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번 넘게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헌법재판소에 재판소원을 청구했다. 법원이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해 성적 자기결정권 등 기본권을 침해 당했으며, '폭행·협박이 피해자의 저항을 불가능하게 할 정도여야 죄가 성립한다'는 낡은 잣대로 성폭력을 처벌하지 않는 재판 관행을 바꿔야 한다는 이유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여성위원회, 한국성폭력상담소 등 61개 단체가 모인 '동의없는 성폭력 재판소원 공동대책위원회'는 23일 서울 종로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피해자가 1시간 동안 75회 이상의 명시적 거부의사를 표시했음이 객관적 증거로 확인됨에도 '피해자의 저항이 부족했다'는 낡은 잣대로 성폭력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준 법원을 바로잡기 위해 재판소원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청구인은 지난 2022년 지인으로부터 동의 없는 성폭력을 당한 A 씨다. 공대위에 따르면, A 씨는 사건 당시 "그만해", "아파", "안 돼" 등 명시적인 거부 의사를 수십 차례 밝히며 저항했음에도 성폭력 피해를 입었다. 사건 이후 A 씨는 지인을 유사강간 혐의로 고소했다. 또한 재판부에 성폭력 상황 및 자신의 거부 의사 표시가 담긴 1시간가량의 녹음파일과 녹취록을 제출했다.
1심 재판부는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피고인이 피해자의 내심(속마음)의 의사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이유였다. 2심 재판부 또한 무죄 선고를 유지했고, 검찰이 상고를 포기해 재판이 종결됐다.
A 씨는 해당 재판이 자신의 성적 자기결정권, 평등권, 인격권, 그리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본질적으로 침해했다며 지난 17일 재판소원을 청구했다. 피해자가 표시한 거부 의사보다 가해자가 오해했을지도 모를 '내심의 의사'를 우선해 국가가 범죄로부터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해야 할 의무를 포기했다는 것이다.
법률대리인단장을 맡은 오지원 변호사(법률사무소 법과 치유)는 "우리 법은 의사에 반해 물건을 가져가는 '절도', 의사에 반해 남의 집에 들어가는 '주거침입', 의사에 반하는 '추행'을 처벌한다. 그러나 성적 자기결정권을 짓밟고 성기 삽입이라는 중대한 신체 침해를 동반하는 강간죄와 유사강간에 있어서만은 '최협의설'이라는 낡은 장벽을 세워 가해자는 벌금형도 받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최협의설'은 강간죄 요건을 구성하는 폭행과 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여야 한다는 논리다. 대법원은 2023년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강제추행죄에서 최협의설을 페기했으며, 이후 강제추행 등 일부 성폭력 사건에 재판부가 완화된 기준을 적용해 가해자를 처벌하는 사례가 늘어 왔다.
오 변호사는 "대법원이 강제추행죄에서 최협의설을 폐기했는데 왜 더 중대한 신체 침해인 유사강간 사건에서는 여전히 피해자에게 죽을 힘을 다해 저항했음을 증명하라 요구하느냐"며 "피해자는 아무리 거부했어도 존중받지 못한 상황에서 오히려 법이 요구하는 저항까지 못한 게 자신의 잘못이라는 죄책감까지 평생 안고 살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번 재판소원이 단순히 한 개인의 억울함을 푸는 것을 넘어, 오래된 악습인 법원의 강간죄 판단기준을 헌법 정신에 맞게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며 "국가가 외면한 피해자의 목소리에 응답해 청구인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평등권을 확인하고 회복시켜주시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피해자 A씨도 입장문을 통해 "무죄라는 문장 앞에서 사건 직후보다 더 무너졌다"며 "피해자의 거부 의사가 '가해자의 논리로 재해석되지 않는 나라', '어느 재판부를 만나느냐가 피해자의 운명을 결정하지 않는 나라' 그 시작이 부디 이 사건이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헌재에 재판소원 인용을 촉구했다.
다음은 한선희 천주교성폭력상담소 소장이 대독한 A 씨 입장문 전문이다.
저는 2022년 오랜 지인으로부터 성범죄 피해를 입고, 근 4년간 1심과 항소심을 거쳤습니다. 4년이라는 길고도 외로운 시간을 '유죄'가 쓰여진 판결문만을 바라며 버텼습니다. 하지만 허망하게도 두 번의 재판 결과는 모두 무죄였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저를 여전히 고통스럽게 만드는, 그리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두 번의 재판결과에서 저를 힘들게 했던 점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심 판결문에는 제가 사건 당시 분명한 거부 의사를 표현했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같은 판결문에 "피고인이 피해자의 내심의 의사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였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라고도 쓰여있습니다. "피해자는 분명히 거부했다"고 쓰여있는 판결문 안에, "그래도 피고인은 오해할 수 있었다"라는 의미의 말 또한 쓰여있는 것입니다.
피해자의 거부가 판결문에 명시된 사건에서조차 '오해 가능성'이 피고인의 무죄 근거가 된다면, 피해자의 말은 도대체 무엇으로 더 증명되어야 하는 걸까요? 피고인이 제 거부 의사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수십 차례 거부 의사를 말하는 제 말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더 억울하고 힘들었던 점은 제가 저항해서 겨우 피고인의 행동을 멈추게 한 것을 피고인이 '강제로 할 의사가 없었다는 증거'로 보았다는 점입니다.
거절 의사를 밝혔어도 유사강간으로 나아간 것은 피고인이 피해자의 내심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피해자가 저항을 하여 피해를 멈추게 한 것은 피고인이 강제로 할 의사가 없었다는 방증으로 해석되는 이 상황이 저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죄라는 문장 앞에서 사건 직후보다 더 무너졌습니다.
그래도 다시 한번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은 검사가 1심 판결의 문제를 지적하며 항소를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항소심 판결문은 더 짧았고, 더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1심 재판에 이어 2심 재판에도 증인으로 출석까지 했으나 항소심 재판부는 "원심의 판단은 정당하다"는 한 문장으로 검사의 항소를 기각했습니다. 기각한 이유를 자세히 알고 싶었지만 판결문은 고작 네 쪽이었고, 그중 실질 판단은 한 쪽을 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항소심 검사에게 대법원 상고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검사는 상고를 하지 않았습니다.그래서 저는 재판소원을 하기에 이르렀고, 지금 이 자리에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날 밤의 일이 저를 무너뜨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를 더 큰 절망에 빠트리고 세상에 대한 불신을 갖게 한 것은 '피해자인 저를 보호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 두 재판의 판결문이었습니다. 피고인에 대한 저의 분노는, 모순적인 법의 논리 아래 너무나도 하찮게 짓밟혔습니다. 저는 이제 거대한 법 아래, 피해자가 아닌 피해자로 무력하게 존재합니다.
저는 사건이 있던 그 날의 저에게 미안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법은 저를 미안해야 하는 피해자로 만들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매일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저의 거부의사가 분명히 존재하는데, 왜 법 앞에서는 거부 의사로 해석되지 않는지를. 피해자라는 자리가 한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바탕으로 성적자기결정권을 주장할 수 있는 자리가 맞는지를.
저는 저 한 사람만을 위해 이 자리에 나선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어디선가, 자신의 거부의 말이 상대방의 '무시'로 인해 원치 않는 피해를 겪고 법 앞에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많은 피해자의 이름으로, 용기 내 이 자리에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헌법재판소에 간곡히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부디 이 사건을 문 앞에서 돌려보내지 말아 주십시오. 피해자의 거부 의사가 '가해자의 논리로 재해석되지 않는 나라', '어느 재판부를 만나느냐가 피해자의 운명을 결정하지 않는 나라' 그 시작이 부디 이 사건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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