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장은진의 <그녀의 집은 어디인가>(자음과모음 펴냄)와 김희진의 <옷의 시간들>(자음과모음 펴냄)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을 했으리라. 과연 그들의 외모만큼이나 소설도 서로를 닮았을까, 하는 궁금증. 출판사의 마케팅도, 언론의 관심도 그 부분에 집중했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 권의 소설을 읽는 내내 '닮은 그림 찾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몇 개의 단어에 동그라미를 친다. 라면, 불면증, 책, 니체, 도둑과 기타 그리고 다시 라면. 이 정도면 어떻게든 끼워 맞추는 식으로라도 쓸 수 있겠지, 하는 생각. 하지만 그들의 인터뷰를 찾아 읽는 순간 얄팍한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쌍둥이 소설가는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싱크로율' 95%에요. 똑같은 복제 인간이 다른 소설을 쓰고 있다고 보면 돼요."
조금만 생각해보면 시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서로 닮은 것이 뻔한 그들의 글에서 굳이 닮은 것들의 목록을 작성해 무얼 한단 말인가? 말하자면 상상력의 부재.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닮음을 설명하기 위해 굳이 혈연을 끌어들일 필요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비슷한 것을 보고, 비슷한 것을 입고, 비슷한 것을 먹으며 비슷한 것을 욕망하는 우리들의 조건은, 삶은 얼마나 닮아있는가. 나는 남과 다르다는 똑같은 착각까지도.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건 어떨까. 그들의 작품에서 내가 느낀 불만은 그들의 닮음 때문이 아닌 우리들의 닮음 때문이고, 그곳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의 한계, 즉 우리 모두의 한계 때문이라고. 물론 그것은 서로 다른 두 작품을 굳이 한 자리에서 다뤄야하는 나의 비루한 자기변명에 다름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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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의 집은 어디인가>(장은진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열쇠 가게를 지키며 외롭게 살아가는 소설가 지망생 와이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일이 닥친다. 무려 30만 원이 찍힌 전기 요금 고지서가 날아온 것이다. 범인은 제이. 빈집에 몰래 들어와 전기를 훔쳐 먹던 그녀는 와이의 집에서 먹게 된 전기의 '쓸쓸한 맛'에 반해 그의 집에 눌러 살고 있었다. "가전제품을 두루 갖춰 놓고 살지 않는" 가난한 도시 남자의 집에, 에너지 효율이 낮은 전기 먹는 하마(라고 하기에 그녀는 너무 아름답다지만)가 들어온 셈이다.
물과 전기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먹을 수 없는 제이는 온몸에 고압의 전기가 흐르는 특이 체질의 소유자. 감전될까 두려운 와이는 그녀를 섣불리 내쫓지도 못하고 그저 타박만 할 뿐이다. 나가라는 것만 빼고 뭐든지 하겠다는 그녀를 부려먹을 요량으로 라면을 끓여오게 하는 와이. 하지만 그녀는 그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파 송송 계란 탁' 라면을 끓여 그의 속을 뒤집어놓는다. 파와 계란이 라면 특유의 쓸쓸한 맛을 해치는 것을, 그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와이는 한때 절친한 친구였던 케이의 집에 그녀를 버려 놓고 오기로 결심한다. 어차피 케이는 부자고, 부자는 나쁘고, 게다가 케이는 아오이 유우를 닮은 와이의 여자 친구를 가로챈 악질이기 때문이다. 완벽한 계획. 하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완벽한 계획이 그렇듯 계획은 실패로 돌아간다. 열쇠공이라는 직업을 십분 살려 집안에 몰래 들어가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그들 앞에는 이제 막 목을 매달아 자살을 기도하던 케이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졸지에 케이의 목숨을 구하게 된 와이. 케이는 너무나 순순히, 그래서 더욱 불안하게, 제이를 받아들이겠다고 한다. 하지만 제이는 가전제품이 아니고, 그런 대접에 진절머리가 난다.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하는 제이. 그녀의 집은 어디인가? 단서는 하나다. 제이가 묘사한 집 주변의 정경을 케이가 받아 그린, 바다와 구름다리와 숲이 있는 그림 한 장. 그렇게 그들은 제이의 집을 찾아주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서로 다른 생각을 품은 채. 물론 모든 비용은 케이가 대는 조건으로.
문제는 지금부터다. 무릇 길을 떠난다면 그 길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겪는 상황이 이야기에 녹아들어야 할 터. 아무리 이야기의 중심이 그들의 관계에 있다고 하더라도, 관계가 만들어내는 드라마는 단단한 땅 위에 발을 붙이고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여행에는 어떤 여정(그것이 '旅情'이건 '旅程'이건)도 존재하지 않는다. 여행을 위해 그들이 꾸린 것은 배낭도 아니고 봇짐도 아닌, 삐뚤어진 관점과 아집뿐이라는 듯.
그들은(특히 화자인 와이는) 시종일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뿐이다. 결국 아무 것도 바라보지 않는 셈이다. 오직 자기 자신 외에는. (대신 그들은 말을 한다. 해묵은 오해도 순식간에 해결하는 강력한 대화의 힘!) 그들의 여행과 비교하면 프랑스의 귀족 자비에르 드 메스트르가 42일간 가택에 연금된 상황에서 쓴 <내방 여행>이 마치 다른 성운으로 떠난 우주여행처럼 웅장하게 느껴질 정도다.
현실감이 없기는 인물들도 마찬가지. 가난 때문에 대학도 포기한 채 열쇠 가게를 운영하며 술집에서 아르바이트까지 하는 와이는 오직 전기 요금 때문에 (이런 원고를 몇 편은 써야 벌 수 있는, 적지 않은 돈이긴 하다!) 제이를 쫓아내려는 인물이다. 그가 계란과 파가 들어간 라면을 싫어하는 것도 가난 때문이다. 그는 케이의 집에서 다시 한 번 제이가 끓인 라면을 먹으며 생각한다.
그렇다. 라면 먹을 때마다 쓸쓸하다고 느꼈던 건 혼자 먹어서가 아니라 라면에 계란을 넣지 않아서였다. 라면에 계란 하나 맘 놓고 넣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나는 알게 되었다. 가난은 고작 계란 하나로 비루해질 수 있고, 부자는 고작 계란 하나로 누군가를 비참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라면과 계란 하나 사이의 괴리감. 계란 하나가 휘두르는 엄청난 폭력. 그런 게 가난이었고 또 그런 게 부자였다. (71쪽)
이토록 자신의 조건, 가난에 집착하는 인물이 생업을 접고 얼마가 걸릴지 모르는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하는데 필요한 사유의 시간은 단 반쪽에 불과하다. 그리고 스물아홉 해를 사는 동안 그를 집요하게 괴롭혔던 가난의 문제는 그를 다시는(적어도 남은 170여 쪽 동안에는) 성가시게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에게는 좋은 일이다. 하지만 소설에도 좋은 일일까? 글쎄. 적어도 인물에 대한 설득력을 떨어뜨린다는 사실은 인정해야할 것이다. 대신 그를 사로잡는 것은 케이와 제이에 대한 불만과 질투. 질투는 과연 그의 힘이 아닐 수 없다.
케이 또한 마찬가지다. 부잣집에서 태어났지만 강압적인 부모의 요구와 화가가 되려는 자신의 욕망 사이에서 방황하다 귀를 잘라버린 그는,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리며 삶에 대한 욕구를 잃어버린 남자다. 하지만 그는 과연 우울증 환자일까. 글쎄. 적어도 내가 보기엔 아니다. 그는 우울증 환자처럼 말하지 않고 우울증 환자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귀를 자른 건 맞다. 하지만 자른 귀를 아이스박스에 넣어 다니는 게 우울증 환자다운 행동인지 아닌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차라리 친구의 여자는 무조건 유혹하고 보는(케이는 오해라고 말하고 와이도 인정했지만, 내 생각에 그것은 사실인 것 같다) 바람둥이라면 모를까. 소설의 적재적소에 그의 발작이 필요하기 때문에 억지로 우울증 환자인 척 하는 건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다.
제이는 무척 흥미로운 인물이지만, 비현실적인 인물에 현실감을 부여하려는 작가의 설명이 오히려 매력을 망친 경우. 온몸에 흐르는 고압 전류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숲 속에 홀로 버려져 책과 음악을 벗 삼아 살아야 했던 그녀의 삶. 그녀의 사연에는 작가가 의도한 어떤 알레고리가 존재하겠지만, 소설 속에서 그것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오염되지 않은 자연과 책과 음악과 소통을 주창하는 그녀의 이야기는, 조금 뻔하다.
결국 비현실도 아니고 초현실도 아니며 현실은 더더욱 아닌 이 '무현실'적인 여행은 그들의 과거를 들추는 몇몇 에피소드들을 통해 서툰 이해를 이끌어내고, 함께 보낸 시간은 두 남자의 마음에 설익은 사랑을 싹 틔우지만 이제 그들에게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어느덧 그들은 그녀의 집에 다다른 것이다. 애틋한 인사도, 별다른 의식도 없이 순식간에 치러지는 이별. 여행은 시작했을 때처럼 갑작스럽게 끝나버리고, 그들은 다시 그들 각자의 집을 향한다. 스물아홉, 마지막 여름은 그렇게 지나간다.
물론 소득은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여행이 그렇듯, 그들의 여행 또한 그들의 삶을 변하게 한 것이다. 다시금 삶에 대한 의욕을 되찾은 케이. 부자에 대한 편견을 버리는 와이. 하지만 그런 변화는 어쩐지 미심쩍다. 와이에게 있어 부자에 대한 편견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짓누르던 가난을 더 이상 의식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여행의 어느 부분이 그를 변하게 했을까? 부자의 대명사 케이에 대한 서툰 이해가? 제이에 대한 설익은 사랑이? 알 수 없다. 작가가 기대한 것은 그들 사이의 소통이고, 그로 인한 변화겠지만 과연 그들은 통했는가? (이 문장은 수사의문문이 아니다. 누군가 내게 설명을 해줬으면 좋겠다!) 아무려나. 그를 위해서는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쯤에서 여행의 초반, 와이가 했던 걱정을 다시 떠올려 보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케이와 나는 집에 두고 온 삶을, 혹은 언젠가 다시 부딪히게 될 삶을 확실히 앞서 걱정하고 근심하는 얼굴이었다. 여행이란 즐거운 것이지만 여행 후에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자신을 발견하게 될까, 일상의 고통을 변함없는 자세로 대하게 될까 두려운 것이다. 여행은 삶의 변화를 위한 거라고, 그러니 꼭 변화를 유도해 내야 한다고 고정된 관념을 나무처럼 각자의 머릿속에 누군가 심어 놓았기 때문이다. 여행이란 변하기 위한 게 아니라 그저 떠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말이다. (120쪽)
그렇다면 질문. 그런 고정된 관념은 도대체 누구에게 있는 것인가? 여행의 끝에서 마치 선물처럼 자신의 주인공들에게 변화를 안겨준 것은 누구인가? 분명한 건 그것이 독자를 위한 선물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목적지가 아닌 여정 그 자체이고, 독자가 기대하는 것은 주인공의 성장이 아닌 성장에 이르는 과정이 아닌가. 한 마디로 이 소설에는 무언가가 빠져있다. 단순히 파와 계란만 없는 게 아니라 면 없는, 혹은 스프 없는 라면을 먹는 듯한 기분이 든단 말이다.
눈 먼 개와 함께 3년 간 모텔을 전전하며 살아가고 있는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그녀의 전작 <아무도 편지하지 않다>가 그 비현실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설득력 있게 독자의 마음을 움직였는지를 생각하면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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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펼쳐지는 <그녀의 집은 어디인가>와 달리 <옷의 시간들>의 배경은 원룸, 빨래방, 편의점, 도서관 등 지극히 일상적인 삶의 공간들이다. 그곳에서 만난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소설의 중심에 있는 것. 저마다 외로운 그들은 서로에게서 자신들의 자리를 발견하고 서로에게 의지하며 삶을 위무한다.
▲ <옷의 시간들>(김희진 지음, 자음과모음 펴냄). ⓒ자음과모음 |
주인공 오주는 불면증에 시달리는 도서관 사서다. 술에 취해 아버지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어머니는 간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공부 밖에 모르던 언니는 유부남 교수와 사랑에 빠져 미국으로 떠난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을 끓여주던 아버지 또한 '술을 모르는 여자'와 재혼한 후 새로운 인생을 찾아 제주도로 떠난다. 그녀와 집과 곧 고장 날 낡은 세탁기 한 대만을 남겨둔 채.
그녀는 불필요하게 큰 집을 정리한다. 직장 근처의 원룸으로 이사하고 새로운 남자를 만난다. 자신의 세탁기와 함께 그녀의 집으로 들어온 남자. 그녀는 그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행복이 그러하듯 그녀의 행복은 그리 길지 않다. 남자 친구 또한 유학을 핑계로 그녀를 떠나버린 것이다. "잠 잘 자고, 행복해라"라는 쪽지만을 남긴 채. 설상가상 "그의 옷을 빨아주기 위해 지금껏 고장을 참아 오기라도 한 듯" 세탁기는 작동을 멈춘다.
하지만 가는 이가 있으면 오는 이도 있는 법. "뭐든 수집한다며 이것저것 사진기를 들이대는 옆집 여자 조미정"을 필두로, "껄렁해 보이지만 한때는 잘나가는 아트디렉터였던 만화가 조미치", "자유롭게 살고 싶다며 거리를 떠도는 전직 교수 콧수염 아저씨"와 "진짜 거리의 부랑자 박구도 아저씨" 그리고 "우울한 표정으로 9번 세탁기만 쓰는 남자"(그의 정체는 기타리스트)가 그녀의 삶에 차례로 끼어들며 무채색의, 어쩌면 침울할 수도 있었을 그녀의 일상을 다채로운 빛깔로 채워나간다.
일종의 대안 공동체라고 할 만한 공간이 빨래방을 통해 형성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아무려나. 더러워진 옷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까지 함께 씻을 수 있으니 좋은 일이다. "에피소드가 신선하고, 대사도 유머러스하다"는 언니의 평처럼, 계속해서 이어지는 여러 에피소드들 또한 무난하다. 다만 가장 흥미로웠던 도서관 에피소드, 그러니까 양장본의 가름끈만 훔쳐가는 도둑 부분이 흐지부지 끝나버린 점은 아쉽지만.
문제는 그들의 이야기가 너무 무난하기만 하다는 점이다. 누가 끓여도 비슷한 컵라면 같다고 할까. 얼핏 독특하지만 결코 자신 안의 어둠을 직시하지 않는 인물들은 밋밋하고, 평면적이다. "젠젠 다이조부"('괜찮아, 정말 괜찮아'라는 뜻의 일본어.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를 입버릇처럼 되뇌는 주인공 오주는 물론이고, 등장인물 모두가 한없이 선량하기만 한 것이다. 나는 조금 궁금해진다. 이런 이야기를 듣기 위해 굳이 소설을 읽어야 할까? 독특한 인물들이 모여 대안 공동체를 이루는 이야기라면, 단지 그뿐이라면 이누도 잇신이 감독한 <메종 드 히미코>를 한 번 더 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오다기리 조와 시바사키 코우의 연기까지 함께 감상할 수 있는데.
그녀의 전작 <고양이 호텔>(민음사 펴냄)이 화제의 데뷔작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 은둔 작가와 그녀를 인터뷰해야 하는 특명을 띤 기자라는 신선한 설정과 유머러스한 대사로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플롯을 살짝 비틀며 시종일관 웃음 짓게 했던 것을 생각하면, 역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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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글의 서두에 "그들의 작품에서 내가 느낀 불만은 그들의 닮음 때문이 아닌 우리들의 닮음 때문이고, 그곳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의 한계, 즉 우리 모두의 한계 때문"이라고 썼다. 불만은 이미 충분히 토로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닮음과 한계를 이야기할 차례. 솔직히 말하자.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한계이기도 할 것이다). 다만 나는 관계와 소통을 희구하는 그들의 소설을 읽으며 서동욱의 글을 생각했을 뿐이다. 언젠가 그는 이렇게 썼다. (이렇게 변변찮은 서평을 갈무리하기 위해 남의 말을 빌리는 것은 순전히 나의 한계이다.)
타인에 의한 수동적인 노출이 나를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특정한 자로 지정해준다. 그러므로 타인의 말 걸어옴과 그에 대한 나의 응답하지 않을 수 없음, 즉 양자 간의 소통은 나를 익명성의 구덩이로부터 자유와 단독성을 지닌 한 주체로서 탄생하게 해주는 '구원의 사건'이다. 자유를 획득한다는 것 자체가 구원이 아닌가? 누군가 밖에서부터 나의 문을 두드려 말 걸어오지 않는다면 나는 끝끝내 자유로운 자가 될 수 없다.
또한 타인과의 만남은 나를 나의 자기성, 나의 유한성 바깥의 무한(타인)을 향해 초월하게 해준다는 의미에서 구원이다. 나의 말함(대답함)은 나를 '대격'으로서 노출시킨다. 대격의 자리에서 노출된 나는 자기의식의 폐쇄된 회로 안에서 자신과 관계하는 나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pour autrui) 자아'이다. 이런 뜻에서 "소통한다는 것은 진정코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다."
즉 타자의 말 걸어옴은 나의 자기성, 바로 자아의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를 끊어버리고, 자아를 '타자에 대해 있는 자'로서 노출(개방)시킨다. 이렇게 자아가 자기성의 회로 바깥의 미지의 땅을 향해나간다는 점에서 커뮤니케이션은 '주체성의 모험'이라 불릴 만하다. 요컨대 자아가 자기에 묶여 있는 자아가 아니라, 자기 바깥의 무한자를 향한 자아, 무한자와 관계하는 자아가 되기에, "타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은 (무한자를 향한) 초월일 수 있다."
이렇게 타인과의 소통은 자아를 자유로운 주체로 만드는 동시에 무한자를 향한 초월을 가능케 해 준다는 점에서 구원의 사건이다. (<일상의 모험>(민음사 펴냄), 46~47쪽)
열쇠공이란 직업에 어울리지 않게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외롭게 살아가는 와이 앞에 나타난 제이. 가족과 남자 친구와 세탁기에게 버림받은 쓸쓸한 도시 여자 오주에게 말을 걸어온 빨래방의 터줏대감 조미치. 결국 이 두 소설이 그리고자 하는 것은 구원/모험이고, 그 중에서도 (서동욱을 따라 말하자면) 일상의 모험/구원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단순한 위로, 위무에서 그치는 것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단순히 익명성의 구덩이에서 끌어올리는 것을 넘어 "자기성의 회로 바깥의 미지의 땅을 향해"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회로 바깥의 미지의 땅은 어디인가? 그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지점이고, 그녀들이 그리지 않은/못한 부분이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한계인 동시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비슷한 것을 보고, 비슷한 것을 입고, 비슷한 것을 먹으며 비슷한 것을 욕망하는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앞서도 말했듯 그들의 작품은 라면을 닮았다고. 라면은 누군가의 주린 배를 채워줄 수도, 누군가의 언 몸을 녹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몇 해 전부터 출판계에 불고 있는 '위로 열풍'이 정확히 그러하듯이. 하지만 라면만 먹고 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물론 현실 세계의 나는 제이와 마찬가지로 라면 의존증에 걸린 가난한 도시 남자다. 그러나 적어도 문학에서 우리는, 같은 값으로 색다른 음식들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을 아프게 하고, 놀라게 하고, 행복하게 하고, 분노하게 하고, 홱 돌아버리게 할 수도 있는 온갖 진미들을.
당신은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가끔씩 먹는 라면은 별미가 아니냐고. 구시대적인 꼰대 발언은 집어치우라고. 사실 맞는 말이다(종종 이렇게 오버하는 것 또한 나의 한계이다). 그렇다면 그녀들에게 부탁해야겠다. 다음에는 영양과 맛을 생각해서라도 꼭 계란을 넣어달라고. 언젠가 우디 앨런이 말했듯 "우리에겐 계란이 필요하니까(because most of us need the eg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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