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에 대한 평가는 "고결한 천재, 성자와 같은 인물, 프랑스 대혁명의 아버지"와 "불안한 정신병자, 비열한 인격의 소유자, 파시즘의 선조"라는 양극단으로 나뉜다.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나 고아나 다름없이 버려진 채로 서른 살까지 정규 교육도 받지 못하고 뿌리 없이 살아가며 허드렛일을 하던 청년이 어떻게 해서 그 시대의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었을까?
친자식 5명 모두를 고아원에 버린 무책임한 아버지가 어떻게 해서 아동 교육에 관한 훌륭한 작품을 남길 수 있었는가?
전기(傳記)는 불필요한 사족은 아닐까?
푸코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탄생과 더불어 '저자'라는 개념이 "개인화라는 특권화된 계기"를 형성하면서 작품에 대한 생산자의 소유를 대변한다고 본다. 저자는 작품을 지배하는 권위의 원천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작품이 "생산자의 소유를 벗어나 누구나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들고 다니면서 쓰일 수 있는 연장통"이 되기를 원한다.
이런 이유로 그는 "저자의 죽음"을 선언한다. "누가 말하건 무슨 상관인가?" 이렇듯 그는 얼굴이 없는 글쓰기를 원한다.
루소는 자서전을 썼다. 그래서 자신의 작품에 자신의 얼굴을 스스로 달았다. 이는 작품에 대한 저자의 권리를 영원히 단단하게 다지는 염원에서 비롯된 것인가? 게다가 자서전을 통해 저자가 스스로 자기 삶을 밝혔는데도 그에 관하여 타인이 쓴 전기가 필요한 것인가?
▲ <루소 : 인간 불평등의 발견자>(리오 담로시 지음, 이용철 옮김, 교양인 펴냄). ⓒ교양인 |
담로시에 따르면 루소 이미지의 이중성은 그의 심리적 내적 갈등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이 내적 갈등은 단순히 그의 성격상의 결함이 아니라 그가 추구한 이상적인 자기(자유인)와 그가 처한 삶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조건(불평등과 억압)과의 괴리에서 오며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통으로 이해될 수 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단 한 줄도 쓰지 않았다고 말한 루소는 왜 자서전을 썼을까? 그 당시가 정치적 검열과 탄압이 존재하던 절대왕정의 시절이었기에 철학자들이 보통 익명으로 출판해서 자신을 보호한 반면, 루소는 표제에 "장 자크 루소, 제네바의 시민"이라고 명확하게 밝힘으로써 위험을 자초했다.
또 그는 자신의 책을, 경력을 높이기 위한 수단도 아니고 명성을 얻기 위한 게임의 책략도 아니고 후원을 얻기 위한 시도가 아니라고 명확하게 규정하였다. 그는 자신을 위해 글쓰기를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에 반대되지만 다른 사람에게 유용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가 글쓰기 좌우명으로 삼은 것은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다"였다. 이는 로마의 풍자 시인 유베날리스의 격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루소의 글쓰기 정신을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자서전은 단순히 생산자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권리 선언이 아니라 진리가 자신을 위험에 처하게 하는 시대적 상황에서 스스로 위험을 감수하는, 진리에 대한 자기 확증적 보증서이다. 이러한 글쓰기는 기존의 지식인의 경쟁 게임의 판도를 완전히 뒤바꾸는 행위이다.
계몽주의 시대의 네 명의 철학자
1740년대 살롱을 중심으로 하는 사교적 모임으로 인해 비약적으로 문화와 예술이 발전하는 와중이던 파리에서 네 명의 무명이지만 야심만만한 젊은이들이 모여 토론하는 모습은 지극히 평범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 네 명은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성장한다.
그 네 명은 다음과 같다. 스위스의 조그만 도시 국가인 제네바 공화국 출신으로 시계 수공업자들의 아들로 태어나 버림받고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루소. 귀족 가문 출신의 사제이지만 감각적 경험론에 바탕을 둔 급진적 유물론자가 된 콩디야크. 루소와 마찬가지로 시골뜨기이자 칼 수공업자의 아들로서 "매우 명석하지만 극도로 위험한 젊은이"인 디드로. 루소와 마찬가지로 부모님께 버림받았지만 뛰어난 수학자로 성장한 달랑베르.
이 중에 두뇌가 명석하고 사교성이 좋은 세 명의 철학자는 프랑스 계몽주의와 <백과전서> 운동을 대표하는 인물들로 성장한다. 반면에 감성이 풍부한 음악가이자 고독하고 게을러 보이는 루소는 계몽주의 안에서 계몽주의의 기초를 무너뜨리게 된다.
감상적이며 고독하고 게으른 것은 이성과 일과 사교성을 중시하던 계몽된 이기적 개인주의자들에게는 전근대적인 것이며 진보에 역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상력이 없는 이성이란 주어진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계산기이거나 기존 질서를 정당화해주는 도덕적 장치에 불과하다. 계몽주의의 시대에 나머지 세 명과 달리 루소는 상상력을 신뢰했다. 이성보다 감성의 중요성을 자각했다. 이는 그가 수학적인 화성을 중시하는 프랑스 음악보다 감성에 호소하는 단순한 선율을 강조하는 이탈리아 음악을 더 높이 평가한 데서 잘 드러난다.
루소는 계몽주의 시대의 여명에 그 한계를 본 사람이다. 이성이 다시 어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즉 계몽의 변증법을. 넷은 가난하고 무명인 상태에서 야심만만한 젊은이들로 만났다. 루소는 계속 가난을 고집했다. 유명에도 저항했다. 그는 의도적 고립을 선택하며 자신에게 명령을 내린 가슴의 자유를 계속 지키려고 했다.
그러나 유명해지면서 루소도 사회 또는 사교에 얽혀들 수밖에 없었다. 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권위적인 후원자로부터 자유롭고자 했고 권위적인 친구로부터도 자유롭고자 했다. 그는 이성의 권위로부터도 자유롭고자 했다. 그래서 계몽 철학을 대표하는 <백과전서>의 기획자이며 주요 편집자이자 철학자인 디드로와 결별한다. 이는 형식적 평등이 성취된 근대 이후의 자유주의 사회도 여전히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그의 직관적인 예감을 암시한다.
'지식'은 해방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권력에 의해 생산되는 것이기도 하다. 근대적 '개인'은 억압적 신분제로부터의 해방의 원천이지만 이기적인 개인주의는 또 다시 억압의 기원이 된다. 루소는 "개인을 존중하지만 각 개인이 공동체의 일부로서 자신을 느끼도록 촉진하는 집단 정신"을 추구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이상향으로 그린 "제네바의 시민"임을 자부심으로 내세웠다.
루소는 진보와 지식보다는 소박한 삶을 선택하는 지혜를 선호했다. 그래서 그는 어렸을 때의 우상이던 진보적 계몽주의자 볼테르가 자신의 고향인 제네바에 파리 스타일의 귀족적 극장을 설립할 계획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한다. 이는 그가 어릴 때 민중적 자발적 축제에서 느낀 단결, 평등, 형제애, 대중적 신뢰감의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루소가 원한 것은 근대의 대중사회의 익명성을 상징하는 극장에서의 가면 쓴 연기가 아니라 어린 시절, 제네바의 시민군이 기동 훈련을 마친 후 춤을 추고 있을 때 아버지 이자크 루소가 "장 자크야, 네 나라를 사랑해라"고 외치던 자발적으로 벌어진 대중적 축제였다. 실제로 유럽 전역에서 지배 엘리트들은 전력을 기울여 이러한 축제를 억압했다.
자각(自覺)에 이르는 좌충우돌의 삶의 여정
"나는 노예 상태를 인류의 모든 악의 근원으로서 증오한다."
이 말이 루소에 관한 이 전기 작가가 내거는 구호이다. 그가 보기에 루소의 삶은 불평등이라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을 전전하면서도 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적 시도를 벌이는 갈등의 연속이다.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명문인 외가 덕분에 유년 시절을 안락하게 보내다가 아버지가 도망간 뒤 수공업자의 도제로 일하면서 억압을 배웠고, 토리노에서는 하인으로 일하면서 신분이 낮아졌으며, 사부아에서는 낮은 직위들을 차지했고, 리옹과 파리에서는 상층 부르주아 계급과 귀족 밑에서 가정교사와 비서 노릇을 하면서 사회의 주변부를 두루 거쳤기 때문에 모든 신분의 삶을 살펴보게 된다.
루소는 수공업자의 도제를 그만두기 위해 도망친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그의 인생 대부분을 뿌리 없이 떠돌아다녔다. 처음에는 그의 심장이 원하는 대로 했고, 나중에는 그의 머리가 원하는 대로 했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겪어 온 내적 갈등의 원천이 이것이다. 그의 삶의 억압적 조건과 그의 자유로운 가슴이 부딪치면서도 그는 이 이유를 몰라서 번민하며 떠돌며 여러 가지 일을 전전했다.
루소도 자각을 하기 전에는 막연하게 이런 삶에서 벗어나 성공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문화의 중심지인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성공했다. 그러나 성공의 한가운데서 거꾸로 그는 그 자신을 찾았다.
루소가 진정 자신을 찾게 된 데는 하나의 계시가 있었다. 이는 벵센 감옥에 갇힌 철학자이자 친구인 디드로를 방문하는 도중에 얻게 된 통찰이었다. 이 계시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라는 명문으로 구체화된다.
그때부터 루소는 스스로 "고립되고 허세 없는 삶의 방식"을 선택했다. 이런 삶의 방식 때문에 "나는 거의 가치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이 때문에 나는 농부에서 귀족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분의 사람들을 관찰하고 비교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됐"다.
루소의 정신적인 갈등은 사회적인 불평등과 관련이 있었다. 그가 원한 것은 후원이라는 이름으로 가장된 종속도 아니고 사회적 명성에 합류함으로써 기존의 착취 구조에 편입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원한 것은 지배자와 하인의 관계 형태의 종속이 아닌 사람 대 사람의 우정이었다. "내가 갈망하는 것은 친구입니다."
루소의 오페라가 성공적으로 데뷔함에 따라 프랑스 왕이 후원 제의를 하였지만 이를 거절한 것이 바로 이런 자각적 삶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 왕의 후원 제의에 대한 거절은 그의 완벽한 참존재를 향한 독립선언서이다.
"내가 대중의 인정을 열망하기 시작하거나, 멋진 노래를 쓴다고 뽐내거나, 형편없는 희곡을 쓴 것에 낯을 붉히거나, 내 라이벌의 명성에 흠을 내려고 애쓰거나, 당대의 위인들을 내 수준으로 낮춤으로써 나를 그들의 수준으로 높이기 위해 그들을 나쁘게 말하는 것을 즐기거나, 아카데미에서 자리를 차지하기를 동경하거나, 분위기를 주도하는 부인들의 비위를 맞추거나, 귀족들의 어리석음을 추켜세우는 것을 그들이 언젠가 보게 된다면 (…) 나는 즉시 내 글과 책들을 불길에 던져버릴 것을 약속한다."
악보를 베끼며 생활비를 버는 철학자 : 나는 자유인이다
루소는 이러한 자각으로 인해 스스로 선택한 비극적인 삶을 살게 된다. 그는 1751년 마흔 살까지 성공하고 싶은 허영심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그 성공이 착취의 편에 일조한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자유로운 독립적인 영혼을 지닌 루소는 왕과 귀족들의 후원을 거절한다. 의도적인 가난을 선택하며 유명해지는 것도 거부하며 파리를 떠나 고립적인 삶을 산다.
루소가 허영심을 추구하던 시절에 그 글은 평범했지만 그가 새로운 삶을 선택하자 그 글이 위대해졌다. 루소가 원한 것은 지식인들의 세력 경쟁이라는 게임에서 그 게임을 더 잘하는 것이 아니라 체스 판을 통째로 뒤집어 버리는 것이었다. 즉, 볼테르는 부를 통해서 존경을 얻기를 원했는데 반해 그는 스스로 선택한 궁핍을 통해 자신을 미덕의 화신으로 승격시킨 것이다. 이러한 방식이 훨씬 세련되고 철학적이어서 윤리적인 덕성이 모든 예술과 학문보다 으뜸가게 된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1762년 이후 루소는 주요 저작 모두에서 자기 자신의 진실함을 방어했다. 이의 정점인 <고백론>에 의해 근대 심리학이 탄생한다.
그는 "언제나 나 자신이 되는 것"이 목표였다. 겉모습의 변화는 참존재의 변화를 가져온다고 그는 믿었다. 그래서 위선자가 겉으로 보이기 위해 겉모습을 꾸민다면 이에 반해 그는 참으로 그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 겉모습을 꾸몄다. 그의 이중적 이미지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전기의 특징은 이렇게 루소의 심리적인 내적 갈등에 대한 묘사를 그의 인생의 행로에 대한 묘사와 결합한 데 있다. 이렇게 해서 루소가 자신의 갈등이 실은 사회적 모순에서 비롯된 것임을 자각하는 과정을 통해 그가 자유와 평등과 연대의 철학자가 되어가는 모습과 이 깨달음을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고난에 처한 말년을 심리 분석적으로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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