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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의 나라, 대한민국!

[김민웅의 '리브로스 비바'] 아이작 싱어의 <바보들의 나라, 켈름>

어린이를 위한 동화?

곧 어린이 날이다. 아이들에게 무엇을 읽히는 것이 좋을지 부모들은 열심히 책 정보를 찾을 것이다.

1999년에 나온 황선미의 <마당을 나온 암탉>(사계절 펴냄)이 어느새 100만 부 판매를 돌파했단다. 명필름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조만간 개봉 예정이기도 하다. 모성애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갖게 하는 이 작품은 읽는 이들에게 눈물을 흘리게 한다. 암탉 자신이나 그를 잡아먹게 되는 족제비나 다 자식을 가진 어미라는 지점에서 "엄마"의 모습에 담긴 본성을 독자들은 새롭게 떠올리게 된다.

한편, 우리 동화에는 정치·사회적 메시지를 담는 일이 별반 없다. 그건 동화에 속한 작업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또 그러다가는 동화 판매가 문제가 되고 동화 작가라기보다는 이념적 편향을 가진 작가라는 낙인이 찍혀 출판이나 활동에 지장을 가져올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동화의 뿌리인 우화나 민담 또는 전설에는 날카로운 정치·사회적 비평과 풍자가 담긴 경우가 태반이다. 권정생의 동화에는 생명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 함께 정치 현실에 대한 본질적 비판이 보이지 않게 깔려 있다.

<이솝 우화>는 권력자들의 허위에 대한 정치 풍자이며, 톨스토이의 민담 역시 현실에 대한 날선 비판과 각성의 촉구가 들어 있다. 우리의 <토끼전>이나 여러 판소리들 안에 설치된 해학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우리의 동화 쓰기에 이런 전통과 흐름은 단절되어 있다시피 하다. 권력의 검열을 비켜나가는 수단으로 동화라는 장르를 선택하거나 또는 아이들 때부터 현실 학습에 있어서 비판의식을 길러나가는 방식으로 동화를 쓰기도 하는 민담 전통을 잇는 것은 부담스러워진 모양이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동화 작가

▲ <바보들의 나라, 켈름>(유리 슐례비츠 지음, 강미경 옮김, 두레아이들 펴냄). ⓒ두레아이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폴란드계 유대인 아이작 바세비스 싱어(1904~1991년)의 <바보들의 나라, 켈름>(유리 슐례비츠 그림, 강미경 옮김, 두레아이들 펴냄)은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의 동화이기도 하고 어른들도 함께 읽고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그가 대체로 동화 작가처럼 알려져 있지만, 아이작 싱어는 성인을 위한 소설에서 아이들을 위한 동화에 이르기까지 그 작품 세계가 다채롭고 양도 만만치 않은 다작의 작가다.

국내에서는 <원수들, 사랑 이야기>(김진준 옮김, 열린책들 펴냄)를 비롯해서 몇 편이 번역되어 나오긴 했어도 그 놀라운 해학과 풍자 그리고 이야기 솜씨를 마음껏 맛볼 수 있는 그의 작품은 아직도 출간되지 못했다. 그의 대표적인 단편인 저 유명한 '바보 김펠(Gimpel, the fool)', '루브린의 마술사(The magician of Lubrin)', '짧은 금요일(Short Friday)' 그리고 장편 <허드슨 강변의 그늘(Shadow on the Hudson)>같은 작품은 아직도 국내 독자와 제대로 만나고 있지 못한 형편이다.

"바보 김펠"과 "바보들의 나라, 켈름"

아이작 싱어가 동유럽계 유대인들의 언어인 이디쉬어로 쓴 '바보 김펠'을 그 자신 역시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되는 솔 벨로우가 영어로 번역하면서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된 싱어의 작품 세계는 학살과 추방, 유랑과 신의 부재라는 신앙의 위기 상황에 시달려온 유대인들의 삶과 정신이 도리어 유머로 압축된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단편들을 읽는 내내 우리는 웃게 된다. "유대인의 유머"는 세계적으로도 이름이 높은데 그건 비극의 절정에서 상황을 역전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는 처절한 생존의 기로에 몰려 살아왔던 민족의 정신적 자산이다.

<바보들의 나라, 켈름>은 '바보 김펠'과 완전히 다른 대척점에 있다. '바보 김펠'은 세상이 바보라고 조롱하는 김펠이 도리어 사실은 현자 또는 성자임을 말하고 있다면, <바보들의 나라, 켈름>은 자기들은 현자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야말로 바보인 자들의 현실을 폭로하고 있다. 폴란드의 한 도시 이름인 켈름을 가상의 도시로 설정한 이 작품은 이곳을 다스리는 지배자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우둔한 짓들을 하는지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 작품은 1973년에 나왔는데 당시 미국이 베트남 전쟁 반전 운동과 인권 운동의 사회적 폭풍 속에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는 시대적 분위기로 휩싸여 있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달러 금 태환을 중지할 수밖에 없는 결과로 브레튼우즈 시스템의 작동이 멈추는 달러 체제 위기를 겪고 있었던 것도 <바보들의 나라, 켈름>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맥락이 된다. 이에 더해 스탈린 체제 이후 폭력적인 정치 체제로 변모하는 현실 사회주의의 정체가 드러나고 있었던 상황도 아이작 싱어의 작품에 영향을 끼친다.

말하자면 아이작 싱어는 자본주의 미국의 대외 정책과 경제 체제에 대한 풍자와 함께,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현실 사회주의도 마찬가지의 비판 대상으로 삼으면서 어떤 방식의 삶이 우리에게 최선인지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다.

위기, 전쟁 그리고 혁명

줄거리는 이렇다. 켈름이라는 마을에 그로남이라는 현자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는 다섯 명의 현자로 이루어진 위원회를 통해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들 다섯 명의 현자들은 얼뜨기 례키슈, 얼간이 자인벨, 바보 트라이텔, 빙충이 센더, 멍청이 슈맨드릭이고 그의 비서는 이디쉬어로 바보라는 의미를 가진 슐레밀이었다. 이들은 켈름 마을이 식량 부족과 질병으로 위기에 처해 있다면서 타개책을 마련하는 회의를 연다. 이들 가운데 한 현자는 위기라는 말 자체가 문제라면서 제안이랍시고 내놓는다.

"그 말(위기)의 사용을 금지하는 법을 만드는 게 어떨지요. 그럼 곧 잊힐 테니까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위기가 있다는 것 아무도 알지 못할 테고, 위기를 해결하려고 우리 현자들이 머리를 쥐어짤 필요가 없을 것 아닙니까?"

얼핏 우습기만 한 것 같지만, "위기"라는 말을 제거해서 대중의 판단 능력을 마비시키려는 이러한 시도는 언론 조작을 통해 대중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지배 세력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렇게 엉터리 같은 제안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결국 최고 통치자 그로남이 해결책을 제시한다.

"내 생각에는 전쟁만이 켈름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소."

자본주의 체제와 전쟁이 어떤 유기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이 대목 이후를 통해 알아가게 된다. 전쟁 대상은 "고르슈코프 부족"인데 이들은 켈름에게 아무런 적대 행위를 한 바 없다. 따라서 전쟁을 벌이는 이유를 그로남은 이들이 자기들을 바보라고 부르기 때문이라고 해명한다. 전쟁을 위해 필요한 "대장장이 잘만(군수 산업)"도 있고 상대는 "작은 마을이고 주민들도 우리보다 더 가난하다." 이 전쟁의 결과에 대해 얼간이 자인벨은 "고스슈코프를 정복하면 우리 켈름은 제국으로 발돋음하게 될 겁니다"라고 칭송한다.

미국이 베트남을 비롯해서 제3세계의 가난하고 작은 나라들을 대상으로 벌인 모든 전쟁의 속셈과 그 제국주의를 향한 욕망을 아이작 싱어는 이런 식으로 까발리고 있다. 그런데 이 전쟁은 그만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해서 켈름의 지도부는 패전하고 퇴각하면서 결국 내부의 반란에 봉착해서 이들은 망명 상태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반란을 일으킨 혁명당 역시 전제정치를 펼치면서 무너진다. 이 와중에 시인 제켈은 번번이 바뀌는 지배자를 위한 송시를 써서 아부의 절정에 도달한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권력과 언론, 문화의 유착관계가 송두리째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다가 범죄자임에도 불구하고 써먹을 가치가 있다고 전쟁에 동원했던 절도범 파이텔이 권력을 쥐게 되고, 도둑의 나라가 된 켈름은 결국 이전투구로 내분에 직면하면서 붕괴하고 만다. 이후 다시 돌아온 그로남과 다섯 현자는 권좌에 복귀하지만 켈름의 부인 옌테파샤는 이 모든 것이 다 남자들의 무능함과 어리석음에서 기인했다고 간파하고 여성당을 창당, 켈름의 지도력을 탈취하게 된다. 남자들이 벌인 전쟁과 기아, 그리고 분쟁과 허세를 모두 청산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여성의 지도력이 만들어 나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 것이다.

최고로 뛰어나고 명석한 자들의 어리석음

처음에는 바보들의 이야기쯤인가 했다가 국가의 중심에서 책임지고 있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이야기로 전개되면서, 이들이 내세우는 똑똑함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과 희생을 강요하게 되는 지를 싱어는 말하고 있는 셈이다.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 데이비드 핼버스텀(David Halberstam)이 베트남 전쟁을 지휘한 케네디 정부의 최고로 명석한 집단의 어리석음을 고발한 <최고로 뛰어나고 명석한 자들(The Best and the Brightest)>이 1972년에 나온 것을 함께 떠올린다면, 아이작 싱어의 이 책이 갖는 풍자의 대상이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감지하게 된다.

이 짧은 동화를 다 읽고 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바로 그 "바보들의 나라, 켈름"에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진실로 인간에게 평화와 생명,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일구어낼 수 있는 현명함은 무엇을 말하는지 근본적인 성찰로 이끄는 이 책은 그래서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읽으면서 웃고 생각을 깊이 다질 수 있는 탁월한 수작(秀作)이다.

이 기회에 아이작 싱어의 작품 세계에 계속 더 깊이 들어가 읽는 재미를 흠뻑 누리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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