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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피천득)×(법정+고은)×진중권=리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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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피천득)×(법정+고은)×진중권=리영희!?

[프레시안 books] 리영희의 <희망>

2000년대에 대학을 다닌 내게 리영희는 존경의 대상이기에 앞서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그의 이름을 처음 들었던 순간부터 그랬다. 대체 왜 '이영희'가 아닌 '리영희'인가?

이른바 진보 진영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존경한다고 말하는데, 왜 정작 대학생들 중에는 리영희의 책이나 글을 읽는 사람이 없을까? 수많은 이들이 리영희를 존경한다고 말했지만, 대체 어떤 부분을 어떻게 존경하는지 말해주는 이는 또 없어서, 나의 궁금증은 날로 커져만 갔다.

그러던 중 리영희는 지난해 12월 5일 지병 악화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저작을 주로 내왔던 출판사 한길사에서 <희망>이라는 제목 하에 한 권의 책을 선보였다. 출판사의 책 소개에 따르면 "<희망>은 다시 읽어도 번득이는 리영희 사상의 정수와 빼어난 문장력과 문학성을 담지한 대표적인 명편들을 '산문선'이라는 이름 아래 <리영희 저작집>(전12권)에서 가려 뽑아 한 권으로 엮은 책"이다. "사후의 평가와 연구는 다각적인 측면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겠지만, 먼저 선생의 생각과 사상을 온전히 담고 있는 글과 책을 제대로 읽어보는 데서 시작해야 함은 분명"하다는 출판사 책 소개의 말에 공감하며, 이미 고인이 되어버린 '사상의 은사'를 뒤늦게 만나고자 하는 행렬에 나 역시 동참하였던 것이다.

▲ <희망>(리영희 지음, 임헌영 엮음, 한길사 펴냄). ⓒ한길사
그런데 일단 <희망>을 펼쳐들면 그 어떤 감정보다 먼저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리영희의 산문을 묶어낸 편집자가 쓴 서문 때문이다. "선생의 글은 이런 인문학적 사상성 때문에 시사 칼럼의 차원을 넘어 고전적인 영원한 생명력을 담보해내는 셸리의 '사슬 끊는 프로메테우스'를 연상케 한다"(7쪽)거나, (리영희 선생은) "민족 지성사적인 관점으로 본다면 아마 단재 신채호 이후 처음 맞는 총체적인 사상가로서의 실천적인 지성"(8쪽)이라거나, 심지어 "그의 칼럼은 정지용의 어휘력과 피천득의 서정성, 법정 스님의 안정감, 고은의 기지에다 진중권의 예리성을 두루 담아내고 있는 듯"(8쪽)하다는 식의, 호들갑스럽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표현들이 갑작스레 독자에게 달려든다. 순간 나는 지나치게 화려하고 요란스러운 광고 탓에 제품을 살까 말까 고민하게 되는 소비자의 심정을 느끼게 되었다.

잠시 책장을 덮고 생각해보았다. 다소 부적절하다고까지 느껴지는 ('진중권의 예리성'마저 리영희가 갖추었다니!) 그의 이름 앞에 붙어 있는 요란스러운 수식어들은 오히려 그만큼 리영희라는 한 지식인이 있는 그대로 이해되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가 아닐까? 리영희의 책을 편집하고 그의 생전 대담을 나누어 몸이 불편한 상태에서도 본인의 자전적 기록을 완수하게끔 한 문학평론가 임헌영의 노고를 비하할 생각은 없지만, 그의 서문이 내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읽지 않으면 나 역시 막연하게 '참 좋은 분이었지,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정신적 스승이었지'라는 상투적 표현 속에 함몰되고 말 것이라는 그런 예감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그러한 긴장감 속에서 나는 <희망>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편자가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책은 총 5장과 한 편의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과 5장은 개인적인 체험, 독서 후기, 내면적 갈등 등을 담고 있고, 2~4장은 문화적, 정치철학적, 종교적 주제에 대한 리영희의 산문들을 포함하고 있다.

마지막 부록은 그 유명한 '상고 이유서'로, 리영희가 1977년 구속되어 있을 때 어떠한 참고 문헌도 없이 자신의 책 <우상과 이성>, <8억 인과의 대화>에 대한 반공법 기소가 왜 잘못되었는지를 논한 한 편의 논문이다. 한 지식인, 특히 냉전 논리가 지배하던 1960~70년대 당시 한국인이 알지 못했던 소련과 중국 등의 실상을 보도함으로써 이른바 '사고의 균형'을 찾아준 저널리스트 겸 학자의 깊은 세계를 들여다보기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막상 본문 속으로 들어가 보면 그 기대는 제대로 충족되지 못한다. 오히려 '대체 리영희는 누구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갔는가?'와 같은 질문이 더욱 증폭될 뿐이다. 그의 사회 참여적 글쓰기의 이면에 있는 사상들, 그것이 담겨있다고 여겨지는 산문들을 한데 모은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더 큰 혼란을 느꼈다. 이 책 <희망>에 등장하는 '사상의 은사' 리영희의 사상은 동어 반복적이거나 '상식'적이며, 때로는 한 권의 책 안에서 서로 상충되는 내용이 담겨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령 종교에 대한 리영희의 생각을 담고 있는 "종교와 신앙 앞에서 망설이는 마음"(219~224쪽)을 살펴보자. 저자는 예수님 부처님을 믿으라고 강요하고 설교하는 것보다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더욱 중요하며, 한국의 종교인들은 그와 정반대로 '겉치레'에만 치중하여 큰 교회와 절과 성당을 짓는 일에만 매진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21세기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귀에 딱지가 앉힐 정도로 많이 들었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바로 그 점이 내게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제도화된 종교는 인간을 구원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에서 대심문관의 우화를 통해 바로 이 난제를 향해 전력 질주하여 부딪친다. 형식화된 교회와 제도는 신자들의 정신적 자유를 예속한다고 비판받지만, 바로 그 예속으로 인해 그들은 마음의 평화를 얻으며 그것이 더욱 올바른 일은 아닌가? "종교와 신앙 앞에서 망설이는 마음"의 이면에는 바로 이와 같은 질문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사상의 은사'의 사유가 바로 저 지점까지, 혹은 저것보다 더 깊은 심연까지 다가가 지금껏 내가 알지 못한 세계의 눈을 뜨게 해주는 그런 것이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리영희는 그러한 '상식적'인 결론에 대하여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다만 지학순이나 장일순과 같은 모범적인 '예수님의 제자들'의 사례를 거론할 뿐이다. 리영희가 저널리스트로서 지식인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실사구시형 인물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건 너무 상식적이고 상식적이기만 할 뿐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상식의 토대는, 마치 리영희가 평생을 싸워왔던 군사 독재 시절의 '상식'과 마찬가지로, 그리 단단한 토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가끔 엉뚱한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20년, 30년 장기 복역한 미전향 공산주의자들처럼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도 신을 버리지 않는 신자, 십자가에 침 뱉기를 거부하는 신자만이 감히 '신자'니 '교도'라고 '종교인'을 자칭할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아직도 종교를 가지지 않는 이유', 238쪽)

물론 그렇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굳건한 신앙심은 리영희가 말하는 '이성' 혹은 '합리'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라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 '살인하지 말라'라고 써 있기 때문에 전쟁에 참전하여 총을 들고 싸울 수 없다고 목숨을 걸고 투쟁하던 사람들이, 역시 그 성경에 '피를 흘리지 마라'고 써 있다는 이유로 수혈을 거부하여 자신 혹은 자녀들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역설적 상황 속에서 리영희 혹은 그와 한국 사회가 공유하는 '상식'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 서평은 리영희의 종교관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가 판단의 기준으로 내세우고 있으며 자명한 것으로 여기는 (적어도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상식이나 이성이 올바르지 않을 가능성에 대해 회의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상식' 혹은 '이성'이 지니는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 한 가지 사례를 들고 있을 따름이다.

물론 한국의 현대사에는 길고 어두운 시기가 있었고, 그동안에는 '공산주의자도 사람이다'와 같은 진정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던 그런 역사가 포함되어 있다. 바로 그 시기에 리영희는 모든 지식인들에게 '사상의 은사'였지만, 그것은 그가 남다른 용기와 현실감각을 지녔기 때문이었지, 상식과 비상식의 경계를 넘나들며 깊거나 높은 사유의 궤적을 그려냈기 때문은 아닌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좀 더 꼼꼼하게 읽는 독자들은 심지어 한 권의 책 안에서도 서로 상충되는 서술을 어렵지 않게 짚어낼 수 있다. 가령 그의 명성을 드높인 칼럼 중 하나인 '파시스트는 페어플레이의 상대가 아니다'(311~327쪽)를 펼쳐보자. 여기서 그는 해방 이후 친일파와 그 잔재 세력들에 의해 지배되어 온 한국의 현대사를 통시적으로 고찰한 후, 그와 같은 세력들은 어설픈 '관용론'과 '보복 불가론'을 타고 다시 세력을 잡으려 들 것이므로, 독일이나 일본의 파시스트들을 상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페어플레이 정신을 접어두고 "민주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칼럼은 이후 386 세대들의 정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나라당을 '파쇼'라고 자연스럽게 부르며, 그들과는 어떠한 타협이나 대화의 여지도 있을 수 없고, 따라서 그들을 패퇴시키기 위해 이른바 '야권 대연합'을 포함한 모든 방책을 동원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가 바로 이 칼럼의 메아리 속에 울리고 있지 않은가). 그 자체에 대한 비판적 검토는 잠시 미뤄두자. 중요한 건 바로 뒤이어지는 칼럼인 '광주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329~336쪽)를 보면 정 반대의 입장이 결론에 버젓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악(惡)을 악으로 갚고 싶은 당연한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자만이 상호간의 부정적 관계를 변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적'과의 부정적 관계에 새로운 국면을 활짝 열어젖히는 '자유'(自由)를 '적'과 '나'에게 동시에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336쪽)

물론 전자는 1988년에, 후자는 1993년에 쓰인 것이며, 김영삼의 3당 합당과 뒤이은 대통령 당선으로 인해 하나회는 해산되었고 군부 독재는 적어도 형식적으로나마 완전히 청산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도외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루쉰의 그 유명한 어구인 "물에 빠진 개는 몽둥이로 두들겨 패야 한다"는 말까지 인용하며 '파시스트'에 대한 비타협적 태도를 강조하던 목소리와, "악을 악으로 갚고 싶은 당연한 유혹"을 물리치자는 주장은, 적어도 사상·담론의 측면에서는 양립하기 어렵다.

또 이런 대목은 어떨까? 리영희는 "우리는 일본의 문화·사상·관습·제도를 두려워하거나 미워할 필요가 없다"(410쪽, '해방 40년의 반성과 민족의 내일')라는 상식적인, 하지만 1984년이라는 발표 연도를 놓고 볼 때에는 혁신적인 주장을 한다. 그런데 불과 한 쪽 앞에서 "우리 유행가 가수가 '히트'해서 유행시키고 있다는 '돌아와요 부산항에'라는 노래도 퍽 석연치 않은 인상을 준다. 침략의 출입구였던 부산으로 일본인을 다시 불러들이는 발상 같아서 말이다"(409쪽, 같은 칼럼)라는 문구를 읽었던 사실을 상기해본다면 역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것이다. 일본의 문물을 두려워하거나 미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리영희와,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듣고 석연치 않은 인상을 받는 리영희는 과연 동일 인물인가?

질문을 이렇게 바꿔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상호 모순되는 측면을 지니고 있으며 그 모두를 '자신의 글'로 써내려가는 리영희라는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한 걸음 더 나아가보자. 그렇다면 그 리영희가 '사상의 은사'로서 활동했고 활동해야만 했던 해방 이후 현대사는 대체 무엇인가?

<희망>은 리영희를 곧바로 알게 해주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리영희라는 한 자연인과, 그가 태어나고 자라났으며 살아간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에 대해 궁금해지게 만드는 책이다. '상식'으로 '몰상식'에 맞섰던 그의 인생은 어떤 사상적 통일성이나 완결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다면적·다층적인 형태를 띠고 있고, 바로 그래서 그의 칼럼 하나하나는 쉽고 재미있지만 그것들을 전체적으로 놓고 볼 때 독자는 (적어도 나는) 어떤 후련함과 상쾌함 대신 주체할 수 없는 호기심과 지적 갈증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은 독서의 경험이야말로 2011년의 독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리영희를 '(정지용+피천득)×(법정+고은)×진중권' 같은 '먼치킨 캐릭터', 즉 '우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게 아니라, 지금 이 시대의 '이성'으로 지난 시대의 이성적 비판적 지식인을 바라보고 사유하는 것 말이다.

한 사람의 원로에 대해 알고 싶고 존경심을 표하고 싶다면 직접적으로 그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화>나 <역정>을 읽는 편이 낫다. 하지만 현재의 눈으로 과거의 지성을 살펴보고 싶다면 <희망>을 집어 드는 것은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같은 비판적 독서를 통해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희망이 자라날지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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