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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미래학의 유혹에 빠지다?

[프레시안 books] 조정환의 <인지 자본주의>

자본주의의 보편성?

한 동안 푸대접을 받았던 개념인 자본주의가 부쩍 요란한 조명을 받는 듯 보인다. 2008년 미국을 덮친 금융 위기가 크게 한 몫을 하였을 것이다. 그 탓인지 이곳저곳에서 자본주의를 되돌아보자는 말들이 떠돈다. 그러나 정색을 하고 자본주의의 문제를 헤아려본다고 해서 자본주의에 어떤 큰 탈이 날 것 같은 조짐은 없다. 자본주의를 넘어서자는 말들을 들어보면, 사실은 '자본주의 불패론'을 우아하게 반복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차라리 사정은 반대쪽에 가까울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자본주의에 관한 점잖고 진지한 토의가 필요하다는 경고 자체가 이미 사정은 자본주의에 유리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잘못을 고발하는 수많은 항의를 듣는다. 그리고 만악의 근원인 자본주의는 가공할 윤리적인 괴물로 격상된다.

또 이 때문에 우리는 역설적으로 안도한다. 그렇게 자본주의가 위력적인 것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면 우리는 가장 전형적인 기독교 신자처럼 그 사악한 세계를 대하도록 요청받는다. 그 결과 자신의 소박한 개인적 삶 안에서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윤리적 책임과 대면할 필요를 절감하면서 서둘러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결국 우리는 냉소적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거나("어쨌거나 자본주의는 돌아간다") 아니면 나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강박적인 소명감으로부터 사소한 무엇이든 실천하겠다는 자세를 가다듬는다("결국 문제는 탐욕스러운 우리들 자신이었다"). 이는 지난 몇 년간 아마존닷컴 베스트셀러들이 잘 보여준다. 통제 불가능한 악으로 자본주의를 비난하는 책들과 식단을 짜는 것에서부터 성탄절 쇼핑에 이르기까지 세부적 일상생활의 습관을 바꿈으로써 자본주의에 대적하라는 윤리적 지침서들이 모두 동시에 잘 팔린다.

결국 자본주의의 위기라는 것은 매체가 만들어낸 신기루 같은 스캔들처럼 보인다.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가 자신의 위기를 이처럼 용케 피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엄밀한 뜻에서 위기는 더 이상 지금과 같은 세계가 불가능해지는 지점을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위기는 당연시했던 모든 것을 혼란스럽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제 자본주의 위기는 정반대로 '현상'한다. 그것은 어떤 조처로도 능가할 수 없는 힘으로서 혹은 너무나 유약하여 어디에서도 무너뜨릴 수 있는 무엇으로 보이게 된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는 다양한 원근법을 통해 현상하는 환상으로, 즉 부재하는 무엇이 재주를 부리는 윤리적 악몽으로 군림한다.

▲ <인지 자본주의>(조정환 지음, 갈무리 펴냄). ⓒ갈무리
조정환의 <인지 자본주의>(갈무리 펴냄)는 대작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미 이탈리아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고, 안토니오 네그리를 비롯한 이들의 이론과 정치적 전망을 열정적으로 소개하여 왔다. 나아가 이를 한국에서의 반자본주의적 운동 혹은 코뮤니즘적 이행의 정치로 변환시키고자 왕성하게 활동하여왔다.

이런 사정 속에서 <인지 자본주의>가 각별한 것은 그간의 작업에서 논의되었던 주요 주장을 종합하는 것이면서도 나아가 그가 제3기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자본주의를 분석할 수 있는 일반 이론을 구성하려는 야심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그는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성행한 비판적 지식인들의 이론적 행보와 거리를 둔다.

근대성 비판을 필두로 신자유주의 비판에 이르기까지 또 동아시아론이나 탈식민적인 이론적 민족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장들이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조정환은 이런 지적 유행과 달리 "자본주의와 그것의 모순과 한계에 대한 관심을 다시 한 번 진지한 관심의 대상으로" 삼을 것을 역설한다. 자본주의에 대하여 사유한다는 것이 보편적인 것에 대하여 사유하는 특별한 방식이라 한다면, 그는 바로 사유하는 지식인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다양하고 차이가 나기 때문에 즉 그 차이나는 개별성을 인식한다는 것은 사유한다는 차원에 끼지도 못한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은 차이나는 현실을 넘어 보편성을 사유하는 것에 있다는 바디우 같은 이의 생각을 떠올려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보편성을 사유하려 시도하는 그의 작업을 통해 우리의 곁에도 사유하는 지식인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마르크스의 현대화?

제목인 <인지 자본주의>가 알려주는 것처럼 저자는 제3기 자본주의가 인지 자본주의라고 단언한다. 지금의 자본주의가 인지 노동의 착취를 주요한 특징으로 하는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결론이 생산 혹은 노동의 문제 설정을 새로운 방식으로 자본주의 분석의 전면에 놓음으로써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또 이런 문제의식에 설 때 자본주의의 '거대한 전환'을 식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물론 이는 네그리와 하트의 <제국>(윤수종 옮김, 이학사 펴냄)이 현기증 나는 성공을 거둔 이후에 그리 낯설지 않게 된 생각들이라 할 수 있다. 자본은 더 이상 공장이나 사무실에서의 노동 시간 안에서 이뤄지는 직접적인 활동을 지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 따라서 전통적인 산업 노동자의 형상 속에서 자본에 종속된 자의 모습을 찾으려하는 것은 무망하다는 것, 우리가 만들어내는 다양한 집합적인 지적 활동과 사회적인 상호 작용 자체로부터 가치를 얻어내기에 자본은 삶정치적인 권력이 되었다는 것 등 말이다.

그런데 조정환은 이러한 역사적인 소묘를 지지할 수 있는 일종의 자본주의 일반 이론을 구성하고자 한다. 이는 마르크스의 (잉여)가치론을 특정한 역사적 시대(산업 자본주의)에 조응하는 입장으로 간주하고, 이를 변화된 자본주의의 현실에 맞게 수정하는 일로 이어진다. 따라서 그의 작업이 마르크스주의의 현실적인 재구성인지 아니면 마르크스주의로부터의 이탈인지라는 쟁점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완고한 '올드'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난감하게 하는 많은 쟁점을 포함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마르크스의 결정적인 주장들에 대한 심각한 오해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먼저 저자는 가치 법칙을 수정하기 위한 중요한 전제로서 노동의 정체성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변화하여 왔는지 묘사한다. 그것은 전문 노동자에서 대중 노동자에서 인지적 행위자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서술된다. 수도원적 방식을 통해 영혼을 통제 대상으로 삼고 신체를 훈육, 감금, 격리라는 방식을 통해 통제하던 자본이 있다. 이 자본은 1871년과 1917년의 혁명으로 대표되는 노동의 저항에 직면하자 영혼 자체를 착취의 대상으로 삼는 방법을 취하게 되고 이것은 기계화로 나타난다. 다음으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인지적 행위자로서의 노동자가 지배하는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산업 생산은 에테르적인 정보 기계로 대체되고 사회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인지 공장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두 번째 단계의 국가였던 케인스주의적, 복지 국가는 대중의 공포에 토대를 둔 '핵국가' 혹은 '신경찰 국가'로 전환한다.

저자는 노동의 정체성이 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변천한다는 가정에 근거하여 마르크스의 가치론을 수정해야 할 필요를 도출한다. 그는 마르크스가 생존할 당시 인지 노동 혹은 비물질적 노동이 자본 관계의 주변 혹은 외부에 놓여있는 역사적 조건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나아가 마르크스는 비물질적 활동들이 역사적으로도 포섭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본성적으로도 자본주의에 포섭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의 생각에 따를 때 마르크스의 논리적 결론은 인지 노동이 지배적으로 되는 역사적 상황에서는 가치 법칙이 소멸하고 말 것이라는 것으로 이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인지 노동이 상품으로 되고 있으며 또한 잉여 가치를 만들어내는 생산적 노동이 되었다면 이를 어떻게 분석할 것인가. 여기에서 조정환은 비물질 노동에 대한 가치 측정의 문제를 끌어들인다. 알다시피 마르크스에게서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은 자본의 가치 구성과 그것의 경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나 아니면 잉여 가치의 착취를 설명하기 위해서나 아주 중요한 범주임에 분명하다. 어쨌거나 노동력 상품의 가치는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을 통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것은 잉여 가치의 크기와 그 비율을 판별하기 위한 기준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조정환은 물질 노동에는 적절했을 사회적 필요노동시간 개념이 인지 노동에는 적용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것은 더 임의적이고 명령적이며 외부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생산의 사회적 관계로부터 가치를 규정하는 원리를 찾을 수 없다면 혹은 그가 말하듯이 척도는 이제 명령으로 전환되었다면,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은 자본의 폭력과 강탈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조정되어야 한다는 결론과 손쉽게 만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그가 이제 자본주의는 경제적 사회 구성체라기보다는 정치적 사회 구성체에 가깝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해서 크게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권력의 사회학 혹은 정치경제학 비판

그런데 이런 식의 추론은 실은 생소한 것도 낯선 것도 아니라 할 수 있다. 서로 다른 모습을 한 채 마르크스 이전이나 이후에나 이런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표상하려는 자본주의 비판의 기획은 있어 왔다. 잉여 가치가 축출되고 있다고 분개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불평등이든 아니면 빈곤이든 탈취이든 자본의 범죄를 고발하는 사람은 언제든지 있다. 그런 주장을 위해서는 약간의 양심과 도덕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주의에서 사정은 다르다. 노동 가치, 가치 법칙, 상품과 화폐의 양극성 같은 것을 부정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이런 개념이 부정될 때, 다른 모든 개념들 역시 위기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는 그 토대부터 허물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처지에 놓인다면 마르크스주의는 흔하디흔한 도덕적 자본주의 비판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가치론을 역사유물론을 지탱하는 최소한의 공리로 고수하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가치론을 위협하는 흐름들은 줄곧 쏟아져 나왔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흐름은 단연 포스트구조주의를 경유하여 등장한 가치론 없는 자본주의론, 간단히 말하자면 화폐라는 기호적 코드의 세계로서의 자본주의론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가치론을 화폐론으로 환원하고, 나아가 다시 화폐론을 노동에 관한 상징 이론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화폐란 무엇인가. 이런 물음에 대해 그들은 간단히 상품의 언어이자 상징이라고 답한다. 따라서 화폐는 상품의 내적 모순의 표현이 아니라 상품을 표상하는 기호가 된다. 따라서 교환이 생산을 지배하게 되고 가치는 오직 화폐의 코드를 읽으면 알 수 있는 언어학적 게임의 효과인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러한 입장이 상품 없는 화폐의 세계를 가정한다면 이와 대조를 이루는 또 하나의 입장은 화폐 없는 상품을 가정하는 주장이다.

이 역시 가치론 없는 자본주의론을 구성한다. 교환이 생산을 규정한다는 앞의 주장에 반해 이들은 생산이 교환을 결정한다는 입장에 선다. 이들은 생산의 기술적 성격에 의해 가치가 결정된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는 리카도 유의 고전 경제학의 전통을 쇄신하여 자본주의에 접근하는 경제학자들이나 새로운 산업 혁명, 기술 혁명을 역설하는 사회학자들이 흔히 취하는 입장이다.

이들에게서 상품은 곧장 투명한 경제적 관계로 나타나게 된다. 이들에게서 상품이란 화폐로의 전화라는 도약이나 시련을 겪지 않은 채 곧장 이윤으로서 전유되는 것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입장은 생산의 기술적 조건에 대한 이해에 근거하여 사회를 하나의 거대한 공장, 생산 기계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따라서 상품과 화폐의 모순에 근거한 자본의 착취적 성격은 분배에서의 문제로 대신 된다.

따라서 이들은 임금, 이윤, 지대의 관계를 특별히 강조한다. 이 때문에 이들은 분배를 둘러싼 투쟁 속에서 계급 투쟁을 발견한다. 그 때의 계급이란 물론 마르크스적인 의미에서의 계급이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소득의 원천을 갖는 사회 집단으로서의 계급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물론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조정환의 인지 자본주의론은 이러한 가치론 없는 자본주의론이 가진 특성을 모두 공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본은 이제 직접적인 명령이 되었으며 경제적 과정에서의 착취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생각, 자본은 이제 지대 수취자가 되어 명령하는 권력으로서 작동한다는 주장은 화폐 없는 상품을 주장하는 입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이는 어쩌면 예정된 귀결인지도 모른다. 그가 노동 혹은 생산으로부터 자본의 존재론을 재구성한다고 하였을 때, 그것은 이미 구체적 필요노동과 추상적 노동의 모순, 그리고 이와 동일한 것인 상품과 화폐의 모순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용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의 측면에 대한 강조가 아무리 중요할지라도 그것이 노동의 사회적 분업에 따른 노동의 사회화, 즉 노동의 노동력 상품으로의 전화를 통한 가치화를 피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노동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노동의 상품적인 성격을 희생하는 것을 통해 이뤄지는 한 그것은 착취에 대한 이론이라기보다는 폭력이나 착복을 통해 자신의 힘을 행사하는 자본이라는 주장에 이르고 만다.

한편, 상품과 화폐의 양극성에 대한 무시에서 비롯된 또 하나의 편향인 상품 없는 화폐론 역시 명령으로서의 자본이라는 입장을 통해 고스란히 나타난다. 상품에 토대를 두지 않는 화폐란 결국 순수한 강제로 보일 수밖에 없다. 어떤 노동 생산물이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이 임의적, 외연적, 외부적이라면 그것은 결국 화폐를 사회적인 코드와 유사한 것으로 환원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 이를 통해 자본은 다시 경제적인 착취를 통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서 이해된다. 결국 이럴 경우에 우리는 가치론을 수정하거나 폐기하는 인지 자본주의론이라는 것이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기획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권력의 사회학'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인상을 떨치기 어렵게 된다.

자본의 보편성

견딜 수 없고 또 혐오스러운 현실을 우연스러운 변덕에 따른 것으로 귀착시키지 않고 그리하여 이 문제를 일으킨 몇몇 물신화된 형상들(그것은 마이크로소프트일 수도 있고, 조지 소로스일 수도 있으며 혹은 월스트리트일수도 있을 것이다)을 규탄하는 것에 머물지 않기 위하여, 자본주의의 일반적 원리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그러한 보편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쟁점이라 할 수 있다.

보편성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편은 그것은 숨겨진 본질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에 따를 때 보편성은 현상의 배후 속에서 언제나 변화무쌍하고 화려한 현상의 둔갑을 결정하는 불변적인 본질로서 작용할 것이다. 그렇다면 보편성은 사이비 신학이 되어버린 채 모든 역사적인 변화를 거부하는 몽매로 전락할 것이다. 이런 시점 속에서 어쨌거나 모든 변화는 단순히 속임수에 불과하고 역사는 본질을 기만하기 위한 환영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보편성을 이해하는 또 다른 방식 역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입장은 모든 경험적인 사실에서 나타나는 변화로부터 곧장 보편성을 끌어내는 것이다. 이것은 보편성을 모든 경험적 현상들을 매개하는 일반적인 원리로부터 찾으려 하는 시도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담론적인 산물은 미래학이라 할 수 있다. 미래학은 현상과 본질 사이에 좁힐 수 없는 거리를 강조하는 앞의 주장과는 대조적으로 현상은 곧 본질이라는 입장으로 나아간다.

미래학은 현상과 본질의 차이는 허위일 뿐이고 본질이란 현상들을 매개하는 언어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강변한다. 그렇기에 본질이라는 깊이의 효과는 순전히 착각이며 지금 여기에 우리가 식별할 수 있는 현상을 조직하는 원리 자체로부터 이후 혹은 미래를 인식할 수 있는 법칙을 발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알다시피 구조주의와 그 이후의 지적 유행으로부터 우리의 지적인 공적으로 성토할 수 있게 된 것은 본질주의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역사로부터 초연한 영구적인 본질을 강조하는 것보다 더 간단히 무시당하는 생각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인지 자본주의>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위험 역시 이러한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자본의 새로운 보편성을 식별해야 한다는 초조감으로부터 미래학으로 전락할 위험에 빠져드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모든 변화가 전연 새로운 것이라는 것, 그리고 이로부터 '거대한 전환'을 가능케 한 결정적인 변화가 무엇인지를 규정해야 한다는 발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자본주의 비판을 위해 필요한 보편성을 오인하는 조건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보편적이다. 그것은 숨겨진 본질이라는 점에서 그러한 것도 아니려니와 미래학적인 의미에서 스스로의 일반적인 특성을 끊임없이 갱신한다는 그런 뜻에서도 아닐 것이다. 새로운 자본주의의 등장 혹은 자본 없는 자본주의를 역설하여 온 수많은 경영, 경제 담론들이 주된 논거로 삼아온 지식 정보 경제 담론과 인지 자본주의론이 다른 주장일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본의 보편성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오직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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