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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요정ㆍ최고은…다시 비극을 반복할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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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요정ㆍ최고은…다시 비극을 반복할 텐가?

[기고] 음악인·작가들이 나서야 한다

원래는 지난 1월 29일 있었던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고(故) 이진원의 추모 공연 직전에 쓰려했던 글이었으나, 아직 많은 이들이 애도하고 있는 와중 '정치적'인 글을 내놓는 것도 부담스럽고 해서 잠시 접어두었다. 그러다 얼마 전, 지병과 생활고로 인해 전도유망했던 신예 감독/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이 요절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나는 비로소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중 하나가 미루어두었던 이 글을 완성하는 것이란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물론 지금 이 시점에서도 나는 조심스러워야 한다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아직 그 둘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까닭에서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언제 애도가 완성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과연 그것은 '때'가 되면 완성되는 것인가?). 오히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애도에 대해 우리가 섣부르게 쓸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에 괄호를 친 다음 작금의 상황을 주시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최고은도 염두에 두고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론 한 사람의 음악가로서 '음악계'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쓰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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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원의 요절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애도를 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애도하는 마음을 한쪽에 가지런히 접어두고서, 내게 가장 먼저 당도한 질문은 이것이었다. 이진원의 요절에 대한 대중들의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맞을지 모르겠으나) 실로 폭발적인 반응은 내게는 조금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마 이에 대한 통상적인 답변은 "생전에 그의 음악을 많은 이들이 사랑했기 때문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일례로 이진원의 동생 이진민은 달빛요정의 홈페이지 게시판에 '양은주'라는 이름의 유저가 올린 "추모공연과 홍대 청소 노동자 분… 연대하면 어떨까요…"라는 게시물에 "유족으로서 제 짧은 생각은 이번 추모 공연은 단일 성격을 갖고 진행하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라는 요지의 댓글을 달았다. 물론 그것은 유족-가족으로서 할 수 있는, 해야 할 말이기에 우리는 그녀를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진민이 댓글을 다는 중 이렇게도 썼다는 사실이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젊은이가 아니라 짧은 시간,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음악을 하면서 행복해했던 미남 청년을 기억해주셨음 좋겠습니다." 여기서 이진민이 애써 부인하고자 하는 것은 '생활고에 시달리다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젊은이'로서의 이진원이다. 그러나 그것을 굳이 부인하고 있다는 그 이유 때문에라도 우리는 이진민이 그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주제넘게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확실히 '그것'은 우리가 이진원의 죽음을 애도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뉴시스

여기서 이를테면 이진원이 실제로 얼마나 가난한 생활을 하였는가, 최고은이 굶주림으로 죽은 것인가, 아니면 병으로 죽은 것인가를 따지는 것은 진정한 추문이다. 우리는 정확한 사실에 대해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대신 우리가 따져야할 것은 '(두 죽음에 관련하여) 걸려 있는 진짜 문제가 무엇인가?'이다. 이진원이 미남 청년이었건, 가난한 음악가였건 그것은 이미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것은 '그 이후'의 상황들이다. 만약 이진원과 최고은의 죽음에 얽힌 가난함이라든지, 병이라는 것들이 실제로 전혀 그렇지 않다 밝혀진다 한들 수많은 음악가/예술인들이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 처해있다는 현실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이진원, 최고은이라는 개개인의 삶과 '이진원/최고은이라는 계기'를 분리해내야만 한다. 각각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이진원, 최고은은 애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진원/최고은이라는 계기'는 지금 바로 이 시점에 가장 유의미한 '정치적인 것'의 고유명이다. 그러한 계기를 통해 그동안 사회의 담론장에서 배제되어 왔던 음악가/예술인들의 '생계'라는 문제가 표면 위로 올라왔다는 사실은 분명한 자리이동, 그 자체로 '정치적인' 행위이자 숙고되어야 할 대상이다. 그렇다면 '이진원/최고은이라는 계기'를 갓 지난 이 시점, 지금 우리는 이를 질문해야하지 않는가?

"작금의 상황에서 (정치, 사회 혹은 '생계'를 완전히 배제한) 순수-음악 또는 순수-예술을 논함이란 그 자체로 자신이 게으르다는 것을 증명함에 다름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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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원의 갑작스런 죽음에 많은 이들이 슬픔에 잠겨있던 지난 1월 19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상상마당'에서는 민주당 최문순 의원실과 문화연대의 주재로 '한국 인디음악의 미래는 있는가 - 자생적인 음악 시장 만들기 위한 대안 찾기'라는 토론회가 열렸다. 발제자는 대중음악평론가 김작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이동연 교수, 토론자로는 레이블 일렉트릭뮤즈 김민규 대표, 민주당 최문순 국회의원, 진보신당 이재영 정책위원회 의장, <한국방송> '음악창고' 박권일 음악감독, 대중음악평론가 서정민갑, 그리고 밴드 와이낫의 전상규가 참여하고 있었으며 나는 관객 중 한명이었다. <프레시안>의 기사(☞바로 가기)에 각 발제자 및 토론자의 발언이 잘 정리되어 있으니 참조하길 바란다.

토론회를 보면서 내내 머릿속에 하나의 의문이 맴돌았다. '공정한 시장이 도입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가?' 김민규 대표와 이재영 의장, 그리고 서정민갑 평론가의 일부 발언을 제외하고선 다른 발제/토론자들의 논의는 대체로 '공정한 시장을 만들자'는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질 않고 있었다. 불합리한 유통구조의 문제를 지적한 최문순 의원, "<한국방송>에서 장애인 등 소수자에 대한 공익적 프로그램의 제작·방영이 강제되어 있는 것처럼 인디 음악에 대한 지원도 제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며 '마이너 쿼터제'와 유사한 제도를 제안한 서정민갑 평론가, 공중파 예능국과 메이저 기획사의 카르텔에 대해 지적한 박권일 음악감독의 주장과 의견들에 대해선, 물론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확실히 '공정한 시장'이 도입된다면 인디 씬에서도 경쟁력을 갖춘 스타들이 탄생할 가능성도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인가? 그렇다면 매스미디어에 어울리는 상품성을 갖추지 못한, 또는 갖추고 싶어하지 않는 많은 인디 음악가들의 생계는? (우리는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음악가들이 상품성을 갖추는 것을 꼭 제 1의 목표로 놓고 있지 않음을 상기해야 한다. 그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은 시장에서 음악을 파는 것과는 상관없이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공정한 시장'이 도입된다 해도 상품성을 갖추지 못한, 또는 갖추고 싶어 하지 않는 이들의 경우 생계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을 것이라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추론이다. 오히려 실용음악과가 다수 개설되어 전문 인력이 늘어난―하지만 꼭 그런 이유에서 공급과 소비의 불균형이 심해지고 있는―작금의 시점에서 '공정한 시장'이라는 이념은 인디 씬보다는 대중음악 씬 전반의 문제로서 제기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해 보인다.

한편 일렉트릭 뮤즈의 김민규 대표, 진보신당의 이재영 정책위원회 의장은 '국가/사회의 역할'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발언했으며 서정민갑 평론가 역시 그에 대해 강하게 언급했다. 김민규 대표는 "개별 뮤지션들이 음악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기본적인 생활 보장이 먼저일 것"이라며 "1) 음악 교육·앨범 녹음 지원을 담당하는 지역 단위의 창작의 거점 마련 2) 기존의 '하향' 방식이 아닌 인디 음악인들 사이에서 나온 기획을 행정부처로 전달 가능하게 하는 관련 재단 등 루트 마련 3) 인디 음악을 더 많이 노출시킬 수 있는 매체 인프라 마련"에 대해, 이재영 의장은 "독립 문화를 지원하는 예산 자체의 확충"과 "인디 뮤지션과 같은 불안정 노동자들에게 실업 급여 조건을 완화해주는 제도"에 대해 이야기 했다.

내게는 앞서의 논자들과 김민규 대표, 이재영 의장의 관심이 근본적으로 다른 곳에 있는 듯 보였는데, 앞서의 논자들이 '공정한 시장의 도입'을 촉구하고 있다면 김민규 대표는 시장 진입 이전의 제작-생산 단계를 어떻게 공적으로 지원할 것인가를 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민규 대표의 인식에서 흥미로웠던 점은 음악을 교육하고 생산하는 행위 그 자체가 사회의 구성원들과 두루 관계된다는 것을 전제로 두었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사회에서는 공공적으로 음악 교육과 생산을 지원할 이유가 없다.) 한국적인 상황에서 교육이 공적 영역에 속한다는 것은 대개의 상식이다. 그러나 음악이 공적 영역에 속한다는 주장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한편으로 그가 이재영 의장과 함께 음악가들의 "기본적인 생활 보장"과 "실업 급여 조건 완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김민규 대표, 이재영 의장의 인식은 근본적으로 '공정한 시장'이 도입된다 해도 음악가 대부분의 생계는 여전히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을 공유하고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데, 현재 인디 씬에서 활동하고 있는 음악가들이 꼭 "시장에서 팔릴 수 있는 형태의 '콘텐츠'를 제작하는 것"을 지향하고 있진 않기 때문이며, 또 현실적으로는 메이저 기획사에서 투여하는 만큼 물적 자본을 투자할 여력이 없으므로 매스미디어에 적합한 형태의 '콘텐츠'를 만드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공정한 시장의 도입'으로 형편이 다소 나아질 수는 있겠고 그렇기에 '공정한 시장'은 분명 추구해야할 가치이겠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으로선 부적절하다 볼 수 있다.

▲ '한국 인디음악의 미래는 있는가 : 자생적인 음악 시장을 만들기 위한 대안 찾기' 토론회.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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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음악가의 생계 문제에 있어 더욱 나은 해결책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제시할 수 있을까? 그에 앞서 나는 음악가와 사회의 관계에 대하여 명료하게 정의할 필요성을 느낀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원점에서 질문해보아야 한다. "음악가와 사회 혹은 음악과 사회는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사회에 대해, 음악이란 무엇입니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해 크게 두 갈래의 답이 나올 수 있다 생각한다. 하나, 사회에 있어 음악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른 하나, 사회에 있어 음악은 꼭 필요한 것이다. 나는 음악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어떤 관점이건 이 둘 중 한쪽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 생각한다. 전자의 경우에서 음악과 사회는 큰 관련이 없는 까닭에 서로가 어찌 되든 별 상관이 없다. 후자의 경우에서 음악과 사회는 서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서로에게 지속적으로 상관해야 한다. 나는 이미 전자의 관점을 특히 현 상황에서는 지극히 게으른 관점이라 공격한 바 있다. 그렇다면 후자는? 나로선 사실 이 역시 주저된다. 자칫 사회가 음악에게 '사회적 효용'을 요구할 수도 있는 까닭에서다. 나는 음악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음악에겐 사회의 논리와는 다른, 나름의 자율적인 논리가 있다는 것, 즉 음악은 자율적이라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할 때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손택의 다음과 같은 언명이다.

"…이 활동들은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활동이거나, 아예 정당화 자체가 필요 없는 활동이다. 예술작품은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어떤 것을 보여주거나 이해시켜주는 것이지, 판단하거나 일반화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음악이란 것이, 사회의 입장에선 보았을 땐 정말로 순수-잉여 이상 이하도 아니다, 라고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멀리갈 필요도 없이, 자신이 음악을 감상하는 것이 사회와 자신에게 과연 어떤 도움이 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쉽다.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현실적으론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다.)

그렇다면 음악은 사회로부터 정당화될 필요가 없으므로 공적인 지원을 받을 이유가 없다, 라고 우리는 말해야 하는가? 이 글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이 곳이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분리'를 수행해야 한다. 바로 '음악'과 '음악가'의 분리. 조금 더 세밀하게 말하자면 '순수-음악'과 '사회 구성원으로서/생활인으로서/경제인으로서의 음악가'의 분리. 음악은 자율적인 예술의 영역일 수 있다. 음악에게는 음악의 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음악가도 음악의 길을 걸을 수 있는가? 나는 아니라 생각한다. 음악에게는 그 자체로 정당화될 필요가 없으며 화폐를 재생산할 이유도 없으나 음악가는 여러 수단과 방법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재생산하여 생계를 해결하고 목숨을 부지해야 한다. 음악의 첫 번째 목표가 상품으로서 화폐와의 교환가능성을 높이는 것은 아닐 수 있으나 음악가에게 화폐를 구하여 자신을 재생산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가? 역사상 대부분의 음악가들은 이 모순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으려 노력해왔다. 그러나 또 다른 길을 제안해볼 수는 없을까? 요컨대 내가 이 지점에서 고려하고 있는 것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생계를 조건 없이 생계를 유지할 만큼 소득을 주는 제도' 즉 '기본소득'이라는 제도다.

단순히 예술가 연하는 발상에서 기본소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 굳이 음악을 위악적인 언사로 순수-잉여라 표현했던 까닭은 대부분의 음악가들이 사회적인 관점에선 크게 의미 없는 음악이라는 분야에 매달리고 있는 처지가 일정한 직업이 없이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는 계층, 자신의 집을 갖지 못하고 이리저리 셋방을 옮겨 다니며 주거 불안정을 겪고 있는 계층, 직장이 있더라도 비정규직으로 언제 회사에서 잘릴지 알 수 없는, 이른바 프레카리아트(불안정 노동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쓰레기가 되는 삶들> 에서 적절하게 지적했듯 우리는 우리 사회가 너무 많은 것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동시에 또한 너무 많은 것을―심지어 인간까지도―잉여/쓰레기 전락시키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다시 '이진원/최고은이라는 계기'로 돌아가, 우리가 두 죽음에 대해 정말로 분노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이 전도유망한 음악가였고 영화인이었기 때문이었나?

▲ 고 최고은 씨.
얼마 전 <경향신문>의 논설위원 이대근은 '우리는 조용히 죽어가고 있다'(☞바로 가기)라는 비통한 제목을 단 칼럼에서 "<시크릿 가든>의 작가도 밥과 김치가 없었던 최고은처럼 반 지하 방에서 사흘간 과자 한 봉지로 버틴 적이 있다고 했다. 다행히 그는 가난에서 탈출했지만 그의 성공이 그의 가난과 굶주림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그가 비운 자리를 다른 사람, 가령 최고은 같은 이가 물려받는다면 그의 예외적인 성공을 공유하기는 어렵다"고 썼다. 우리에게 가장 급선무인 것은 성공하지 못할 대부분의 삶에 대해, 어떻게든 실패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개개인의 생계를 더 이상 개개인의 문제가 아닌 공적인 과제로서, 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권리로서 생계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기본소득의 문제의식은 적실하다. 기본소득의 구상 속에서 음악가/예술가는 그의 작업이 사회적으로 의미있건 그렇지 않건 간에 생계를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음악가/예술가는 음악가/예술가이기 이전에 사회의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기본소득 외의 선택지들도 있다. 이를테면 진보신당의 홍원표 정책위원이 모델로 제시한 프랑스의 '앙떼르미땅 제도(☞바로 가기)'도 주목할 만 하다. "문화예술 분야의 직업인들에게" "연중 507시간 이상 유급으로 계약에 근거해, 일했다는 증거만 있으면 … 일이 없는 시기에도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게 하는 제도로서 이를 사회 활동에 대한 최소한의 참여 의무를 부과하는 참여소득(participation income)의 일종이라 볼 수도 있겠다. 한편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난 2월 17일 진행한 '2011 예술정책 대국민 업무 보고회'에서 쏟아졌던 '예술인 복지법', '기초 창작 인프라', '조기교육 시스템' 등의 요구에 대해서도 점검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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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론적으로 나는 '음악'과 '정치'는 큰 관련이 없다 생각한다. 그러나 '음악가'와 '정치'는 국면에 따라 밀접하게 관련 있을 수 있다 생각한다. 그리고 '이진원이라는 계기'를 방금 통과해온 지금의 국면이, 말하자면 그 국면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국면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한국 인디음악의 미래는 있는가 - 자생적인 음악 시장 만들기 위한 대안 찾기' 토론회가 끝나갈 무렵, 최문순 의원은 "오늘 제기된 문제들은 음악인들의 활동력을 기반으로 해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 발언했다. 이때 나는 다소 양가적인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어찌 되었건 최문순 의원은 음악계의 내부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해당 산업의 종사자들, 이를테면 음악가나 레이블 대표, 평론가 등이 '음악인들의 활동력'에 대해 언급할 수 쉽게 없었던 것은 '(각양각색의) 음악인들을 단일한 기치 아래 모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했다. 그에 대한 우려였는지 서정민갑 평론가가 "'단일한 통로'로 발언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을 때 김민규 대표는 "문제 제기가 오히려 많은 갈래로 이루어져야 한다"라 반박했다. 그러나 우리는 김민규 대표가 공공적인 창작 인프라 마련, 보다 유연한 행정부서, 기본적인 생활보장 등에 대해 대체로 적절한 의견을 내놓고 있음에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즉 변화에 있어 구체적인 이행의 경로를 제시하는 데 있어선 뚜렷한 대안을 말하고 있지 못함을 지적해야 한다. 서정민갑 평론가의 '단일한 통로'라는 표현은 그것이 무척 낮은 수준의 합의라 해도 사회에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을 만큼의 '실질적인 정치적 영향력의 확보'가 중요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사회에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기 위해선 질적인 측면, 그리고 양적인 측면 모두에서 적잖은 조직력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가장 처음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최소한의 합의'이다. 이러한 합의는 물론 자신의 예술 콘텐츠를 파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어 아르바이트 등을 병행하며 삶을 살아가는 프레카리아트화 된 음악가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나가야겠지만 가급적이면 더욱 많은 이들―이를테면 장래 전업 음악가를 지향하고 있는 학생/지망생, 경제적으로는 다소 나은 사정이지만 같은 뜻을 공유할 수 있는 음악가, 한국의 언더그라운드/로컬 씬에 관련 있는/관심 있는 많은 이들―과 함께 할수록 더욱 좋다고, 또한 '음악가/예술가를 위한' 보다는 '비슷한 처지의 사회 구성원들과도 이해관계를 공유할 수 있는' 요구가 되면 될 수록 좋다 생각한다. 물론 지난한 과정이 예상되나, 그를 지나 어느 정도의 합의가 이루어졌다면 그를 바탕으로 일종의 정치적인 연합 내지는 연대체를 구성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 단계까지 큰 잡음 없이 흘러왔을 때, 우리에게 가능한 것은 분명 적지 않으리라 예상되지만 굳이 하나의 포인트를 설정하자면 2012년 중반의 19대 국회의원선거와 후반의 18대 대통령선거를 점찍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국면에서 연합 내지는 연대체를 통해 음악가와 함께 하는 이들의 요구 사항을 구체적인 정책 제안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고 필요한 경우 지지 선언과 보이콧 등을 통해 정치적인 압력을 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전국적인 규모에서의 활동이 무리라면 음악가들 대다수가 거점으로 삼고 있는 '홍대 앞'이 위치한 서울 마포구 갑, 서울 마포구 을 국회의원 선거 정도에 집중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그 외에도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 관련 정책에 대해 발언할 수도 있고 서울문화재단 등 각 지역의 문화예산을 쥐고 있는 단체들을 압박할 수도 있다. 혹은 조금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음악계 바깥의 정치 단체들과 연계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라 생각된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관심 있고 실행력 있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의 여부이다. 특히 음악가와 같이 자유로운 이들이 무엇인가를 합의한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이진원/최고은이라는 계기'를 막 지나온 지금, 우리에게 남아있는 길은 무엇인가? 어쩌면 지금의 상황은 음악가들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는 상황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그러하다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오히려 그렇게 주어진 '선택을 강요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돌파하는 것이 아닌가? 행동의 주체로서 누가 앞서 나서게 될지를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다. 그러나 분명 누군가는 이 일이 자신의 소임임을, 이 일에 자신의 몫이 있음을 알고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그 '몫'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두 죽음을 보내고 남겨진 우리에게 단 하나의 의무가 있다면 작금의 비극들을 반복하지 않는 것, 그것들을 종식하는 것이다. 우리에겐 비극을 반복할 이유가 없다. 다함께, 우리는 다시 한 번 외쳐야 한다.

우리에겐, 다시 비극을 반복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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