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고,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람에 의해 끊임없이 변모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이 만든 도시는 과연 사람을 위한 곳인가? 도시를 만드는데 기여한 사람은 정작 도시가 제공하는 편익을 제대로 누리고 있는가?
<프레시안>은 진보적 도시 연구 집단 한국공간환경학회와 공동으로 '도시 주인 선언' 기획 연재를 시작한다. 현재 시민 열 명 중 아홉 명이 도시에서 거주하고 있다. 도시에 거주하지 않는 나머지 시민도 도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다. 이 기획은 도시의 거주자와 이용자는 누구나 차별 없이 평등하게 "도시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우리에게 아직 생소한 개념인 "도시에 대한 권리"에는 도시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평등하게 누릴 권리, 도시 공공 공간에 대한 자유로운 이용권, 도시 행정에 대한 참여권 등 도시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권리들이 포함된다. 또 이 안에는 자유롭게 무선 인터넷에 접속할 권리 등 최근에 새로 포함되었거나 되어야 할 권리도 있다. 다른 나라의 도시에서는 시민들의 당연한 권리로 인정되고 있는데도, 아직 우리의 도시에서는 생소한 권리도 있다.
앞으로 매주 화, 금요일 두 차례씩 이어질 이번 기획 연재를 통하여, 지금 대한민국의 도시에서 도시의 주인이어야 할 시민들이 과연 적절한 수준의 권리를 누리고 있는지, 당연한 권리임에도 불구하고 침해받거나 무시되는 권리는 없는지, 도시에 대한 권리에서 배제되거나 소외되는 사람들은 없는지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기획을 통해 우리의 도시에서 도시 거주자나 방문자가 당연하게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양적으로, 질적으로 더 확장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편집자>
우리의 도시에서 배제되는 사람들
서울 은평구에 있던 한양주택 마을은 비록 낡고 오래된 단독 주택 단지였지만, 서울시가 '아름다운 마을'로 지정했을 정도로 정겹고 살 만한 곳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서울시가 이 지역을 은평뉴타운 구역으로 지정하고 재개발을 추진했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함께 살면서 이웃과 동네에 정이 많이 든 주민들은 재개발을 반대했으나, 서울시는 뉴타운 사업을 밀어붙였고 결국 이 마을은 철거되었다.
자신들이 소유한 땅과 집에서 그냥 살겠다는 한양주택 주민들의 주장은 묵살되었다. 한양주택 주민들이 주장했던 자신의 집과 땅에서 계속 살 수 있는 권리는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의 도시에서 이 정도의 권리 침해는 별로 큰 사건으로 간주되지도 못한다. 토지나 건물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훨씬 더 끔직한 일들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림 씨는 가족과 함께 용산에서 호프집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용산 일대 재개발 추진으로 인해 졸지에 생업을 중단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삶이 막막해진 이 씨는 호프집에 이미 투자했던 권리금과 시설비 등의 보상과 생계 대책을 요구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실정법에서는 토지나 건물의 소유주가 아닌 세입자는 그 동네에서 아무리 오랫동안 살았어도, 또 그 지역의 상권 형성에 아무리 기여했어도 재개발 과정에서 부재 지주가 행사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가질 수 없다.
용산에서만 무려 26년간 장사를 한 당시 71세 이상림 씨는 실정법이 보장해 주지 않는 '생존권'을 주장하고자, 농성이라는 '불법' 행위를 택했다. '불법' 행위의 대가는 참혹했다. 테러 진압 임무를 띤 경찰특공대에 의해 강제 진압을 당하는 과정에서 이 씨는 인간의 가장 소중한 권리인 생명을 잃었다.
용산 참사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고(故) 이상림 씨의 아들 이충연 씨는 현재 공무 집행 방해, 건조물 침입 등의 죄목으로 구속되어 현재 복역 중이다.
박래군 씨와 이종회 씨는 용산 참사의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 대책을 촉구하는 시위를 조직했다. 그러나 '불법 폭력' 시위 혐의로 법원에서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오랫동안 인권 증진을 위해 몸 바쳤던 한국을 대표하는 인권운동가 박래군 씨는 이 사건으로 인해 전과 11범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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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녀 씨는 서울 홍익대학교 근처에서 작은 칼국수 집 '두리반'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지역 재개발이 추진되면서, 안 씨는 이미 투자한 1억 원의 상가 권리금과 시설비에 대한 아무런 보상 없이 단지 이사 비용 300만 원만 받고 나가라는 통지를 받았다.
이를 거부한 안 씨는 2009년 말부터 두리반을 점유한 채 철거 반대 투쟁을 시작했다. 안 씨의 남편인 소설가 유채림 씨와 인연으로 많은 문인들이 여기에 참여하면서, 두리반 투쟁은 점점 문화 운동의 성격으로 나아갔으며 1년 반 동안 음악회, 낭독회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이런 까닭에 두리반을 철거할 '합법적' 권리를 가지고 있는 재개발 시행사는 강제 철거를 시도하지 못했다. 다만 지난해 여름부터 시행사의 요청으로 한국전력공사가 전기 공급을 중단하는 등 압박이 이어졌다.
그러다 지난 6월 8일 시행사와 두리반이 '두리반 이주 대책 등을 담은 합의서'에 조인하면서 531일간의 농성이 막을 내렸다. 여기엔 두리반이 인근 상권에 다시 문을 열 수 있도록 시행사가 영업 손실 배상금 명목 2억 5000만원을 지급하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프레시안 |
2010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 회의는 대통령과 주류 언론이 우리나라 '국격'을 상승시켰다고 대단히 칭송했던 행사이다. 그러나 G20 정상 회의를 앞두고 이주노동자, 노점상, 노숙인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이 실시되었다. 대한민국 시민권을 가진 노점상, 노숙인도 G20 정상 회의 행사를 위한 단속 대상이 되었다. (☞관련 기사 : "G20 개최의 조건? 노숙인·노점상은 나가 있으라고?")
많은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 G20 정상 회의를 대비한 치안 확립을 명분으로 추방되었다. 그 와중에 단속을 피하던 한 베트남 출신 이주노동자가 추락사하는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위시하여 수십 년 동안 떠들썩한 국제 행사가 있을 때마다 이른바 '국격'을 위하여 도시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공권력의 단속 대상이 되어 거리에서 추방되는 일이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G20 정상 회의 서울 개최는 또 다른 예술적 범죄자(?)를 만들었다. G20 정상 회의 홍보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린 대학 강사 박정수 씨는 공용 물건을 손상하는 조직적 범죄 행위를 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관련 기사 : '쥐 포스터' 그린 박정수 "쥐 형상이 특정인하고 결부되냐")
그 얼마 전에는 서울대학교 디자인 그룹 FF가 오세훈 시장이 추진하는 '디자인 서울' 정책을 조롱하는 스티커 작업 (이른바 '해치맨 프로젝트')을 하다가 경찰에 소환되었다.
이들은 도시에 머물 권리가 없는가?
지금까지 살펴본 여러 사례들은 모두 대한민국의 도시에서 일어난 이야기들이다. 위 사례들 모두 대한민국의 법을 엄정하게 집행하는 공권력에 의하여 쫓겨나거나 처벌받거나, 그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쫓겨나거나 처벌받아야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큰 소리로 공권력을 비난하고 자신들이 정당한 권리가 있다고 당당이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권리 주장에 공감하고 동조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고 G20 정상 회의를 개최하는 선진화된(?)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후진국형 참사인 용산 참사의 원인과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불법" 점거 농성을 한 세입자보다, 강제 진압을 한 공권력과 함께 세입자를 배제하는 현 재개발 사업의 문제점을 비난했다.
다양한 집단과 개인들이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두리반을 "불법" 점유한 안종녀 씨를 후원했다. 용산 참사로 구속되었던 박래군 씨는 세계적 인권 단체 국제앰네스티에 의해서 양심수로 선정되었다. 국제엠네스티는 경찰력의 과도한 사용을 야기하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강제 단속과 집단 추방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G20 정상 회의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린 박정수 씨를 돕기 위한 각계의 구명 운동도 펼쳐지고 있다. 과연 누가 옳은가? 왜 많은 사람들이 실정법이 인정하지 않는, 혹은 실정법을 위반하는 권리 주장에 동조하고 있는가?
실정법과 공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쫓겨나는 소수의 사람도 있다. 경기도 화성의 한 아파트 단지 주민들은 집단적으로 한 정신 지체 장애인 가족에게 그 아파트 단지를 떠날 것을 강요했다. 2009년 봄 정신 지체 장애인이 지역 주민을 때린 사건 때문이었다. 장애인 가족은 피해자 가족에게 피해 배상금을 주고 합의했으나 일은 이걸로 끝나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의 부녀회와 입주자대표회가 나서서 정신 지체 장애인과 같은 아파트에 살수 없으니 이사를 가라고 장애인 가족들에게 강요했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집단 이사 강요에 시달린 장애인 가족은 아파트 주민 대표들을 고소하기에 이르렀다. 여러 장애인 단체도 나서서 정신 지체 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차별적 인식을 항의하면서 이 소송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과연 누가 옳은가? 폭력 사건을 일으킨 정신 지체 장애인은 사회로부터 격리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아니면 우리가 보듬어 안고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가?
서울역과 같이 만인이 이용하는 공공장소를 점유하는 노숙인은 일반 시민에게 혐오감을 준다. 그래서 노숙인 단속을 반기는 사람들도 있다. 거리를 점유하고 있는 노점상은 시민들의 보행에, 바로 앞 상가의 영업에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래서 노점상 단속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요구가 있기 때문에 공권력이 단속에 나서는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 이들을 공공장소나 거리에서 단속하고 쫓아낸다면 노숙인이나 노점상이 갈 곳은 어디인가? 우리의 도시에서 이들이 우리와 함께 머물 수는 없는 것인가? 이들에게는 도시에서 쫓겨나지 않고 살 수 있는 권리가 없는가?
용산에서 호프집을 운영했던 이상림 씨, 홍익대학교 앞에서 칼국수 집을 운영하는 두리반의 안종녀 씨는 다른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거나 피해를 주지 않았다. 오히려 도시 상권에 많은 기여를 했다. 이들이 쫓겨난 이유는 토지나 주택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사회적 차별에도 불구하고 우리 도시 경제에 많은 기여를 했다. 이들이 쫓겨난 이유는 시민권 혹은 체류권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도시에 기여한 이들이 도시에 머무를 수 있는 권리는 없는 것인가?
이렇게 도시에서 배제되고 추방되는 사람들에게 위안과 대안을 줄 수 있는 담론이 하나 있다. 최근 세계적으로 관심을 끌고 있는 "도시에 대한 권리" 담론이 바로 그것이다. 일찍이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1901-1991년)는 도시에 거주하는 주민 누구나 도시가 제공하는 편익을 누릴 권리, 도시 정치와 행정에 참여할 권리, 자신들이 원하는 도시를 스스로 만들어 나갈 권리를 뜻하는 "도시에 대한 권리(Le droit a la ville, The Right to the City)"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 출신의 비판적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는 사람들이 누려야 할 권리 중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소홀히 취급받고 있는 것이 바로 도시에 대한 권리, 즉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도시를 만들고 고쳐 나갈 권리, 그리고 이를 통해 사람들 스스로를 변화시킬 권리라고 주장했다.
도시에 대한 권리
최근 유엔(UN) 산하 기관인 유네스코(UNESCO)와 유엔-해비타트에서는 이른바 "도시에 대한 권리" 캠페인을 통해 도시를 더 따뜻하고 포용적으로 만들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도시가 인류 대다수의 삶의 터전이 되고 있는 도시화 사회에서, 도시에서의 배제나 추방이 우리의 삶 자체에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경쟁과 효율, 이윤 추구라는 신자유주의적 경향으로 인해 각국의 도시에서 배제되거나 소외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것도 이런 캠페인 추진의 배경이다.
더 포용적인 도시를 만들기 위해 이런 국제 기구들이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캠페인도 있지만, 아래로부터의 운동도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 급격한 도시화에 따른 도시 빈민의 문제가 심각한 남미의 도시에서는 오래전부터 "도시에 대한 권리"를 슬로건으로 내건 운동 단체들의 투쟁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브라질 같은 곳에서는 이러한 투쟁의 결과, 무허가 정착촌 주민들의 주거권 보장 등을 포함한 "도시에 대한 권리" 보장이 헌법이나 법률로 명시화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요즘 미국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운동 단체도 바로 '도시에 대한 권리 연대(the Right to the City Alliance)'이다. (☞바로 가기 : 도시에 대한 권리 연대)
도시에 대한 권리를 외치는 이들의 주장은 도시 거주자라면 누구나, 재산이나 토지 소유 유무, 나이, 성별, 계층, 인종, 국적, 종교의 차이에 따른 차별이나 배제 없이 도시가 제공하는 편익을 향유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앞에서 예를 든 우리 도시에서 쫓겨나거나 처벌받는 사람들의 주장이, 실정법을 앞세운 공권력보다 오히려 더 정당해 보인다.
역사적으로 권리의 개념은 고정되거나 영구불변한 개념이 아니었고, 실정법의 테두리 속에 갇혀 있던 개념도 아니었다. 시대적 흐름과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 진화, 확장・발전되어온 개념이 바로 권리 개념이다.
지금의 선진국에서도 한 때 노예 소유가 합법적 권리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노예제는 불법이다. 한때 동성애자는 공권력에 의해 감옥에 가던 시절도 있었다. 이제는 단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감옥에 가지는 않는다. 여전히 사회적 편견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점차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사라지는 추세에 있다.
한때는 밀폐된 버스나 비행기에서도 담배를 자유롭게 피우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개방된 광장에서도 담배를 피우면 처벌된다. 흡연권은 제한되고 대신 비흡연권이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과거에는 당연한 권리였던 것이 이제는 처벌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그 반대로 과거에는 불법이었던 것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이제는 당연한 권리로 인정되기도 한다. "도시에 대한 권리"는 지금 전 세계적으로 도시 거주자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로 인정 받아가는 추세에 있는 권리이다.
앞으로 진행될 이번 기획 연재에서는 다양한 필자들이 함께 참여하여 세입자, 노점상, 노숙인, 장애인, 이주노동자, 시위대 등 우리 도시에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이유로 배제되거나 소외되는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도시의 구성원으로서 도시가 주는 편익을 함께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한다.
이러한 주장은 현재의 실정법 혹은 우리의 보편적 통념과는 다른 주장일 수 있다. 또 기존의 인권을 강조하는 논의와도 조금 다른 시각일 수 있다. 그렇지만 "도시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는 새로운 외침은 우리의 도시를 보다 따뜻하고 살기 좋은 장소로 만드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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