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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손에 피 묻히는 일? 다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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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손에 피 묻히는 일? 다를 수도 있다!

[변방의 사색] 박상훈의 <정치의 발견>

나는 '변방의 사색' 첫 번째 글에서 정치학자 최장집의 민주주의론에 대해 말했다. 그 글에는 몇 개의 댓글이 달리기도 했는데, 그 중에는 '경솔하다', '함량 미달이다', '최장집을 다시 읽어보라'는 식의 비난도 있었다. 내가 보기엔 최장집이 한국 정치를 향해 그렇게 복잡한 이야기를 해온 것 같지는 않은데, 여기저기서 '오해'하고 있다고들 하니 의아했다.

기실, 내 글도 그리 꼼꼼한 편은 못 되었고, 원론적인 입장만을 선언하는데 그쳤던 터라 보론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최장집의 후학이자 학문적 동반자이기도 한 정치학자 박상훈이 <정치의 발견>(폴리테이아 펴냄)을 출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다시 오독이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 꼼꼼하게 정리하며 읽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남는다.

▲ <정치의 발견>(박상훈 지음, 폴리테이아 펴냄). ⓒ폴리테이아
자신이 강조하는 가치의 긍정적 측면과 비판하려는 대상의 부정적인 측면만을 대조시키는 단선적인 도식이 우선 눈에 띄었다. 후반부 4~5강에서는 앞서 1~3강에서 강조된 주장들이 여러 차례 반복되면서 긴장감이 떨어진 것도 아쉬운 대목이다.

하지만 이 책은 여러 가지 미덕을 갖췄다. 무엇보다 인간의 불완전함, 나약함을 긍정하면서도 인간의 삶의 조건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정치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읽는 이에게 불어 넣어주는 데에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특히 진보 정치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권할 만하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박상훈이 말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몇 가지 원론적인 전제들에 다른 생각을 갖고 있고, 이 책에 대한 서평을 빌미로 기왕에 최장집의 민주주의론에 대해 이야기한 것에 덧붙여 몇 마디 더 진전된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다.

문제는 현대 민주주의의 척도 그 자체

최장집과 박상훈의 한국 정치에 대한 분석이 높은 현실적 설명력을 갖고 있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들의 학문적 성과이겠지만, 그것은 일차적으로 그들이 오늘날 정치 현실에서 '실제로' 통용되는 뚜렷한 현실적 척도(대의제와 정당)로써 한국의 민주주의를 분석하고 있는 것에 연원한다.

최장집과 박상훈에게 문제시되는 것은 이 척도(arche)가 한국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지, 척도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그들이 구사하는 언어에는 '후퇴, 미성숙'과 같은 일정한 정상 상태를 전제한 개념들이 등장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 척도가 '전진'하고 '성숙'해짐으로써 의미 있게 작동되는 것일 뿐이다.

물론, 그들의 고뇌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수십 년 이래 여전히 피폐하고, 갈수록 뚜렷해지는 사회·경제적 균열은 현실 정치에 반영되지 않는다. 견디지 못한 대중들은 격렬한 운동으로 분노를 분출하지만, 이내 사그라지고 만다. 그렇게 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며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보수의 재집권이 유력한 것을 보면 박상훈이 한국 정치를 두고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 없이 격렬하기만 한 불모의 흥분 상태"라고 통탄해하는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 대목에서 나는 철학자 고병권의 입론에 기대어 이 척도의 타당성에 대해 의심해볼 것을 제안한다. 이를테면, 여학생들이 촛불 집회를 조직하고, 시민들이 광장에 '난입'하는 사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사정위원회 회의장에 '난입'하고, 청소 용역 노동자들이 정치인이 아니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일반 시민들과 직접 연대하는 현상을 한번 생각해보자.

물론, 박상훈은 운동을 통해서는 복잡한 사안들을 다룰 수 없으므로 이런 갈등이 결국 정당을 통해 제도화되어야 하며, 운동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에게 '난입'은 제도화된 민주주의가 운동으로 퇴행한 징표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난입'은 정당과 대의제라는 "척도가 한계를 드러내는 곳에서 도래하는 민주주의"(고병권)의 한 구현인 것이다.

만약 한국의 민주주의가 퇴행하고 있는 것이라면, 정당과 대의제가 피폐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정당과 대의제로써 풀어낼 수 없는 문제들이 등장하고 있음에도 다른 정치적 가능성의 공간이 마련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필요한 것은 문제적 상황을 척도에 맞추어 바로잡거나 척도로써 수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척도 자체가 온당한 것인지를 점검하고 의심하는 일이다.

박상훈은 좋든 싫든, 대의제 민주주의가 유일무이한 현실이며,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평등의 기제라는 전제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굉장히 안타까웠던 것은, 박상훈이 직접 민주주의를 그저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라는 작은 도시 국가에서 200년 정도 지속되다 사라졌으며, 한 번도 재연된 적 없고 앞으로도 재연될 가능성이 없는 역사적 에피소드로 치부하고 마는 것이었다. 그는 직접 민주주의를 두고 '현실이 될 수 없는 낭만적인 정치관'일 뿐이라고 분명하게 못을 박고 있다.

간디는 어디선가, "역사책에는 전쟁에 대한 기록밖에 없지만, 비폭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지금 우리가 전멸하지 않고 살아있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전쟁 따위의 폭력의 시간보다 훨씬 길었던, 일상적인 비폭력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인민이 직접 자신의 삶의 문제를 기율할 수 있는 영역은 비록 왕조의 전제적 지배가 작동하는 곳일지라도 토착적 삶이 가능했던 어디에서든 공기처럼 존재했다. 이들 사회에서 정치는 경제가 그러했듯 특수한 영역으로 사회로부터 분리되지 않았고, 사회에 착근되어 있었다. 민주주의는 마을 공동체와 구성원들의 일상을 기율하는 정치의 일반 형식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려는 욕구, 할 수만 있다면 그 자유의 영역을 넓혀가려는 충동은 인간의 뿌리 깊은 본능이다. 요컨대, 촛불 시민들이 그러했고, 지금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러하며, 지금 서남아시아에서, 세계 어디서든 흥분된 민중들이 직접 행동으로써 실천하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의 발전과 퇴행의 도상에서 벌어지는 진자 운동이 아니라 척도가 한계를 드러낸 곳에서 도래하는 민주주의를 향한 에로스의 분출인 것이다.

여담이지만, 2008년 늦은 봄부터 여름까지 내가 사는 밀양에서 두 달 넘게 지속된 촛불 집회는 내 삶을 많이 바꾸어 놓았다. 밀양이라는 극보수의 도시에서 익명의 존재로 살아가던 시민들이 마흔 차례가 넘는 정기적인 집회에서 만났고, 서로 친구가 되었다. 그 뒤로부터 우리는 지금까지 3년째 지역 운동을 이끌어오고 있다.

반복되는 지역 활동의 일과와 빈약한 우리의 대오 속에서 언제나 의기소침해있던 나에게 이들과의 만남은 신천지의 발견과도 같았다. 몇 년 사이 우리는 거의 한 식구처럼 어울리게 되었고, 여러 모색과 공부 끝에 생활협동조합과 공부방을 시작하게 되었다.

작년부터는 기금을 모아 번듯한 공간을 열어 많은 소모임을 열었고, 지역 현안들에도 개입하고 있다. 박상훈이 주장하듯 운동만으로는 현안을 풀어내지 못하지만, 우리에게 운동은 단결과 조직화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고 무엇보다 나 자신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한나 아렌트는 "정치 행위는 연극적인 데가 있어서, 정치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배우의 페르소나가 바뀌기도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나에게 일어난 변화는 박상훈이 말한 바 "투표의 질을 높이기 위한" 활동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정치의 '규모'와 '한계'에 대한 사유

나는 박상훈이 이 책 전편에서 강조하고 있는 정치의 놀라운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아니, 적극적으로 찬동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치 활동이 이루어지는 '규모'와 그것의 '한계'에 대한 사유라고 생각한다. 사상가 이반 일리치는 이 점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일리치는 산업의 규모와 성장의 한계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오늘날 정치 체제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여기서 나는 인간 삶의 다차원적 균형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균형의 차원에서 자연스러운 규모가 규명된다. 산업이 이 자연적 규모를 넘어서는 정도로 성장하면 먼저 그것이 애초에 고안된 목적을 좌절시키게 되며, 그 다음엔 체제를 빠르게 위협한다. 따라서 이 자연적 규모는 반드시 파악되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의 삶이 지속가능할 수 있는 인간 활동의 한계 역시 규명되어야 한다. 더 큰 성장이 환경을 적대적으로 만들 때, 구성원이 가진 자연스러운 능력을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도록 무력하게 만들 때, 구성원이 서로 고립되어 인공적인 껍질 안에 갇히게 될 때 (…) 사회는 파괴된다.

국가를 단위로 하는 대의제 정치는 역시 국가 단위를 무대로 하는 자본의 행방과 결부된다. 이 네트워크는 전 세계적인 규모로 연결된 자본의 행방과 자동적으로 결부되어 그 어떤 반정립의 에너지도 굴복시키고 만다. 박상훈은 이 책에서 자신의 참모와 정치 후배들에게 '정치하지 말라'고 괴로운 심정을 토로한 말년의 노무현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고 있지만, 나는 박상훈이 안타까워하는 만큼 그가 왜 이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예컨대, <진보의 미래>(동녘 펴냄)에서 한때 열정적인 노동운동가이기도 했던 그가 정리 해고 정책을 도입했던 심경을 토로한 대목을 보자.

노동 유연화를 왜 받아들였냐? 궁핍했어요. (…) 인건비가 갑자기 올라 버렸어요. 우리 한국 상품이 미국 백화점 진열대에서 전부 뒤로 밀린다 했고, 그마저 경쟁력이 없어서 뒤로 밀린다는 얘기가 나오고, 핵심인데, 대안이 없잖아? 대안이 없으니까 우리는 새로운 국가 전략으로 갈 수밖에 없었어요. 일자리, 일자리가 어디 있나? (…) 정리 해고를 거약할 방법이 없더라니까.

'정치하지 말라'는 노무현의 당부에는 음모와 배신, 술수가 난무하는 현실 정치에 대한 절망뿐 아니라 실제로 이 총체적인 체제의 장력 속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정치인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회한이 서려 있는 것이다. 박상훈이 이 책에서 수차례 예찬하고 있는 정치의 놀라운 가능성이 실제로 구현될 수 있는 '적정한 규모'는 어디가 될 것인지, 그것의 분명한 한계는 어떻게 규정될 수 있을지를 판단하는 것은 정치의 가능성에 대한 예찬보다 수백 배 중요한 것이다.

박상훈은 이 책에서 막스 베버를 인용하면서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위태로운 수단을 사용할 수도 있어야 하는 정치가의 운명"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정치가란 이런 윤리적 역설을 감당할 자신감과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을 '정치란 손에 피를 묻혀야 하는 일'이라고 읽었다.

노무현의 회고록을 읽다보면, 이라크 파병을 서술하던 대목에서, 특히 김선일의 죽음에서 눈에 띄게 문체가 수그러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노무현은 결국 '국익'과 한 시민의 '생명'을 거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박상훈은 사울 알린스키의 글을 빌려 정치 현실에서 갈등과 타협이 가지는 역동적인 의미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또한 중요한 것은 그 갈등과 타협의 '규모'인 것이다. 정치에서 타협은 다른 말로 거래인 것이다. 그리고 국가 단위의 정치 현실에서 그것은 평범한 거래일 수 없다. 반드시 누군가의 목숨이 걸려 있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거대 정치는 '국익'이라는 폭력적인 개념과 김선일이라는 한 개인의 '생명'과 같은 식으로 성립할 수도 없고 성립해서도 안 되는 선택항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결국, 지금 이 현실에서 의미 있는 변화란 이러한 갈등과 타협이 할 수 있는 한 작은 규모에서 이루어지도록 정치적 공간을 쪼개나감으로써 정치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 거래의 범위와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노력인 것이다. 다수의 지배를 위해서 누군가는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야 한다면, 어떻든 그 체제는 폭력의 체제로써 기능할 수밖에 없으며, 인민 주권의 실질적인 개체성은 구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다른 삶'의 형상이다

나는 왜 이런 글을 쓰는 것인가. 박상훈이 그러하듯 나 또한 보수보다는 진보에 더 큰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패러다임이 지나간 뒤에, '정당과 대의제 민주주의'라는 현실 정치의 척도 안으로 정치적 해석과 실천의 가능성을 사실상 가두어버리는 최장집, 박상훈 유의 논리가 진보의 상식으로 서서히 자리 잡아 가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은 20세기 초반이 그러하듯이 급격하게 변해갈 것으로 예측된다. 식량 공황, 에너지 고갈, 기후 변화와 같이 이 체제의 물적 기초 자체가 허물어지는 급격한 흐름 속에서 정치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대의제 체제를 통해 이런 문제에 대한 전환과 해결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나 나른하고 가망 없는 일로 여겨진다.

물론 나는 박상훈이 말하는 "투표의 가치를 높이는 행위"로써 기약할 수 있는 변화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갈급한 것은 "제대로 된 정당", "유의미한 선거"가 아니라 '다른 삶'의 형상이다. 지금 대안적 실천이 일구어낼 수 있는 공간은 주류의 시각에서 보면 한 줌도 되지 않겠지만, 이 체제가 지속 불가능하다는 것이 명백해질수록 '다른 삶' 형상은 하나의 모델로서 마른 종이에 불이 붙듯 번져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경제가 어려워질수록 파시즘 체제가 도래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박상훈은 더 더욱 정당 정치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실질적이고 강력한 반파시즘 투쟁은 바로 이러한 '대안적 삶의 공간을 확장하는 실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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