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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충고 "딸아, 상처 받는 여인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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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충고 "딸아, 상처 받는 여인이 되어라!"

[프레시안 books] 츠카 코우헤이의 <딸에게 들려주는 조국>

"너는 아빠가 이 세상에서 얻은 유일한 진리이며 때 묻지 않은 존재란다."

"아빠가 엄마와 결혼한 이유는 오로지 아빠만을 생각하는 엄마의 그 해맑은 눈동자에서 '조국'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빠는 그렇게 마음을 담는 법을 연출하면 되는 거야."


츠카 코우헤이(김봉웅)의 이름을 처음 접했던 것은 내가 막 연극 학교에 들어가 연극 공부를 시작할 무렵이었다. 공부를 마치고 극작가로 데뷔한 후 대학로에 나온 다음에도 그 이름은 지인들의 입을 통해서 일본 연극을 얘기할 때마다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다.

그 말을 종합하자면 그는 한마디로 '독특한' 연출가였다. 그래서 나는 그의 연극을 한 번도 본 적 없으면서도 그저 막연하게 현대판 데라야마 슈지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데라야마 슈지는 한 세대 전 일본에서 활동한 전방위 예술가였다.

▲ <딸에게 들려주는 조국>(츠카 코우헤이(김봉웅) 지음, 김은정 옮김, 이상북스 펴냄). ⓒ이상북스
일본에서는 1990년대 초에 나왔다가 츠카 코우헤이 사후에 한국어로 번역돼 출간된 <딸에게 들려주는 조국>(김은정 옮김, 이상북스 펴냄)은 내가 그렇게 그에 대해 막연히 품고 있던 인상을 한꺼번에 바꿔놓았다. 이 책의 홍보 카피는 "경계인으로 살아온 한 천재 연출가의 삶, 그리고 뜨거운 사랑"으로 '연극'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내게는 자신이 지극하게 사랑하는 딸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알려주는 자상한 아버지의 편지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인과 한국인의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했던 이양지, 유미리, 최양일, 정의신 같은 예술가들이 흔히 그러하듯 우리가 선입견처럼 품고 있는 재일 한국인의 모습에서 많이 비켜나 있는 인물이다. 필명을 일본 이름으로 썼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른 재일 동포처럼 일본에 적대적인 원한을 품고 있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일본에 귀화해서 한국인의 얼굴을 한 전형적인 일본인으로 살아가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재일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기대지 않고 살아왔고 생활과 문화적인 면에서는 자신을 일본인으로 여겼는가 하면 한국말도 배우지 않았으며 오랜 고민 끝에 딸의 국적은 일본으로 바꿀 정도였다. 승부의 세계에선 이기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인간을 계급 투쟁을 하는 존재로 파악했고 그런 투쟁 본능이 진보를 이끌어온다고 믿었다. 그러면서도 인간에 대한 신뢰와 변하지 않는 따뜻한 마음의 소중함을 온몸으로 껴안았던 사람이다.

나는 그에게서 남과 북 그 어디에도 갇히지 않은 채 스스로 경계인의 삶을 자처했던 재독 역사학자 송두율이나 중국에 살면서 '국경'과 '경계'에 대한 다양한 질문들을 제기하고 있는 재중 동포 3세 감독인 장률, 그리고 세계 시민으로서의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영혼이 자유로운 언론인이자 작가인 고종석의 모습을 겹쳐보게 된다.

넉넉한 품과 열려있는 사고를 소유하고 있는 예술가. 그가 바로 약관 24세에 연극계에 데뷔해 수많은 후배 연출가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1970~80년대 일본 연극 붐을 이끌었고 1985년 한국으로 건너와 자신의 작품 <아타미 살인 사건>을 원작으로 한 연극 <뜨거운 바다>를 올려 국내 관객들과 연극 관계자들을 뒤집어지게 만든 장본인, 츠카 코우헤이다.

그가 딸에게 쓴 편지를 묶은 이 책에는 눈여겨볼 대목들이 많다. 사적인 글을 쓸 때처럼 쓱쓱 써내려간 듯 보이지만 읽는 도중 몇 번이나 연필을 들어 밑줄을 긋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켰던 부분들이 많았다. 몇 장면만 인용해본다.

병원에서 너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빠는 엄마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이 아이가 커서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는 날까지 잠시 맡아두는 거라고. 그때까지 키우는 역할을 맡은 거라고 생각해. 아무튼 맹목적인 사랑은 좋지 않아."

(…)

너는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까? 엄마와 아빠가 결혼한 게 스무 살 때였으니까, 너도 스무 살에 결혼을 한다고 하면 너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 16년이네.

어쩐지 쓸쓸해진다. 그러나 네 인생이야. 네가 원하는 대로 살면 돼. 아빠는 항상 곁에서 조용히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너와 엄마만은 꼭 지켜줄 거야' 중)


아빠 같은 사람들은 스스로 원해서 한국인으로 태어난 게 아니다. 태어나 보니 한국인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죄가 되어야 한다면, 그 세상이 잘못된 것이겠지.

아빠가 이 책을 세상에 내놓아 혹시 네가 어깨를 못 펴고 다니게 되는 건 아닌지 또 걱정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빠보다 너보다 더 괴로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위안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걸 생각해 주렴. ('아빠는 비열하고 어리석은 아이였다' 중)


"하지만 우리도 참 난처한 존재들이군. 일본에서는 한국인라고 차별당하고, 한국에 오면 재일 한국인이라고 괴롭힘 당하고. 우리는 대체 어디로 가면 좋은 거야?"

(…)

"그건 그렇고, 인간이란 참 슬픈 존재로군. 누군가를 차별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가 봐." ('너는 아빠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줄까' 중)


미나코야. 아빠는 네가 무럭무럭 자라주길 기원하고 있다. 그리고 타인의 아픔이나 슬픔을 아는 사람이 되어 주었으면 한다. 네가 상처받는 여인이 되었으면 한다. 막상 네가 상처받은 모습을 보면 아빠는 미쳐버릴 것처럼 괴로울 거야. 네게 상처 준 사람들을 안다면 다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몰라. 하지만 그때 아빠는 마음속으로 계속 "내일은 너를 위해 있다"고 외칠 거야. 그러니까 미나코도 상처받는다 해도 마지막에는 '내일은 꼭 좋은 일이 있을 거야'라고 생각해주기 바란다. ('네가 상처받는 여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중)

이 책 곳곳에는 그간 우리가 굳게 믿어왔던 화석화된 근대적 개념인 '민족'이나 '국가' 같은 낡은 관념을 허물고 초월한 사람에게만 존재하는, 한 사람의 진실한 인간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그의 자유의지가 뜨겁게 녹아있다.

그의 연극 <뜨거운 바다>에서 도쿄에서 온 강 형사가 자신이 호감을 느꼈던 서울의 여 형사 김지숙에게 "김 형사님, 조국이란 당신의 아름다움입니다. 애국심이란 당신을 사랑스럽게 생각하는 의지입니다"라고 털어놓았듯이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갈무리하듯 딸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미나코야, 틀림없이 조국이란 너의 그 아름다움이다. 엄마의 변함없이 한결 같은 상냥함이다. 아빠가 엄마를 사랑스럽게 생각하는 그 뜨거움 속에, 나라가 있다. 두 사람이 너를 무엇보다 소중히 생각하는 눈길 속에, 조국은 있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사랑스럽게 생각하는 강한 의지가 있다면,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

츠카 코우헤이는 2010년 1월 1일 병상에서 남긴 유언에서 "돌아보면 부끄러움이 많은 인생을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부끄러움이 없는 인간은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쓰레기라고 경멸할 만큼 그 누구보다도 더 '부끄러움'이 무엇인지를 자각하고 실천했던 예술가였다.

먼저 가는 자는 뒤에 남는 자에게 괴로움을 끼쳐서는 안 된다는 신조로 자신이 죽은 후에도 일체의 의식을 사양하고 다만 유골은 사랑하는 딸의 손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 대한해협에 뿌려달라고 부탁했던 이 아름다운 남자를 나는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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