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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가 된 교회, 이대로면 기독교 신자는 '지옥불' 신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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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가 된 교회, 이대로면 기독교 신자는 '지옥불' 신세!"

[김민웅의 '리브로스 비바'] <네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라>

"강도의 소굴"이 된 교회

오늘날 교회는 조롱거리로 전락했다. 그 추락의 속도는 막을 길이 없을 정도다. 날로 거대한 규모의 건물로 자신을 과시하지만, 그 건물의 크기 이상으로 쏟아지는 세간의 비난에 대해 무감각하다.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과 부패는 교회가 욕망의 성채인 것을 입증하고 있다. 나사렛 예수의 표현대로라면, "강도의 소굴"로 되어버렸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강도들과 동맹을 맺고 권력자들이 되어버렸다. 그런 까닭에 교회는 기독교인들의 문제로 그치지 않게 되었다.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자들을 내쫒고 물건을 쌓아놓은 상을 뒤엎은 것은 무엇 때문이었던가? 교회 안에서 일체의 상행위를 금하는 것에 그 목적이 있지 않았다. 성전 안에 특권 체제를 견고하게 세워놓고 부와 권력을 누리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파는 비싼 제물을 강요하는 현실에 대한 일격을 가하기 위해서였다. 그 일이 벌어진 것은 "모두를 위한 하나님의 집"을 그들만의 성채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예수를 예루살렘의 이른바 지도자들이 좋아할 리가 없다.

▲ <네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라>(랍 벨·던 골든 지음, 양혜원 옮김, 포이에마 펴냄). ⓒ포이에마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을까? 아니다. <네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라>(양혜원 옮김, 포이에마 펴냄)의 저자 랍 벨과 던 골든은 고난에 처한 이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채 200억 원 이상을 들여 이미 규모가 대단한 교회 건물을 또다시 중축하고 있는 현실에 경악한다. 이것은 교회이기를 포기한 교회다. 따라서 교회가 아니다.

구원은 그런 곳에서 나오지 않는다. 도리어 세상이 교회를 구해야 할 판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책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하면, 교회는 긴장할 것이다. 그 긴장은 세상을 생명의 힘으로 가득 차게 하는 기쁜 소식, 복음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다.

제국의 폭력과 교회

미국 거대 교회의 상황은 한국 교회의 현실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래서 이 책은 우리의 현실에서도 그대로 꽂혀 들어온다. 번역된 제목은 <네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라>라고 되어 있는데, 원제는 "예수, 기독교인들을 구하기 원하신다(Jesus wants to save Christians)"이다. 기독교인들은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여기고 있으므로 이 제목은 사실 도발적이다. 교회가 구원의 현장이라고 스스로 여기고 있는 자존심에 반격을 취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부시가 집권했던 시기의 미국이 전쟁 국가로 되는데 있어서 가장 강력한 버팀대가 되는 것은 보수 기독교인들이었다.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선택해야 마땅한 이들이 제국의 전쟁을 옹호하는 최대 세력이 되었다. 9·11 이후 미국은 그렇게 해서 민주주의가 약화되고 자본의 탐욕을 위한 전쟁이 당연한 정책으로 되었고, 그 결과 공항 출입을 하는 모든 사람들은 잠재적 테러 분자로 감시를 받아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교회는 이런 상황을 만들어내는데 최대의 기여를 하고 있는 셈이다.

랍 벨과 던 골든은 바로 그런 현실에 우선 주목한다. 공항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이런 저런 이유로 조사하고 감시하는 시스템을 작동하고 있는 현실 자체를 이들은 문제 삼는다. 제국의 폭력에 희생된 예수를 떠올려야 하는 교회가 그 제국의 편에 서서 폭력의 제도화에 대해 지지하거나 침묵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이것은 우리가 "에덴의 동쪽"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일깨운다.

여기서 "에덴의 동쪽"이란 최선의 이상적 현실 에덴에서 벗어난 지점, 상황을 말한다. 이렇게 일단 본래의 길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인간은 폭력과 압제의 길로 들어선다. 이 책은 성서 해석을 통해 인간이 빠져 들어간 바로 그 길에 대해 성찰하도록 요청하면서, 그와 동시에 그로 말미암아 고통에 처해 울부짖고 있는 이들의 절규에 귀 기울이라고 말한다. 거대한 제국에 의해 짓밟히고 유배당한 이스라엘의 현실은 그 절규의 압축이다.

"이스라엘"의 고난

사실 이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듣게 되면 오늘의 우리는 팔레스타인을 억압하는 국가 폭력의 실체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2000년 전 이스라엘은 지금의 팔레스타인과 다르지 않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단어이자 현실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제국의 지배 아래 변방에 몰려서 폭력과 억압에 고통을 받아야 했던 이들 모두를 대변하는 존재이자 이름이다. 이스라엘은 흑인 노예, 외국인 노동자,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 비정규직 노동자, 전쟁으로 희생된 이라크의 민중 등으로 번역되어도 이상하지 않는 단어이다.

성서는 이들이 토하는 절규와 울부짖음에 귀 기울이고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나님은 울부짖음을 언제나 들으시는 하나님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됨됨이에 아주 중요한 요소다. 하나님은 항상 압제당하는 사람의 울부짖음을 들으시는 존재인 것이다. 울부짖음이 역사를 시작하게 한다. 발동을 건다. 한바탕 흔들어서 움직이게 만든다. 울부짖음은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는 촉매이며, 원인이자 이유이다. 그러나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듣기만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행동을 취하신다. 출애굽 이야기는 하나님이 그 울부짖음에 어떻게 행동으로 응답하시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 책은 성서의 출애굽 사건을 통해 오늘날 교회가 가야할 길을 일깨운다. 거대한 압제와 폭력의 시스템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겪은 혁명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그 혁명이 또한 이후 좌절되고 변질되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제국 이집트에서 벗어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당도해서 국가를 건설한 이후 다윗과 솔로몬을 거치면서 전쟁국가가 되고 만 것을 직시하도록 한다. 압제당한 이들의 절규가 외면당하는 현실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 고발은 아모스와 같은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 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라. (…) 빈궁한 사람들을 짓밟고,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을 망하게 하는 자들아. (…) 헐값에 가난한 사람들을 사고, 신 한 켤레 값으로 빈궁한 사람들을 사자, 찌꺼기 밑까지 팔아먹자 하는 구나."

공평과 정의의 실체

교회가 찬양을 하고 잔치를 벌이고 자기들끼리 신이 나는 판에 취했을 때 하나님은 도리어 분노하시고, 공평과 정의의 세상을 만들라고 말씀하신다. 너무나 당연한 이 말씀은 오늘날 교회에서 과격하고 위험한 발언이 되고 말았다. 예수 이야기에 이르면 우리는 그 정의와 공평의 실체를 목격하게 된다. 랍 벨과 던 골든은 "어린 양(예수)이 하나님의 혁명을 일으키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그 예수는 한국의 교회에서 여전히 과격하고 위험하다. 강도의 소굴이 된 교회, 강도와 동맹을 맺은 교회는 그 예수와 적이 된다. 그러나 이 예수와 함께 하는 이들은 교회를 구하고 세상을 구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오늘의 한국 교회에서 이 예수를 전하는 설교를 우리는 듣기 어렵다. 그런 설교는 정치적이기에 영성을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그런 설교는 현실을 거론하기에 복음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설교는 성서에서 이탈한 이데올로기이기에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그러면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살이 찢기고 피가 쏟아진 사건은 무엇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영적인 살과 피였는가? 글자로 된 피와 살인가? 이데올로기로 만들어진 십자가인가?

랍 벨과 던 골든은 바로 이 살이 찢기고 피가 쏟아져 이루어낸 성찬의 의미를 파고든다. 죽기까지 자신을 나눈 이 존재를 둘러싼 무수한 논란과 해석이 있지만, 그 핵심은 언제나 불의한 세상과 맞서 정의와 공평, 그리고 사랑을 온몸으로 이루어낸 사건에 있다. 이것이 빠진 신학, 이것이 존재하지 않는 예배, 이것을 볼 수 없는 교회는 예수와 아무 관련이 없다. 돈과 권력과 지위를 구하는 자기들만의 모임에 불과할 뿐이다.

한국 사회 진전의 장애물

한국 사회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를 꼽으라고 하면 한국 교회가 제외되지 않는다. 물론 그렇지 않은 교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폭력과 억압에 항거하여 인간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그 자존감으로 가득 찬 생명의 권리를 무한히 옹호하고 지켜내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 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라는 질타를 받을 것이다.

교회를 다니든 아니든, 오늘날 한국 사회의 현실을 새롭게 돌파하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네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라>를 펼쳐보기를 권한다. 기독교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면 더욱 권한다. 리처드 호슬리의 <크리스마스의 해방>(다산글방 펴냄)과 함께 이 책을 읽으면 성서의 본래 맥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때마침 이명박 정부가 공정한 사회를 위한 여러 정책을 내놓았다는 소식이다. 공정한 사회를 발상할 인물이 없는 정권, 공정한 삶을 살아내지 못한 자들의 집단에서 무얼 내놓을 수 있을까? 구제역 대응의 과정에서 "파고 묻고 덮었지만" 악취와 함께 내장이 썩고 가스가 찬 돼지 사체들이 땅 위로 솟아올랐다. 겉으로 별별 것을 다 해본다 한 들, 그 안에 들어찬 것이 결국 밖에 나오는 법이다. 덮는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의 탄식을 외면하고 이들의 저항을 범죄로 돌리는 권력은 "강도의 소굴"과 다를 바 없다. 그 권력과 동맹을 맺은 교회가 예수에 의해 뒤엎어지지 않으면, 가난한 사람들의 탄식은 날로 깊어만 갈 것이다. 이런 현실에 <네 이웃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라>는 비난받고 조롱당하는 교회를 위해서라도 그 교회 스스로가 집어 들어야 할 책이다.

랍 벨과 던 골든의 설교에 대한 이 대목, 의미 깊다.

"자신이 이미 믿는 것을 확인해주는 것이 좋은 설교가 아니다. 설교는 소비하고 나서 얼마나 좋았는지 혹은 얼마나 즐겁고 만족스러웠는지 평가하는 상품이 아니다. (…) 설교는 토론을 시작하는 것이다. 설교는 첫 단어를 제시하는 것이다. 설교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보도록 영감을 주는 촉매제다."

이 책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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