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 잡지 중 하나인 영국의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는 1986년 3월에 "원자력의 매력(The Charm of Nuclear Power)"이라는 특집 기사를 실었다. <이코노미스트>는 "풍부하고 안전하고 값싼 에너지"라는 원자력 신화를 소리 높여 찬양하다 너무 몰입한 탓인지 "원자력 발전소는 초콜릿 공장만큼이나 안전하다"는 과도한 찬사를 이 첨단 기술에 바쳤다. 그리고 한 달 후 체르노빌 참사가 발생했다.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고 어떻게 대응하는가는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과학기술 수준에서나 경제력 측면에서 당대 경쟁자가 없었던 미국의 경우 1979년 스리마일 섬 사고가 나자 사고 발생 나흘 만에 지미 카터 당시 대통령이 현장을 방문하여 원자력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기존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감시 시스템을 개선하고, 원자력 발전소 운영 요원의 자격 요건을 엄격하게 하는 한편 비상 대처 훈련을 강화하는 등 원자력 발전소 안전에 관한 강력한 조치가 이어졌다. 스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 미국에서 이에 버금가는 사고는 아직까지 발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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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마일 섬과 체르노빌의 핵 재앙에도 불구하고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꿋꿋이 추진한 나라는 일본과 한국이다. 심지어 원자력의 나라 프랑스에서조차도 체르노빌 이후 원자력 발전소 건설의 속도는 현저히 줄었다. "풍부하고 안전하며 값싼 에너지"라는 신화를 끊임없이 국민들에게 주입하면서 국가가 앞장서서 원자력 진흥 정책을 펼친다는 점에서, 안전을 관리하는 규제 기구는 진흥 기구의 부속으로 두면서 원자력 산업의 책임은 최소화하고 사고 시 국민의 세금을 투여해 원자력 발전소 산업을 지원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일본과 한국의 원자력 정책은 놀랍도록 유사하다.
그리고 마침내 일본과 한국은 원자력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여 프랑스와 함께 국제 수출 무대에서 힘을 겨루는 경지에 도달했다. 핵 사고의 공포가 조금씩 무뎌지고 온실 기체는 감축해야 하지만 전기는 여전히 풍족하게 사용하고 싶은 나라들에서 원자력의 유혹이 점차 강화되었다. 그리고 다시 원자력의 시대를 열어가려는 '신화 작가'들과 원자력 발전소 로비스트들이 바빠졌다.
<이코노미스트>도 가만있지 않았다. 체르노빌 사고로 체면을 구겼던 <이코노미스트>는 마침내 2007년 9월에 자존심 회복을 시도한다. 이번 특집의 제목은 "원자력의 새로운 시대(Nuclear power's new age)"다. 시작은 제법 겸손하다. 1986년 3월에 원자력의 매력을 칭송했었으나 시점이 썩 좋진 않았단다. 그리곤 체르노빌의 공포에도 불구하고 원자력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은 나라들이 있는 반면에 공포에 짓눌려 강력한 규제 조치를 취한 나라들은 결국 원자력 발전소 기업의 붕괴로 이를 구제하기 위해 많은 혈세를 투여했다는 교묘한 논리를 제기한다.
그리고 당당하게 원자력이 두 번째 기회를 맞이했다고 선언한다. 미국, 영국, 호주 등에서 전개되고 있는 원자력 발전소 건설의 흐름을 소개하면서 "적절히 관리한다면"이라는 수식어를 달아 원자력의 재등장은 좋은 일이라 결론을 내린다.
<이코노미스트>가 이렇게 결론을 내리는데 사용한 논리는 과학기술 예찬론자들이 전가의 보도로 사용하는 '새로운 원자력 기술'이다. 원자력 발전소 기업인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GE)이나 웨스팅하우스 그리고 프랑스의 아레바(AREVA) 측의 말을 인용하여 "새로운 원자력 발전소 기술은 지금의 것보다 훨씬 단순하고 안전해서 더 빨리 건설하고 더 싸게 운전할 수 있으며 과거의 사고들은 되풀이 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점잖게 충고한다. "원자력의 공포는 과장되었다. 체르노빌 사고로 약 4000명 정도가 사망했는데 이는 중국 탄광의 연간 사망률 보다 낮다."
약간 더 교묘해졌을 뿐 <이코노미스트>의 논리는 사실 1986년 3월의 것이나 2007년 9월의 것이나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원자력은 "풍부하고 안전하고 값싼 에너지"라는 신화의 반복 재생일 따름인 것이다. 그러나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핀란드 올킬루오토(Olkiluoto) 원자력 발전소 3호기 건설의 어려움은 이러한 신화가 여전히 허구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후쿠시마 원자력 사고가 나기 전 일본 원자력계의 분위기는 어떠했는가? 아랍에미리트(UAE) 원자력 발전소 수출 경쟁에서 한국에 패배한 일본 원자력 산업계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원자력 르네상스 시대에 원자력 발전소 수출의 가장 큰 걸림돌은 과도한 내진 설계 요구로 건설 비용을 높여서 대외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일본의 안전 규제 정책이라는 강력한 비판들이 제기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과도한 내진 설계 기준을 훨씬 뛰어 넘은 대지진과 지진 해일과 함께 후쿠시마 핵 재앙이 시작되었다.
프랑스 아레바가 핀란드 올킬루오토 섬에 짓고 있는 올킬루오토 원자력 발전소 3호기는 바로 <이코노미스트>가 예찬하는 차세대 원자력 발전소인 GEN III+이다. 이 원자력 발전소는 2005년에 착공하여 2009년에 가동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크고 작은 안전 기술 문제로 공사 기한이 여러 차례 지연되면서 원래 계획보다 4년이 늦은 2013년에야 가동하는 것으로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무려 4조 원 이상의 비용이 추가된다고 알려지고 있다.
월드워치연구소가 올해 4월에 펴낸 보고서인 <세계 원자력 산업 현황>에 따르면, 더 값싸고 안전한 원자력 발전소 기술로 원자력 르네상스 시대를 열어갈 것으로 기대했던 차세대 원자력 발전소는 전혀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원자력 발전소 건설비는 국제적으로 1㎾당 1000달러에서 여섯 배인 6000달러까지 오르는 상황을 보이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싸고 안전한 에너지"라는 원자력의 신화는 이렇게 현실에서 부정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신화를 외치는 세력은 굳건하다. 문제는 이러한 거짓 신화가 울려 퍼지는 순간 핵 재앙은 바로 우리 앞에 다가온다는 역사의 교훈이다.
우리 현실은 어떠한가? 후쿠시마의 공포가 한창인 3월 30일자 한 경제 신문의 칼럼 제목은 이렇다. "그럼에도 원자력 발전소이다." 칼럼의 필자에게 스리마일 섬 사고는 노심 용해가 격납고를 파괴시키기 직전 제어됨으로써 심각한 재앙을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던 대형 사고가 아니라 사고 직전 개봉된 영화인 <차이나 신드롬>으로 인해 원자력 발전소 공포가 부풀려짐으로써 원자력 발전소 산업을 크게 약화시킨 결과만 가져온 해프닝이다.
그에게는 이번 후쿠시마 사고를 계기로 노후 원자력 발전소 7기의 가동을 중단하고 단계적으로 원자력 발전소를 폐쇄하기로 한 독일의 결정 역시 재생 가능 에너지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지닌 나라가 이번 사태를 세계 에너지 시장 장악의 기회로 삼으려는 음모로만 보인다.
경제 신문 칼럼만이 아니다. 최고 정책 결정자인 대통령은 일본의 방사성 물질이 바람의 방향과 상관없이 우리나라에 아무런 영향이 없으며 우리 원자력 발전소는 최대 지진을 고려하여 설계되었고 지금까지 사고로 분류되는 경우는 한 건도 발생한 적이 없어, 공식적으로 세계 최고의 안전성을 인정받고 있다고 확신에 찬 어조로 얘기하고 있다.
체르노빌 25주기에 후쿠시마의 재앙을 지척에 두고도 이렇게 근거 없는 원자력 발전소 신화를 반복하고 있는 우리 현실을 보면서 과연 우리는 이 끔찍한 핵 사고를 비켜갈 수 있을까하는 불편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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