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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죄다 닭들은 아닐 텐데, 한국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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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이 죄다 닭들은 아닐 텐데, 한국은 왜?"

[공작의 꼬리 경쟁·19] 입시 경쟁은 공작의 꼬리 경쟁

수컷 공작의 꼬리

공작의 경우 역시 죄수의 게임과 같다. 예를 들어 어느 공작이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다고 하자. "우리 모두 꼬리에다 너무 많은 자원을 낭비하고 있다. 긴 꼬리로 먹이를 구하기도 힘들고, 맹수의 공격에서 도망가기도 힘들고, 여러 가지로 불편하니, 모두들 꼬리를 절반으로 줄이기로 하자."

이런 제안에 모두는 좋은 제안이라고 동의를 한다. 50퍼센트(%)를 줄여도 꼬리의 길이에 따른 경쟁에서 그 등수는 변함이 없으므로, 암컷은 건강한 수컷을 찾는 데에도 아무런 지장이 없고, 수컷은 자원의 50퍼센트를 절약할 수 있으니 모두에게 좋은 제안이 된다. 사회 전체에 이렇게 좋은 제안을 왜 진작 생각하지 못했을까 하면서 동의를 한다.

하지만 집단에게 좋은 아주 간단한 제안이 과연 개개의 공작들이 성취할 수 있는 그런 제안이 될 수 있을까? 특히 그 공작들이 사람과 같이 이성적이라면?

이렇게 좋은 제안에 동의한 한 수컷 공작이 집에 오면서 생각한다. "만약에 다른 모든 수컷이 꼬리의 50퍼센트를 줄일 때, 나는 몰래 꼬리를 줄이지 않거나 조금만 줄이면 나는 꼬리 경쟁에서 일등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반대로 만약 다른 공작이 꼬리를 줄이지 않는다면, 나 역시 꼬리를 줄이지 않아야지." 그래서 그 수컷은 꼬리를 줄이지 않는 이성적 선택을 한다.

그 다음에 모든 공작이 모였을 때 그 공작은 다른 모든 수컷들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성적 선택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각자가 똑똑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어느 공작도 자신의 꼬리를 줄인 공작이 없었다. 그래서 그 좋은 제안은 결국에는 제안으로 끝나고 아무도 실행에 옮기지 않는 것이 되고 만다. 이렇게 개인적으로는 영리한 행동들이 전체로 보면 열등한 선택이 되는 기이한 결과가 되는 것이다.

한국의 교육에서의 경쟁은 여러 면에서 공작들의 경쟁과 유사하다. 첫째, 지난 글에서 이야기한 사자들의 경쟁이 아닌 공작의 경쟁이기에 경쟁의 결과가 부정적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 교육은 경쟁을 위한 경쟁이 되어 가며, 교육 경쟁이 오히려 아이들 교육에 방해가 되는, 그래서 아이들은 피폐해지고 창의력과 독창성을 잃어가고 있다.

둘째, 한국의 교육은 공작처럼 그 경쟁의 함정에서 헤어나기 몹시 힘들다는 데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 특히 교육 경쟁은 경쟁 상대가 몇몇 특정인이 아닌 자신이 속한 학급과 학교뿐만 아니라 전국의 수많은 같은 또래의 학생들이 경쟁 상대라는 것이 큰 문제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경쟁 논리가 강화될수록, 그래서 사람들이 더 경쟁적으로 될수록 해결이 더욱 힘들어 진다. 그러면 한국의 학부모들은 공작보다 뛰어나니 그러한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고3 학부모의 딜레마

한국 부모들은 자식의 양육비로 한 아이에 평균 2억6000만 원을 지출한다고 한다. 이 액수는 해외 연수 등과 같은 비용은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실제 액수는 더 높을 것이라고 추산한다. 이런 큰 비용은 대부분의 부모가 감당하기에는 도저히 어려운 것이어서, 자녀 출산을 기피하는 사회적 문제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한국 부모들이 그 많은 액수를 지불해가며 교육시킬 필요가 있을까? 단지 경쟁만을 위한 한국의 입시 경쟁에서는 교육에 들어가는 막대한 비용에 비해 자녀가 실제로 얻는 것이 별로 없는 낭비가 된다 하더라도 각 개개인 학부모는 남들은 다 하는데 자신만 안 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간단하게 도식화하여 학부모 A와 B가 자녀의 입시 경쟁에 대한 결정을 해야 한다고 하자. A의 자녀가 좋은 학교에 갈 확률은 얼마나 많은 과외 수업을 받아야 하는 것인가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 하는가에 달려있을뿐더러, B의 학부모 선택과도 관련이 있다. 학부모 A와 B의 선택에 따른 결과가 다음과 같다.

학부모들 A와 B에게는 모든 것을 다 바쳐 투자하는 선택과 적당히 투자하는 선택 둘이 있다. 모든 것을 다 바쳐 하는 투자는 돈이 많이 들고, 또 아이들 역시 많은 시간을 입시 경쟁에 쓰기 때문에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적당히 하는 투자는 돈도 적게 들고 아이도 자유 시간을 가질 수 있어 그 비용이 적게 든다.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는 투자의 비용을 300, 그리고 적당히 하는 투자의 비용을 100이라고 가정하자. 그리고 좋은 대학에 입학함으로써, 그리고 그 뒤에 좋은 직장을 잡을 확률이 높아지는 것에 따르는 수익을 800이라고 하고,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하는 경우에는 그 수익을 200이라고 가정하자.

A와 B, 둘 다 적당히 투자하거나 또는 둘 다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는 투자를 한다면 그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갈 확률은 50퍼센트이다. 그리고 A가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는 투자를 하고 B가 적당히 하는 투자를 한다면 A의 자녀가 좋은 대학을 갈 확률이 100퍼센트가 되고 B의 자녀가 좋은 학교에 갈 확률은 0퍼센트가 된다. 반대로 B가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는 투자를 하고 A가 적당히 하는 투자를 한다면 A의 자녀가 좋은 대학을 갈 확률이 0퍼센트가 되고 B의 자녀가 좋은 학교에 갈 확률은 100퍼센트가 된다.

A와 B, 둘 다 적당히 투자하는 경우에 각각 좋은 대학을 갈 확률이 50퍼센트이므로 기대 수익은 500(0.5×800+0.5×200=500)이 되고, 총수익은 비용 100을 뺀 400이 된다. 둘 다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는 투자를 하는 경우에는 기대 수익 500에서 비용 300을 뺀 200의 수익을 올린다. A가 다 바쳐서 하는 투자를 하고, B는 적당히 하는 투자를 한다면 A의 이익은 수익 800에서 비용 300을 뺀 500이 되고, B의 이익은 수익 200에서 비용 100을 뺀 100이 된다. 그러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1. A와 B 모두 다 바쳐서 하는 투자 : A와 B 모두 200의 수익을 얻음.
2. A는 다 바쳐서 하는 투자, B는 적당히 하는 투자 : A의 이익은 500이 되고, B의 이익은 100이 된다.
3. A는 적당히 하는 투자, B는 다 바쳐서 하는 투자 : A의 이익은 100이 되고, B의 이익은 500이 된다.
4. A와 B 모두 적당히 하는 투자 : A와 B 모두 400의 수익을 얻음.

아래에 표는 A와 B의 선택과 그에 따른 이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 학부모 A와 B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학부모 A가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좋은지를 보자. 만약 학부모 B가 적당히 선택을 했다면, 학부모 A는 적당히 선택으로 400을 얻고, 다 바쳐 선택을 한다면 500을 얻는다. 그러니 학부모 A는 다 바쳐 선택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 만약 학부모 B가 다 바쳐 선택을 했다면, 학부모 A는 적당히 선택으로 100을 얻고, 다 바쳐 선택으로 200을 얻는다. 이 경우에도 학부모 A는 다 바쳐 선택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 학부모 A는 학부모 B가 어떤 선택을 하던 간에 다 바쳐 선택을 해야만 수익이 극대화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학부모 B 역시 다 바쳐 선택을 해야 수익이 극대화된다. 그러면 두 학부모 모두 다 바쳐 선택을 하게 되는데 그에 따른 수익은 각각 200이 된다. 그러나 이 수익은 둘 다 400의 수익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포기하는 결과가 되고 만다. 어째서 두 학부모 모두 이성적인 최선의 선택을 했음에도 열등한 결과를 갖게 되었을까?

이 간단한 예는 우리에게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각 개인의 최선의 선택이 집단적으로 최선의 선택으로 연결되지 않을 수 있을 뿐더러 개개인 모두에게 열등한 결과를 가져다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이가 200보다 400의 수익을 얻기를 원하고, 400의 수익을 얻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으며, 그러한 선택에 대한 어떤 제약도 없이 각자 자유롭게 그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200의 수익을 얻는 다 바쳐 균형에 머물게 되는 상황인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성적인 행위가 집단적으로는 비효율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공작보다는 똑똑한 한국 부모들?

위의 게임에서 표시된 숫자들은 단지 경제적 수익만을 고려하여 나타낸 것이다. 부모와 아이들이 입시 경쟁으로부터 받는 고통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한 가정이 받는 경제외적으로 지불하는 모든 고통을 비용으로 고려한다면 위에 나타나는 수익은 훨씬 적은 수이거나 아니면 네거티브가 될 것이다.

그러면 한국의 부모들은 자신의 자녀들이 고통 받는 것을 몰라서 아니면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지옥 같은 입시 경쟁으로 밀어 넣는 것인가? 그들은 돈이 많아서 밤늦게까지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는 비용을 부담하는 것인가? 한국의 부모들은 그 어느 나라의 부모 못지않게 아이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고통 받는 것, 비용이 너무 많이 지불 된다는 것을 모르는 바보가 아니다. 알지만 어쩔 수 없기 때문에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처한 사회적 상황 하에서 나름대로 그들의 자녀를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녀가 입시에서 낙오되면 이 혹독한 경쟁 사회에서 안정된 직장을 잡기 어려울 뿐더러 인간 취급조차 받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품고 있다. 그러한 두려움 속에서 대부분의 부모들에게 남는 유일한 선택은 모든 걸 희생하더라도 경쟁에서 이겨야한다는 것이다. 이 혹독한 경쟁 구조는 그들이 집단적으로 엮어낸 거대한 올가미가 되고, 각 개개인은 그 올가미를 끊어내기에는 너무 무력하여, 그들에게 남겨진 유일하게 살아남는 방법은 더욱 경쟁적이 되는 것이다.

수컷 공작들이 모두 좋다고 동의한 제안인 꼬리를 50퍼센트 줄이는 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집단적 비극은 한국의 입시 경쟁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러면 그러한 잘못된 균형으로부터 빠져나올 수는 없을까? 이에 대해 "이것이다" 할 수 있는 간단한 해답은 없지만 대체로 크게 두 가지 방법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각 개인이 이성적(이기적) 선택에서 벗어나는 것이 하나이고, 둘째는 게임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뉴시스

꼬리 경쟁을 벗어나는 방법

먼저 첫째 경우인 이성적 선택에 대해서 얘기해보자. 그런 주어진 게임에서 잘못된 균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성적 선택을 버리는 방법 밖에는 없다. 이성적 선택이라는 가정에 대하여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사람들이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관찰된다는 경험적(positive, empirical) 의미와 이성적으로 해야 좋다는 규범적(normative) 의미가 있다.

여태까지 관찰된 사람들의 행위를 통하여 보면 사람들은 이성적이기도 하고, 이성적이지 않기도 하다는 것이다. 사실 실제 선택에 있어서 사람들이 꼭 이성적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여러 실험을 통해 밝혀졌다.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 역시 마찬가지이다.

위와 같은 게임에서 이성적 선택을 피하는 방법의 하나로 경쟁 논리의 약화를 들 수 있다. 경쟁의 논리 강화는 규범적 의미의 이성적 행위를 강조하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해서 이성적 행위가 좋은 행위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물론 상황에 따라 개인의 이기적 이해의 극대화가 전체의 이해를 높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논의하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과 같은 상황에서는 그 반대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다.

앞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들의 선택이 대개 어떤지를 보았다. 경제학자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이성적으로 즉 개인의 이익 극대화를 추구하는 선택을 하듯이, 만약 사회 전체가 경쟁의 논리(시장의 논리)가 팽배하게 되면 그 구성원들의 선택 역시 그에 따라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경쟁 논리의 약화 또는 공동체 의식의 강화는 각 개인들이 열등한 균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선택을 도울 것이다.

(보통 게임이 한 번만 행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행하여지는 경우에는 열등한 균형에서 벗어나, 더 나은 결과를 갖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죄수의 게임과 같은 상황이 한 번 보면 안 볼 사람들 사이의 게임인가, 혹은 날마다 대면하는 사람들 사이의 지속적 게임인가에 따라 그 결과가 다를 것이다. 매일 대면하는 사람 사이의 지속적 관계에서는 협동이 가능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협동을 통한 더 나은 해결책을 선택하는 일은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그러나 한 사회의 구성원이 두 사람이 아닌 다수인 경우에 이러한 협동적 결과는 어려워진다. 그 이유는 구성원의 수가 많을수록 각 개인은 고립된 개체로서 전체 구성원들의 이해와 무관해지고 또 구성원들 사이의 거래, 계약, 규제 등의 시행과 관리가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는 주어진 게임 아래 행동할 뿐만 아니라 그 게임 자체를 끊임없이 바꾸고 또 새로운 게임을 만든다. 다시 말해 주어진 사회 상황 아래 최선의 선택을 하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그 사회 상황을 바꾸어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간다. 사회 상황을 바꾸는 데는 집단의 합의가 필요하다. 집단의 합의는 사회 구성원들의 이해의 간극이 적을수록 도달하기 쉽고 그 실행 역시 용이하다. 그러나 사회의 계층 형성과 그 계층들의 이해의 간극이 커질수록, 그 문제는 풀기 어려워진다.

예를 들면 양극화가 극도로 진행 되면 될수록 문제 해결이 어려워진다. 양극화로 인하여 계층의 간극이 큰 사회를 생각해보자. 이 사회가 죄수의 딜레마 게임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협동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피해는 제일 먼저 사회 하층을 타격을 가할 것이다. 그리고 사회 전체가 몰락해 간다 하더라도 엘리트 계층은 그 피해로부터 격리되기 때문에 협동하고자 하는 동기가 결여되곤 한다. 그들은 피해로부터 격리될 뿐더러 그러한 사회 상황, 즉 극단적 경쟁 사회의 직접적 수혜자가 되곤 한다.

즉 엘리트 계층은 현재의 사회 상황이 존재할 필요가 있으며 계속 존속될 것을 요구한다. 역사적으로 여러 문명이나 제국이 몰락해 가는 과정에서 그 몰락의 주원인이 그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인식하지 못해서, 또는 그 해결책을 몰라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운다. 해결책을 알아도 집단의 이해 충돌로 실행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계층 간의 격차가 크면 클수록 이해의 대립 역시 커져 그 집단의 문제 해결을 위한 합의 도달과 실행은 더욱 어려워진다.

한국에서 현재 진행되는 경쟁 논리의 강화와 함께 소득 양극화는 교육의 양극화를 초래하고 있다. 한국 사회 전반에 퍼진 양극화는 그로 인한 피해자 계층과 수혜자 계층의 존재를 뚜렷이 부각시키고, 양극화를 옹호하는 그래서 경쟁과 차등화를 성장과 효율에 필요한 것으로 주장하는 계층과 그렇지 않은 계층으로 사회를 분리시킨다. 양극화가 심화되면 될수록 계층 간의 이해가 더욱 첨예하게 대립하여 한국이 직면한 꼬리 경쟁의 문제 해결이 더 어려워 질 것이다. 단기의 수혜자들 역시 극단의 경쟁 사회에서는 피해자가 되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모두가 패자가 되는 열등한 결과에 봉착하게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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