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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카이스트의 6만 원짜리 아인슈타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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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카이스트의 6만 원짜리 아인슈타인들

[공작의 꼬리 경쟁·10] 카이스트의 미래는 없다

카이스트의 6만 원짜리 아인슈타인들

카이스트(KAIST)는 미래의 아인슈타인과 같은 과학자를 양성하는 한국 최고의 연구·교육 기관으로 한국 최고의 교수진과 영재들을 보유하고 있다. 최근 몇 달 사이에 이 학교의 학생 세 명이 짧은 간격을 두고 자살한 사건을 뉴스를 통해 들었다.

학점 0.01의 가격은 6만 원

그중의 한 학생인 '로봇 영재'로 알려진 조모 군은 학사 경고를 비관해 자살했다고 한다. 그는 학업 성적이 아니고 로봇에 천재적 재능을 보여 특별 전형을 통하여 입학하였다고 한다. 실기가 강한 조 군이 미적분과 같은 이론 시험에 낮은 점수를 받게 되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을 것이었다. 입학은 학생의 특기를 고려하여 뽑았지만 학업 평가에 있어서는 그의 특이한 능력이 고려되지 않았으며, 일률적 잣대로 평가했던 모양이다. 그는 낮은 평점을 받아 학사 경고를 받고 한 학기에 총 800여만 원을 납부해야 했다고 한다. 그는 학사 경고를 받을 정도의 낮은 평점, 그리고 800여만 원의 큰 경제적 부담으로 정신적 압박을 받았을 것이다.

이러한 불행한 소식과 함께 눈길을 끈 것은 이 학교에서 최근 '경쟁력 향상'을 위하여 징벌의 성격이 있는 등록금 제도를 도입하였다는 사실이었다. 이 등록금 제도는 쉽게 이야기하자면 성적이 떨어지면 돈을 더 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학생들은 평점 3.0(만점 4.3)에서 0.01점이 낮아질 때마다 약 6만 원(2010년 기준)을 다음 학기 시작 전에 지불해야 한다. 2.0 미만의 평점을 받은 학생은 최대치인 600만 원의 수업료가 부과된다.

사회 전체에 경쟁 논리가 확대되고, 학교나 연구 기관 역시 차등화와 보상 동기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다. 카이스트 역시 이러한 사회 전체의 변화를 반영하여 금전적 보상 제도(벌금 제도)를 도입하였다. 이러한 징벌 성격의 등록금 제도가 도입된 배경으로는 평점이 0.01을 6만 원이라는 돈으로 확인을 시켜줌으로써 학생들이 학점을 올리려는 동기 제공을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는 장사하는 사람이 개당 6만 원의 이익이 있으면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려는 이윤 동기를 적용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세계의 학교나 연구 기관이 다양한 장학금 제도를 갖고 있지만, 이러한 6만 원의 학점 상승 동기 제공의 기발한(?) 아이디어는 세계 어느 대학이나 연구 기관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6만 원이라는 가격을 한국의 최고 연구 기관인 카이스트의 학생 교육에 도입함으로써 학문의 시장화 추진의 완성 단계로 더 접근하게 된 것 같다. 물론 시장 논리의 적용에서 학생들이 받는 정신적 고통은 계산되지 않는다. 시장 논리의 적용의 문제는 학생들의 경쟁이 늘어남으로 받는 정신적 고통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큰 과학자로 성장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은 고려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상 동기로 상대성 이론이 나왔는가?

보상 동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업적에 따른 차등화 보상이 생산성 향상에 기여한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한정된 생산 과정의 한정된 부분에는 적용될 수 있다. 특히 일 자체가 단조롭고 지루하며, 협동이나 아이디어의 교환이 요구되지 않는 단순 노동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예를 들어 공장에서 신발을 만드는 단순 노동을 생각해보자. 차등화 없이 모든 사람이 똑같은 보수를 나눈다면, (공장의 동료들을 친구가 아닌 경쟁의 대상으로만 여긴다면) 대부분 열심히 빨리 하기보다는 천천히 놀면서 만들려 할 것이다.

그러나 차등화 보상을 도입하여 한 켤레 당 얼마를 지급하기로 했다고 하자. 이제 자신이 몇 켤레를 더 만드는지 하는 숫자의 증가에 따라 자신의 보수가 늘어나게 되니 더 열심히 만들 것이다. 이러한 보상 동기의 적용은 협동이나 아이디어의 교류가 필요 없는 단순 작업에 유용할지 모른다. 그들이 공장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보상이 없음에도 자발적으로 신발을 만드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학문은 보상 동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근원적 동기가 더욱 중요하다. 과학자들은 실험이나 학술 토론 등의 연구 과정에서 생기는 중요한 의문점이 있으면, 보상이 있든 없든 그 의문점을 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실제 과학의 많은 중요한 결과들은 보상과 직결되었거나 경쟁을 통한 생산성 향상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

아인슈타인이 경쟁력 향상으로, 아니면 0.01에 6만 원과 같은 금전적 보상 동기에 의하여 그 유명한 상대성 이론에 도달하게 되었을까? 오히려 그러한 금전적 동기나 경쟁 동기의 압력이 있었다면 그런 결과가 나왔을지 의심스럽다. 상대성 이론은 그가 특허청에 일하면서 남는 여유 시간에 공부하고 생각하여 얻은 것이다.

그는 그 결과를 내야만 주어지는 금전적 보상도 없었고, 업적 평가도 없었으며, 또 누구와 경쟁을 해서 이겨야 되는 압력도 없었다. 그의 연구는 경쟁이나 돈이라는 외부의 압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근원적 동기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더 흥미를 갖고 더 깊게 사고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 유전자 법칙의 비밀의 문을 연 멘델, 미적분학의 뉴턴과 같은 저명한 과학자들에게 6만 원의 압력 아래 공부하고 연구하라 했으면 그런 결과를 낼 수 있었을까?

ⓒ프레시안(허환주)

6만 원의 비애

학문적 중요한 결과는 많은 실패와 긴 시간을 거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기계에 동전을 넣을 때마다 커피 한 잔 나오듯이 일대일로 대응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생각을 거치고, 어떤 분야는 많은 실험을 해야 하는 데, 종종 실패로 돌아가기도 한다. 결과가 평점 0.01이 올라가듯이 물건 하나 팔면 파는 대로 이익이 나는 것처럼 되는 것이 아니다.

0.01에 6만 원이라는 보상의 지나친 강조는 학문을 시험 성적이라는 일차원적 숫자로 평가할 수 있다는 오해를 갖게 할 수 있다. 시험에 의한 평가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학문의 여러 다양한 부분은 시험으로 다 평가할 수 없다. 그리고 과학자의 '경쟁력 향상'을 공장에서 개당 6만 원이라는 동기 부여를 하면서 물건을 하나 더 만들어서 이윤을 늘리는 것과 동일시해서는 곤란하다. 그리고 한국의 과학 영재들이 개당 6만 원과 같은 보상 동기에 의한 교육으로는 진정한 과학자의 자질을 배우기보다 단기 이윤에 집중하는 사업가 자질을 배우게 될 것이다.

보상 동기가 주는 부정적 효과는 첫째, 과학자들에게 필요한 학문에 대한 근원적 동기를 잃게 한다는 점이다. 즉 보상 동기로 인해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 얻는 흥미를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있는 흥미마저 없앤다는 것이다. 보상의 강조로 학문은 그냥 하고 싶거나 자신의 내적 동기에 의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배우게 한다. 학문이 하기 싫은 것으로 전락해서 실적에 따라 돈이나 등수로 보상해야 하고, 또는 실적이 떨어지고 업적 평가가 낮아질까 두려워서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가능성이 높은 한국의 영재들이 독창적이고 획기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는 과학자로 크기를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둘째, 보상 동기에 의한 연구나 학업의 실적 평가는 결과를 강조하게 되며, 결과의 지나친 강조는 주위 사람들을 결과를 얻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킨다. 학점 평가에 의한 지나친 압력을 받는 학생들은 교수들로부터 받는 학점에 과도한 신경을 쓰게 된다. 그래서 교수들의 강의나 개인적 접촉으로부터, 학문하는 방법을 배우고 그들을 존경하고 유대를 맺으며, 미래의 자신의 삶에 대한 긍정적 영향들을 받기 어렵게 된다.

교수들 역시 연구 결과에 따른 업적 평가로부터 압력을 많이 받게 되면, 자신의 업적에 도움에 되는지 방해가 되는지에 따라 판단하여 학생들을 도구로 여길 수 있다. 그래서 박사 과정이나 석사 과정 학생들을 공동의 연구 분야에서 일하게 될 가족과 같이 대하거나 미래의 동료로서 대하는 여유를 잃게 될 것이다. 경쟁으로 인한 지나친 결과의 강조로 학생과 교수들의 관계는 사제지간의 정, 보살핌, 존경과 같은 것으로 유대가 맺어지기 보다는 서로의 이용가치와 권위, 복종의 관계로 전락하기 쉽다.
과학자들의 자살

학생들뿐만 아니라 한국의 유명한 과학자들도 자살한다는 소식이 빈번하다. 차등화나 경쟁 강화에 따른 정신적 압력 때문에 일어나는 희생은 학생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많은 교수들은 업적을 내야하는 강한 압박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들은 많은 연구비를 받아야 하고, 좋은 연구 결과를 내서 많은 논문을 발표해야 한다.

이제 교수들에게는 학생들과의 관계에서 학생들의 학문적 발전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필요한 도움을 준다거나, 그들을 인간적으로 대하고, 그들의 모범이 되어 과학자로서의 삶이 얼마나 보람된 것인가 하는 희망을 줄 시간도 여력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그러한 것들은 업적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업적 위주의 평가가 강조되는 상황에서 낭비가 되고 사치가 된다. 혹독한 성과 위주의 경쟁 상황에서 시간과 여유가 있으면 연구비를 더 따도록 노력해야 하고 논문을 하나 더 써야 하도록 압력을 받는다.장래가 촉망되는 또는 많은 업적을 달성한 학계의 권위자들도 자살을 한다. 어느 대학의 물리학 교수는 "큰 논문을 내야 하는데 힘이 든다. 가족과 학생들에게 미안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그는 2003년 한국물리학회 학술상과 2006년 한국과학상을 받은 초전도 분야의 국내 최고 권위자라고 한다. 그리고 한국 최고의 반도체 기업의 부사장이 업무로 인한 부담감을 호소하며 자살했다. 그는 반도체 부문의 세계적 권위자였다고 한다.

오진탁 한림대 생사학연구소 소장은 "우리 사회가 글로벌 경쟁력을 강조하고 있지만, 현실은 국제적 능력을 갖춘 권위자까지 자살로 내몰 정도로 가혹하다. 경쟁과 실적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각계 권위자 잇단 자살은 '경쟁사회의 그림자', <연합뉴스> 2010년 2월 26일자)

그리고 또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경쟁 사회로 빠르게 변하면서 업적 중심의 평가 경향이 강해졌다"며 "승자만 인정받는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우수한 실적을 내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각계 권위자들 잇단 자살…'1등만 기억하는 세상'의 비극, <국민일보> 2010년 2월 27일자)

한국의 영재들 그리고 권위를 인정받는 과학자들도 혹독한 경쟁 위주의 사회의 희생자가 되어 간다. 자살한 사람들 뒤에는 정신적 압박으로 고통 받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업적 평가에 이들의 고통은 포함되지 않는다. 고통뿐만 아니라 이들이 업적 달성을 위해 지불하는 비용이 있다. 학점으로 평가되지는 않지만 과학도로 배우고 성장하는데 중요한 것들, 그리고 업적으로 평가되지는 않지만 과학자로서 연구와 삶에 중요한 것들, 그리고 교수와 제자들 간에 여러 소중한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 업적 평가의 지나친 강조 때문에 여러 가지 소중한 것들을 잃지는 않는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한국의 학교들도 순위 경쟁이 치열하다. 교수들의 연구 논문 발표 편수나 학생들의 학습 실적 등에 따라 한국 내의 대학뿐만 아니라 세계의 대학들과 경쟁을 한다. 매해 그 순위가 발표되고 각 학교들은 그 순위를 올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학교의 의사 결정권자들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이러한 순위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그들 역시 순위 경쟁에 시달린다. 학교 순위를 올리기 위해서 그들은 학교 교수나 학생들에 대한 업적 평가를 도입하여 실적을 올리도록 독려한다.

여기서 경쟁과 실적에 따라 더 좋은 대우를 받는 사람도 있지만 도태되는 사람도 있다. 도태에 대한 두려움은 도태되지 않은 사람들도 갖게 된다. 학교 순위 계산에 학생이나 교수가 받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마이너스로 넣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이 겪는 정신적 스트레스는 학교 순위에 계산되지 않기 때문에 종종 무시되곤 한다. 그러나 이제 순위에만 집착하지 말고 학생과 교수가 겪는 고통도 고려해야 한다. 학생, 학부모, 교수 그리로 학교의 의사 결정권자들 모두 그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해야 할 때다.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에는 프린스턴고등연구소(Institute for Advanced Study)라는 연구 기관이 있다. 이곳은 이론 중심의 연구소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과학자들이 자신이 하고자 하는 연구를 자유롭게 하는 곳이다. 강의의 부담도 없고 논문의 발표에 따라 연구 실적 점수를 매기는 규정도 없다. 아인슈타인 역시 이 연구소에 있었다.

세계의 다른 연구소들이 이 연구소의 모델을 따라 만들기도 했다. 그러면 이 연구소는 왜 경쟁력 향상을 위해서 연구 결과에 따르는 업적 평가에 의한 보상 제도를 도입하지 않았을까? 그들이 경쟁 강화를 통한 생산성(?) 향상을 이해하지 못해서일까? 과도하게 경쟁을 강화하는 한국의 학교나 연구기관에 이 연구소가 시사하는 것이 크다고 하겠다.

한국의 미래 아인슈타인들은 눈앞에 보이는 개당 6만 원이라는 기업의 이윤 극대화에 적용되는 보상(벌금)과 같은 것으로 운영되는 근시안적 교육 제도 아래 성장한다. 이러한 교육은 과학도를 키우는 교육에서 실패하고, 또 정신적 스트레스 증가로 인성 교육에도 실패하여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칠 수 있다.

업적 위주의 환경 아래서는 과학계에 큰 업적을 이루는 독창적인 연구는 위험 부담이 크기 때문에 기피하게 되고 단기 업적에 급급하고 업적 평가에 스트레스를 받아 불안해 하는 과학자로 성장하기 쉽다. 한 과학자가 새로운 아이이어를 시험해보고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위험 부담을 감수하는 용기는 단기 업적 위주의 사회에서 기대하기는 힘들다. 실패할지도 모르고 긴 시간의 연구가 필요한 큰 계획을 받아주는 시스템이 없으면, 개인 과학자가 그러한 모험을 하기는 힘들 것이다.

영재들과 유능한 과학자들이 안정된 환경에서 배우고 연구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주고 기다리는 인내심이 필요하며, 순위에 집착하여 그들에게 무리한 압력을 주는 업적 평가는 지양해야 할 것이다. 단기 실적 위주의 교육 과정을 거치는 동안 한국의 미래의 아인슈타인들이 개당 6만 원에 얽매여 불안한 과학자로 전락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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