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의 멸망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한국인(조선인)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모두 8조로 된 "일한합병조약"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일본국 황제 폐하와 한국 황제 폐하는 양국 간의 특수하고 친밀한 관계를 생각하여 호상 행복을 증진하고 동양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함에는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만 같은 것은 없다고 확신하고 자에 양국 간에 병합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
제1조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그리고 영구히 일본국 천황 폐하께 양여함.
제2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전연 한국을 일본제국에 합병함을 승낙함.
제6조 일본국 정부는 전기 병합의 결과로 전연 한국의 시정을 담임하고 동지(同地)에 시행할 법규를 준수하는 한(국)인의 신체 재산에 대하여 십분 보호를 부여하고 또 그 복리의 증진을 도모함.
제8조 본 조약은 일본국 황제 폐하와 한국 황제 폐하의 재가를 경(經)한 것으로 공포일로부터 시행함.
▲ "일한합병(日韓合倂)" 공표 사실을 보도한 <황성신문> 1910년 8월 29일(월요일)자 호외. 이 기사는 같은 날짜 본 신문에도 실렸다. 또 이날부터 대한제국의 융희(隆熙) 연호 대신 일본제국의 메이지(明治) 연호를 사용하게 된 사실도 이 호외에서 볼 수 있다. <황성신문(皇城新聞)>은 다음 날인 8월 30일부터 <한성신문(漢城新聞)>으로 제호를 바꾸었으며, 결국 9월 14일자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폐간한다는 공고가 없었던 것을 보면 사전에 아무런 통보가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프레시안 |
▲ "국호"를 "한국" 대신 "조선"으로 개칭한다는 사실을 보도한 <황성신문> 1910년 8월 29일자 호외. 하지만 이 기사는 잘못된 것이다. 나라가 없어졌는데 국호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역의 명칭을 한국에서 조선으로 바꾼다는 뜻일 터이다. 그리고 한국인 대신 조선인으로 호명할 것을 <칙령> 390호(9월 30일자)로 공포했다. 사실 대한제국 시기에도 "한국(인)"보다 "조선(인)"을 훨씬 많이 사용했으므로 실제적으로 큰 의미가 없다고도 할 수 있지만, 지명과 자신에 대한 호칭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개개인의 이름도 공식적으로는 일본식 발음으로 불리게 되었다. 예컨대 "黃尙翼"은 "황상익"이 아니라 "고우쇼우요쿠"가 된 것이다. ⓒ프레시안 |
국가(지상)주의를 반대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대한제국의 멸망이 별로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라의 멸망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국민"이 되기를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간에, 패망한 나라에 속한 "인민"들은 "망국민(亡國民)", "피식민지인", "노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은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에서 예외가 없는 일이다. 아무리 국가에 앞선 "개인"의 존엄성을 내세우려 한들 이 엄연한 사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국가와 국민(인민)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언급한다고 하여 식민지 조선인들이 "조국 광복과 민족 해방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국사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경험을 통해 살펴보건대 식민지 압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개인의 존엄성도, 자주성을 핵심으로 하는 근대적 인간도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혹자는 대한제국의 멸망으로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지배 세력의 압제와 수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패망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 대신 더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일제 통치를 만나게 되었다. 늑대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났다고 해야 할까?
일제의 조선 지배와 통치는 그 어떤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지배보다 가혹했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일제는 구미 국가들이 아프리카, 아시아 등지의 식민지를 안정적인 원료 공급과 생산품 수출을 위해 지배했던 목적에 덧붙여, "식민지에 이주하여 정착 생활을 한다"라는 단어 뜻 그대로 일본인들의 식민(植民)을 위하여 조선을 지배했다.
이미 인구 팽창 문제를 경험하기 시작한 일제 당국은 일본 본토와 자연적 조건이 비슷하고 비옥한 조선을 새로운 거주 영토로 절실히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제의 기대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 내 일본인 인구의 비율은 일제 말기에도 3%를 넘지 못했다). 요컨대 일제는 단순히 식량과 산업용 원료를 조달하고 생산품을 판매하려고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던 것이 아니었다. 그에 따라 그 어떤 식민지에서보다 일제와 조선인들의 갈등과 마찰이 첨예해질 것은 당연했다.
또 일본과 조선의 국력과 문화적 역량의 차이는 그 어떤 제국주의 국가와 그들의 식민지 사이의 차이보다 훨씬 작았다. 따라서 일제의 지배를 용인할 수 없는 조선인들의 저항은 필연적이었고, 그에 대응한 일제의 탄압도 악랄하고 극렬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일제는 스스로 소화해내기에 벅찬 조선을 병탄했던 것이었고, 그 결과 일제의 조선 지배는 조선인(한국인)과 일본인 양쪽 모두에 씻지 못할 상흔을 남기게 된 것이다.
일제가 조선을 지배한 35년 동안 조선 사회에는 적지 않은 변화가 생겼다. 개항기, 대한제국 시기보다 더 많은 "근대적" 제도가 도입되었고 "근대적" 산업이 발전했다. 그에 따라 도시의 모습이 달라졌고, 농촌의 풍경도 예전과 같지 않게 되었다. 사람들의 외양과 인식도 변화하였다.
보건의료 분야도 마찬가지였다. "근대식" 의료 기관이 늘어났고, 의사를 비롯한 "근대식" 전문 교육을 받은 의료인의 숫자도 늘어났다. 인구도 그 전 시대와 달리 꾸준히 늘어나는 등 "근대적" 인구 변천(demographic transition) 현상이 나타났으며, 사망률이 감소하고 수명도 늘어났다.
이를 두고 일제 당국은 자신들의 "선정(善政)"의 결과라고 끊임없이 자화자찬하며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활용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그런 주장을 하고 거기에 동조하는 일본인과 한국인이 없지 않다. 필자는 이 연재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을 통해 일제 식민지 시대 보건의료 분야의 변화를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 꼼꼼히 살펴보고, 일제와 그 동조자들의 주장의 진위와 의미를 짚어볼 것이다. 겉으로 나타나는 "근대성"과 그 안에 담겨 있는 "식민지성"을 함께 고찰하려는 것이다.
▲ 조선총독부의원, <조선총독부의원 20년사>(1928년)에서. 대한의원을 개칭한 조선총독부의원은 일제 시대 조선 의료의 중추적 기구였다. 조선총독부의원의 성격과 활동 내용만 잘 살펴보아도 일제가 조선에서 펼친 보건의료의 실태와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프레시안 |
지난 연말 "근대 의료의 풍경 제1편(개항부터 망국까지)"을 일단 마치면서 올 봄에 독자 여러분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그 재회의 시기가 원래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늦어져 초봄이 아닌 "늦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연재의 취지와 성격을 더 선명하게 하기 위해 제목을 "근대 의료의 풍경 제2편"이 아닌 "일제 강점기 의료의 풍경"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성원, 그리고 질책을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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