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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근대 의사 김익남, 그의 진짜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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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최초의 근대 의사 김익남, 그의 진짜 정체는?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2] 김익남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의사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의과 대학 격인 "의학교"의 교관(교수)을 지내며 역시 처음으로 근대식 의사 36명을 배출한 사람은 김익남(金益南, 1870년 9월 6일~1937년 4월 5일)이다. (서재필이 김익남보다 7년 앞서 1892년에 미국 컬럼비아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의사가 되었지만, 이미 미국인으로 국적을 바꾼 다음이었다. 또 서재필은 1890년대 후반 조선에 잠시 돌아와 있을 때에 의사로 활동한 바가 전혀 없었다.)

일본에서 근대식 교육을 받아(1899년 도쿄 지케이의원 의학교 졸업) 의사가 된 김익남은 일제의 중요한 이용 대상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국권 상실 이전 김익남이 일제에 포섭되거나 협력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기도했다 실패로 돌아가자 자결한 정재홍(근대 의료의 풍경 제59회)을 추모하는 사업에 관여하는 것을 비롯해 일제의 눈에 벗어난 행동은 뚜렷하였다. 그러니 김익남이, 일제가 한국 의료계를 장악하기 위해 1908년부터 부여하기 시작한 "의술개업인허장"을 받지 못했던 것은 본인의 불찰이나 우연의 소산이 아니었을 것이다.

▲ 그의 사망 소식을 보도한 <매일신보> 1937년 4월 6일자에 게재된 김익남의 사진. ⓒ프레시안
김익남의 후반 생애는 어떠했을까? 1904년 9월 의학교 교관을 그만 두고 군대 강화를 도모한 국왕과 정부의 방침에 따라 군의관이 되었던 김익남은 대한제국 친위부(親衛府) 소속 2등 군의장(軍醫長, 중령) 신분으로 대한제국의 패망을 맞았다.

일제에 의해 한국군이 강제로 해산되고 2년이 지난 1909년 7월 허울뿐이었던 군부(軍部, 국방부)마저 폐지되고 대한제국 황실을 경호, 보위하는 목적으로 친위부가 설치되었다. 군부는 정부 소관이었던 데에 비해 친위부는 황실 소속이었다. 김익남과 의학교 제1회 졸업생 김교준(3등 군의장, 소령), 손창수(1등 군의, 대위) 등은 친위부 소속의 군의관으로 계속 근무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병탄을 한 달 앞둔 1910년 7월 하순, 친위부 소속 장교 가운데 대다수가 퇴역하고 일부만이 남게 되었다. 이때 김익남의 애제자이자 평생지기인 김교준은 예편하였고 김익남은 군대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

친위부는 병탄 뒤에 더욱 축소되어 이름도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로 바뀌었다. 조선보병대에서 군의관으로 재직했던 사람으로는 김익남 외에 의학교 제1회 졸업생인 이제규와 김명식이 있었다. 이 가운데 이제규는 헌병대사령부에 근무한 경력이 밝혀졌으며, 이것이 민족문제연구소 등이 주관하여 편찬한 <친일 인명 사전>(2009년)에 오른 이유가 되었다. 그에 반해 김익남과 김명식이 헌병대 등 일본군 부대에 근무했다는 기록은 발견된 바가 없다. (김명식은 구한국군 장교를 일본군 장교로 전환하는 칙령에 따라 1920년 4월 28일 일본군 1등 군의가 되었다. 이 조치 이전 조선인 장교들은 차별 대우를 받았다.)

▲ <조선총독부 관보> 1911년 4월 1일자에 게재된 조선인 장교 명단. 여기에는 이들의 소속 부대가 나와 있지 않지만 대부분 조선보병대 소속이었다. ⓒ프레시안

그러면 김익남은 언제까지 군대에서 근무했을까? <총독부 관보> 등 관변 자료에서는 김익남의 전역에 관한 기록을 발견할 수 없었다. 대신 신문에서는 전역과 관련된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김익남의 사망 사실을 보도한 <매일신보> 1937년 4월 6일자에는 "군부 의무국이 설치되자 10여 년 동안 국장 대리로 시무하얏스며 대정 8년(1919년)에는 간도 용정에서 병원을 열어 동포들의 의료 봉사에 힘을 쓴 일도 잇다"라고 되어 있으며, 같은 날짜 <조선일보>에는 "한국 정부에 의무국(醫務局)이 생긴 후에는 삼등 군의장이 되야 십륙년간이나 국장 사무를 취급하엿고 또 휘문 보성 학교의 생리위생과목도 마터 가르첫스며 기미년 이후에는 간도 룡정촌으로 가서 이래 십삼 년 동안이나 그곳에 이주하여 사는 조선 동포의 병을 치료하여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별건곤> 제64호(1933년 6월 1일 발간)에는 "북간도에서 개업하고 잇는 김익남 씨도 곰보회의 평의원 자격은 잇다"라고 나와 있다.

▲ 김익남의 사망 사실을 전한 <매일신보> 1937년 4월 6일자 기사 "조선 최초 양방의 김익남옹 장서(長逝). 서양 의술 수입 보급의 은인." 일본에서 의학을 공부한 학교를 "경응의숙 의과전문"으로 잘못 기재한 것을 제외하면 사실과 잘 부합한다. ⓒ프레시안

▲ <조선일보> 1937년 4월 6일자. 이 기사도 김익남이 의학을 공부한 학교를 "경응의숙 의학전문학교"라고 잘못 적은 것 이외에는 별다른 오류가 없어 보인다. ⓒ프레시안

이 기사들을 종합해 보면, 김익남은 1919년 3·1 운동 뒤 군대를 떠나 간도 용정(龍井)으로 가서 1933년 무렵까지 개업 의사로 활동한 것으로 생각된다. 김익남의 제대는 고종의 별세 및 조선보병대의 축소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보병대는 전투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망국 왕실의 장식물 같은 것이었는데, 이마저도 고종의 서거 이후 더욱 축소되었다. 고종이 세상을 떠나고 조선보병대가 감축되자 더 이상 그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어진 김익남(최고위 군의관으로 국왕의 별세에 도덕적 책임도 느꼈을 것이다)이 전역을 한 것으로 필자는 추정한다. 앞으로 더 많은 연구를 통해 확인해야 할 부분이다.

▲ <매일신보> 1919년 11월 12일자 광고. 김익남은 만주로 갈 무렵, 지석영이 원장으로 있는 조선병원(朝鮮病院)의 고문으로 있었다. 이 광고에는 김익남이 "육군 군의정"으로 나와 있는데, 당시에는 현역이나 예비역이나 대체로 그런 식으로 구별 없이 표현했기 때문에 이것으로 김익남의 전역 시기를 추정하기는 어렵다. 김익남이 조선병원에서 했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단지 이름만 올린 것이었을까, 진료도 했을까? ⓒ프레시안

그러면 김익남은 왜 조국을 떠나 만주(간도)로 갔고, 또 거기에서는 무슨 일을 하였을까?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김익남은 일제 당국으로부터 의술개업인허장을 받지 못해 단독으로는 의사로서 의료 행위를 할 수 없는 처지였다. 만주는 조선에 비해 일제의 지배력이 덜 미치는 곳이었지만 거기에서도 의술개업인허장 없이는 개업을 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교준의 증언에 의하면(<대한의학협회지> 제5권 제10호, 1962년) 자신이 용정에서 개업한 지 1년쯤 되었을 때, 김익남이 그곳으로 찾아와 김교준의 면허장으로 둘이 함께 개업했다고 한다. 김익남은 자신의 처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해 줄 애제자를 찾아 만주로 갔던 것일까? 그러면 김교준이 1924년 무렵 귀국한 뒤에 김익남은 누구와 함께 또는 누구의 도움으로 의료 행위를 계속 하였을까? 지금까지 밝혀진 자료로는 풀 수 없는 문제이지만, 망국민이기 때문에 겪을 수밖에 없었던 어려움으로 보인다.

정구충은 저서 <한국 의학의 개척자>(동방서적, 1985년)에서 자신이 해주도립병원 외과 과장으로 근무하던 1928년(<조선총독부 및 소속 관서 직원록>에 따르면 정구충은 1926년 도립해주병원에서 근무하다 1927년에 도립초산의원으로 전근하였다. 김익남을 만난 시기나 장소에 착오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가을 자신을 찾아온 김익남이 들려준 이야기를 토대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필자를 방문한 목적은 나에게 유력한 인사를 소개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아마 독립운동 자금 관계가 아닌가 기억된다. (…) 선생이 처음 만주에 갔을 때는 차차 자리가 잡혀서 몇 해를 지내는 동안에 망명 온 여러 친구들과의 연락으로 통위부와 군관학교 등의 조직에도 참여했었다. 그러나 빈약한 조직이었고, 경제적으로 곤란을 받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기 구입이 가장 어려운 문제였었다. (…) 1919년 경에는 모두들 큰 희망을 가졌던 것이 일본이 중국의 청도를 장악하고 회령(함북)에 군대가 강화됨에 따라 차차 꺾이게 되었다. (…) 비밀리에 활동하던 광복군(특정한 단체 이름이 아니라 일반적인 무장 독립 단체의 뜻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이나 의열단의 활동도 점차 주춤해지고 선생의 춘추도 50을 넘어서 황혼기에 접어들어 가므로 국내 사정을 살피기 위해 누차 귀국하여 보았으나 정착할 곳이 여의치 않았던 것 같다."

요컨대, 김익남이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하여 무장 투쟁 등에 관여했지만 점차 그런 활동이 여의치 않아지고 나이도 들어서 귀국을 모색하던 차에 자신을 방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익남이 항일 투쟁을 위해 만주로 망명했다는 정구충의 기록을 뚜렷한 근거 없이 받아들이거나, 반대로 무조건 배척해서도 안 될 것이다. 정구충의 언급을 뒷받침하는 자료나 증언은 발견된 것이 없다. 김익남의 최측근이라 할 김교준에게서도 그와 관련된 증언은 없었다. (김교준은 자신의 만주 활동에 대해서도 거의 얘기한 바가 없었다.)

매우 구체적인 내용 등 정구충의 언급이 사실일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기록이나 증언이 나타나기 전에는 판단을 유보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엄밀한 사료 비판 없이 정구충의 언급을 받아들였던 적이 있다. 역사를 공부하는 학도로서 적절하지 못한 일이었다.)

▲ 조선총독부 경무총장(警務總長)이 일본 외무차관에게 1920년 5월 28일에 발송한 "용정 조선인 친목계"에 관한 첩보 보고. ⓒ프레시안
한편, 김익남의 만주 생활에 관련된 일제의 기록이 두 가지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김익남이 "용정 조선인 친목계"(1920년 4월 25일 결성)의 대표(계장)라는 보고이다. 그 보고에 따르면 이 친목계는 조선 남부 지역 출신들이 조직한 것으로 북부 출신들이 상권을 장악하는 데에 대해 자구책으로 조직한 것이었다.

또 한 가지는 김익남이 "용정촌 조선인 거류민회"의 임원(議員)이라는 보고이다. 이 거류민회의 임원진은 앞의 친목계와 달리 북부 지역 출신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다. 이 보고에 그 단체가 "친일단체"로 분류되어 있다고 그 조직원과 임원들이 친일파, 매국노라고 판단하는 것은 성급한 일일 터이다.

이들 단체보다 더 주목할 것은 거류민회의 회장이고 친목계의 고문으로 나와 있는 이희덕(李熙悳, 1869~1934년)의 정체이다. 이희덕은 당시 간도 지역에서 노골적인 반민족적인 행각을 벌여, 독립운동 세력에 의해 처단 대상으로 지목되었던 대표적인 친일파이다. 이 문서들로 김익남이 이희덕과 어떤 관계였는지, 또 이들 단체에서 김익남이 어떤 행동을 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김익남의 만주 생활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반드시 풀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 간도 총영사관 대리영사가 1922년 2월 28일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고한 "간도 및 동 접양(接壤)지방에 있어서 배일단체 및 친일단체 조사의 건." 이희덕이 회장인 "용정촌 조선인 거류민회"에서 김익남이 의원을 맡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프레시안
김교준을 통해 김교헌(김교준의 형. 근대 의료의 풍경 제59회) 등 당시 만주 최고의 항일 운동 세력과 인연을 맺고 있었을 김익남이 이희덕이라는 1급 친일파와는 어떤 관계였던 것일까?

김익남과 관련하여 풀어야 할 문제들이 남아 있지만, 그가 근대 의학의 도입기에 누구보다도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에 반해 우리가 그에 대한 충분한 연구와 적절한 평가에 소홀했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김교준의 술회에 따르면, 김익남은 아들 하나만을 두었는데 그 아들도 1910년대에 폐결핵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김익남의 후반 생애는 이래저래 쓸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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