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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래? 지옥으로 변한 에덴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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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미래? 지옥으로 변한 에덴동산!

[공작의 꼬리 경쟁·22] 누가 그 섬의 마지막 나무를 베었나?

네덜란드의 로게벤이라는 탐험가가 1772년 부활절인 일요일에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마치 모래더미처럼 보이는 이상한 섬을 발견한다. 이 섬이 바로 이스터 섬으로 태평양 남반구에 위치해 있으며 그 면적은 약 160평방킬로미터의 작은 섬이다. 발견 당시 인구는 약 2000명이었다고 하며 이 섬은 대부분이 풀로 덮여 있고 닭과 곤충들을 빼고는 큰 동물도 없는 황량한 섬이었다고 한다.

석상은 많고 나무는 없는 이상한 섬

놀라운 것은 이 섬에서 무려 887개의 돌로 된 석상이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큰 것은 높이가 20미터나 되고 무게가 270톤이나 된다고 한다. 그 많은 석상들이 변변한 나무 하나 없고 밧줄 하나 만들 재료가 없는 곳에서 어떻게 운반되었으며 세울 수 있었을 것인가. 2세기 넘게 여러 추측들이 나왔지만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다.

그러나 근자에 존 프랜리와 사라 킹이라는 두 학자가 꽃씨를 분석해서 옛날에 이 섬에 어떠한 식물들이 얼마나 번성하고 있었는지를 밝혀내어, 이스터 섬이 원래 나무와 잡목 등 여러 식물들이 울창한 비옥한 곳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학자들은 그 당시 약 7000명에서 2만 명 정도의 인구가 살았지 않을까 하고 추산하고 있다.

그러면 왜 지금은 그처럼 황무지인 섬으로 변했을까? 그 답이 이스터 섬의 비극을 말해주고 있다. 기원후 400년 경 폴리네시아 사람들이 최초로 이 섬에 정착했으며, 이때만 하더라도 섬은 숲이 울창하고, 많은 동식물이 살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기원후 800년경부터 이스터 섬의 산림 파괴가 진행되는 여러 증거가 나타난다고 한다. 그리고 기원후 1400년경이 되면 야자나무의 멸종과 함께 숲이 사라지고 만다.

야자나무는 이 섬에 가장 풍부한 나무로 석상을 옮기거나 세우는 데에 쓰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또 큰 카누를 만드는 데에도 이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야자열매와 그 즙에서 추출할 수 있는 설탕과 같은 식품을 공급했을 것이라고 한다. 산림이 없어지면서 동시에 많은 동물과 새들도 멸종하고 만다. 더 이상 벨 나무조차 없는 최악의 자연 파괴가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 가서는 식인 행위까지 일어난다고 한다. 그리고 유럽의 탐험가가 이스터 섬을 발견할 때에는 원래 인구의 10퍼센트(%)에서 25퍼센트 정도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망해가는 섬의 방관자들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문명의 붕괴>에서 이스터의 비극을 부족 간의 과도한 경쟁으로부터 찾는다. 공동 소유인 자연 자원의 무분별한 사용은 부족 간의 경쟁 특히 석상 경쟁의 결과로부터 초래되었고, 그 경쟁이 자원이 희박해지면서 더욱 치열해지고, 그 결과로 자연의 완전 파괴와 그 사회의 붕괴라는 비극적 상황을 맞게 되었다는 것이다.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여러 석상들 중 몇 개는 미완성 단계에서 그 석상 건설을 중도에 포기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나무나 필요한 자원이 고갈되는 마지막 단계까지 석상을 만들고 있었다는 증거다. 그러니까 자연 파괴로 나무가 사라져가는 마지막 단계까지 석상을 세우는 일에 자원을 낭비했다는 이해 못할 상황이 발생했음을 의미한다.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석상을 세우기 시작한 후로 그 석상은 점점 더 커져갔다. 한 부족의 부와 권력은 석상의 크기로 상징된다. 그래서 상대 부족과의 경쟁에서 더 큰 석상을 세움으로써, 더 많은 여유 자원과 인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과시하려고 한 것이다.

산림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 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들은 왜 그런 바보 같은 경쟁에 몰두하고 있었을까? 그들은 나무들이 사라져 갈 때 그들의 삶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만일 알았다면 어째서 계속 파괴되는 자연을 보면서 그 마지막 단계까지 석상을 세우는 일을 멈추지 않았을까?

한국의 현행 교육 제도 하에서 우리의 아이들이 죽어가고, 따라서 우리도 죽어가고 있는 이즈음에 이 제도를 개선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러한 제도의 진행을 멈춰야 하는 것이 분명한 해결책이라 해도, 각 개개인은 무력하게 참담한 현실을 지켜 볼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과 비슷하다.

마찬가지로 이스터 섬의 사람들이 숲이 없어지는 것을 지켜봐야만 하고, 그래서 먹을 것을 구하기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것을 경험하면서도, 석상이 세워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처럼 상황이 악화되어 갈 때 부족 사이의 경쟁이 더욱 심해지고, 그래서 큰 석상으로 부와 권력을 과시함으로써 상대 부족을 제압해야 할 필요가 더욱 커졌을 수도 있다.

ⓒwikipedia.org

과도한 경쟁 그리고 몰락

석상을 세우는 공사와 족장이나 지배 계층이 부족 구성원을 통제하는 수단이 무엇이었는지, 또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마빈 해리스의 큰 형님 이론에서와 같이 석상이 크면 클수록, 그 지배 계층의 세력이 강하다는 증거가 되고,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세력을 따르고, 그래서 권력이 더 공고해졌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유로 지배 계층은 상대 부족과의 경쟁뿐만이 아니라, 내부 결속과 부족의 외연 확대에도 큰 석상을 과시하는 일이 필요했을 것이다. 오히려 다른 부족보다 더 큰 석상을 건설함으로써 자신의 권력과 이해를 보존하려 했을 것이다.

인구 증가와 자원 고갈과 함께 경제적 조건이 악화되는 초기 과정에는 사회의 가장 밑바닥 사람들이 제일 먼저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자원 확보의 경쟁이 부족 간 개인 간에 점점 치열해지고 서서히 그 영향이 다수의 사회 계층까지 퍼지게 되어 지배 계층의 권력 역시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상대 부족과의 자원 싸움이 더 치열하게 되어 내부와 외부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지배 계층은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해야 할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더 큰 석상을 세우려 했을 것이며, 더 많은 자원의 낭비를 초래했다. 만들다 포기한 석상들은 이미 세워진 이전의 것보다 월등히 큰 것이었다고 한다.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그들이 망해가는 최후의 순간까지 자원을 낭비하면서 석상 경쟁을 했다고 추측한다. 여기서 비극은 다수의 개개인들은 서서히 사회 전체가 망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나중에 지배 계층을 축출했을 때에는 상황은 이미 끝난 상태였을 것이다.

추측건대 대부분은 경제 상황이 악화되는 상황에서 자원 확보 경쟁에서 각 개인들이 더 경쟁적으로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마치 한국의 교육 문제에서 경쟁이 점점 더 심해지고, 사람들은 경쟁에서 이기고 지는 문제에만 더 관심을 쏟고 거기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 함정에서 벗어나는 문제에는 관심이 없거나, 개인이 그 문제를 해결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 이미 포기한 상태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남은 단 하나의 선택은 싸워서 이기는 것뿐이다. 이스터 섬의 사람들 역시 자신의 자녀들에게 경쟁이 얼마나 좋은 것이고 살아가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쳤을까?

약 600년 동안 산림 파괴가 서서히 진행되고 있을 때, 그래서 경제적 여건이 서서히 어려워져가고 있을 때, 그 사회는 서서히 더욱 경쟁적으로 되어가고, 더 효율적으로 더 큰 석상을 세웠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아이들은 경쟁의 논리, 강한 자로 경쟁에서 이기는 진리(?)를 배웠을까? 그 경쟁의 논리나 강자의 논리가 바로 자신들의 삶을 어렵게 하고, 결국에는 파멸로 이르게 한다는 생각은 하지는 않았을까?

약자를 보호함이 결국에는 모두를 보호한다

밑바닥 계층이 양식의 부족으로 피해를 받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가장 약한 자를 보호하는 것이 그들 다수와 지배 계층까지 보호하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만약 그 사회가 진정으로 약자들이 죽어가는 상황을 직시하고 그들을 보호하려 했다면 그 사회가 그렇게 막다른 골목으로 몰려가 파멸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원의 고갈되어 가는 초기 상황에서는 하층 계급이 먼저 피해를 보았을 것이고 지배 계층까지 그 피해가 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배 계층의 이해는 약자를 보호하기보다는 자신의 권력 유지였을 것이다. 약자를 위한 진지한 사회적 관심과 해결책 모색이 있었다면, 그들은 산림을 보전하고 자원이 고갈되는 것을 방지하는 대책을 일찍부터 마련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대책으로 결국 피지배 계층뿐만이 아니라 자신들 역시 자원 고갈의 희생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섬의 족장들을 포함한 지배 계층은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와 같이 더 큰 석상을 세움으로써 권력을 유지하고 단기적이나마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 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기적 행위는 지배 계층에게는 이성적 선택일지는 모르나, 집단적으로는 자원을 고갈시키고 결국에는 지배 계층 자신도 피해를 보며, 전체 섬의 파멸을 초래하는 우둔한 선택인 것이다.

공작의 꼬리 경쟁이나 아이리쉬엘크의 머리 뿔 경쟁 같은 바보 같은 경쟁으로 발생하는 비극은 우둔한(?) 동물의 세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비극은 우둔해서 오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계산을 보다 잘하는 이성적이고 이기적일수록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스터 섬의 예는 인간 사회가 갖는 바보들의 경쟁들 중 가장 비극적인 결과 중 하나 일 것이다.

한국의 경쟁은 어떠한가? 이스터 섬의 사람보다 현명한 경쟁일 것인가? 입시 경쟁이나 취업 경쟁 등 한국 사회에 전반적으로 퍼져 있는 극단의 경쟁 상황 하에서 사회 구성원들의 고통은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성공하기 위해 각 개인은 더욱 경쟁적이 되어간다. 모두들 더 경쟁적으로 되어가기 때문에 경쟁의 강도는 증가하고 고통의 강도 역시 따라서 커진다.

한국의 약자들이 과도한 경쟁 상황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어 갈 때 한국 사회는 그들을 진정으로 보호하려 노력하고 있는가? 아니면 자신을 돌보기도 벅차 무관심으로 대하거나 패자로 멸시하는가? 이스터 섬의 사람들이 자원이 고갈되어 갈 때 일찍이 약자를 보호하는 조치를 취했다면 나중에 지배 계층 역시 보호를 받았을 것이다.

약자들을 보호하는 조치들이 결국 자신을 위한 것 또는 자신의 아이의 장래를 위하는 것이 된다. 각 개인들이 경쟁 논리로 단단히 무장하는 것은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 이제 협동의 논리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약자를 보호하는 공동체 논리는 약자를 보호하는 것과 함께, 더 중요한 지배 계층을 포함한 다수 사회 구성원의 이익을 보호해준다는 사실을 되새겨봐야 할 것이다.

거기에다가 교육 경쟁으로 피지 못하고 시들어 가는 아이들의 아픔을 헤아리고, 정신병으로 고생하는 아이들, 그리고 자살이라는 마지막 선택을 해야만 하는 아이들의 절망에 마음 아파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고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 아이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사회 그리고 그들의 미래가 암울한 사회는 정말로 희망이 없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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