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두 문화> 미스터리와 대학생의 등록금 '반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두 문화> 미스터리와 대학생의 등록금 '반란'

[이명현의 '사이홀릭'] 찰스 퍼시 스노우의 <두 문화>

찰스 퍼시 스노우가 지은 <두 문화>(오영환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에 대해서 언급한 글들을 살펴보면 그곳에 '두 문화'의 전선이 구축되어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한쪽 끝에는 <두 문화>를 실제로 읽고 글을 쓰는 평범하고 상식적인 문화가 존재하고 또 다른 쪽 끝에는 <두 문화>를 읽지 않고 읽은 척하면서 글을 쓰는 또 다른 극단적인 문화가 있는 것 같다.

<두 문화>를 읽고 나서 이 책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이야 글쓴이의 영역이니 그 내용이나 주장이 어떻든 원칙적으로 문제 삼을 것이 없다. 다만 의견이 다르면 그에 대한 논박을 하면 될 것이다. 이것이 상식적이고 평범한 사람들이 하는 행위일 것이다.

▲ <두 문화>(찰스 퍼시 스노우 지음, 오영환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그런데 이 책을 거의 또는 전혀 읽지 않고 이 책에 대해서 글을 쓰고 그를 바탕으로 자신의 논리를 전개하는 경우를 보면 마음이 좀 불편해진다. 물론 어떤 글을 보면서 글쓴이가 <두 문화>를 정말 읽지 않고 읽은 척하면서 글을 썼다고 단정하는 것은 오만한 짓일 것이다. 책을 읽었지만 스노우의 의도를 잘못 파악했을 수도 있고 (물론 저자의 의도 자체가 고착된 것이 아닐 수도 있고 비평자에 의해서 새롭게 정립되기도 할 것이다.) 정독하지 않고 훑어만 봐서 초점을 놓쳤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백번 양보하더라도 거의 확실하게 <두 문화>를 읽지 않은 것 같은 글들을 자주 만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두 문화>의 번역본 부제는 '과학과 인문학의 조화로운 만남을 위하여'로 되어 있다. 이 때문인지 이 책의 논점을 (책을 읽지 않은 채) 부제에 적힌 글귀를 (읽은 척하면서) 확대 해석해서 이 책을 '과학과 인문학의 만남'에 대한 바이블이나 핸드북으로 둔갑시키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 이 책을 읽어 보았다면 결코 그런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은, 이 책의 논점의 극단적인 대척점에 서 있는 '문학적 지식인'에 속할 필자가 그런 글을 쓴 것을 보면 정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다.

<두 문화>는 스노우 자신의 주관적인 주장이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나는 책이다. 따라서 한 번이라도 책을 읽은 사람과 전혀 읽지 않은 사람이 서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책이기도 하다. 적어도 피에르 바야르의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김병욱 옮김, 여름언덕 펴냄)의 전략이 잘 먹혀들지 않을 가능성이 큰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책의 첫 부분을 장식하고 있는 스노우의 1959년도 리드 강연의 제목이 '두 문화와 과학 혁명'라는 것을 재빨리 파악한다면, 좀 더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스노우가 정말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의 문제를 십중팔구는 놓치고야말 것이다.

사실 책을 읽지 않고 책에 대한 글을 쓰거나 인용하거나 심지어는 서평을 (또는 책 소개를) 쓰는 문화가 한국 사회에 어느 정도 만연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출판사에서 보내온 보도 자료만 살펴보고 상상력을 발휘해서 서평을 쓰는 것이 책을 읽지 않고 글을 쓰는 가장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물론 제한된 지면에 '책 소개'를 하는 경우에는 보도 자료의 인용이 적절한 처방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서평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오는 글이라면 글쓴이는 최소한 그 책을 직접 읽어봐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상식일 것이다. 이런 사태의 이면에는 반드시 왜곡된 사회 구조의 문제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글쓴이 개인이 먼저 그에 굴하지 않을 자존감을 확보해야 한다고 하면 너무 과하고 현실감 없는 낭만적인 주장인가?

이제 <두 문화> 이야기를 해보자. 스노우는 이 책에서 크게 세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두 문화' 사이의 몰이해와 간극, 이를 극복하고 과학 혁명의 시대에 동참하기 위한 교육 제도 개선, 그리고 이런 합리성을 바탕으로 부유한 나라가 어떻게 가난한 나라를 도와서 빈부의 격차를 해소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차례로 이야기 하고 있다. 먼저 스노우가 말한 '두 문화'는 문학적 지식인과 과학적 지식인이었다.

"한쪽 극에는 문학적 지식인이 그리고 다른 한쪽 극에는 과학자, 특히 그 대표적인 인물로 물리학자가 있다. 그리고 이 양자 사이에는 몰이해, 때로는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는) 적의와 혐오로 틈이 크게 갈라지고 있다."

사실 두 집단에 대한 그의 판단은 의례적이고 양비론적인 면도 일부 있긴 하지만 한쪽에 분명하게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있는 것 같다. 아래 인용한 몇 구절에서도 그런 그의 관점이 비교적 명확하게 드러난다. 내가 진행하는 '독서와 토론' 수업에서 이 책을 같이 읽고 토론했던 많은 '문과 계열' 학생들이 이 부분에서 반사적으로 발끈하곤 했었다.

"한쪽 극의 과학적 문화는 비단 지적인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인류학적인 의미에서도 진정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또 한편에서는 어떤가. 그들도 무력해지기는 마찬가지지만 워낙 자존심이 높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파급 효과는 더 심각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문화가 '문화'의 전체인 양 그리고 마치 자연법칙 같은 것은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 (…) 그러면서도 대다수의 비과학자들은 그 체계에 대해서 아무런 개념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들이 갖고 싶어 한다 해도 가질 수도 없다. 광범한 지적인 체험의 세계에서 이 그룹의 사람들은 음치였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 음치는 타고나면서가 아니라, 훈련을 통해서 혹은 훈련의 결여에서 온 것임을 덧붙여둔다."

"과학적 문화에 속하는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서구의 지식인들은 산업 혁명을 이해하려고 힘쓰지도 않았고 원치도 않았으며, 또 할 수도 없었다. 하물며 그것을 받아들일 턱도 없었다. 지식인, 특히 문학적 지식인은 말하자면 타고난 러다이트(산업혁명(1811~1816) 당시 기계가 실업의 원인이라고 잘못 생각한 데서 기계 파괴의 폭동을 일으킨 공장 직공들)들이었다."

오래 전에 스노우가 당시 영국이 처한 특수한 상황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했던 말들이 여전히 우리들의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두 문화'를 좀 더 익숙한 '양극화'로 대체하고 그 주역들을 그냥 떠오르는 우리에게 익숙한 다른 이름들로 대체하면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처한 현실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오래된 <두 문화>의 역사성과 보편적인 생명력이 있는 것이다. 그의 문제 제기는 아직 유용하고 해결은 요원하다.

스노우는 "과학이 우리들의 운명을 크게 좌우하는" 시대에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또 의사소통을 하지 않으려는 두 문화의 존재는 위험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두 문화를 극복하고 과학 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소양과 능력을 갖출 수 있는 교육을 할 수 있도록 '교육 제도'를 개혁할 것을 제안했다. 물론 '과학적 사고와 판단'을 할 수 있는 합리적인 지식인의 양성이 궁극적인 목표였다.

"이 사실은 내 마음을 다시 교육의 문제로 향하게 한다. 어째서 우리는 과학 혁명에 대처하지 않는가, 어째서 다른 나라들은 더 잘 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상대적으로 과학 혁명의 시대적 소명을 잘 수행하고 있는 미국과 소련의 교육 제도의 장점을 취할 것을 제안했다. 1957년에 소련이 스푸트니크호를 발사한 이후 경쟁적으로 엘리트 과학 교육을 강화했던 양국의 교육 정책이 그의 눈에는 하나의 롤 모델로 비쳤을 것이다.

교육 제도의 개혁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해서 진부해진 개념이다. 하지만 여전히 절박한 화두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 사회의 모든 악순환의 근원이 '교육 문제'에 (특히 대학 입시) 있다는 극단적인 관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스노우의 오래된 문제의식에 이어서 너무나도 뻔해 보이는 그의 처방전이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큰 슬픔이다.

시대적 소명에 답하는 교육이 있어야한다는 데는 누구나 동감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하지만 '두 문화' 또는 '양극화'를 극복한다는 큰 그림을 그리고 '사람답게 잘 사는' 것을 중심에 둔다면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할 수도 있다. 온갖 이해가 얽히고섥힌 실타래를 단박에 풀어서 해결할 생각을 하지 말고 우선 해소할 수 있는 아주 기본적인 것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생존권과 인권의 차원에서 학생들의 먹을 권리, 입을 권리, 잠잘 권리, 놀 권리, 재미있게 공부할 권리를 보장해 주면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무상 급식을 전면적으로 실시하고 머리 모양이나 옷 입는 것은 그냥 내버려두고 대학교의 등록금은 정상화하면 될 일이다. 문과와 이과 같은 인위적인 벽은 애초부터 쌓지 않으면 된다. 그러고 나서야 교육의 가치와 목표에 대해서 격렬하게 토론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이건 교육 제도 이전에 '사람다움'의 문제다.

어쩌면 이 모든 논의의 정점에 스노우의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의 문제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국가 간의 빈부의 격차를 궁극적으로는 '해소'될 수 있는 문제로 보았다. 부자 나라들의 적극적인 원조와 희생을 통해서 가난한 나라를 산업화시켜서 빈국의 지위로부터 끄집어내자는 것이었다.

"아시아나 아프리카 문제의 전문가들의 입을 통해서 지금도 듣는 것은 '그네들을 우리의 수준까지 끌어올리자면 족히 500년은 걸릴 걸, 뭐'라는 말이다. 이러한 말은 그야말로 무분별하며, 기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의 말이다. 그리고 흔히 이런 말을 하는 자들은 구석기인도 5년쯤이면 따라갈 수 있는 인간들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변화의 속도가 그처럼 크게 증가되었기 때문에 상상조차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이다. 이 앞으로의 10년간은 지금까지의 10년 동안 볼 수 없었던 사회적인 변화가 반드시 일어나고야 말 것이며,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게 할 것이다. 다시 1970년대에는 보다 큰 변화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은 이 단순한 개념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이제 자기의 일생 동안 그저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간단명료한 진리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산업화가 가난한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이다."

현실성 없는 낭만적인 생각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한편 위에 인용된 글만 놓고 보면 장하준의 <사다리 걷어차기>(형성백 옮김, 부키 펴냄)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김희정·안세민 옮김, 부키 펴냄)의 어느 구절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스노우의 통찰과 지향점이 시대정신을 내포하고 있고 현대적이고 현실적이라는 이야기다.

그래서인지 <두 문화>는 곧바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스노우 자신의 말처럼 그의 리드 강연이 결코 '독창적'이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이미 꿈틀거리면서 그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그러면서도 중요한 사상과 지향점을 제시했기 때문에 그 파급력은 더 증폭되었을 것이다.

'두 문화'라는 극성이 어느 시대에나 발현할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존재라면 궁극적인 해결보다는 그것을 해소해서 윤택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궁리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방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그의 논점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스노우의 <두 문화>가 제안하는 처방전이 하나의 스토리텔링이 있는 레시피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꿈꿨던 세상은 이렇다.

"궁극적으로 교육의 변화가 곧 기적을 낳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의 문화의 분열은 필요 이상으로 우리를 우둔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커뮤니케이션을 어느 정도 손질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한 바 있듯이,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나 파스칼이나 괴테가 그들의 시대의 세계를 이해한 것처럼, 우리들의 현대의 세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남성과 여성을 길러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행운을 누리게 되는 날에는 우리는 많은 훌륭한 인재를 육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예술과 과학에 있어서의 풍부한 상상적 체험을 무시하지 않을 것이며, 과학기술이 베풀어 주는 것, 그리고 그들과 다를 바 없는 다른 많은 인간들이 겪고 있는 제거할 수 있는 고난을 방치해 두지 않을 것이며, 또 일단 부정할 수 없는 책임이 밝혀지게 될 때 그것을 무시하지 않을 사람들일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꿈을 꾸고 있는가. 모든 것을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해야할 것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