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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증권맨'·'엄친딸'이 부러운 당신에게

[철학자의 서재] 조너선 캐플런의 <아름다운 응급실>

나는 경쟁에서 살아남은 사람일까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20년 가까이 '남보다 더'라는 말에 혈안이 되어 살아왔다. 초등학교 다닐 때에는 옆의 아이보다 그림을 더 잘 그리고, 인기가 더 많기를 원했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다른 친구들보다 공부를 더 잘하기를 원했다. 대학에 와서는 다른 학생들보다 더 재밌는 대학생활을 하고자 했고, 대학원에 와서는 다른 학우들보다 더 논문을 잘 쓰고 똑똑해지고자 했다.

나는 지속적인 경쟁을 통해서 능력을 키운다면 원하는 자리나 위치에 오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살았다. 내가 처한 상황이나 환경이 최고의 조건은 아닐지라도 꾸준히 능력과 자질을 갈고 닦는다면, 바라던 것을 얻으리라 믿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내 자신을 비교하였고, 내가 남보다 잘했다고 생각이 들 경우에는 그 사람을 폄하하고 그보다 더 낫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새로운 경쟁 대상으로 정했다. 내가 남보다 잘하지 못했다고 생각이 들 경우에는 자신을 비하했다. 이러한 경쟁심이 사람을 조급하고 신경질적이게 만든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경쟁을 통해 얻는 성과를 볼 때면 그러한 불편한 진실은 바로 외면해 버렸다.

계속 남과 비교하고 경쟁을 하던 생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 일이 있었다. 다양한 학교·학과 출신의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름난 학교를 다니는 한 사람이 자신의 부모는 이른바 '사'자 들어가는 직업에 종사하지만, 돈을 너무 못 벌어서 좀 그렇다는 식의 얘기를 하였다. 그는 뒤이어 내가 볼 때 사치스럽다고 생각되는 생활을 자신이 누리는 것에 대해서 당연한 것 마냥 얘기하였고, 동문들과 그들만이 웃고 즐길 수 있는 얘기를 하였다. 그가 당연시하다 못해 하찮게 생각하는 그의 생활은 내가 그토록 갈망하고 꿈꾸던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옆의 나랑 비슷하다고 혹은 속으로 나보다 못하다고 폄하했던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는데, 그들의 얼굴 역시 내 얼굴처럼 굳어 있었다. 그때 나는 내가 승자가 아니라 패자임을 알게 되었다. 무한한 경쟁에서 한두 번은 이길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 나는 패자이다.

이러한 무한 경쟁이 결코 공정하지 않은 게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좋은 집안과 외모, 재능 등을 고루 갖추고 있고, 어떤 사람은 그 중 한두 개를, 그리고 어떤 사람은 어느 하나 가진 게 없다. 이 사람들이 똑같이 시험을 보고 평가를 받는다면, 이것이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 모임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무한 경쟁이라는 불공정한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불공정한 게임은 그 모임뿐만 아니라 내 삶의 전반에 걸쳐서 진행되고 있었다. 광고나 영화에 나오는 예쁜 여자들을 보면서 얼굴과 몸매를 비교하고, 국제적인 학자들을 놓고서 학력이나 외국어 능력을 견주며, TV에 나오는 재벌집을 보면서 집안의 경제력을 비교했다. 나는 이 불공정한 게임을 그만두기보다는 이를 통해서 조금이라도 나은 위치 혹은 재능을 획득하기 위해서 발버둥을 칠뿐이었다.

경쟁의 거부

▲ <아름다운 응급실>(조너선 캐플런 지음, 홍은미 옮김, 서해문집 펴냄). ⓒ서해문집
<아름다운 응급실>(조너선 캐플런 지음, 홍은미 옮김, 서해문집 펴냄)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여기서 나와 비슷한 무력감과 회의를 느낀 사람을 만났다. 그의 이름은 조너선 캐플런(Jonathan Kaplan)인데, 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 역시 그의 부모님처럼 의사가 되었는데, 그의 조국에서만큼은 승자의 위치에 서서 승자가 누리는 혜택을 누렸다. 싸움·폭동·질병으로 인해 병원을 찾은 하층민들이 그의 풍부한 '의료실습대상'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군복무를 하지 않으려고 승자의 위치를 이용해서 영국으로 도피하였다. 그런데 영국에 가자 승자가 아닌 패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영국의 의사들은 혈연과 학연으로 단단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아프리카에서 온 '빽' 없는 의사가 올라갈 수 있는 위치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영국 의료계에서 주류로 편승할 수 없었던 그는 미국이라는 활로를 찾아갔다. 미국에 간 그는 영국에서보다는 비교적 자유롭게 의학 연구에 참여하고 활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의료계는 철저히 돈의 흐름을 따랐다. 제약회사와 손잡고 시장성이 있는 약품이나 의료기구 개발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래서 간단한 약물요법으로 가능한 치료를 비싼 의료기계로 치료한다든지 혹은 치료법 개발이 시급한 질병이 있더라도 그 치료제가 시장성이 없다면 시판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이윤 추구에 집중하는 미국의 의료계에서 일하는 것에 회의가 들었고, 자신이 진정한 의료인이라는 위안을 얻기 위해서 다시 아프리카로 떠났다.

아프리카의 분쟁지역에서 의료봉사를 하던 그는 아프리카에 온 구호단체들조차도 전쟁 난민의 구호보다는 그들 간의 권력 다툼에 더 집중하는 사실과 몇몇 국가나 기업이 전쟁을 지속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의료행위로는 이러한 전쟁과 그것에 따른 사람들의 고통을 종식시킬 수 없다는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또 자신이 몇 사람을 치료하는 것보다는 수로관 엔지니어가 난민촌에 배수로를 파서 수많은 사람들을 살려내는 광경을 보면서 자신의 의료행위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일인지를 깨달았다.

자신의 역할이 얼마나 초라하고 미미한 것인지를 깨달은 그는 전쟁에서 다친 몇 사람을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쟁의 실상이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한지를 외부세계에 알리는 언론을 만드는 것이 더욱 시급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서 그는 모잠비크에 갔을 때 난민치료가 아닌, 전쟁 난민의 실상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려고 했다.

그가 분쟁지역으로 구호활동만 다닌 것은 아니다. 그는 비행기 안의 승객이나 환자를 먼 지역의 병원으로 이송할 때 동행하는 역할을 하는 항공의사로서 일하기도 했다. 또 크루즈의 선의(船醫)가 되어서 각국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임상경험을 쌓았다.

선의로서든 항공의사로서든 어떤 위치에 있건 간에 그는 지난 번 아프리카의 전쟁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얼굴을 잊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또 다른 분쟁 지역인 미얀마로 떠났다. 미얀마에서는 소수민족 사람들이 정치세력의 다툼으로 인해 아파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접한 그는 소수민족들이 이용할 수 있는 지역에 병원을 세우려고 하였다.

더반에서는 의료행위가 아닌 다큐멘터리를 찍음으로써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하였다. 거기서는 다국적 기업의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그 지역 사람들이 수은 중독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 사실을 폭로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는데, 그 결과 주민들은 이전보다 나은 보상을 받게 되었고 그 기업 역시 이전보다 많은 벌금을 냈다. 그는 이 작업을 통해서 진부하다고 생각했던 공중위생, 산업재해, 유행병과 관련된 의학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영국으로 다시 돌아와 증권가 사람들 혹은 기업 간부들의 직업병을 연구하고 치료하였다.

이 책에서 그려내는 그의 삶을 살펴보면, 그가 무한 경쟁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자신의 집안 배경이나 학벌 혹은 백인이라는 이유로 조국에서는 승자일지 모른다. 하지만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그 역시 열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전락한다. 부단히 주류사회에 편입하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학연이나 혈연이 없어서 혹은 돈을 최고의 목표로 두지 않았기에, 의사로서 거머쥘 수 있는 최고의 자리와 권력을 맛볼 기회조차 제대로 얻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경합해서 이겨야 하거나, 다른 사람의 목숨을 돈으로 바꿔야 하거나 전쟁 속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목숨을 담보로 자신이 속한 단체나 국가의 이익을 도모하는 상황에서 의사로서의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인지를 절감하였다. 또 이러한 상황에 순응하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부끄럽고 불편한 짓인지도 느꼈다.

이에 그는 끝끝내 이길 수 없는 불공정한 게임을 그만두고 다른 삶의 방식을 찾아나간다. 항공의사, 선의, 분쟁지역에서의 의료봉사자, 생명을 위협받는 소수 민족 혹은 산업재해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의 제작자, 그리고 직업병을 연구하고 치료하는 의사로서 다양한 일들을 경험하고 해냈다. 이러한 일들을 하면서 그는 누구와의 비교나 경쟁 없이 그리고 누구의 희생도 없이 의사로서 인간으로서의 만족감과 성취감을 맛본 것 같다.

누가 영원한 승자인가

무한 경쟁에서는 내가 어떤 사람을 이기면 금방 어디서 더 잘난 사람들이 나타나서 나와 경합을 벌인다. 이때 경쟁에서 밀려난 대다수의 사람은 평생을 '루저'로 살아간다. 이름난 대학을 못가서, 돈이 없다는 이유로 결혼을 못해서, 얼굴이 예쁘고 날씬하지 않아서, 비정규직으로 일해서, 정리해고 일순위에 들어가서 등등… 온갖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경쟁에서 밀려난 자로서의 패배감과 무능력함에 괴로워하며 살고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러한 경쟁 구조가 불합리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구조에서 탈피하자고 외치거나 벗어나려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나를 포함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저 '내가 최선을 다하면 완전히 망하지는 않겠지'라는 심정으로 살고 있지 않나 싶다.

그런데 아프리카의 분쟁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게으르고 열심히 살지 않아서 그런 고통을 받는 걸까? 미국에 사는 서민들이 나쁜 짓을 해서 제대로 된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걸까? 우리나라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공부 열심히 안 하는 학생이 없고, 자기계발 안 하는 직장인이 없다. 일 열심히 안 하는 사람이 없고, 몸매관리 소홀히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왜 다들 그렇게 아득바득 열심히 사는데도 무력감과 열등감을 갖고서 불만족스러운 삶을 살아야 하는 건지… 이 문제가 전적으로 그들 개인의 잘못인지 궁금하다.

이 책의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더반에 갔다가 영국으로 돌아온 뒤로는 현대의 직업병에 대해 연구하고 치료한다고 전했다. 영국의 증권맨, 은행가, 기업의 중견 간부들의 삶은 겉으로 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엄청난 연봉, 호화스러운 생활, 높은 사회적 지위는 누가 봐도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의 삶이다. 하지만 그들은 언제 누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항상 1등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정신이상증세를 보이기도 하고 원인 모를 신체적 고통을 받고 있다고 했다. 이러한 사실을 미뤄 볼 때 무한 경쟁에서 영원한 승자는 없다는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총성 없는 무한 경쟁이라는 전쟁터에서 무고하게 고통 받고 죽어가는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그 대안 가운데 하나를 이 책의 저자가 보여주었다고 본다. 무한 경쟁이라는 불공정하고 터무니없는 게임을 그만두고, 다른 사람도 나도 모두가 서로를 도와줄 수 있고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몸소 보여주었다.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그 경쟁을 그만두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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