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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은 셋방만큼 깊은 곳, 만화가의 슬픈 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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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최고은 셋방만큼 깊은 곳, 만화가의 슬픈 습지

[철학자의 서재] 최규석의 <습지 생태 보고서>

만화계의 긴긴 암흑기

한국에서 만화는 시사, 비판, 계몽을 위주로 하던 성인 매체로 출발했으나 일제 강점기를 겪으며 탄압을 받아 명랑 만화 위주로 살아남게 되었다. 그 후 독재와 군부 정권을 거치며 '만화는 아이들만 보는 유치한 것'이라는 편견이 대중들에게 깊게 각인되었다. 이는 지금까지도 지속돼오고 있어 만화계의 많은 창작 노동자들을 괴롭힌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만화 시장 왜곡의 직접적 원인으로 가장 많이 지적되는 것은 '청소년 보호법'과 '대여점'이다. 1997년 청소년 보호법의 시행으로 촉발된 이른바 '만화 탄압 사태'로 수많은 작가들이 고통을 겪었고, 연재를 중단한 작품도 많았다. (청소년 보호법 제정 직후 최초로 실시된 유해 판정(1997년 7월 15일)으로 1700여 종에 달하는 만화가 '청소년 유해 매체'로 판정되었다. 이른바 '만화 탄압 사태'이다.)

또 IMF를 전후로 '도서 대여점'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많은 창작자들의 반발과 저작권 문제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이렇듯 만화는 정책적으로 가장 홀대받은 문화 사업 중 하나이다. 사실 홀대로 그친 것이 아니라 정부가 나서서 만화계의 숨을 옥죄었다고 봐야 더 정확할 것이다. 이러한 탄압에 계속 시들어가던 만화계는 일본 만화에 대부분의 자리를 내어주고 이윽고 불법 스캔 만화로 시장을 잠식당하면서 결국 고사 직전에 몰렸다.

물론 웹툰(web-toon)의 약진이 계속되면서 신진 작가들이 꾸준히 배출되고 있고, 출판도 이어지고 있다. 일본에서 활동하는 길을 모색하는 작가들도 많다. 하지만 전체 만화계가 그 정도로 부활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만화계는 아직도 암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창작 노동자 대부분이 '워킹 푸어'

우리나라 문화 산업 중에 그나마 '잘 나간다'고 알려진 영화계도 창작 노동자인 스태프들의 상황이 낫다 말하긴 힘들다. 널리 알려졌듯 몇몇 스타와 제작사만 배를 불리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영화 스태프의 2009년도 연평균 소득은 623만 원. 월급으로 치면 52만 원도 채 되지 않는다. 그들은 청춘을 바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성실히 일하지만 돈을 떼이기도 하고 계약 기간이 끝났음에도 추가 촬영이 결정되어 무보수로 일하기도 한다. 한마디로 그들은 제때 제몫을 받지 못한다. 가난하다.

얼마 전 유망하고 젊은 시나리오 작가가 지병과 생활고에 시달리다 결국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이야기는 곧 "남는 밥" 운운하는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로 흩뿌려졌다. 그러나 그녀는 영화계에 만연된 임금 체불과 그로 인한 생활고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투병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가 창작한 시나리오 5편은 제작사와 계약까지 했지만, 제작이 무산되어 돈을 받을 수 없었다. 그녀는 전형적인 '워킹 푸어(working poor)'였다.

고인(故人)과 대학을 같이 다녔던, 지금은 영화계를 떠난 친구가 있다. 그녀는 고인의 죽음을 접했을 때 "우습게도 눈물을 흘리기보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납득'을 먼저 했다"고 말했다. 또 "그렇게 죽어간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안도감"도 들었기 때문에 한동안 괴로웠다고 했다. 수많은 스태프들이 그렇듯 내 친구도 그 '빈곤함' 때문에 영화판을 떠났다.

그런데 스크린쿼터와 같은 제도도 없고, 노동조합도 없으며, 진흥법도 아직 제정되지 않은, 더군다나 그 예술성도 공인받지 못하고 있는, 만화계에 종사하는 창작 노동자들의 현실은 얼마나 더 암담할까?

습지에 서식하는 청춘들

▲ <습지 생태 보고서>(최규석 지음, 거북이북스 펴냄). ⓒ거북이북스
하지만 최규석의 만화 <습지 생태 보고서>(거북이북스 펴냄)는 현실을 암담하게 그리지만은 않는다. 주인공들은 20대의 만화학과 학생들인데, 대부분의 에피소드가 작가 자신의 경험담을 토대로 구성되어 작가와 작가 친구들의 실명이 등장한다. 창작 노동자가 되기를 희망하는 그들은 비가 오면 물에 잠기는 반 지하 단칸방에서 5명(4명은 사람, 1명은 사슴이다)이 자취를 하고 있다. 그들은 빈곤하고 궁상맞지만 의연하다. 작가는 이들을 '습지'에 모여 '서식'하고 있는 '하위 종'이라 설명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하위 종(種)의 남루함을 자랑으로 여기지는 않지만 딱히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어찌 보면 은근히 즐기는 듯도 한 뻔뻔함과 간혹…먹이사슬의 모순을 접할 때면 뒤에서나마 구시렁거릴 줄 아는 비판의식도 갖춘 편이다. 허나…전반적으로 일관된 서식 양태를 보여주는 듯하다가도 이종(異種)으로서의 의태(擬態)가 가능한 상황 하에서는 순간적으로 행동 양식이 돌변하기도 한다. 물론 티 난다." (1장 '의태')

최규석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습지 생태 보고서>도 처절함과 남루함,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담담함이 작품 전반에 흐른다. 그렇지만 다른 작품들보다 위트도 더 배치되어 있고 캐릭터도 더 궁상맞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욕망에 더 솔직하다.

그래, 창작 노동자들에게도 살아 날뛰는 욕망이 있다. 작가는 고상한 예술의 이름으로 덧칠된, 꿈이라는 이름으로 꾹꾹 눌러놓은 욕망을 굳이 숨기거나 피하려고 하지 않는다. <습지 생태 보고서>에는 친구들이 들어차 잘 곳이 없는 단칸방을 보며, 기필코 성공해서 "지평선이 생성되는 방에서 매일매일 천 바퀴씩 굴러다녀 줄 테다!"(14장 '안분지족' 중)라고 다짐하는 청춘이 있다.

"너도 좋은 집에서 멋진 차 타고, 스타일 죽이게 입고 폼 나게 살고 싶잖아!?"(23장 '뛰어 오른 적 없어!')라는 물음에 흔들리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청춘이 있다. 다른 이의 고통과 슬픔이 자신에게 전이될까 봐 도망가지만, 몇 걸음 못가 그에 죄책감을 느끼는 청춘이 있다. 데이트하다가도 아버지의 한 달 용돈은 4만 원임을 떠올리며, '이건 죄짓는 게 아니고 그저 남들 다하는 그냥 연애'라고 스스로에게 항변해야 하는 청춘이 있다.

작가는 이 청춘들의 욕망과 갈등을 비장하거나 참담하게만 그리지 않는다. 때로는 비꼬면서 때로는 애처롭게 바라보면서 토닥인다.

가난을 그리는 만화가

최규석은 김준일 (경향신문 문화부) 기자의 추천사에 쓰여 있는 것처럼 "항상 현실에 기반을 둔 만화를 그린다." 그리고 그의 만화는 항상 '가난한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하지만 그는 세스 토보크먼과 같이 급진적이고 저항적인 이야기를 하는 작가는 아니다. 민중의 삶을 그리고 있지만 무섭고 무거운 이야기를 정면에서 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그 삶을 비장하거나 참담한 것으로 그리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최규석은 어떤 상황에서도 '웃음'을 빼놓지 않으며, "팔이 잘려본 사람은 손가락 잘린 사람을 위로하지 못한다"(48장)고 하면서도, 손가락마저도 진지하게 바라보고 그려주는 작가이다. 이 점이 내가 최규석 만화, 특히 이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최규석은 "<습지 생태 보고서>를 접한 이들은 슬프다거나 괴롭다거나 '다 그런 거지'라는 식의 체념하는 듯한 반응을 보이곤 한다. 그러나 나의 원래 의도는 '일단 웃자'이다"라고 하면서, 때를 보고는 피가 나도록 때를 밀거나, 혹은 체념하여 목욕을 안 하는 것보다 "때의 더러움과 때가 언제나 몸에 붙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대수롭지 않게 그것을 씻어내는 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지듯이, 인간의 내면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그런 자세가 필요하지 않나"라고 말한다. 이성과 욕망의 충돌과 삶에 대한 작가 자신의 고민은 '인간은 원래 극단적이지 않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졌고, 이를 통해 "인간이 가진 때를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어야 그것을 벗겨낼 수 있다는 믿음"을 얻었다고 고백한다. 그 믿음에 기반을 둔 작품이 <습지 생태 보고서>라는 설명이다.

나는 그의 '일단 웃자'라는 말이 웃고 난 다음엔 한 번 진지하게 따져 묻겠다는 말로도 들린다. 책장을 덮고 나서도 지워지지 않는 그 습하고 궁상맞은 삶의 모습들, 그 씁쓸하고 비릿한 가난한 청춘들이 진정 "웃지 않고선 버틸 수가 없는"(5장 '칭찬은 고래 친구를 도발한다')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가상의 캐릭터인 '녹용'을 통해 독자에게 그리고 자신에게도 묻는다.

"자네 혹시 진실은 통한다고 믿는 거야?"(16장 '적자 인생')

그는 과연 어떤 대답을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베짱이가 굶어 죽는 세상이 과연 옳은 것일까?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토니 모리슨의 동화 <누가 승자일까요?>에 나오는 베짱이는 여름내 노동하던 개미에게 많은 위안을 주었고, 겨울이 되어 그 몫을 바랐지만 인정받지 못하고 쫓겨난다. 그러나 베짱이는 "예술이야 말로 일이야. 놀이처럼 보일 뿐이지"라며 당당함을 잃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나는 하고 싶지 않아도 먹고 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들보다 더 힘들다'는 논리 위에서 창작 노동자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오히려 창작 노동자들 대부분이 '워킹 푸어'로서 자본주의의 논리가 가장 비판 의식 없이 관철되는 문화 산업의 첨단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어쩌면 그들에겐 창작 노동을 꿈꾸는 그 자체가 투쟁일 것이다. 베짱이가 굶어죽는 세상이 과연 옳은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는가? 베짱이의 철없이 즐겁기만 했던 여름은 사실 개미의 관점 혹은 개미가 옳다는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우리는 단 한 번도 베짱이의 창작 노동, 정서 노동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베짱이의 가난에 대해 부당함을 느끼지도 않았다.

최규석은 책의 말미에 "지갑의 상태와 관계없이 하고 싶은 작업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에 "궁상 수준의 가난"을 꼭 고되고 힘들고 벗어나야만 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생활 방식으로 받아들인다고 썼다. 하지만 창작 노동자들에게는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는 가난"이 찾아오고 있다. 지갑의 상태와 관계없이 창작할 수 있는 기본적인, 말 그대로 정말 기본적인 제도와 여건이 마련되는 것이 시급하다. 특히나 만화계는 스크린쿼터와 같은 제도도 없고, 노동조합도 없고, 정부의 지원도 미약하다. 진흥법도 논의만 되고 있다. 만화계에는 보다 적극적인 '처방전'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걸까? 그것이 싫은 논리적인 이유를 백 가지는 더 댈 수 있는 세상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도망이 아닌…선택일 수는 없는 걸까? 패배할 것이 두려워서 출발선에 서기를 피하고 있는 걸까? 혹은 어른이 되는 날을 자꾸만 미루고 있는 것일까? 불안한 눈빛으로 친구의 연봉을 묻거나 부동산 정보를 뒤적거릴 어쩌면 슬플 그날에 한때는 이렇게 되지 않으려 노력했노라고 자위할 기억을 만들고 있는 것뿐일까? 세상 안으로 성큼 들어서지도 발을 빼지도 못한 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지금, 그래도 조금씩은 자라고 있는 것일까? 자기 안의 수많은 모순과 세상에의 두려움을 한가득 품고도 영문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기분 좋은 외침은…단지 어리석음 때문만은 아니겠지?"

마지막 장에 다다른 작가는 수줍게 희망을 이야기한다. 마지막 장 제목은 이렇다. '그렇겠지?' 나는 책을 덮을 때마다 속으로 크게 대답한다. "그럼!" 그리고 만화계의 부활을 바라며, 창작 노동자들이 정당한 대가를 받기를 바라는 아주 소박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대답하곤 한다. "그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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