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가 한족(漢族)만의 역사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이른바 "외래 왕조의 성립"을 통해 중국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전개시켜왔다. 선비족의 연, 거란의 요, 여진의 금, 몽골의 원 그리고 만주에서 일어난 청조는 모두 외래 왕조가 중국의 역사를 이끌어간 보기다. 이는 초원 제국과 중원 사이의 격돌, 융합, 분리를 보여준다.
한족이 오랑캐라고 부른 북방 초원의 유목민들이 중원을 장악하거나 또는 그와 대립 내지는 협력하면서 펼친 역사는 중국과 만주, 몽골 그리고 우리의 과거사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는데 긴요한 대목이다.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동북아시아 체제가 형성되어온 자취를 알고자 한다면 이 점을 짚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역사는 세계사이며 그것은 관련된 요인들의 유기적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당이 수를 멸망시킨 결정적 세력인 고구려의 공세를 꺾기 위해 돌궐을 동맹군으로 끌어 들이려 한 것이나, 이를 간파하고 고구려가 돌궐과 외교 협상을 벌인 일이라든가 하는 사실(史實)은 흥미진진할 뿐만 아니라 동북아 정세를 관리하는 국제 관계의 반복되는 유형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에게 동북아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은 깊지 못하다. 중국은 그저 단일한 한족이 중심이 된 중국의 연속선에서만 인식한다.
"내륙 아시아"에 대한 연구
그러기에 초원 또는 유목 제국의 발상지인 "내륙 아시아"라고 불리는 지역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우리 사회의 인문학적 조명을 크게 받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한 고전적 저작인 오웬 라티모어가 지은 <중국의 내륙 아시아 변경(Inner Asian Frontiers of China)>(1962년)이나 그의 여행기 <투르키스탄으로 가는 사막의 길(The Desert Road to Turkestan)>(1995년) 같은 책은 여전히 번역되지 않고 있다.
▲<위태로운 변경>(토마스 바필드 지음, 윤영인 옮김, 동북아역사재단 펴냄). ⓒ동북아역사재단 |
토머스 바필드의 원저는 지난 1989년에 나왔고, 니콜라 디 코스모의 책은 2002년에 나왔으니 내륙 아시아와 중국사의 관계에 대한 연구의 흐름이나 문제제기 또는 비판을 정리해볼 수 있다. 전근대 동아시아 국제 관계와 북방 민족사를 전공한 윤영인의 번역은 영어 원문에는 우리가 파악하기 힘든 중국 원서의 본문도 자세하게 정리해놓아 우리로서는 영어 원본보다 이 책이 더 도움이 된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토마스 바필드의 관점은?
저자는 동아시아 역사 전공자가 아니고 인류학자다. 그런 까닭에 그가 동원하는 자료는 1차 자료가 아닌 번역된 자료나 2차 자료가 중심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양과 정보를 체계적으로 엮는 솜씨는 매우 뛰어나다. 우리는 그의 저작에서 초원 유목 제국의 등장과 중원의 관계가 어떤 역학을 가지고 펼쳐지는지, 그래서 형성되는 정치 구조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데 적지 않은 단서를 얻게 된다.
물론 그의 이론과 접근에 대한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초원 제국과 중원의 상호 의존성에 대한 연구는 이 책의 중심 테마로 동아시아의 지난 시기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의미 있는 역사 이해의 얼개를 짜준다. 그에 더해 인류학자가 동아시아 역사를 이런 수준으로까지 알고 있다는 점도 놀랍다. 기원전 221년의 한 제국과 흉노 제국 사이의 역사로부터 1757년 청조 수립 이후의 몽골의 쇠퇴까지 다룬 내용은 그 자체로 방대하다.
이 책은 일반인들이 읽어내기에는 다소 어렵거나 까다로울 수 있다는 점이 아쉽지만 그래도 중국의 역사에 관심이 있거나 우리 역사의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는 과정을 새롭게 조명해보고자 한다면 일독을 권한다. 힘들여 읽는 것만큼 얻는 것도 적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르네 그루쎄의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김호동·유원수·정재훈 옮김, 사계절 펴냄)에 대한 공부까지 가세해준다면 오늘날의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세계사의 전개 등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쌓일 수 있을 것이다.
토머스 바필드의 관점은 북중국 지역을 둘러싼 초원 제국과 중원, 그리고 만주 지역, 투르키스탄의 네 지점이 서로 어떻게 얽혀 있는가에 집중되어 있다. 얼핏 우리는 초원에서 일어난 유목 제국은 중원의 붕괴를 노리고, 서로 권력이 교체되는 상황을 떠올리기 쉬우나 바필드는 초원 제국과 중원의 성장과 쇠퇴는 서로 상호의존적 경향을 보인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 두 체제의 붕괴가 발생할 경우 만주 지역의 세력이 힘을 얻는 역사의 유형을 잡아낸다.
이렇게 되는 까닭을 그는 초원 제국의 번성은 한족 지역인 중원이 가지고 있는 물자에 달려 있다는 점으로 해서, 초원 제국은 중원의 파멸을 원치 않으며 공세를 취하는 경우란 중원의 물자 공급을 압박하는 전술로 작동할 때라고 말한다. 이와 함께 중원의 세력은 자기 내부에서 반란이 일거나 다른 유목 세력의 침공이 있을 때 이들 초원 제국의 지원을 받는 등 서로 적대하면서도 협력의 관계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또한 흉노에서 선비, 돌궐, 몽골 등의 역사적 변화의 과정에서 군사력은 초원 제국, 통치 제도는 한족의 관리 능력에 의존하는 2중 구조가 있어왔음도 밝히면서 당의 경우에는 초원 제국의 전통이 그 안에 남아 돌궐과 같은 유목 문명이 중국에 끼친 막대한 영향도 언급하고 있다. 당이 당시 세계적 교류의 중심이 된 이유도 따지고 보면, 소그디아 상인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비잔티움에까지 이르는 비단 교류의 길을 장악하고 있던 돌궐적 요소가 내부에 있기 때문인 것을 알게 된다.
초원(Steppe)과 중원(China)의 관계
이런 토머스 바필드의 관찰과 분석은 기본적으로 초원 유목 제국은 야만이고 중원과 언제나 적대적이었으며 한족은 초원 제국의 전통을 자신의 정통사에서 배제하려고 했다는 식의 접근을 비판적으로 보게 한다.
바필드는 초원 제국과 중원의 관계를 이렇게 밝힌다.
"유목 제국 연맹은 중원 경제와 연결이 가능했던 시기에만 존재하였다. 유목민들은 교역권과 물자를 제공받기 위해 강탈이라는 전략을 사용했다. 그들은 변경을 습격한 후 중원의 조정과 평화 조약을 협상했다. (…) 중원과의 무역을 통한 이익과 물자 제공은 유목 제국을 견고하게 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러한 자원을 파괴할 의도가 없었다. (…) 몽골을 제외하면 유목민의 정복은 중원의 중앙 권력이 붕괴되어 강탈의 대상이 되는 국가가 사라졌을 경우에 일어났다. 즉, 강력한 유목 제국은 중원의 토착 왕조와 나란히 흥기하고 붕괴되었다. 한나라와 흉노 제국은 10년 이내의 시기에 같이 출현하였고, 돌궐 제국은 바로 수당 왕조에 의해 중원이 통일되었을 때 나타났다." (42쪽)
이렇게 상호의존적인 북중국 지역의 초원 제국 등장과 중원의 붕괴는 만주 지역에 근거를 둔 세력의 성장을 가져오게 된다.
"당나라가 쇠퇴하면서 왕조는 내부 반란의 진압을 유목민에게 의존하게 되었고, 8세기 중엽의 안녹산의 난을 평정하는데 위구르의 결정적인 지원을 받았으며 (…) 840년 위구르가 키르기즈의 공격에 무너진 후 초원의 중심 지역은 혼란기에 접어들었고, 당나라 역시 중원 내부에서 일어난 반란에 의해 붕괴되었다. 당나라의 붕괴는 만주 지역에 혼성 국가가 조성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유목민 거란족의 요 왕조였다. (…) 몇 세기 이전의 모용연과 마찬가지로 거란은 한족과 부족 조직을 통합하는 이원적 통치 체제를 실행하였다. 그러나 연나라와 마찬가지로 거란도 다른 만주의 부족 집단인 여진에 의해 정복되었다. 삼림 지역의 여진 부족은 12세기 초 거란 제국을 멸망시키고 금 왕조를 세웠으며 북중국 전부를 정복하여 송나라는 남쪽에 제한되었다. 여기까지 두 차례의 순환 주기는 그 구조가 놀랄 만큼 유사하지만 몽골의 흥기는 이 체제를 와해시키고 중원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51쪽)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 신라-발해 남북조, 그리고 고려에서 조선으로 가는 길목에는 이런 역사가 펼쳐졌다. 좌우 양쪽으로는 만주와 투르키스탄을 두고 그 중간에 초원 제국과 중원이라는 대립 구조를 가졌던 동아시아는, 그와 같은 조건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그 구조가 붕괴되면서 전혀 다른 국제사적 운명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동아시아의 미래를 어떻게 읽어나가야 하는가에 대한 과제를 던진다.
동아시아 미래를 바라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머스 바필드가 보았던 고대에서 전근대에 이르는 동아시아의 대립과 협력 구도는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중국은 동북공정과 서남공정에 걸친 동아시아 지배 질서를 구축하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펼치고 있다. 티베트나 위구르의 현실, 몽골과 만주에 해당하는 동북3성 지역에 대한 중국의 민감한 정책은 모두 이런 지난 시기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그리고 이를 내면적으로 깊이 이해하는 것은 동아시아의 미래를 평화적으로 만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인식이다.
뿐만 아니라 문명의 교류라는 역사적 과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내륙 아시아에 등장한 초원제국사와 중원의 관계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실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도처에 넘치고 있다. 이런 인문학적 지식이 한 사회의 상식으로 스며들 때 그 공동체의 국제적 시야와 능력은 빼어나게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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