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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춘을 아웃 소싱하는 대한민국…대표 포주는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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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춘을 아웃 소싱하는 대한민국…대표 포주는 '대학'"

[100명의 '초경' 이야기로 세상을 말하다] <마이 리틀 레드북>

"여러분 남편의 피는 예수님의 피만큼 성스럽고 섹시합니다!"

만약에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 2008년 미국 대선 당시 공화당 부통령 후보였던 여성 보수 정치인 사라 페일린은 이렇게 '섹시하게' 말하지 않을까?

미국의 저명한 페미니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쓴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이란 칼럼의 일부다. 그렇게 되면 "월경은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자랑할 가치가 있는" 행사가 되리라는 가정 하에, 그녀는 거침없이 남성 중심 문화를 풍자한다. 그녀는 말한다. 남성들은 얼마나 오래, 얼마나 많이 하는지 자랑할 거라고.

1978년 처음 등장한 이 글이, 수정을 거쳐 최근 한 '빨간 작은 책(little red book)'에 다시 등장했다. 마오쩌둥의 '빨간책'에서 공산주의만을 빼고 혁명적 정신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는 <마이 리틀 레드북>(박수연 옮김, 부키 펴냄)이다. 예일대학교 학생 레이첼 카우더 네일버프가, 여성 100명의 '초경 경험담'을 보물 캐내듯 찾아내 묶은 책이다.

▲ <마이 리틀 레드북>(레이첼 카우더 네일버프 엮음, 박수연 옮김, 부키 펴냄). ⓒ부키
책에는 네일버프의 고모할머니부터 여동생을 포함해, 세대를 아우르는 여성들의 기록이 고스란히 담겼다. 엄마가 다리 사이에 손을 뻗어 '실이 매달린 핫도그'를 빼내는 걸 목격해 충격을 받았다거나 하는 킥킥댈 수 있는 얘기도, 색을 확인할 수 없기에 몇 번이고 소변이 나온 줄로 착각했다는 시각장애인의 경험처럼 가슴을 저릿하게 만드는 이야기도 있다.

책은 이런 경험담을 공유하면서, "몸에서 달의 주기를 체험"하는 신비로운 신체를 긍정하자고 말한다. 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여전히 월경은 '속삭이거나(whisper)' '하얗거나(white)' '좋은 느낌'을 주지 못하는, 불편한 손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제 아이를 가질 수 있게 되었구나!" 하며 딸을 껴안는 미국 어머니들 앞에, 그저 '손발 오그라드는' 이들도 많다.

한편, 여성으로서의 신체를 거부하기에, 월경이 그야말로 '재앙'인 이들도 있다. 모든 여자가 경험하지만 그들을 묶어주지는 않는 이 경험, 어떤 얘기를 보탤 수 있을까?

'프레시안 books'는 여성이라는 정체성에 가장 투철할(?) 것으로 여겨지는, 페미니스트 학자를 만나 대화를 나눠보기로 했다. 바로 임옥희 경희대학교 객원교수다. <채식주의자 뱀파이어>(여이연 펴냄) 등의 저서로 한국 문화를 여성적 시각으로 읽어내는 데 힘써왔던 그는, 이 달달한 빨간책 속에서 어떤 이야기들을 끄집어 낼 것인가?

올해 들어 가장 '달'이 짧은, 지난 22일(하지) 임옥희 교수를 만났다. 앞으로 이어질 그녀의 이야기는 "월경은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되는 계기 아니냐"고 궁금해 했던 남성들의 기대와는 다를 것이다. '피를 뽑는' 여성의 새빨간 이야기.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것은 결코 비유가 아니다.


월경(Period)은 마침표(Period)가 아니야!

생리대 쇼핑은 충분히 힘들었다. 나는 감추려고 했다. 바구니에 생리대와 함께 연필, 치약, 공책, 머리핀 등 다른 많은 물건들을 함께 담아서 내가 원래 가게에 온 의도를 적어도 위장하려고 했다. 그래도 파란 생리대 상자는 감춰지지 않았다.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내 부끄러운 피로 물든 다 쓴 생리대를 어떻게 버린다지? (…) 나는 다 쓴 생리대를 화장지로 싸서 갈색 종이봉투에 넣고 옷장 안에 쑤셔 넣었다. 몇 개월이 그렇게 지나갔다. 봉투는 큼지막했고 낡은 봉투 하나에 반년 분량의 생리대가 모였다. (…) 피는 이미 말라붙었고, 생리대는 오래돼서 딱딱하게 굳고 벌레가 꼬여 있었다. ('옷장 밖으로', 1968년)

내가 생리를 시작하자 아버지는 식물이 죽는다면서 물을 주지 말라고 했다. ('화분 물주기여 안녕', 1942년)


프레시안 : <마이 리틀 레드북>, 어떻게 보셨는지요?

임옥희 : 처음에는 시큰둥했는데, 끝까지 읽어 보니 여러 가지 재밌는 얘깃거리가 있었습니다. 일단 '옷장 밖으로'라는 글이 상징하는 대로, 까놓고 얘기한다는 의미가 있죠.

이 책에는 1920년대부터 정말 바로 최근까지의 초경 경험이 실려 있는데, 그 옛날과 요즘 경험 사이에는 큰 편차가 있어요.

알다시피 월경이 금기시되어서 월경하는 여성을 격리해 둔 예가 많이 있지요. 저만 하더라도 예전에 할머니께 "달거리 하는 여자는 남자를 타 넘으면 안 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러면 남자도 달거리를 하게 된다, 여성화가 된다는 미신이었는데 그런 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졌던 거죠. 이 책에도 월경 하는 여자가 식물에 물을 주면 그게 마른다고, 물을 못 주게 했다는 얘기가 많이 나오죠.

과학적 담론이 일반화되기 이전에는 참으로 많은 곳에서 월경을 마술적인 힘에 이끌리는 신비한 현상이라고 봤죠. 영어권에서 월경을 완곡하게 이르는 '저주'라는 표현에서도 이것을 일종의 주술적인 것, 비과학적인 것으로 여기는 문화가 드러나는데요. 우리도 광고 때문인지 '마법에 걸린다'는 표현을 쓰죠. 그런 주술적 힘이 남성들한테 나쁜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금기를 만들어냈고, 그래서 감춰야 할 것, 부끄러운 것으로 여겨지게 된 셈이고요.

하지만 그건 앞 세대 얘기고, 책에서도 1990년대~2000년대 초경 경험자의 수기는 많이 다르죠. 여성으로서 긍정적인 사건, 축하해야 하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아버지한테 꽃다발을 받는다거나 어머니의 포옹을 받으면서요. 그게 책 전체의 의도이기도 한데, 월경을 하나의 축제처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다 함께 드러내놓고 얘기하자는 것이지요.

프레시안 : 완전히 새로운 건 아니죠.

▲ 임옥희 경희대학교 객원교수 ⓒ프레시안(손문상)
임옥희 :
네. 이미 1990년대 한국에서도 '월경 축제' 같은 게 열리면서 얘기가 됐었거든요. 이미 오래 전에 벽장을 뚫고 나와 이제는 생리 휴가나 생리 공결(여학생이 생리 기간 중 결석을 해도 출석으로 인정을 해주는 제도) 등이 제도적인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지요.

그러니까 중요한 건 이 책이 생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인데, 상당히 긍정적이죠. 많은 수기에서 여성들이 "나도 이제 여자가 되었다"며 기뻐하고 있어요. 임신을 할 수 있는 몸이 되었단 사실에 감격하고 있고요. 'Period'라는 단어가 월경을 뜻하는데, 그 시작인 초경을 여성으로서의 삶을 완성하는 마침표(Period)로 보는 것 같아요.

그런데 초경은 하나의 단계일 뿐이지 여성이 되는 전체 과정의 마침표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어머니가 딸의 초경을 축하해주는 가장 큰 이유가 이제 아이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생산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인데, 이런 재생산의 영역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도 있을 수 있고요. 누구나 모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 점에서 초경이나 임신을 여자로서의 정체성을 자각하는 최대 계기로 생각한다는 건 너무 생물학적인 성적 측면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프레시안 : 저에게도 초경은 그렇게 큰 사건이 아니었고, 잘 기억이 나지도 않는데요. 이 책이 대부분 서구 여성의 경험을 담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문화적 차이인 듯도 합니다. 한편, 생리 같은 원체험에 별로 감흥이 없다는 건, 생물학적인 성적 측면, 즉 '섹스(sex)'로서의 정체성보다 사회적 맥락에서 구성되는 '젠더(gender)'로서의 정체성이 더 중요해졌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 책이 100퍼센트 생리를 '여성으로 완성되는 긍정적 경험'으로 보고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닌데요. 가령 '에이미와 마거릿, 그리고 케이트'(1989년)를 보면 사춘기의 온갖 변화들을 미화하는 영화나 책을 향해 "소녀들에게 어떻게 한마디 불평도 없이 갑자기 성적 대상이 된 자신의 위치를 담담하게 받아들이라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라고 반문합니다.

임옥희 : 저는 동의해요. 초경 경험은 편차가 어마어마하지요. 패드와 탐폰을 사놓고 고대하는 이가 있는 반면 불쾌해 하는 사람이 있고요.

그런데 결국엔 이 책엔 초경 경험을 이렇게 명료하게 기억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얘기가 있는 거잖아요. 모든 이가 그 경험을 드라마타이즈 할 수 있을 만큼 의식을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수기에선 쿠바에 놀러 갔을 때 피델 카스트로가 혁명을 일으킨 바로 그날 자신이 초경을 시작했다면서 월경과 혁명을 연결시키는데, 과연 월경이 여성으로서의 '혁명의 날'이 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죠.

생물학적인 변화는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이긴 한데, 부정적이다 못해 끔찍한 반응을 할 수도 있죠. 가령 <3xFTM>이란 다큐멘터리/텍스트를 보면 한 FTM(Female To Male, 여성에서 남성이 된 성 전환자)이 초경을 했을 때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고 고백하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자기 몸이 여자라는 걸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실존적 고통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프레시안 : 네. 책에서도 '터너 증후군'을 가진 이의 고백이 나오죠. FTM의 경우와는 반대인데, 인위적으로 촉진시킨 생리 피를 보고 "앞으로 나는 결코 완전한 의미의 여성이 될 수 없겠구나" 하면서 좌절합니다. 또 외부 요인에 의해 생리가 고통이 되기도 하는데, 케냐에서는 중산층 이하의 여성들이 생리대를 구하지 못해 학교를 내리 쉬기도 한다는 내용이 있어요.

임옥희 : 네. 그렇기에 어떤 상황에서는 생리가 인지하게 하는 것이, '여성으로서의 자각'보다 정치적인 상황에 가깝기도 하죠. '마오쩌둥의 시대'라는 글을 보면 화장지가 배급제를 통해 지급되던 문화 혁명 시기, 딸 셋인 집의 소녀가 "딸 많은 집엔 차별이다"라고 토로하는 대목이 나오잖아요. 생리대, 화장지 하나에도 정치적인 배경이 들어가 있는 거죠. 생리대가 부족해 정규 교육에서도 배제되는 케냐의 경우도 그렇고.

생리대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거의 대부분의 수기에서 생리대 이름이라곤 '코텍스' 하나만 나오잖아요? 저 어릴 때도 코텍스 하나밖에 없어서 이게 회사 이름이 아니라 패드를 뜻하는 단어라고 생각할 정도였어요. 그래서 코텍스야말로 자본이 여자의 몸에 가장 밀접하고 철저하게 들어온 상품의 예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일회용 생리대가 상품화되기 전엔 모두 다른 자구책을 갖고 있었겠죠. 우리는 면 생리대를 만들어 썼고, 알래스카에서는 수세미처럼 얇은데 거칠지 않은 풀이 있어서 그걸 생리대로 썼다고 하고요. 과거의 그 방법들이 어디로 가버렸을까 궁금하지 않나요? 생태주의 페미니즘 운동 진영에서는 일회용 생리대가 몸에 좋지 않고 버려도 오랫동안 썩지 않는다는 데 문제의식을 갖고, 다시 면 생리대를 쓰자고 주장해 왔는데요. 우연찮게 '면 생리대-코텍스나 탐폰-면 생리대'의 흐름을 모두 겪은 세대로서, 이 책에 그런 언급도 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프레시안(손문상)

'생리 휴가'의 함정?

프레시안 : 우리 실생활과 가장 밀접하다고 할 수 있는 생리 관련 이슈라고 한다면 생리 휴가나 생리 공결일 텐데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임옥희 : 네. 사실 그 점이 평소에도 힘들었던 부분인데요. 학교에서 수업을 하다보면 여학생들이 생리 공결을 정말 많이 씁니다. 함께 생각해 볼 문제란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기말 시험에서 생리 공결 제도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지 물어봤어요. 여학생들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남학생들도 의외로 정당하다고 주장하더군요.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사실 그다지 설득력 있게 그 정당성을 주장하는 학생은 없었어요.

<마이 리틀 레드북>을 읽어 봐도, 심각한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이 거의 없잖아요. 생리할 때도 탐폰을 낀 채로 비키니 입고 수영장에 가고, 할 거 다 하는 게 우리와 가장 다른 점이었는데요. 우리는 대개 생리와 관련해 '고통 담론'을 얘기하잖아요. 그게 실제로 고통이 있어선지, 생리 공결 제도 자체가 필요해서 고통스럽다고 하는 건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페미니즘 이론에서 왜 이 제도를 만들었는가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고 주변에 의견을 물어보니 그나마 답으로 나온 게, 서구 여성과 달리 아시아인은 생리통이 심하다는 얘기였죠. 생물학적으로 아시아인의 자궁이 약해서라고 하는데 의학적으로 깊이 조사해보진 않아서 그렇게 단정 지을 수는 없고요.

또 다른 논리는 모성 보호를 위해서라는 입장인데요. 생리 공결은 직장에서 생리 휴가, 더 넓게는 출산 휴가와 같은 맥락에서 나온 제도잖아요? 엄마들이 출산을 하면 몸을 보호하기 위해 샤워도 며칠간 안 하고 한두 달 산후조리원을 다니며 '몸조리'를 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건 이런 제도들이 '보호'하는 사람들이 매우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생리 휴가를 쓸 수 있는 것도 정규직일 때나 가능한 일이잖아요.

솔직히 '여대생들이 한 달에 한 번 쉴 정도로 엄청난 노동 강도로 수업을 받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 게 사실입니다. '아파도 무조건 수업은 들어라' 이런 게 아니고요. 이 제도의 정당성을 말할 때 나오는 수사에 갸웃거리는 부분이 있고, 모두가 공통으로 겪는 고통이라고 얘기하기엔 조금 부족하지 않나 싶은 거지요.

고통이 심하다, 당연히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이렇게 스스로 '약자' 위치에 빠지는 논리가 성립되는 건 아닐까 하고 조심스럽습니다.

프레시안 : 그래도 분명 생리는 불편하고 때에 따라 고통스러운 게 사실이잖아요. 저는 반대로 남자들이 가볍게 "아유 저 히스테리, 쟤 생리하나봐" 이런 식으로 부정적으로 말하기도 하니까, 오픈됐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여성이 하는 경험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억압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거든요.

임옥희 : 대학생들이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억압이 있다면 그런 제도를 당당히 쓰긴 어렵겠죠. 이미 감춰야 하거나 부끄러운 경험이 아니므로, 공개적으로 인정받는 게 당연하다는 논리가 강하잖아요. 그런데 이 제도가 여성에게 좋을까, '유리'한 제도일까, 그런 이해관계로 얘기한다면 조금 애매하게 생각되는 구석이 있는 거지요.

앞서 말한 대로 오히려 노동 강도가 강한 비정규직 노동자들한테는 있어도 의미가 없는 제도잖아요. 그런 여러 차이들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는 정규직 아닌 경우, 산전·산후 휴가조차 쓰지 못하는 구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모성 보호' 차원을 얘기한다면, 이 세계에서 보호되는 모성은 누구의 모성인가? 노동 강도가 높은 작업장의 모성은 왜 보호되지 않는가? 이런 점을 생각하지 않고서 여성 일반의 고통 담론으로 넘어가는 논리가 우려되는 것입니다.

프레시안 : 여성 '모두'가 겪는 생물학적인 고통이라고 얘기하며 공통의 권익을 주장하지만, 실제로 더 심각한 문제는 은폐되어 있다는 건가요?

임옥희 : 네. 잘 안 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프레시안 : 말씀하신 것처럼 같은 생물학적 경험을 하더라도 하나로 수렴될 수 없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데요. 재밌었던 건 이 책을 보자마자 반응을 보인 게 여성인 제가 아니라 남성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월경이 여성에게 있어 정체성을 자각하는 매우 중요한 계기 아니냐" 하면서요.

그런데 오히려 저는 별 감흥이 없었고, 월경을 왜 그리 대단하게 생각할까 궁금해졌거든요. 왜 그럴까요?

임옥희 : 광고 탓? (웃음) 남자들의 상상력 속에서 여자가 '타자'라는 걸 가장 뚜렷하게 의식할 수 있는 경험이기 때문이어서가 아닐까요. 육체적으로 남녀가 다르다면 그 사이에 뭐가 있을까. 월경, 잉태, 출산 이런 것들이잖아요. 자신들은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이고 또 생명을 낳는다는 신비한 경험과 이어져 있기 때문에 경외감이 들기도 하는 것 같아요.

여자들만이 부리는 마법은 아닐까? 신비로운 뭔가가 있지 않을까? '여자임을 각성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느끼지 않을까? 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과연 몽정이 남성성을 자각하는 결정적 계기일까 궁금하거든요. 드디어 내가 소년에서 벗어나 남자가 되는구나, 이런 느낌을 갖나요? 밤중에 혼자 일어나 숨 죽여 팬티를 빨았다든지 하는 그런 일화는 공통적으로 나올 것 같긴 하지만요. 그런데 남자 100명이 '나의 첫 몽정'을 써서 모아보자고 나올 것 같진 않은 반면 여성들은 이걸 책으로 만들어냈죠.

그게 사회가 여성을 보호해주어야 할 대상으로 본다는 점, 그리고 여성의 정체성을 대체로 사회 유지에 반드시 필요한 (생명의) '재생산' 측면에서 찾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 주는 차이 아닐까요? 아무리 젠더 평등을 외쳐도 결국 가장 뚜렷하게 보이는 차이를 통해 여성을 얘기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거지요.

프레시안 : 그와 관련해서 아주 재밌는 글이 하나 실렸는데요. 이제는 고전이 된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칼럼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입니다.

임옥희 : 예전에 봤었는데, 다시 보게 되어서 반가웠어요. 비유도 신선하고 아주 재미있죠. 똑같은 '피'라고 하더라도 남성이 흘리면 영웅주의로 해석되거나 긍정적으로 얘기하잖아요. 그런데 여성의 피는 부끄럽게 여겨졌고요. 그런데 이 글에서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 문화적 페미니스트들은 예술과 문학에서 무혈의 이미지를 만들어 낼 거라고 하는데요. (웃음)

월경은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자랑할 가치가 있는 남성들의 행사가 될 것이다. 남성들은 얼마나 오래, 얼마나 많이 하는지 자랑할 것이다.

의회는 매달 남자들이 불편한 일을 겪지 않도록 '국립 생리 불순 연구소'에 연구비를 지원할 것이다. 위생 용품은 연방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아 무료가 될 것이다.

물론 자비를 털어서라도 타이거 우즈 탐폰, 아놀드 슈워제네거 터미네이터 패드, '양이 적은 날을 위한' 마이클 펠프스 운동선수용 생리대 같은 명품 생리대를 사려는 남성들도 있을 것이다.

군인, 우파 정치인, 근본주의 종교인은 월경의 어원을 'men-struation'이라고 분석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남성만이 병역에 복무할 수 있고, 공직에 오를 수 있으며, 신부 또는 목사가 되거나, 랍비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영화도 나올 것이다. 조지 클루니, 브래드 피트 주연 <블러드 브라더스>, <대부 3탄 : 폐경>
인터넷에는 달 채팅방과 생리통 블로그가 넘치고, 자신과 월경 주기가 같은 유명 스타를 검색해 보는 남자들도 많을 것이다.

남성이 월경을 한다면, 권력의 정당화는 이런 식으로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남자가 월경을 한다면', 1978년)


'꼴 페미'라고?

프레시안 : 그런데 이런 글 읽으면 꼭 '꼴 페미', '페미년' 어쩌고 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실제로 페미니즘이라는 관점, 페미니스트라는 이름이 굉장히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요. 이런 상황에서 지금 페미니즘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관해 고민해 오신 것 같은데, 어떤 문제의식인지 구체적으로 말해주신다면?

ⓒ프레시안(손문상)
임옥희 :
어떤 운동이든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소멸시키는 것이 목적이겠죠. 여성이 다 해방되면 여성 해방 운동이 있을 필요 없고, 계급이 사라지는 사회에서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가 필요하지 않을 것처럼.

그런데 지금 여성과 관련한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이 남아 있음에도, 문제가 다 해결된 것처럼 말들을 해요. 그런 부분이 운동을 굉장히 힘들게 만드는 장애가 되고 있어요. 페미니즘 이론이 과거에 마치 문화 운동처럼 여겨져 하나의 패션처럼 소비되었기 때문인 것 같은데, 문제들은 절대로 해결된 게 아니라 단지 지연되고 있을 뿐입니다. 그 지연되는 것들을 운동 차원으로 어떻게 끌고 올 수 있을까가 가장 고민입니다.

프레시안 : 많은 문제들이 그저 지연되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사실 많은 여성들이 주장했던 '양성 평등'은 여러 면에서 많이 실현되지 않았나요? 페미니스트를 싫어하는 여성들도 많은데, 그건 여성 억압적인 구조가 많이 사라졌기에 그들의 구호가 힘을 잃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게 아닐까요?

임옥희 : 소위 '잃어버린 10년' 동안 많은 재야 여성 운동의 주장이 제도화된 건 사실입니다. 해결된 일들도 많고요. 하지만 현실적으론 따라가지 못하는데 이론적으로 앞서가서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착각하는 부분도 많습니다.

가령 미혼모 문제를 들여다보면 우리 사회가 그렇게 많이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아무리 호주제가 폐지됐다고 해도, 양성평등이 구현됐다고 해도 우리 사회에서 '아버지를 모른다'는 건 오점이며 얼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미혼모뿐 아니라 부부 관계로 묶이지 않은 남녀의 아이들도 마찬가지고요. 결혼 제도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여성의 아이는 보호해줄 생명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죠.

사회는 물론 당사자의 부모들조차 미혼인 상태로 임신을 한 여성에게 낙태나 입양을 권합니다. 그리고 '재출발'을 하라고 하죠. 하지만 '아버지'가 있으면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고요. 여자 혼자 아이를 기르는 걸 봐 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이어지는 논리는 '두 사람이 벌어서 아이 하나 키우기도 힘든데, 혼자 키워낸다는 건 더 힘들다'는 것, 그리고 '네 아이로 인해 사회에 부담을 주지 말라'는 거죠. 이건 장애아한테도 해당하는 논리고요. 한마디로 경제력 없는 아이들을 낳지 말라는 겁니다.

저출산이 그렇게 문제라고 말하면서 미혼모의 아이는 마치 없는 것처럼 여기는 위선적인 태도는 무엇일까요. 정부가 출산율의 전체적인 저하로 위협을 느끼는 건 맞지만, '어떤' 출산을, '어떤' 재생산을 원하는지는 분명하죠.

프레시안 : 같은 '가족', '출산'이라고 해도 상황은 절대 같지 않다는 말씀으로 들리는데요. '여성' 역시 그렇죠.

임옥희 : 네. 모든 여성이 생리를 한다는 이유로 여성이라는 성 계급으로 묶어낼 수 없는 거죠. 급진적 페미니즘 같은 경우 이런 생물학적인 근거로 모든 여자를 동질적인 단위로 보기도 하는데, 여자들 사이에도 엄청난 편차가 있는 걸 알아야죠.

지난 번 한 친구가 제게 영화 임상수의 최근작 <하녀>에 나오는 재벌집 안주인과 하녀를 보면, 같은 여자로 안 느껴진다는 얘기를 했었어요. 이런 계급의 문제를 포함해서 여자라는 성적인 동질성만으로 묶어서 이야기하는 건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고 봅니다. 앞서 얘기한 생리만 해도 모두가 그걸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지요. 모두가 자궁을 통해서만, 혹은 생물학적인 재생산을 통해서만 모성을 경험하는 건 아닙니다.

프레시안 : 한국에서 여성이 겪는 생리의 고통을 말하면 꼭 나오는 얘기 중 하나가, "여자들만 고생 하냐? 남자들은 군대 간다!"입니다. 서로가 '남성 : 여성'을 강조하면서 한쪽이 더 큰 피해를 입는다고 주장하지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양 측이 대립하는 구도를 만들어 놓고 자신을 피해자 위치에 놓는 방법이 오히려 운동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또 권리 확보를 위해 소수자 정체성을 강조하다 오히려 고립되는 경우도 있고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임옥희 : 얼마 전 소수자 정체성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를 목격한 일이 있었죠. '게이' 황의건 씨가 트위터에서 김여진 씨를 '국밥집 아줌마' 같다며 매도했는데, 사람들이 "아니 어떻게 성적 소수자인 게이가 외모 비하 발언을 할 수 있느냐"며 화를 냈어요. 우리는 게이라면 더 진보적이거나 정치적 올바름을 지향할 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거죠.

이성애가 지배적인 사회에서 동성애자는 그 정체성 자체만으로 저항성을 가진 존재가 될 수는 있지만, 모두가 모든 사안에 있어서 옳은 얘기를 하는 사람일 수는 없는 거죠. 황 씨처럼 다른 면에서는 굉장히 보수적인 얼굴의 청년이 나타날 수 있는 거예요.

사회적 소수자가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법 중 하나가 자신을 피해자로 만드는 건데요. 정당화 할 수 있는 부분이 있죠. 또 실제로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의 관심을 이끌어내고 정치적 힘을 집결시킬 수도 있고요.

하지만 동시에 발목을 잡지 않겠습니까? 약한 존재, 보호받을 존재라고 여기게 만드는 겁니다. 관심을 끄는 데는 도움이 되어도 운동을 지향할 땐 장애가 될 수 있기에 이율배반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전략은 문제적이라고 봅니다.

이는 페미니즘이 늘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최근 성폭력의 범위를 넓게 잡으면서, 아주 일부이지만 젊은이들이 사랑과 성폭력을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어요. 연인 사이에서 아주 사소한 일로부터 '성희롱' 얘기가 나오는 경우를 보면, 왜 성행위 주체로서 스스로를 그렇게 무력한 위치에 서게 하는지 의아해지는 거죠.

일부는 고소·고발까지 가는데, 법정에서 시비를 가려야 할 정도로 사랑과 그것이 아닌 개념을 구분하지 못하나, 행위 주체로서의 능력이 없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물론 진짜 폭력을 구분해야겠지만, 스스로를 무력화시키는 건 페미니즘이 의도하는 방식이 전혀 아닙니다.

ⓒ프레시안(손문상)

매춘을 아웃 소싱하는 사회

프레시안 : 얼마 전 영등포 집창촌 여성들이 생존권을 주장하며 거리로 나왔는데요. 성매매를 근절할 것이냐 하나의 노동으로 인정할 것이냐, 관점이 매우 첨예하게 부딪치는 풀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임옥희 : 일단 전부터 집장촌 여성들 스스로가 자신을 정치화할 수 있는 언어를 가져야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예를 들어 이들이 진짜 명품 가방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시위의 의미로 동전을 잔뜩 모아 명품 매장으로 던지는 것. 이런 게 상황을 정치화하고 운동의 차원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언어인 거죠. 비록 마스크나 모자를 쓰긴 했어도 그들이 거리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냈다는 점, 이건 정말 한국 사회에서 달라진 부분이라고 봐요.

2004년 성매매방지법이 통과되었는데, 이 법은 성매매 집결지를 강제적으로 폐쇄하고 철거의 명분을 제공해주는 역할을 하게 됐죠. 그 결과 매춘 여성들이 거리로 내몰리게 되었고요. 그런데 이러한 탈성매매주의 시각에도 문제가 있지만, 성 노동 인정 투쟁을 하는 성노동주의자들의 시각 역시 대단히 아이러니컬해질 수 있는데요.

매춘을 노동의 하나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일견 진보적이지만, 중산층 가족 중심의 단정한 성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매춘 노동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가부장적인 논리와 동전의 양면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문제지요.

탈성매주의자들 시각대로 성매매 여성들을 소위 '단정한 직업(decent job)'으로 이끌려고 할 때 정책적인 벽에 부딪치게 되는데요. 그들에게 탈 성매매를 권유하면서 다른 직업을 찾을 때까지 약 1년 정도 지급하는 정부 지원금이 매달 60만 원이에요. 헌데 차상위 계층이나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에게 지급되는 돈이 그 절반 정도라는 거죠. 그럼 과연 어떤 기준으로 지원금을 책정하는 것인가도 문제가 됩니다.

프레시안 : 일부는 이 여성들에게 '일터를 뺏기면 다른 일을 하면 되지 않느냐'고 비난합니다. 그렇다면 성매매를 자발적으로 하느냐 어쩔 수 없이 하느냐가 또 논쟁 지점이 되는데요.

임옥희 :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최근 와서는 거의 인신매매 수준의 강제적인 성 노동을 하는 여성은 거의 없을 거라고 보거든요. 물론 일부 남아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예전처럼 '병든 부모 치료비와 남동생 학비를 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런 서사를 갖고 있는 사람은 드문 게 사실이거든요.

그런데 우리 사회는 리얼리티 프로그램 속 '루저'들이 일순간 개과천선하는 식의 내러티브를 원하고, 성매매 여성에게도 그런 알리바이가 있어야 비난을 덜 해요.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매춘을 한다고 하면 엄청나게 비난을 하죠. 하지만 지금은 대다수가 '집안의 온갖 하중을 짊어지고 어쩔 수 없이 거리로 나왔다'고 얘기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란 거죠.

그렇다면 매춘을 오래된 직업(old profession)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을 이야기해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진정 문제적인 건 따로 있습니다. 사회가 여성들에게 단정한 직업을 가지라고 강요하면서 그 여성을 사회의 오점으로 만드는 방식인데요.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 전체가 비유적으로 '매춘 구조'로 돌아가는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비난을 매춘하는 여성들에게만 짊어지게 하고 있어요.

매춘을 아웃 소싱하는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돈데요. 그런 점은 전혀 이야기하지 않고 있어요.

요즘 대학 사회 보면 그런 느낌이 들 때가 많아요. 최저 임금 4320원 갖고는 아무리 일해도 등록금을 마련할 수 없거든요. 그래서 여학생이고 남학생이고 노래방 도우미부터 막노동까지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렇게 만드는 학교가 포주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어요. 바로 이런 구조엔 다 눈감고 있잖아요.

샹탈 애커만 감독의 <잔느 딜망>이란 영화가 있는데요. 주인공 여성은 남편이 죽고 고등학생 아들을 키우면서 아주 단정한 중산층의 삶을 살아가요. 아침에 일어나서 아들 도시락 싸고 시장에서 장 보고, 스테이크를 만들기 위해 고기를 다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건조하게 보여주죠. 그리고 오후에 카페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저녁엔 아들 과제 봐주는 아주 전형적인 주부의 모습이 이어져요.

그런데 좀 다른 게 하나 있는데, 바로 집에 여러 명의 '고객'들이 찾아오는 거예요. 찾아오는 남자들과의 관계(매춘)라는 비용으로 중산층의 우아한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겁니다. 이 영화가 우리 사회의 돌아가는 모습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고 봐요. 돈의 포르노그래피의 시대, 매춘에 의해서 지탱되는 부분들은 선망하고 매춘 여성들에게만 비난을 감당하게 하는 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아웃 소싱 구조를 얘기하면서, 그동안 모든 무게를 다 짊어졌던 성 노동이 하나의 직업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합법화하는 방향으로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합니다. 물론 현재 법으론 성을 산 남성들을 처벌하도록 하고 있으니 이들을 고객이라고 봤을 때 양립할 수 없다는 문제가 생기죠.

또 얼마 전 어느 대담에서 "왜 이렇게 결혼 연령이 높아지고, 독신 가구가 증가하는가" 하는 질문에 "이젠 성적인 문제를 결혼 제도 바깥에서도 해결할 수 있다"는 답이 나왔는데요. 여성 역시 원 나잇 스탠드든 섹스 도구든, 결혼하지 않고도 성적인 욕구를 해결할 수 있는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결혼 제도로 묶이지 않은 사람들이 많아지는 현상과 관련해서도 사회 전체가 좀 관심을 기울여봐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데까지 생각이 미쳤습니다. 결코 간단하지 않은 문제죠.

ⓒ프레시안(손문상)

여성이여, 출산 파업을!

프레시안 : 마무리를 위해 책 얘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마이 리틀 레드북> 서문에서 이 책이 마오쩌둥 어록집인 <빨간책(little red book)>의 혁명적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고 농담을 했는데, 농담인 만큼 그 지점까지 닿지는 못한 책이었습니다. 만일 여성들이 진짜 혁명을 한다면 어떤 게 있을 수 있을까요?

임옥희 : 방법이 어디 멀리 있는 것 같진 않네요.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리시스트라타>에 나오는 것처럼 여자들이 출산 파업하면 사회가 당장 흔들리는 거잖아요. 일종의 생물학적 혁명이죠.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게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큰 파워가 될 수 있는 거죠.

헤겔은 여성들이 공동체를 존속시킬 수 있도록 생명을 만들면서도 자신의 아이를 전사로 내보내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여성을 공동체의 아이러니라고 표현했는데요. 애초에 낳지 않으면 공동체 존속 자체가 안 되지 않습니까. 자본주의 사회를 바꿔낼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방법이 소비하지 않는 것 외에, 바로 낳지 않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부분에선 여성이 굉장히 막강한 파워를 갖고 있는 거죠.

너희들이 애를 안 낳는다면 공장에서 찍어내는 기술이라도 만들겠다고 하겠지만, 아직까지는 그게 수익이 나는 장사가 아닐 거예요. (웃음) 물론 어느 시점이 되면 공장에서 아이들을 만들어 낼 겁니다. (웃음)

프레시안 : 마지막으로 요즘 가장 천착하고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임옥희 : 지금까지 한 이야기와 전혀 다른데요. 원래 피부가 좋지 않았지만 최근에 좀 더 까매졌어요. 주말에 봉화에 가서 열심히 '피'를 뽑았거든요.

프레시안 : 피요?

임옥희 : 피를 모르는구나. (웃음) 피(血)가 아니라 피(稗)요. 봉화 오지에 폐가를 하나 샀거든요. 오랜만에 내려갔더니 마당이 완전히 개망초로 뒤덮여 있더군요. 그야말로 방치 농법이에요. 열심히 농사지어서 생산성을 높일 거야, 하는 순간 귀농 역시 자본주의 구조 속으로 들어가서 망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봉화라고 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살았던 '봉하'와 많이들 헷갈려 하시는데, 전혀 다른 지역입니다. (웃음) 태백, 청량산, 청송교도소 삼각형 구도 한 가운데 있어서 교통도 안 좋고, 정말 오지입니다. 그래도 거기 내려가 있으면 내가 소비하라는 명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고, 편안한 기분을 맛볼 수 있는 것 같아요. 그게 유일한 휴식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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