이라고 말한다.

네오가 예언자 오라클을 처음으로 찾아가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대기실에서 염력으로 숟가락을 구부리고 있던 한 동자승은 네오에게 "숟가락은 없어요, 오직 마음이 있을 뿐이에요"라고 말한다. 이 불교적 화두는 묘한 신비감과 함께 '마음의 감옥'을 탈출할 수 있게 할 중요한 암시가 담겨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매트릭스 안에서의 '나'는 현실적 자아의 잉여 이미지일 뿐이다. 그러나 매트릭스에서 스미스 요원과 싸우다 죽으면 느부갓네살 호 안에서 잠들어 있는 실제의 '나'에게도 죽음이 찾아든다. 가상 세계에서 벌어진 일이 왜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가. 모피어스는 이렇게 답한다. "정신이 죽으면 몸도 죽어. 정신이 이것을 진짜로 만들지"라고. 철학사의 중요한 테마,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 속에서 영화 <매트릭스>는 마음의 존재를 긍정하는 입장에 선다.

운명에 대한 질문도 있다. 네오의 희생으로 최후의 전쟁이 끝나고 <매트릭스> 시리즈가 대단원의 막을 내릴 무렵, 예언자 오라클에게 보디가드인 세라프가 "이렇게 될 줄 알았죠?" 하고 묻는다. 오라클은 놀란 표정으로 "몰랐어"라고 답한다. 그러나 잠시 뒤 "몰랐지만, 믿었지"라고 말한다. 운명이란 '선택'과 '믿음'에 의해, 결국 '마음'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이다.

과연 <매트릭스>에 철학이 있나?

이 책 <매트릭스에서 철학하기>에는 철학자 열다섯 명의 글이 실려 있고,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거의 모든 주제가 망라된다. 그만큼 <매트릭스>가 흘려 놓은 철학적 파편들이 풍성하다.

네오는 '둔한 말 같은 인간들의 도시'에서 그 말들을 자극하는 '등에'를 자임한 소크라테스에 비견된다. 동굴 속에 일렁이는 불빛이 만들어낸 그림자를 실재로 알고 있는 죄수들에게 동굴 바깥의 실재를 본 '그'가 죄수들을 인도하기 위해 동굴 속으로 되돌아온다는 플라톤의 비유는 <매트릭스>의 큰 얼개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는 끝내 이 세계를 '악령이 만들어낸 기만'으로 바라보게 되는데, 이 또한 이 영화의 바탕이다. '인간을 피아노 건반 같은 존재로 격하시키는' 자유와 계몽의 세상에 협력하느니 지저분한 독방에서 '진실의 사막'을 대면하며 혼자 살겠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 생활자'는 곧장 네오와 모피어스 일당에 대응된다.

그러나 <매트릭스> 시리즈를 다 보고 나면 나로선 어찌할 수 없는 한숨이 나온다. 결국 이 영화의 메시지란 '사랑이 세계를 구원한다'는 것이고, 이 지겨운 도식에다 '모든 것이 윤회변전한다'는 불교적 순환론을 강제로 접붙여 놓은 것에 다름 아니니깐 말이다. 철학책이 몇 권이나 나올 정도로 수많은 철학, 종교, 신화에서 빌려온 것들이 넘실대지만, 이들이 결국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나는 좀처럼 가늠할 수 없었다.

예컨대, 숟가락이 없다면 '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절대 거기까지는 나아가지 않는다. 모피어스는 네오에게 '실재란 뇌파로 전달되는 전자 신호일 뿐'이라고 하지만, 정작 네오는 스미스 요원에게 믿음, 소망, 사랑을 설파한다. 이 격차와 역전의 메커니즘은 영화의 내적 구조 속에 장착되지 않는다. 그저 영화의 포스트모던한 장식품으로 나부낄 따름이다.

불편한 점도 적지 않았다. 구세주 네오와 매트릭스의 설계자 아키텍트, 시온의 현자(賢者)인 하먼은 모두 백인 남성이었다. 우직하고 용맹스런 전사 모피어스와 니오베, 탱크, 링크는 모두 흑인이었다. 네오를 매트릭스의 설계자에게 안내하는 키메이커는 작고 오종종한, 그렇지만 뛰어난 손재주를 가진 전형적인 일본인이며, 악동이자 성욕의 화신인 매트릭스의 정보 브로커 메로빈지언은 프랑스인이다. 전형적인 미국인들의 세계관이 투영되어 있다.

<매트릭스>는 기술 문명에 관한 영화이다. 네오에 대한 기대를 마지막까지 버리지 않는 시온의 현자 하먼 의원은 네오를 시온의 기계실로 데려가 심각한 얼굴로 '시온은 이 기계들 덕택에 돌아간다'며 '인간과 기계는 공생해야 한다'는 소박한 기계론 설파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맥이 탁 풀렸다. <매트릭스>는 인간이 자신이 창조한 기계에 의해 끔찍한 착취를 당하고, 끝내 여기로부터 해방되는 여정을 그린 대서사시라고 말해진다.

그런데 이 영화가 표명하는 기술관이란 게 고작 '인간을 살리는 기계도 있고, 죽이는 기계도 있다, 서로 공생하자'는 따위 하나마나한 소리일 뿐이라니. 이것은 그저 기술 문명 제1의 수혜자인 미국 중산층의 세계관일 따름이다. 그래서 이 책 제일 마지막에 수록된 동유럽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글이 빛난다.

그는 앞선 논자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매트릭스>를 읽는다. 앞의 열네 편이 <매트릭스>의 거죽을 대체로 찬사 일변도로 그려낸다면, 지젝은 <매트릭스>에 얼룩져 있는 어떤 '징후'를 통해 이 영화를 비난한다. 지젝은 <매트릭스>를 대부분 미국의 대학 교수인 다른 논자들은 전혀 생각지도 않은 '미국인들의 편집증'으로 읽은 것이다.

이를테면 영화 <트루먼 쇼>처럼 이 세계가 나를 주연으로 하는 하나의 쇼가 아닌지 의심하는, 자신이 살고 있는 물질적 삶이 너무나 완벽해서 실제 삶이 구체성을 잃고 공허한 쇼로 역전되어버리는 후기 자본주의적 징후로 보는 것이다. 그는 컴퓨터가 전능한 신과 같은 존재가 되어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은 피해망상이라 보고 있다.

평범한 주체들은 이러한 현실의 배후를 설명할 능력이 없다. 주체는 점점 쪼그라들어 시스템에 병합되어버렸다. 이 체제의 주인은 시민이라 하지만, 입헌군주국의 군주처럼 만들어진 칙령에 서명이나 하고 마는 허깨비가 되어 버렸다. 기실, 인간은 그동안 자연 세계에 지나치게 개입해 왔고, 이로써 받게 될 복수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기술 문명의 편익을 지나치게 추구함으로써 겪게 될 복수에 대한 공포 또한 커져왔다. 현대 과학은 양자물리학에서 보듯 '실제 작용은 하지만 우리의 현실 경험으로 번역될 수 없는' 법칙의 세계로 숨어버렸고, 따라서 우리들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할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 문제는 이처럼 현실이 편집증으로 되어가는 것이며, 거기 살아가는 주체가 조금씩 피해망상을 키워간다는 것이다.

지젝의 탁월한 해석은 이 대목에서 빛을 발한다. <매트릭스>는 기술 문명의 억압과 구속에서 해방을 꿈꾸는 인간들의 투쟁을 다룬 대서사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매트릭스> 자체가 인간 존재를 지탱하는 피해망상적 환상의 극화이며, 그러므로 공허한 기표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많은 글들은 데카르트를 인용하든, 칸트를 인용하든, 네오를 소크라테스에 견주든,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 생활자'에 견주든, 사르트르의 '로캉텡'에 견주든, 결국 빨강 약과 파랑 약의 선택을 다루고 있다.

지젝이 말하는 이 징후를 인식하지 못한 평범한 주체들에게 이 공허한 영화에서 그나마 가장 실감나게 육박해 오는 것이 바로 이 '빨강 약과 파랑 약'의 선택항뿐인 것이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자, 사랑이 세상을 구원한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다' 따위 식상한 메시지와 현란한 그래픽, 특수 효과, 무술 액션은 이러한 병적 징후를 가리는 할리우드식 포장지일 따름이다.

과연 우리를 이끌어가는 것은 질문인가?

아이들은 대부분 '빨강 약'을 선택하겠다고 했다. 나는 감당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빨강 약을 먹는 순간, '제명이 되어 버릴'지도 모를 일인데. 센티넬의 습격으로 잔혹하게 짓이겨지거나, 스미스 요원 앞에서 힘도 못 쓰고 스러질 텐데,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꿀꿀이죽 같은 거나 먹으면서 햇빛 한줌, 나무 한그루 없는 캄캄한 생활을 견디면서도 정말 빨강 약으로 살고 싶느냐고 말이다.

네오를 처음 만났을 때 트리니티는 말했다. '우리를 이끌어가는 것은 질문'이라고. 과연 우리를 이끌어가는 것은 질문인가? 내 경험으로 학교 교육 속에서 아이들에게 받을 수 있는 질문이란 시험 범위 알려달라는 것밖에 없다. 이딴 학교 교육 왜 시키는지, 왜 멀쩡하게 흘러온 강을 22조 원이나 들여서 파 뒤집는지, 돈 없다고 노동자들 수백 명 정리 해고하면서 왜 자기네들끼리는 몇 백억 원씩 돈 잔치를 하는지, 이런 질문이 과연 우리를 이끌어가고 있는가?

'빨강 약'이란 이를테면 오직 배우겠다는 신념 하나로 깡으로 버티던 처녀 용접사 김진숙에게 던져진 <전태일 평전>과 같은 것일진대, 이 '빨강 약'을 주저 없이 집어 삼킨 김진숙은 지금 200일 가까운 시간 동안 고공의 백척간두에서 싸우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좀 더 솔직해져야 하지 않은가. 차라리, 기계들이 건설한 매트릭스가 좋은 세상에 가깝지 않은가. 기아와 결핍이 없는, 그러나 적당한 고통도 있는, 다만 '이건 모두 가짜야!'라고 소리치지만 않으면 되는….

<매트릭스로 철학하기>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나는 새삼 마르크스의 이 명제를 떠올렸다.

"지금까지 철학은 세계를 해석해왔다.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

<매트릭스>를 철학 교본으로 읽자는 통념은 교정되어야 한다. 매트릭스 속엔 아무런 철학도 없다. '돈을 벌자'는 자본의 교의가 넘실거릴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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