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정부가 들어선 후에 잠시 언론사 사장을 역임하고 물러나 이제는 재야 원로의 한 사람으로 이 사회 양심의 한 귀퉁이를 떠받치고 있는 김종철이 상당히 야심적인 책을 냈다. <문화의 바다로>(21세기북스 펴냄)라는 시리즈로 총 10권을 기획하고 있는데, 그 중 다섯 권이 나왔다. <당신의 종교는 옳은가>, <교육인가 사육인가>, <글쓰기가 삶을 바꾼다>, <음악, 삶의 소리를 듣다>, <영화, 삶의 풍경을 찍다> 등이다.
책들의 제목만 봐도 드러나듯이, 그는 개인들이 삶의 현장에서 각자의 자아와 밀착되는 의미를 찾아 가꿔나갈 수 있는 형태의 사회를 원한다. 그에게 문화는 토대의 차원에서 온갖 사악함의 원인으로 작동하는 탐욕의 구린내를 일시적으로 덮어줄 상부 구조의 호사가 아니라, 인간적 삶이라는 것이 무엇으로 구성되어야 하는지를 실천 속에서 직접 탐색하면서 의미를 생산하는 활동에 해당한다.
인간적 삶의 의미를 실천 속에서 규정하는 중요한 프레임이자, 그러한 프레임의 확대 재생산에 기여하는 사회 제도로 종교와 교육이 빠질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시리즈의 1권과 2권이 종교와 교육을 각각 다루고 있는 것은 적절한 순서로 보인다. 이 서평은 이 두 권에만 집중한다.
<당신의 종교는 옳은가>
서양 사회에서 오늘날 정치 생활을 위한 일반적인 지혜이자 미덕 중 하나로 간주되는 톨레랑스 또는 관인(寬忍)이라는 가치는 종교와 관련된 분쟁의 역사와 결부되어 있다. 만유의 창조주이자 주재자이며, 전지전능한 유일자로 정형화된 신의 개념은 기독교에 특유한 것으로 모든 종교에 공통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창조주 유일신이라는 관념이 없더라도 모든 종교에는 어떤 형태로든 모종의 교조(敎條) 즉 도그마(dogma)가 있을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통제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들, 천재지변과 같은 커다란 사건에서부터 일상사의 작은 우연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기획이나 예상을 비웃듯이 비켜가버리는 숱한 운수가 어떤 초자연적이거나 신성한 힘에 의해 좌우된다고 보는 믿음이 대부분의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초자연적이거나 신성한 힘에게 강한 꾸지람을 들을 수 있는 행위, 즉 신 또는 하늘로 하여금 진노케 할 수 있는 행위는 모든 종교에서 그만큼 강하게 금지되는 것이 논리적인 귀결이다.
▲ <문화의 바다로-당신의 종교는 옳은가>(김종철 지음, 21세기북스 펴냄). ⓒ21세기북스 |
각자의 종교 안에서만 생활하면서 다른 종교와 접촉할 필요가 없는 상태가 마냥 지속된다면, 이와 같은 도그마도 나름대로 인간적 삶에 질서를 부여하는 기초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종교와 접촉이 불가피하게 일어나게 되면 이 부근에서 대단히 심각한 의문이 떠오르게 된다. 예컨대 기독교에서는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도그마가 있는 반면에 불교에서는 물리적인 여유만 있다면 불상을 모셔두고 절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스스로 기독교도라고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 때문에 불교는 기독교와 공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애당초 종교도 아닌 미신이라고 강변한다. 불교도 가운데서도 조직의 생존과 번영에 목숨을 바치는 것을 자신의 업으로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기독교의 교세 확장을 위협으로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반응은 익숙하지 않은 대상을 곧 악과 동일시하는 셈으로서, 지성의 어떤 부분이 개명되지 못한 상태인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가 된다. 불상이 우상이라서 불교가 미신이라는 논리는 마리아 상이나 십자가가 우상이므로 기독교도 미신이라는 공격에 답변할 수 없는 자가당착을 벗어날 수 없다. 상대에 대한 공격이 곧 자신에게 그대로 돌아온다는 깨달음은 애당초 상대를 공격하게 인도한 이유라는 것이 별로 타당하지 못하다는 반성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다. 그리하여 단순히 불상을 곧 우상으로 혼동한 착각에서 벗어나, 피해야 할 우상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지를 파고 들어가는 관심으로 연결될 수 있다.
김종철은 <당신의 종교는 옳은가>에서 이런 방향으로 파고들어가는 관심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대신 종교라는 것이 얼마나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지, 그리고 각 종교라는 것이 어떤 역사를 거쳐서 형성된 결과인지를 문외한이라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평이한 문장과 길이로 요약해서 소개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특별히 문제가 되는 종교 조직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기독교가 으뜸일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도 가운데에는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악령에 사로잡힌 것으로 간주하면서, 그들이 생각을 바꿀 때까지 압박하는 것이 신에게서 받은 자신의 사명인 양 여기면서 자부심까지 느끼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이런 광신도들의 전투성에 의아해하면서도 그들이 부르짖는 "신의 뜻"에 따르지 않았다가는 혹시 횡액을 만나지나 않을까 조금이라도 불안한 사람이라면 기독교의 역사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세의 십자군 전쟁이 어떤 정치적인 동기에서 출발했는지, 그 과정에서 얼마나 어이없는 학살과 착오들을 저질렀는지, 그런 오류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 기독교를 개혁하려는 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개혁 운동의 와중에서 또다시 어떤 참극과 죄악들이 자행되었는지 등의 역사는 곧, 근대 이후 서구의 기독교 사회가 개인 영혼 내면의 문제에 대해 권력이나 외압이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을 받아들이게 된 사연과 같다.
증산교를 창시한 강일순은 일제 경찰에게 의병 활동이라는 의심을 받아 고초를 겪은 적이 있는데, 제자들은 천지개벽을 말하던 스승이 그까짓 경찰쯤 쉽게 꺾어버릴 줄 알았던 모양이다. 슈퍼맨이나 헐크 또는 홍길동을 꿈꿨든지 시라소니나 김두한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스승은 "죽어도 원망을 말고, 곱게 죽는 것이 좋다"는 식이었단다. 이 얘기를 김종철은 별다른 해설 없이 서사적으로 전할 뿐인데, 아마도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전통이 무의식적으로 배어나온 것 같다. 그가 여백으로 처리하는 메시지를 감히 대신해서 엮어 봐도 된다면, 한 가지를 말하고 싶다.
강일순의 저런 태도는 예수가 붙잡혀 가는 장면에서 보인 태도와 너무나 닮았다. 사실, 죽음이나 고초가 다가올 때 저항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사례들은 종교의 역사에서 예수 이전에도 대단히 많다. 특정 종교 조직과 별 상관이 없었던 소크라테스도 죽음 앞에서 비정상적이랄 만큼 태연한 모습을 보였고, 디오게네스, 에픽테투스, 토머스 모어, 그리고 20세기 초 프랑스의 시몬 베유 등등, 통상 철학자로 분류되는 사람들, 이외에 보다 정상적인 사람들 가운데에도 저세상 가기와 이웃집 놀러가기가 마치 단어 하나 차이일 뿐인 것인 양 살다간 이는 매우 많다. 강일순이나 예수나 소크라테스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는 물론이고, 무엇을 위해 저항을 포기했는지에 관해서도 나는 남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입장이 전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언급한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와 "무엇을 위해"에 관한 실존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방향이 아니라면 어떤 경전도 어떤 도그마도 어떤 신학도 종교로서는 손색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불교,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 유교, 도교, 그리고 동학, 증산교, 원불교 등의 역사에 관한 간략한 섭렵으로 구성된 이 책의 제1부를 읽다보면, 독자의 마음 안에 이와 같은 고찰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를 수 있기를 바란다. 이어서 제2부에서는 무신론 및 불가지론과 관련된 매우 심각한 질문들이 제기되는데, 여기서도 저자는 이런 질문들에 관해 자신의 견해를 파고들어가 밝히는 전략보다는 독자들에게 생각할 주제를 던지는 데서 그치는 자제력을 발휘한다. 다만 무신론과 불가지론이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분별을 강조하는 동시에, 리처드 도킨스 등의 무신론은 "신이 있는 종교"에 대해서만 비판의 효력을 가질 뿐 불교나 도교 등 "신이 없는 종교"에는 효력이 없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누군가 망상에 시달리면 정신이상이라고 한다. 다수가 망상에 시달리면 종교라고 한다"는 로버트 퍼시그의 도발적인 발언은 신이 있는 종교에 속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망상에 시달리지 않는다면 해당하지 않을 것이고, 신이 없는 종교에 속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망상에 시달리고 있다면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종교라는 허울 아래서 망상에 시달리고 있는 사례들이 적지 않게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무신론 자체가 하나의 교조로 굳어져서 자유로운 사고를 가로막는 경우도 적지 않게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망상이 아닌 형태의 종교적 믿음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과학적 합리성의 본질과 한계를 뚜렷이 인식하고 그 한계 바깥에 위치하는 영역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인간적 삶의 의미가 생동할 수 있을지 등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보다 창발적인 방향의 탐구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탐구는 종교, 철학, 과학, 역사 등과 내면적으로는 당연히 긴밀하게 연관되지만, 동시에 그러한 영역 구분을 초월한 지평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한국의 지성은 여태까지 이러한 방향의 행보를 거의 내딛지 못했다는 것이 내 관찰이다. 김종철의 이 책이 한국 사회의 일반적 지성으로 하여금 보다 창조적인 방향으로 기수를 돌리는 데 조그만 자극제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교육인가 사육인가>
한국의 교육이 문제라는 한탄은 이제는 이미 하나의 유행어로 정착된 정도이다. 하지만 한국 교육의 어떤 점이 문제인지를 묻게 되면 사회적인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개인적인 차원에서라도 어느 정도로 정리된 견해를 갖춘 사람도 찾아보기 어렵다. "입시 위주", "경쟁 체제", "공교육 붕괴" 따위 무성한 상투어들은 전체 국면 가운데 어떤 특정한 문제점을 가리키는 용어로서는 정확도가 크게 미흡한 구호에 불과하기 때문에, 구체적인 대안의 발굴로 이어갈 수 있는 추동력을 거의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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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의 바다로-교육인가 사육인가>(김종철 지음, 21세기북스 펴냄). ⓒ21세기북스 |
우선 교육은 출세의 방편인가? 도덕주의자들은 혹시 그러면 안 된다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나는 청소년들이 출세를 원하는 게 전혀 잘못일 수 없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자라나는 후세에 대한 교육은 학생들에게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실력과 더불어 남들이 인정해 주지 않을 때 서러움을 극복하고 더욱 정진하는 성숙하고 건강한 영혼을 배양하는 데 목적을 둬야 한다고 믿는다. 이렇다고 할 때, 세상에 기여하는 실력이 무엇인지가 진짜로 따져봐야 할 질문으로 대두하게 되는데, 이는 어떻게 따지더라도 표준적인 답이 나올 수는 없고 결국 각 개인이 자신의 기질이나 취향 그리고 처지 등 다양한 요소들 사이에 나름대로 균형을 잡으면서 스스로 찾아야 할 일로 남는다.
한 젊은이가 어떤 방면으로 인생의 행로를 잡든지, 그 방면에서 선배들이 축적해 놓은 기예를 익히는 것은 필요하고 유용한 일이다. 교육은 이런 것들을 전수하는 기능을 수행하지만, 이것이 교육의 전부일 수는 없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스스로 개척해 들어가는 도전 정신, 그리고 그러한 도전의 경로에서 쉽게 좌절하지 않는 인내와 열정, 허황된 목표를 추구하지 않도록 자신의 기획을 이치에 따라 점검할 수 있는 분별력, 나아가 이치에 맞는 일이라면 전인미답의 경지라도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선량한 확신 등이 전수되어야 한다. 특정 분야에서 조예를 쌓아, 그 일 자체에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수준이 되면 사회적 인정이라는 동기가 없더라도 추구를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분야라 할지라도 입문 과정의 초보자에 해당하는 청소년들에게는 사회적 인정이라는 동기가 없다면 힘들고 어려운 훈련을 이겨낼 추동력이 부족할 것이다.
둘째, 소위 인성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학생들에게 강요되고 있는 프로그램들은 인성을 배양하는 데 성공할 수가 없다. 위에서 종교에 관해 말할 때 간접적으로 암시했듯이, 도덕, 양심, 가치 등은 내면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에 외부에서 주입되는 순간 인성 배양이라는 목표를 배반하고 따돌림의 위협에 굴종해서 집단적 편견을 억지로 흡수하는 뒤틀린 인간성을 생산해낼 뿐이다. 이렇게 억압된 심성은 잠재의식 밑으로 숨어들어 응축된 울분으로 말미암아 느닷없는 상황에서 폭발할 가능성이 상존한다. 교육 당국의 제한된 상상력 안에서 획정된 "바른 생활"의 기준을 주입하는 방식으로는 인성이 배양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어떤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도중에, 그 과제를 해결하려면 기성의 어떤 권위에게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 다른 사람들의 선례를 참고한 다음에도 남는 매듭은 자기 스스로 풀어내야 한다는 깨달음, 그리고 그것을 실제로 풀기 위해 상상의 지평을 확장해 나가는 등의 궁구야말로 인성의 싹이 터서 건강하고도 씩씩하게 성장해 나갈 수 있는 가장 좋은 환경이다. 그러므로 전인 교육이라는 환상을 빨리 버리고, 하나를 하더라도 학생의 자아와 그 일의 본령이 긴밀하게 접촉할 수 있도록 노작(勞作)과 실습 중심의 교육이 초등 과정에서부터 이뤄져야 하며, 싫어도 들어야 하는 필수 과목을 없애거나 수를 줄이고 선택 과목 체제로 개편해서 선택에 따른 결과에 스스로 책임지도록 하는 것이 인성을 기를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교육인가 사육인가>라는 제목을 통해 김종철이 전하려고 하는 사육 아닌 교육의 형상을 내 나름대로 그려본다면 지금까지 말한 바와 같다. 하지만 종교의 경우에 그랬듯이 교육에 관해서도 저자는 불립문자의 미덕을 지킨다. 그리하여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명시해서 주장하는 대신에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생각해 볼 거리를 제공하는 데서 그친다.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하는 전략에 따라 이 책은 핀란드, 미국, 프랑스, 독일, 영국, 일본의 교육 방식을 예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김종철은 다른 나라의 사례를 참고할 때 한국의 논객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 하나를 잊지 않고 지적한다. 그것은 바로 "엄친아"식 사고방식이다. 자식 잘 되기를 바라는 엄마가 자식을 훈계할 때 자신의 온갖 기대들을 투사시켜, 사사건건 "엄마 친구 아들"을 들먹인다면 자식에게 상처와 좌절을 심어주기 십상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 내부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는 척하면서 "선진국은 이렇다더라"는 식으로 시기심과 열등감이 결합된 환상을 준거로 사용하게 되면 실천적인 동력은 전혀 없는 말장난과 자기 비하만이 남게 된다.
다른 나라의 사례들을 살펴보는 와중에서 김종철의 시선이 머무르는 대목은 역시 학생 개개인의 자주성을 길러주는 교육이어야 창의력의 계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창조성의 본령은 기성의 전통이나 관습이나 권위의 한계를 새로이 확장한다는 데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창조적인 사유나 업적이란 부모나 선생이나 정부의 인증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방식으로는 생성될 수가 없다. 세종이든, 베토벤이든, 링컨이든, 반 고흐든, 문익환이든, 빌 게이츠든, 어떤 일에든 창조적인 족적을 남긴 사람이란 곧 남들의 오해와 멸시를 강한 신념을 뚫고 나가, 결국에 가서는 자신을 모멸했던 사람들조차 그 창조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상황을 주도한 사람들이다. 즉,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는 일은 단순히 익숙한 길과 새로운 길이라는 두 개의 떡 중에 새로운 길을 선택하는 일이 아니고, 길이 아니라고 여겨지던 것을 길로 여기도록 사람들의 사유 프레임 자체를 바꾸는 성격을 내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주성의 함양은 아주 어릴 때부터 권장될수록 효과가 크고, 여기에는 무엇을 가르치느냐는 차원뿐만 아니라 어떻게 가르칠 것이냐는 차원도 똑같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특히 한국 사회의 경우 가정과 학교와 군대와 직장과 정치와 종교에서 권위주의와 교조주의의 풍습이 아직도 지배적이기 때문에, 학교 문화의 민주화라는 과제는 정치사회의 민주화라는 과제와 불가분리로 상호 얽혀있다.
한국의 종교와 교육을 이야기하는 책들을 김종철이 민주주의와 자유를 강조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정치의 질이란 사회 전반의 문화적 수준을 반영하는 것인데, 문화의 주체인 개인들이 정치권력에 순응하는 태도로 일관한다면 문화적 창조력이 메말라서 정치가 야만으로 전락하고, 다시 그러한 야만에 개인이 순응하는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다. 개인들이 주권을 자각하여 자주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문화에 생동감이 넘치게 되고, 정치에서도 야만을 몰아낼 수 있는 공동체적 역량이 조직화될 수 있다. 김종철의 <문화의 바다로> 시리즈는 전체적으로 이러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데, 이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희망의 소재를 확인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리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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