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지난 5월 13일 발행된 '프레시안 books' 39호에 실린 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학 교수의 <인지 자본주의> 서평에 대한 저자 조정환 씨의 반론입니다. (☞관련 기사 : 마르크스주의, 미래학의 유혹에 빠지다?) |
퇴행 : 운동권을 찾아, 경제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찾아
내가 기억하는 서동진은 68 혁명의 사상가 푸코의 관점을 따라 소수자적 성정치학을 주장하던 사람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는, 68년의 혁명을 혁명이라기보다 새로운 자본주의인 신자유주의를 낳고 사라진 매개적 소실점으로 정의하기 시작했고 68 혁명과 비교되기도 하는 한국에서의 2008년 촛불 봉기를 운동이라기보다 운동 정치의 '위기'로 규정했다.
촛불 봉기를 '운동의 위기'의 증상으로 비판한 책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산책자 펴냄)의 기획자였던 서동진은, 이 책의 기획자 서문에서 이 운동의 위기를 타개할 대안으로 1980년대의 운동권을 불러낸다. 그가 생각하는 운동권은, "국가가 국민 혹은 시민을 호명할 때 민중이란 이름을 내세우며 어떤 체제 속에서 살 것인가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주체로서 자리를 점유하고자 분투"(8쪽)한 집단이다.
그에 따르면, 1980년대의 운동권이 수행한 민중 운동은 "민주주의를 탈국가화시키면서 동시에 선거를 비롯한 일련의 민주적 절차들이 온전히 정치적 행위의 공간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위력을 발휘"(8쪽)했다. 68 혁명·촛불 봉기라는 운동 형태와 1980년대의 운동권의 운동 형태를 비교하는 것이라면, 뭔가 거꾸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민주주의를 '탈' 국가화시키는 경향은 1987년 투쟁보다 68 혁명이나 촛불 봉기 같은 것에 돌려져야 하는 것이지 않을까? 1987년의 운동권은 민중 권력의 국가 형태를 적극적으로 추구했을 뿐만 아니라 그 실효에서도 직선 정부, 문민 정부, 국민 정부, 참여 정부 형태로 이어진 국가의 자장에서 자유롭지 않지 않았던가?
이런 의문을 남기면서, 그는, 68 혁명은 자본주의의 산파였고 촛불 봉기는 '민주주의적 사태'와는 거리가 멀었음에 반해, '운동권'이 수행한 1987년의 항쟁과 투쟁은 "민주화의 효과"를 불러오면서 '국가와 정치 사이에 어떤 일치도 없음을 규정해' 냈다는 생각을 자유롭게 전개한다. 이 독특한 운동권주의적 역사관을 통해서 그는 1987년에서 2007년까지의 20년을, 신자유주의 시대로서보다는 "민주화 이후"의 시대로 보는 지극히 최장집스러운 역사관을 반복하는 새로운 세대의 일원이 된다. (이러한 평가는, 정작 1980년대 운동 형태를 지속하고 있는 사람들의 일반적 평가 방식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니 서동진에게, 이명박 정권의 등장이 "민주화의 효과가 중단되는 역사적 계기"로 나타나고 우리의 눈길을 "운동"으로 향하게 할 당연한 사태로 다가간 것은 일면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이상한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자유의 의지 자기 계발의 의지>(돌베개 펴냄)에서 그는, 노동 유연화, 지식 기반 경제, 신지식인 등의 현상, 요컨대 신자유주의 현상들을 포괄적으로 비판하는데, 그 신자유주의는, 그가 민주화 이후의 시대라고 부르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들에 의해 주도된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다면 1987년의 "민주화 효과"란 실은 신자유주의에 다름 아니었던 것인데, 68 혁명을 신자유주의 효과를 낳고 사라진 소실점으로 평가한 그가 왜 1987년을, 이명박 정권에 의해 더 극화된 모습으로 '연속'되는, 신자유주의 효과를 낳고 사라진 소실점으로 평가하지는 않는지, 왜 그것을 이명박 정권에 의해 '중단'되어질 민주화 효과의 원천으로 평가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운동권에 대한 그의 생각은 어떨까? 운동권이 "정치 없는 정치를 정치화"하고 "해방적 정치를 지속"한, 그리고 "정치가 사회의 경영과 관리란 역할 속으로 봉쇄되지 않도록 투쟁"한 "영예로운 이름"이라는 그의 생각은, 1987년이 민주화 효과를 20년간 지속해 왔다는 그의 평가와 연결되어 있는 한, 기억이지 현실은 아니며 신화이지 실재는 아니다.
1980년대의 운동 정치 속에서 민중 운동(서울민중운동연합), 노동 운동(서울노동운동연합), 혁명 운동(제헌의회그룹)을 이끌던 이재오, 김문수, 김성식은 지금 한나라당을 이끌고 있으며 정치 운동, 시민운동, 학생 운동을 이끌던 사람들(김근태, 유시민, 김민석 등)이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을 이끌고 있고,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을 이끌던 사람들(권영길, 노회찬, 심상정, 강기갑 등)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을 이끌고 있는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들이 지금 국가를 둘러싼 제도 정치 영역에서 서로 각축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의 지난 20년간의 제도 정치가 운동권의 정치화 및 국가화의 산물임을 확인해 주는 것이지 않을까?
그러므로 우리는, 서동진의 생각과는 달리, 1987년의 '운동권'은 "사회의 경영과 관리란 역할 속으로 봉쇄되어진" 전형적 사례에 속하지 그것과 "투쟁"한 사례가 결코 아니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운동의 국가화라는 이 엄연한 현실 앞에서 운동을 수호하기 위해 종종 우리는 제도 정당들에 들어간 사람들은 배신자라는 식의 종교적 '믿음'의 논리가 동원되는 경우를 접할 수 있는데, 이것은 사회와 운동의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 없고 그것을 제대로 설명해 낼 수 없을 때, 그 무력함이 취하는 정신적 피난처일 뿐이다. (서동진이 명시적으로 배신의 논리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나는 그의 논리 속에 이 논리가 잠복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뒤에서 밝힐 것이다.)
나는 2009년에 출판한 <미네르바의 촛불>(갈무리 펴냄)의 '총론'에서 서동진 식의 정치적 기획이, 현실에 실재하는 운동인 촛불에 대한 냉소주의를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거기에서 나는, 인식론적으로 촛불 냉소주의는, 현대 사회와 현대적 삶의 변화에 대한 부인에서 비롯되는 것으로서, 사회적으로 그것은, 계급의 다중적 재구성과 다중 지성의 출현 앞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과거의 엘리트주의적 위계 관념을 고수하려는 어떤 심성과 연관되어 있으며, 이것은 주로, 현대 사회의 엘리트주의적 제도 구조에 진입한 좌파 부분의 신보수화 경향과 연관되어 있다고 말했다.
신자유주의가 20여 년을 휩쓴 뒤인 21세기에 와서, 현실에 출현하는 실재적인 운동 형태들 대신에 과거의 조직 운동권과 운동의 정치를 불러내려는 시도는 일종의 시대착오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 퇴행 증상의 표현이라는 생각은, 나의 책 <인지 자본주의>(갈무리 펴냄)의 행간 속에도 흐르고 있는 정치적 그림자 주제 중의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출간 직후 서동진이 '프레시안 books'에 기고한 서평 "마르크스주의, 미래학의 유혹에 빠지다?"에서 표현한, 나의 책에 대한 비판적 문제 제기(그 논지는, 우리의 논쟁 맥락에서는, '현실의 변화에 대한 강조는 미래학이다'로 압축할 수 있다)는, 2009년 그가 기획한 책의 필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이택광과, <미네르바의 촛불> 출간 이후에 치렀던 논쟁의 쟁점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이며, 그 쟁점이 '어떤 운동이 필요한가?'에서 '어떤 이론이 필요한가?'로 지평을 옮겨 계속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지난 20년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우리 시대에 작동하고 있는 문제를 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할 논쟁적 계기를 제공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이 서평에서의 비판적 문제 제기를 매우 기쁘게 받아들인다. 2년 전에 촛불 운동을 거부하면서 20년 전의 저 '운동권'을 영예로운 이름으로 불러냈던 서동진은, 이번에는 <인지 자본주의>에 나타난 마르크스주의의 정치적 재구성의 시도를 거부하면서 지난 세기에 흥행했던 마르크스주의의 경제주의 판본을 불러낸다.
운동권이나 마르크스주의라는 이 두 단어가 오래 나 자신에게 달라붙어 있었던/있는 꼬리표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가 이 단어들을, 나를 겨누는 비판의 무기로 사용하고 있는 상황이 다소 아이러니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바로 이 아이러니 속에 현대 역사의 정치적 비밀이 숨겨져 있다면 이 문제를 파고드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일 수 있지 않겠는가? 그 비밀은, 운동과 이론을 시간 속으로 가져가는 문제이다. 그리고 변화의 평면으로서의 시간, 주체성의 재구성의 평면으로서의 시간이야말로 우리가 다루어야 할 핵심적 문제이다.
방법으로서의 이미지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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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지 자본주의>(조정환 지음, 갈무리 펴냄). ⓒ갈무리 |
서동진의 서평은 <인지 자본주의>를, 그 자신이 부정적인 것으로 평가하는 몇 가지 관점들과 나란히 놓고, 둘 사이의 공통 요소, 둘의 유사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비판을 전개한다. '미래학은 경험적인 사실에서 나타나는 변화로부터 곧장 보편성을 끌어낸다. <인지 자본주의>는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모든 변화가 전연 새로운 것이라고 보면서 이로부터 자본주의의 보편성을 끌어내려 한다. 양자는 유사하다. 그러므로 인지 자본주의는 미래학과 같다.'
서동진의 이 추론에서는 미래학도 비판되지 않으며 인지 자본주의도 비판되지 않는다. 다만 인지 자본주의 비판에, 미래학에 대해 이미 형성되어 있는 부정적 이미지가 덮어씌워질 뿐이다. 이 이미지 비판의 방법은, '포스트구조주의는 가치론 없는 자본주의론을 갖고 있고, 네오리카도주의는 상품 없는 가치론을 갖고 있다. 가치론 없는 자본주의론과 상품 없는 가치론은 마르크스주의의 정통 가치론에서의 일탈이다. 인지 자본주의는 이 두 요소를 다 갖고 있다. 고로 인지 자본주의는 마르크스주의로부터의 두 곱의 일탈이다'와 같은 논법에서도 나타난다.
미래학도, 포스트구조주의도, 네오리카도주의도 비판되지 않으며 인지 자본주의도 비판되지 않는다. 서동진은, '마르크스주의 가치 법칙은 오늘날도 여전히 타당하다'는 (사실은 증명되어야 할 문제를) 전제로 삼으면서 그것과는 다른 모든 주장들을 기각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오늘날의 인지 자본주의적 현실에서 사회적 필요 노동 시간에 따른 가치 측정이 위기에 처했고 가치 개념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하다는 문제 제기에 대해, 자본주의는 분업-상품 생산-가치화-화폐화로 이어지는 노동가치론과 가치 법칙 없이는 논구될 수 없는 것이며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로부터의 이탈이라는 주장을 단순히 대치시킨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서동진은, 자신이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낼 수 있고 이를 통해 그 자신과 공동의 취향과 감정을 갖는 사람들을 묶어낼 수는 있을 것이다. 즉 감정의 공동체를 구축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의 특성, 구조, 동학이 무엇인가라는 <인지 자본주의>의 애초의 문제 제기는 묻히고 만다.
문제는, 상품이 될 수도 되지 않을 수도 없는 이중 구속의 현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서동진이 전개하는 생각을 나의 방식으로 체계화해보면, 자본주의는 분업화(노동 분할)하며 분업으로 인해 상품이 출현하고,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의 사용 가치와 교환 가치, 유용 노동과 추상 노동 사이의 양극 관계에서 (교환) 가치의 지배 즉 화폐가 발생하며 이 연쇄 관계는 현대 자본주의에서도 불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생각은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현재성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자본주의 일반이 아니라 산업 자본주의에서 나타났던 현상이며 이 현상들이 제3기 자본주의인 인지 자본주의에서 어떻게 연속됨과 동시에 전환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인지 자본주의>, 113~116쪽) 내가 <인지 자본주의>에서 서술한 그 전환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노동이 인지화되고 분업이 다이어그램과 알고리즘, 즉 네트워크화된 시스템에 종속되면 네트워크화된 시스템에서 생산된 생산물들은 상품화되기보다 탈상품화되며, 가치화되기보다 탈가치화하며 그 결과 화폐는 유통 수단이나 지불 수단을 넘어 명령 수단으로 전화하고 이윤을 비롯한 모든 소득 형태들은 이 시스템 및 그것의 흐름에 대한 소유 독점을 기초로 강제되는 지대(수수료)로부터의 분배로 된다.'
만약 노동의 인지화가 가져오는 이러한 역사적 특수화가 부정될 수 있다면, 인지 노동이 산업 노동과 마찬가지로 상품화, 가치화될 수 있고 유통 수단과 지불 수단으로서의 화폐에 의해 매개됨을 입증할 수 있다면, 그래서 잉여 가치의 성격에 어떠한 변화도 없음이 입증될 수 있다면 나의 논점은 붕괴될지 모른다. 하지만 서동진은 인지 노동에 대한 어떠한 분석도 전개하지 않았다.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의 상품화-가치화로 구성되는 가치 법칙론 없이는 성립할 수 없고 이것을 부인하는 논리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라는 폐쇄된 순환 논리가 그의 서평을 지배했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구분된다. 마르크스주의를 믿다가 믿지 않게 된 자들은 배신자/배교자이다.
그런데 상품화를 부인하는 것이 이론이 아니라 현실이라면 어쩔 것인가? <인지 자본주의>가 던지는 물음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노동력 상품은 마르크스의 사유에서 상품 중의 상품이다. 오늘날 상품이었던 노동력은 해고되어 탈상품화되고 상품이 되고자 하는 청년들 다수는 상품 세계에서 배제된다. 오늘날 노동자들은 상품이 되지 않을 수도 없고 상품이 될 수도 없는 이중 구속(double bind)의 상황에 놓여 있다. 상품화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현실에서 노동자들이 부단히 탈상품화하는 오늘날의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이 시대의 역사적 위치와 의미는 무엇이고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도록 요구하는가?'
이런 문제들을 함께 생각하고 공통의 의견을 생성해 나가고자 하는 것이 <인지 자본주의>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서동진이 '마르크스주의는 가치 법칙이며 가치 법칙을 부인하는 생각들은 모두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라는 단순 논리 속에 묻어버린 질문들을 다시 끄집어내어, 인지 자본주의적 현실이 마르크스가 그려낸 자본주의의 논리를 어떻게 연속하고 있으며 어디에서 그것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는지를 다시 묻고, 그 문제를, 서동진이 제기한 가치 법칙(분업-상품-가치-화폐)의 지형 속에서 좀 더 진전시켜 보고자 한다. 이것을 나는 '인지 자본주의와 가치 법칙'이라는 제목을 단 <인지 자본주의> 제4장의 '보론'으로 삼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주의적 가문 문화
서동진이 제기하는 비판의 논점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인지 자본주의의 등장을 알리고 이를 마르크스주의의 재구성을 통해 분석하려는 작업에 분투하는 조정환은 이러한 제3기 자본주의를 인지 자본주의라고 단언한다. 지금의 자본주의가 인지 노동의 착취를 주요한 특징으로 하는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결론이 생산 혹은 노동의 문제 설정을 새로운 방식으로 자본주의 분석의 전면에 놓음으로써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또 이런 문제의식에 설 때 자본주의의 '거대한 전환'을 식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물론 이는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윤수종 옮김, 이학사 펴냄)이 현기증 나는 성공을 거둔 이후에 그리 낯설지 않게 된 생각들이라 할 수 있다. 자본은 더 이상 공장이나 사무실에서의 노동 시간 안에서 이뤄지는 직접적인 활동을 지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 따라서 전통적인 산업 노동자의 형상 속에서 자본에 종속된 자의 모습을 찾으려하는 것은 무망하다는 것, 우리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집합적인 지적 활동과 사회적인 상호 작용 자체로부터 가치를 얻어내기에 자본은 삶정치적인 권력이 되었다는 것 등 말이다.
그런데 조정환은 이러한 역사적인 소묘를 지지할 수 있는 일종의 자본주의 일반 이론을 구성하고자 한다. 이는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론을 특정한 역사적 시대(산업 자본주의)에 조응하는 입장으로 간주하고, 이를 변화된 자본주의의 현실에 맞게 수정하는 일로 이어진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마르크스주의의 현실적인 재구성인지 아니면 마르크스주의로부터의 이탈인지라는 쟁점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완고한 '올드'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난감하게 하는 많은 쟁점을 포함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마르크스의 결정적인 주장들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지 자본주의>에서 이루어지는 마르크스주의 재구성의 시도가 마르크스주의의 현실적인 재구성인가, 아니면 마르크스주의로부터의 이탈인가? 이것이 서동진이 질문을 던지는 방식이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와 계급 의식>(박정호·조만영 옮김, 거름 펴냄)의 한 장을 이루었던 '정통 마르크스주의란 무엇인가?'에서 매우 징후적인 사건으로 나타났던 하나의 심문을 대면하게 된다.
이 질문을 던졌던 위 책의 저자 죄르지 루카치는 정작, 역사 변증법만을 인정하고 자연 변증법을 부정한다는 이유로 스탈린의 비판을 받은 후, 책 앞에 장문의 자기비판적 서문을 붙이고 나서야 겨우 이 책을 출판할 수 있었다. '당신은 마르크스주의에 속하는가 벗어나는가?' 하는 심문 방식은, 한때 '운동권'의 사유 문법이었을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를, 주권을 기술한 법령으로, 숙청과 처벌의 척도로 만들면서 위계적이고 규율적인 가문(家門) 문화를 조장해온 바로 그 '마르크스주의'주의적 인지 장치이다.
말년에 마르크스는 정작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이다"(<자본론에 관한 서한집>(한네스 스캄브락스 엮음, 김호균 옮김, 중원문화 펴냄, 243쪽)라고 말했는데, 이 사태야말로 소련의 해체가 도래하기 한 세기도 전에 '마르크스주의'에 출현했던 위기의 증상이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가치 법칙이 마르크스의 '결정적' 주장인가?
'당신은 마르크스주의에 속하는가 속하지 않는가?' 하는 심문 방식을 하나의 권력적 인지 장치로 규정하는 것으로 서동진의 문제 제기가 모두 소진되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주의의 가문 경계를 설정하려는 낡은 인지 습관을 그가 반복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마르크스주의가 아주 소규모의 운동 집단들을 제외한다면, 그 어느 곳에서도 권력 기능을 수행한다고 보기 어려운 시대에, '그것은 권력 장치야'라고 비판하고 마는 것은 초점을 놓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거의 아무도 마르크스주의를 돌아보지 않으려 하는 시대에, 마르크스주의를 지키고자하는 의지는 권력 의지이기는커녕 오히려 시류에 저항하는 노력으로도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왜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인지, 이를 통해 그가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으면 안 된다.
이미 위의 인용문에 그의 목적이 나타나 있다. 그것은 '올드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그가 옹호하고자 하는 '마르크스의 결정적인 주장들'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의 그 결정적 주장이 무엇일까?
서로 다른 모습을 한 채 마르크스 이전이나 이후에나 이런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표상하려는 자본주의 비판의 기획은 있어왔다. 잉여 가치가 축출되고 있다고 분개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불평등이든 아니면 빈곤이든 탈취이든 자본의 범죄를 고발하는 사람은 언제든지 있다. 그런 주장을 위해서는 약간의 양심과 도덕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주의에서 사정은 다른다. 노동 가치, 가치 법칙, 상품과 화폐의 양극성 같은 것을 부정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이런 개념이 부정될 때, 다른 모든 개념들 역시 위기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는 그 토대부터 허물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처지에 놓인다면 마르크스주의는 흔하디흔한 도덕적 자본주의 비판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가치론을 역사유물론을 지탱하는 최소한의 공리로 고수하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서동진이 노동 가치, 가치 법칙, 상품과 화폐의 양극성을 마르크스의 결정적 주장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노동가치론과 가치 법칙을 부정하면 마르크스주의는 토대로부터 허물어지고 도덕적 자본주의 비판으로 전락하고 만다고 생각한다. 정말 흔한 것은 이런 생각이다. 마르크스주의는 곧 노동가치론이고 마르크스주의의 본령은 가치 법칙에 있다는 생각은, <인지 자본주의>에 대한 다른 평가에서도 나타난 바 있기 때문이다.
정작 <인지 자본주의>를 읽어보지 않았다는 사람('EM')조차 이 책의 출간에 대해 논평하면서, "그가 마르크스를 올바르게 제시하고 있는가? 절대 그렇지 않다. 마르크스의 가치론을 그는 전면 부정하기 때문이다. (…)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다. 어째서 조정환 선생은 마르크스의 핵심 명제를 부정하면서도 스스로 마르크스주의 진영에 이름을 올리는 것을 허용하는 것일까?"(☞바로 보기 : 조정환 선생의 '인지 자본주의' 출간에 부쳐)라고, 아무 부담 없이 편하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흔하고 상투적인 생각이다.
이것은, 가치 법칙이 마르크스주의의 본령이라는 생각이 '올드' 마르크스주의 서클 내에서는 하나의 주류로 자리 잡아 왔음을 의미한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대체 어떤 사람들이, 어떤 동기에서 마르크스의 핵심 명제는 가치론이며 가치 법칙을 부정/수정하면 마르크스주의는 토대로부터 허물어진다는 생각을 유포시켜 왔을까?
(이와 달리 최원은 '네그리적 관점'이 이데올로기 분석을 완전히 결여하고 있고 생산관계 우위론에 생산력 우위론을 대치시키는 역편향으로 흐름으로써 다중의 '생산력'에 기반을 두고 미래 사회의 상을 그리는 목적론적 관념론으로 귀결한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 방법 역시, 어떤 생각을, 이미 문제라고 알려진/느껴지는 편리한 구도 속에 삽입함으로써 기각하는 이미지 비판의 일종이다. 그리고 이 비판은, 내가 보기에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론 이후로 이데올로기론이 장치론으로 변용되고 그것에 통합되어 왔다는 점을 몰각하는 마르크스주의 퇴행 증상의 다른 현상 형태이다.)
내가 보기에는 세 가지 행위자들이 그러한 생각을 다듬어 왔다. 첫째는 파리 코뮌의 패배 이후 운동의 차원에서 마르크스주의의 국가화를 개시한 제2인터내셔널. 둘째로 러시아 혁명 이후 가치의 생산과 분배를 국가 차원에서 계획하려 했던 사회주의 가치 법칙론. 셋째 운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의 위기 이후 대학으로 들어간 마르크스주의(특히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와 그것의 영향 하에서 이루어진 대학 내 여러 마르크스주의 분과 과학들.
이 세 가지 흐름은, 가치화에 대항하는 투쟁이 아니라 '가치 생산의 조직화와 가치의 계획적 분배'를 마르크스주의의 본령으로 삼는 공고한 이론적 전통을 만들어 왔다. 이 전통은, 마르크스의 생각을, 노동 가치화로부터 해방되는 코뮤니즘 혁명 이론이 아니라 노동 가치의 계획적 조직으로, 요컨대 국가 계획을 매개로 한 자본주의 구원 논리로 바꾸어왔다. 나는 서동진이나 앞의 'EM'의 생각이 이 흐름 속에 위치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작 마르크스는 어떻게 생각했는가? <자본론> 제4권으로 명명되는 <잉여가치학설사>에서 마르크스는, 자신의 잉여 가치론을 정립하기 위해, 자신 이전에 이루어져온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자들(제임스 스튜어트, 케네,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도, 시스몽디, 제르맹 가르니에, 가닐, 페리에, 나소 시니어, 네케르, 홉스, 로크, 로베르투스 등)의 가치론과 잉여 가치론을 상세하게 분석한다.
예컨대 애덤 스미스는, 생산적 노동을, 때로는 '자본과 교환되어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으로, 때로는 '교환될 수 있는 상품에 고정되는 노동'으로 정의하는 혼동을 보이지만(<잉여가치학설사>(카를 마르크스 지음, 아침 펴냄, 168~187쪽) 리카도의 경우 스미스와 같은 혼동을 보이지는 않는다(<자본론>(제2권, 카를 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펴냄 439~500쪽).
다만 리카도는 노동과 노동력을 혼동할 뿐인데 이것은 <자본론> 이전에는 (예컨대 <임금 노동과 자본>에서는) 마르크스 자신도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했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과 교환되어 잉여 가치를 창조하는 노동을 생산적 노동으로 파악하는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의 성과를 계승하면서 노동과 노동력의 명확한 구분을 통해 그것이 누락하고 있는 중요한 지점을 보완할 뿐이다.
요컨대 상품에 노동이 고정된다는 것, 즉 노동이 상품 가치의 원천이라는 생각은 마르크스가 발견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취하지도 않은 것이며 마르크스가 취하는 잉여 가치론도, 수많은 고전 정치경제학자들에 의해 이미 발견되어 온 것에 그 자신이 좀 더 일관된 논리를 부여한 것일 뿐이다.
마르크스의 이른바 가치 법칙을 구성하는 노동가치론과 잉여 가치론이 이렇듯 부르주아 정치경제학자들에 의해 발견된 것인데, 마르크스주의의 본령이 가치 법칙이라면 마르크스주의는 부르주아 정치경제학과 무엇이 다를 수 있는가? 마르크스주의의 본령을 가치론에서 찾는 마르크스주의들은 글자 그대로 정치경제학이지 정치경제학 비판이 아니며 부르주아 사유를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르크스는 이들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달리 자신의 고유한 발견물이 계급을 발생시키는 관계에 대한 경제적 분석, 즉 잉여 가치의 발생과 현존에 대한 경제적 분석을 한 것에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주장 세 가지를 정식화한다.
그리고 이제 나 자신에 대해서 말한다면, 근대 사회에서 제 계급의 존재와 그 계급들 사이의 투쟁을 발견한 것이 나의 공로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오래 전에 부르주아 역사가들은 이러한 계급 투쟁의 역사적 전개에 관해 서술하였으며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계급을 경제적으로 해부하였습니다. 내가 새롭게 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래와 같은 사실을 증명한 데 있습니다. (1) 제 계급의 존재는 오직 생산의 발전에 있어서 특정 역사적 국면과 불가결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이며, (2) 계급 투쟁은 반드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고 (3) 이와 같은 독재 그 자체는 단지 모든 계급의 폐지, 그리고 계급 없는 사회로 이행하는 과도기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프랑스혁명사 3부작>(카를 마르크스 지음, 임지현·이종훈 옮김, 소나무 펴냄(1987년), 257쪽)
이 인용은 마르크스가, 만약 '마르크스주의'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프롤레타리아의 혁명과 코뮤니즘의 필연성에 관한 이론일 뿐임을 강력하게 시사한 것이다.
많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이, 바로 마르크스주의의 본령이 가치 법칙에 있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전거로 삼는 <자본론>에서도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자본론>은 상품과 가치에 대한 서술에서 시작하고 경향으로서의 가치 법칙이 부르주아 사회의 운동을 규정하고 있음을 증명하지만 가치 법칙을 확정하고 상술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책이 결코 아니다. (이는 헤겔의 <논리학>이 존재론(양, 질, 한도)에서 시작하지만 존재론에 초점이 있지 않고 개념론(주관, 객관, 이념), 특히 이념에 초점이 있으며 존재에서 본질을 거쳐 이념에 도달하는 그 운동을 서술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과 유사하다.)
<자본론>은 오히려 이와 정반대로, 노동가치론과 가치 법칙이 그 자신의 운동으로부터 어떻게 교란과 위기에 직면하며 궁극적으로는 해체될 수밖에 없는가를 규명할 목적으로 서술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것의 미완성으로 인해, 둘째로는 경제적 과정을 중시했던 엥겔스의 편집과 가필 터치로 인해, 셋째로는 제2인터내셔널과 제3인터내셔널 과정에서 <자본론>에 덧씌워진 경제주의적 이미지로 인해, 현재에 전하는 <자본론>에서 우리가 이러한 서술 목적을 읽어내기는 쉽지 않지만, <자본론>의 개요서인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과 그것의 이론사인 <잉여가치학설사>를 고려하고 지금까지의 <자본론> 독해 방식에 대한 비판적 접근의 견지에서 <자본론>을 읽어보면 이 점은 명백한 것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가치 법칙에 따라 잉여 가치를 증대시키고 더 많이 축적하려는 자본의 필사적 운동은 필연적으로 불변자본을 증대시키고 가변자본을 감소시키게 되는데 이것은 가변자본을 구성하는 노동력 상품의 (오직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서만 근본적으로 극복될 수 있는) 가치 하락과 탈가치화를 가져온다는 것, 이것이 이윤율의 경향적 하락을 통해 가치화의 위기를 가져오고, 모든 상품 가치의 퇴락을 통해 가치 법칙을 소진시키는 공황(노동력 상품만이 탈가치화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 자체도 탈가치화되는데 공황은 이것들이 종합적으로 나타나는 국면이다)을 규정할 뿐만 아니라, 그 과정이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그리고 '잉여 가치화에 근거를 둔 계급화'의 폐지로 이르게 될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연성을 규정한다는 것이 <자본론> 전체의 핵심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한 번 더 강조하자면 <자본론>은, 서동진이 생각하듯 가치 법칙을 서술하려는 책이 아니라 가치 법칙의 위기와 파괴에 이르는 자연사적 성격의 혁명 과정을 입증하기 위한 책이다. 만약 가치 법칙을 부정하는 것이 도덕적 자본주의 비판으로 귀결되는 것이라면 마르크스 자신이 도덕적 자본주의 비판가라고 말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자본론>의 개요인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 서술되어 있듯이, <자본론>은 코뮤니즘의 역사적 필연성을 입증하기 위한 기획의 일부이지 가치 법칙을 논증하기 위한 책이 아니다. (<마르크스를 넘어선 마르크스>(안토니오 네그리 지음, 윤수종 옮김, 새길 펴냄, 8장)
이렇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의 본령을 가치 법칙에서 찾고 '가치 법칙이 무너지면 마르크스주의도 무너진다'는 생각을 피력하는 것은 마르크스를 완전히 마르크스에 반대하는 인물로 전도시키는 이론적 계급 투쟁, 다시 말해 자본을 위한 이론적 계급 투쟁에 지나지 않는다.
시스템화, 외부 효과, 정리 해고 그리고 탈상품화의 현실
그렇지만 <자본론>이 가치 법칙의 위기와 폐지의 필연성을 밝히려는 이론적 기획임이 분명하다고 해서 이것이 우리에게 가치 법칙은 실재하지 않는다거나 가치 법칙은 관념적으로 부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나는 <인지 자본주의>에서, 노동이 인지화하는 사회에서는 신체화된 산업 노동의 사회에서와는 달리 가치 법칙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이미 <자본론>에서 산업 자본주의를 모델로 서술한 가치 법칙의 위기가 인지 자본주의에서는 양적으로만이 아니라 질적으로도 한층 심각해진 수준에서 전개된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 것이지, 가치 법칙을 이론상에서 관념적으로 부정하고자 한 것이 결코 아니다.
가치 법칙의 위기는 인지 자본주의의 이론이 아니라 인지 자본주의적 현실에서 나타나는 것인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상품화의 곤란에서 나타난다. 한 상품의 가치가 그것의 재생산에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 시간에 따라 측정되는 경향으로서의 가치 법칙은 노동력 상품의 일반적 (혹은 적어도 일정 수준의) 존재 없이는 존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인지 노동이 과연 상품으로 일반화하고 있는가? 분업화, 상품화, 가치화, 화폐화가 자본주의의 본령이자 마르크스주의의 본령이라고 생각하는 '올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믿음과는 달리, 경향의 수준에서 오늘날 자본은 더 많은 인지 노동을 탈상품화하는 데 사활을 걸고 있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경제학이 말하는 '외부 효과'론이다. 외부 효과란 흔히 '한 사람의 행위가 제3자의 경제적 후생에 영향을 미치지만 그 영향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를 지칭하는데, 이것은 노동자를 상품 세계 외부로 밀어내면서 이루어지는 착취, 그러니까 고용 없는 가치 효과, 상품화 없는 착취를 말한다.
이 외부 효과화 메커니즘이 가동될 때, 인지 노동자는 구매할 필요가 없는 존재, 그러니까 더 이상 상품이 아닌 존재(즉 비상품 혹은 폐품)로서 가치 효과를 낳는 신비한 존재로 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정리 해고와 실업자 증대로 나타나는 특수한 고용 경향을 낳는 역사적 맥락이다. 그런데 이 신비함의 실재적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지화하는 노동 공동체의 공통된 활동 성과(부)를 시스템적으로 수탈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나는 '명령'이라고 불렀는데 '명령'은 (서동진이 생각하듯이) '폭력'으로 환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지 자본주의>에서 내가, 인지 지대는 알고리즘과 다이어그램에 의해 수탈된다고 표현하면서 직접적 폭력에 의해 수탈된다고 하지 않은 점이 유의되어야 한다. 명령은 일상적·직접적 수준에서는 언어화(languaging)와 재현으로 나타나며 중간 수준에서는 주로 화폐화로 나타나고, 폭력은 핵무기가 그렇듯이 최종 심급에서 작동한다. (이것은 일상에서 폭력이 사용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테러에 대한 전쟁이 보여주듯이 폭력은 일상화되어 있다. 그것은 언어적 명령과 화폐적 명령에 대한 교란을 제거하는 차원에서 전개되며 궁극적 폭력 수단은 최종 심급을 위해 잠재화된다는 의미이다.)
오늘날의 명령 체제는 언어적 명령(과학, 종교, 철학, 법 등의 비물질적 이데올로기를 포함하여 다양한 물질적 이데올로기, 요컨대 언어적 장치들), 화폐 명령(즉 교환 수단이나 지불 수단을 넘어 사람들을 자본이 필요로 하는 부분에 강제로 배치할 수 있는 화폐의 힘, 다르게 표현하면 화폐의 용역(用役) 기능), 군사적 명령(전쟁, 치안 등) 등의 복합체이다. (지대 수취자의 명령은 폭력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핵 독점, 화폐 독점, 정보 독점으로 이루어진 폭력, 화폐, 정보의 성층화와 네트워크화를 통해 자본은 다중의 공통체가 생산하는 부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예컨대 미국은 핵 확산 금지 조약(NPT)을 통한 핵 독점을 통해 세계 전역으로부터 공납을 받고 있고, 달러발행권(Seigniorage)을 통한 화폐 독점으로 거대한 수수료를 거둬들이고 있고, 지적재산권을 통한 정보독점으로 거대한 사용료(royalty)를 획득하고 있다.
이것들은 주권 토지, 화폐 토지, 언어 토지에 대한 소유 독점을 통해 징수되는 지대들이다. 이 지대 수취 구조는 지역, 일국, 지방, 기업 등의 차원에서 다른 방식으로 재생산된다. 기업 차원에서 제국 차원에 걸쳐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인지 노동들에 대한, 그리고 그것의 헤게모니 하에서 수행되는 다양한 산업적 활동들에 대한 착취가 이렇듯 지대화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 나의 중요한 논점 중의 하나였다.
서동진은 내가 주장하는 자본의 구체적으로 역사적인 이 이행이라는 핵심 논점과 정면에서 대결하지 않고 그것에 분업화, 상품화, 가치화라는 가치론의 일반적 기초 이론을 대치시킨다.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의 측면에 대한 강조가 아무리 중요할지라도 그것이 노동의 사회적 분업에 따른 노동의 사회화, 즉 노동의 노동력 상품으로의 전화를 통한 가치화를 피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노동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노동의 상품적인 성격을 희생하는 것을 통해 이뤄지는 한 그것은 착취에 대한 이론이라기보다는 폭력이나 착복을 통해 자신의 힘을 행사하는 자본이라는 주장에 이르고 만다."
상품화의 필연성이라는 서동진의 이 이론적 의지처가 과연 안전한 곳인가? 우선 노동의 상품적 성격이 희생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폭력이나 착복에 이르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해 두어야 한다. 상품화=비폭력화, 비상품화=폭력화라는 사고 도식은 사실은 자본주의를 비호하는 관념 체계일 뿐이다. 왜냐하면 상품화를 통해 작동하는 자본주의는 폭력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상품 사회가 폭력 없이 유지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었다. 상품을 갖지 않았던 원시 공동체 사회가 폭력으로 유지되었던가? 그와 반대로 오히려 우리는, 상품 사회인 자본주의 그 자체가 폭력에 의해 구축된 것임을 시초 축적에 대한 마르크스의 서술을 통해 잘 알고 있으며 자본주의 전 역사에 걸쳐 상품 사회로서의 자본주의가 폭력에 의해 지탱되는 경우를 부지기수로 발견할 수 있다.
둘째로 상품 사회 그리고 노동의 상품적 성격의 희생은 내가 이론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에서 현실로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자에게는 유일한 상품인 노동력을 중심에 놓고 볼 때, 오늘날 노동력의 상품화는 더욱더 어려워지고 있고 강제 폐품화, 조기 폐품화, 상품화의 저지가 일상다반사로 전개되고 있다. 노동력 외에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없다. 서동진의 기대와는 달리 자본주의에서 상품화는 필연적이지 않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역시 우리의 공통 언어인 마르크스로부터 그 이유를 찾아보도록 하자.
마르크스가 출발점에서 생각하고 있는 '노동'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이며 그 이상이 아니다.
"저고리 아마포와 같은 천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물적 부의 요소들은 언제나 특수한 자연소재를 특수한 욕망에 적응시키는 특수한 합목적적 생산 활동을 거쳐서 창조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사용 가치의 창조자로서의 노동, 유용 노동으로서의 노동은 사회의 어떠한 형태로부터도 독립된 인간 생존의 조건이며 영원한 자연필연성이다. 즉 그것 없이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는 불가능할 것이며 따라서 인간 생활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자본론>(제1권, 카를 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옮김, 53쪽) "상품체는 자연소재와 노동이라는 두 요소의 결합이다." (같은 책, 53쪽)
마르크스의 상품 개념은 '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상적 물건'이며 <자본론>에서 상품으로 표상되고 있는 것도 밀, 구두약, 명주, 금, 철, 책상, 집, 실, 아마포, 저고리, 사탕, 커피, 수수 등과 같은 물건들이다.
"상품은 우리의 외부에 있는 대상(Gegenstand)이며 그 속성들에 의하여 인간의 어떤 종류의 욕망들을 충족시켜주는 물건(Ding)이다. 그 욕망의 성질이 위로부터 생겨 나는가 환상으로부터 생겨나는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같은 책, 43쪽)
그리고 앞서 말했듯, 마르크스의 '생산적 노동' 개념은 '자본과 교환되어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다. 요컨대 자본주의적인 의미에서 생산적인 노동력 상품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구를 충족시켜야 한다. (1) 대상(Gegenstand)이면서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물건(Ding)일 것, (2)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를 수행하면서 자연소재와 노동의 결합체인 상품을 생산할 것, (3) 자본과 교환되어 잉여 가치를 생산할 것.
<인지 자본주의>에서 내가 제기한 물음은 이것이다.
"노동이 인지화하는 사회에서 우리가 광범위하게 확인할 수 있는 인지 노동력은 이와 같은 의미에서의 자본주의적인 노동력 상품인가?"
마르크스는 빗물질 노동을 <자본론>의 분석 대상으로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 이유와 의미에 대해서는 <인지 자본주의> 4장 1절인 '인지 노동에 대한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상술했으므로 여기서 반복하지 않는다.) 그런데 빗물질 노동자의 노동력도 하나의 상품일 수는 있다. 그것은 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상이고 물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마르크스가 규정한 자본주의적 의미의 노동력 상품일 수 있는가? 인지 노동력은 대상이고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물건이기 때문에 위의 (1)의 요구를 충족시킨다. 하지만 인지 노동은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수행하지 않으며 자연소재와 노동의 결합체인 물질적 상품을 생산하지도 않는다. 즉 (2)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3)의 요구도 만족시키지 않는다. 인지 노동은 많은 경우에 생산 과정에 외부화되며 자본과 교환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자본과 교환되는 경우에도 그것이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지는 애매하다. 잉여 가치가 생산되려면 필요 노동의 가치가 확정되어야 하는데, 인지 노동자들의 노동력 상품이 생산되는 데 평균적으로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지를 측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지 노동의 시대에 가치 법칙이 겪는 교란, 즉 측정불가능성의 현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지 노동력은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주의적 의미에서의 생산적인 노동력 상품으로 정의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인지 노동의 시대에 노동력은 성공적으로 상품화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가치 법칙의 결정적 붕괴를 의미하는 것인가? 그렇게 말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자본이 축적을 거대한 규모로 계속하고 있고 또 사회의 다양한 노동력들이 아직도 상품 형식 속에서 거래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딜레마를 어떻게 풀 것인가? <인지 자본주의>는 이 딜레마를, 가치 법칙에 대한 (삶)정치적 이해를 통해 해소하고자 시도했다. (삶정치적 이해에서 정치는 경제에서 구분되는 정치가 아니다. 그것은 정치경제적인 것이자 정치문화적인 것, 그리고 사회적인 것으로, 즉 동시에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며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사회적 필요 노동 시간의 교란(가치 법칙 속의 비객관적인 요소, 즉 정치문화적인 요소)은 물질노동의 경우에도 존재했다. 높은 문화 수준을 갖고 있거나 투쟁력이 강한 노동 부문에서 한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노동 시간은 길어지고 투쟁력이 약한 노동 부문에서는 그 시간이 짧아진다. 만약 특정 사업장에서 자본이 노동의 파업을 진압하지 못하게 되면 그곳에서 잉여 가치는 불가능해지고 가치 법칙은 붕괴한다. 노동력의 가치를 측정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인지 노동의 경우 이 교란 현상은, 투쟁이라는 지점에서만이 아니라, 그것의 형성의 지점에서도 항상 나타난다. 인지 노동은 그 자체가 정치적 노동이기 때문에 그 노동력의 형성에 얼마만큼의 노동 시간이 드는지를 객관적으로 혹은 평균적으로 측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척도로서의 가치 법칙은 불가능하다고 해야 하지 않는가? 가치 법칙의 이 논리적 불가능성을, 자본의 현행적인 가치 축적이라는 현상과 결합시킬 수 있는 유일하게 가능한 방법은, 자본의 화폐적 축적을 경제적 축적이 아니라 정치적 축적으로, 즉 (명령) 권력의 물적 축적으로 이해하고 가치 법칙을 경제 법칙이 아닌 정치 법칙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인지 노동의 시대에 와서야 우리는, 가치 법칙이 순수한 경제 법칙이 아니라는 것을, 자본이 노동을 지배하는 데 성공할 때에만 유지되는 정치적 법칙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서동진이 오해하듯이, <인지 자본주의>는 가치 법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 법칙을 경제주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즉 (삶)정치적으로 이해할 것을 주장한다. 이 주장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려면, 명령이나 정치를 폭력과 혼동하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하며, 자본주의는 곧 상품화라는 고정관념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20세기 이후 분업의 성격 변화와 사회 공장화
상품화가 자본주의의 절대적 논리가 아닐 수 있다는 비판으로 서동진의 논리가 모두 소진되지 않는다. 그가 도피할 수 있는 마지막 피난처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업이다. 그는, 분업이 있는 한 상품화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가치화도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피난할 수 있다. 분업은 상품화와 가치화, 유용 노동들 사이의 대립, 유용 노동들과 추상 노동의 양극화를 가져오는 원천이라는 생각이 마지막으로 남아 있다.
자본주의는 이 기본 논리를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으며, 마르크스주의는 바로 이 점을 확고하게 밝히는 학설이라고 말한다면 어쩔 것인가? '노동이 인지화한다고 해서 인지 자본주의론이 말하는 가치 법칙의 위기는 있을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인지 자본주의 하에서도 분업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면 어쩔 것인가? 그래서 분업, 이것이 서동진의 비판에 남는 마지막 논점이다.
그런데 정말로 분업이 있다면 상품화가 있게 되고 결국 고전적 방식의 (잉여) 가치화가 있게 되는 것일까? 인지 자본주의에서도 분업화와 상품화가 전개되고 그래서 가치화는 그것에서부터 따라오게 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역시 마르크스의 분업 개념을 살펴보자. 마르크스는 분업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사회 내부의 분업은 그것이 상품 교환을 매개로 수행되건 또는 그것과는 관계없이 수행되건 간에 매우 다양한 경제적 사회 구성체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매뉴팩쳐에서 수행되고 있는 바와 같은 작업장 내부의 분업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전혀 독특한 특징이다." (같은 책, 462쪽)
사회 내 분업과 작업장 내 분업, 이 두 가지 분업의 특징은 어떠한가? 마르크스에 따르면, 매뉴팩쳐적 분업은 공동 생산물을 생산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상품을 생산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산수단을 집중시킨다. 여기에서는 사전 계획에 의한 균형적 자원 배분이 이루어진다. 이를 위해 자본가의 권위가 지배한다. 얼핏 보면 사회주의에서의 분업이라고 해야 할 이것에, 실제로 케인스주의적 균형론이나 사회주의적 국가 계획론에 부합할 이 작업장 내 분업 체제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독특한 창조물"이라고 정의한다. (같은 책, 462쪽. 우리는 이것을 자본이 갖는 사회주의로 읽을 수 있으며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본질적 동일성에 대한 직관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런 관점에 따라 나는, <공통도시>에서 케인스주의에서 신자유주의에 이르는 20세기 자본주의 전체가 사회주의라는 관점을 제시한 바 있다. <공통도시>(조정환 지음, 갈무리 펴냄), 103~120쪽)
반면 사회적 분업은 매매와 상품화에 의해 매개된다. 그것은 생산수단을 분산시킨다. 그것은 사후적으로 균형에 도달한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경쟁만이 권위로 기능하며 이 때문에 일종의 무정부상태를 표현한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의미에서의 사회 내 분업은 자본주의에서만이 아니라 어느 경제적 사회구성체에서나 발견된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이전에는 사회적 분업은 존재하나 작업장 내 기술적 분업은 미약하다. 작업장 내부 분업은 이미 일정한 정도로 발전되어 있는 사회적 분업을 전제로 해서 발전한다. 이렇게 작업장 내부 분업이 발전하면 그것은 사회 내 분업에 반작용하여 사회적 분업을 발전시키며 세분화한다. 그리고 식민제도와 세계시장은 사회 내 분업을 발전시키는 또 다른 요소이다. (같은 책, 455쪽)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작업장 내부 분업의 발전과 사회 내 분업은 서로 상승 작용을 하여 자본주의는 자신의 사회 내 무정부성을 지양할 수 없고 오히려 심화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분업화와 상품화는 지양될 수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들이 일반적으로 무정부적인 상태에 있는 역사적 시대에 이론 작업을 했다.
그래서 그는 작업장 내부 분업에서의 계획성과 사회적 분업에서의 무정부성 사이의 대립을 필연적인 것으로 이해했고 이 양자의 지양은 자본주의 이후 사회에서나 가능할 것으로 보았다. 그가 반복해서 '자본가들은 매뉴팩쳐 내의 계획된 분업을 세분화하면서도 사회의 작업장화, 즉 계획화에는 반대한다'고 말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자본가들이 (더 이상 상품화가 필요 없어질) 사회의 작업장화와 모든 분업의 작업장 내 분업화를 반대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했다.
그러나 이 주장을 시간의 평면 속으로 가져가 보자. 20세기 중반 이후의 자본주의에도 이 말이 맞는가? 사회주의와 케인스주의, 그리고 파시즘은 작업장 계획을, 작업장을 넘어 사회에까지 일반화한 조직된 자본주의들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20세기는, 사회의 작업장화(사회공장화)가 강력하게 전개된 시대이다. 계획이 사회 수준에서 부상했고 경쟁의 종속변수로 바뀌었다. 국가가 중요한 행위자로 부상한 것은 이 때문이다. 두 번의 세계 대전과 냉전은 심지어 국가를 넘은 (준)계획 주체를 구축하지 않을 수 없도록 강제했다. 서동진은 이것을 리카도주의적 생각이라며 기각하고 있지만, 이 비판은 20세기 역사 전체를 망각하는 경우에만 정당화될 수 있는 주장이다.
21세기의 인지 자본주의에서는 어떨까? 다시 국가로부터 시장으로 행위 주체가 이전했는가? 그렇지 않다. 신자유주의는 계획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재조직하는 자본주의이고 국가의 위치와 역할 변화는 이 이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인지 자본주의는 지구의 작업장화와 계획화를 더욱 강하게 추동한다. 기업이 전 지구적 수준에서 네트워크화하고 시스템화하며 권력이 전 지구적 네트워크 권력의 성격을 띠면서 분업은 점점 더 크게 작업장 내 분업의 성격을 띤다. 상품화는 네트워크시스템화의 종속변수로 된다.
일국적 수준뿐만 아니라 전 지구적 수준에서 전개되는 외주화와 하청화 체제는 사업장 내 분업연관과 납품 시스템을 확대하며 핵 독점과 핵우산, 달러발행권에 의거하는 국제 결재 시스템, 그리고 정보 독점과 감시-통제 시스템은 자본의 권위를 더욱 작업장 내부의 것과 유사한 것으로 만든다. 자본의 수준에서는 계획과 조절이 정상으로 되고 경쟁이 예외로 되며, 권위가 정상으로 되고 무정부가 예외로 된다. (물론 이것은 경쟁-무정부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점점 극단화되는 경향이 있다.)
인지 자본주의에서 경쟁의 위치와 역할의 변화
이 대목에서 (서동진은 제기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이러한 견해가 자본주의에서 경쟁의 역할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라는 반론을 예상해 볼 수 있다. 경쟁이 예외로 된다는 것은 결코 경쟁이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생산이 시스템화한다고 해도 전 세계가 단일 시스템으로 조직되지 않는 한 경쟁은 엄존한다. 하지만 경쟁은 대개는 자본들을 분열시키고 파괴하는 힘이 아니다. (이윤의 형성과 분배에서 경쟁은 자본간 협력의 양태이며 오직 손실의 분배에서만 경쟁은 자본들 사이의 관계를 파괴하는 것으로 된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생각이다. (이에 대해서는 <장기 20세기>(조반니 아리기 지음, 백승욱 옮김, 그린비 펴냄), 391쪽). 그런데 2008년의 금융 위기와 그 전개 과정은, 자본이 오늘날은 손실의 분배에서도 서로 협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위기 이후에 자본의 손실은 개별 자본가들의 몫으로 귀속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의 것으로 '사회화'되었다. )
그것은 "생산과 소비의 사회적 성격을 표출시키는"(<자본론>(제3권), 226쪽) 메커니즘이며 개별 자본들이 사회적 자본의 일부로서 작용하도록 만드는 과정이다. 하나의 생산 분야에서 경쟁은 다양한 개별 가치로부터 단일한 시장 가치와 시장 가격을 성립시키며 상이한 생산 분야들 사이에서 경쟁은 이윤율을 균등화시키고 생산 가격을 성립시킨다. 경쟁은 흔히 생각되는 바와는 달리 자본을 사회화하여 '자본의 사회주의'를 가능케 하는 힘이다.
만약 각종의 생산 분야의 모든 상품들이 경쟁 없이 그것들의 실재적 가치대로 판매된다고 가정하면, 매우 상이한 이윤율들이 각종의 생산 분야를 지배할 것이고 자본에게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무정부상태일 것이다. 경쟁은 무정부상태를 가져오는 메커니즘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는 메커니즘이다. 경쟁을 통해 평균이윤율, 일반적 이윤율, 사회적 이윤율이 성립되면 "상품들은 더 이상 단순히 상품으로서 교환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자본의 생산물로서 교환되며 자본은 잉여 가치 총량으로부터 각각의 크기에 비례하여 일정한 몫을 요구"(같은 책, 205쪽)하게 된다. '능력(즉 자본의 크기)만큼 생산하고 능력만큼 분배받는' 자본의 사회주의는 경쟁을 통해 실현된다.
자본은 평균이윤율의 형태 하에서 비로소 "자기를 하나의 사회적 힘으로 의식하게 되며 각각의 자본가는 사회적 총자본 중의 자기의 비중에 비례하여 이 사회적 힘을 나누어 가진다"(같은 책, 228쪽). 자본가들이 노동계급에 대해서는 진정한 비밀결사적인 동맹을 형성하고 자신들 사이의 경쟁에서는 형제답지 않은 행동을 보이는, 이 외관상의 모순은 '평균이윤의 사회주의', '자본의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모순이 아니고 일관된 것이다. 평균이윤율을 획득하기 위해서 자본은 노동계급에 대해서는 서로 형제처럼 동맹하여 싸우고 서로 간에 대해서는 타인처럼 경쟁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을 사회적인 것으로 만드는 이 평균이윤화(끊임없는 불균등의 균등화)가, "(1)자본의 이동 능력이 높으면 높을수록, 즉 자본이 한 분야에서 다른 분야로,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 쉬워지면 쉬울수록 (2)노동력이 한 분야에서 다른 분야로, 한 지방 생산지에서 다른 지방 생산지로 이동하는 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더욱 빨리 달성된다."고 보았다(같은 책, 229쪽).
이 조건들은 오늘날 마르크스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발전했다. 인지 자본주의 하에서 이루어진 자본의 금융화와 노동의 유연화가 그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경쟁의 양상을 바꾸지 않을 수 없다. 경쟁은 여전히 시장을 조건으로 하지만 자본가들은 경쟁의 비용을 가능한 한 줄일 수 있는 방향으로 그것을 계획하고 조율한다. 거대 국가들(G2, G8, G20) 사이에서, 거대 기업들 사이에서, 그리고 거대 지역들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협상, 담합, 협정, 조약 등은 그것이 실현되는 방식이다.
우리가, 경쟁이 예외화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 협상, 담합, 협정, 조약 등은, 심지어 합병과 통합조차도 경쟁이 표현되는 현대적 양식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2008년 금융 위기 속에서 자본은 자신의 이윤을 사회화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손실을 사회의 것으로 떠넘길 수 있었는데 이것은 그 금융위기가 '자본의 사회주의'의 위기라기보다 '자본의 공산주의'의 위기였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조정환, <인지 자본주의>, 210쪽)
갈림길 : 마르크스주의의 폐지인가 마르크스주의의 진화인가?
이런 상황에서 서동진은 경쟁-무정부의 현실을 여전히 자본주의의 핵심인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현실로부터의 퇴행을 계속한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를 이미 오래 전에 끝난 소상품생산 사회와 국민국가 시대의 표상 속에 묶어 둠으로써 마르크스주의를 무력화하고 고립시키면서 실천적으로 폐지하는 행보를 계속한다.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이론과 코뮤니즘의 이론'이 아니라 가치 법칙을 설명하는 '경제학'으로 묶어놓는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의 창안물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주의를 자본주의의 하나의 역사적 형태(국가자본주의)로 만들어온 지난 시기의 퇴행적인 역사적 실천들의 산물이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를 하나의 국가 이데올로기로 만들어 결국 마르크스적 사유를 불모의 것으로 만들고 궁극적으로 고립시키는 것으로 작용했다.
완고한 마르크스주의, 강철같은 마르크스주의, 올드 마르크스주의 등은 우리 시대에, 그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마르크스주의'의 이름으로 마르크스주의의 결정적 폐지에 이를 필사적인 노력을 불나비처럼 계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화석화된 "'마르크스주의'주의"와 거리를 두면서 지금 마르크스의 사유 노력을, "'마르크스주의'주의"의 지배 시대에 그것과의 저항 속에서 이루어진 별종적이고 혁명적인 다양한 사유 노력들과 연결시키면서, 그것을 (삶)정치적 혁명의 이론으로 살려내고 진화시킬 필요성은 그런 만큼 긴급하고 절박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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