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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야구 '빠'의 인간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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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어느 야구 '빠'의 인간 극장

[편집자, 내 책을 말하다] 정범준의 <마흔, 마운드에 서다>

자이언츠 키드와 이종범빠

저자인 정범준 씨와 나는 가끔씩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사는 이야기, 책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그러다가 어김없이 '야구' 이야기에 꽂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그는 자이언츠 키드요, 나는 이종범빠다. 그 자리에 <경향신문>의 이용균 기자(<야구멘터리>의 저자)가 끼면 날 새는 줄 아시면 된다.

그러던 어느 날엔가, 저자는 사회인 야구를 한다고 자랑질(!)을 했다. 야구 선수 평전으로는 국내 최초라 할 수 있는 최동원 평전(<거인의 추억>)을 출판한 지 얼마 안 돼서였다. 나는 내심 부럽지도 않았다. 힘들고 험한 운동은 워낙 싫어하는 체질인 까닭이다. 나는 나의 레전드인 이종범이 은퇴를 최대한 늦추며 활약하길 바라는 마음뿐, 그래서 응원뿐이다.

해가 두 번 바뀌고 나서, 저자는 또다시 책을 하나 썼노라고, 이번에는 살포시 고백해 왔다. '사회인 야구'에 관한 책이라며 자신의 일지와 팀원들에 대한 취재, 인터뷰들을 섞어 썼다고 했다. 그렇지만, "선배가 꼭 출판해 줘"라는 말은 하지 않은 채, <조선일보> 논픽션상에 응모해 버렸다.

불행과 다행이 섞여서, 그 원고는 최종심까지 올랐다가 대상으로는 선택을 받지 못했다. 소재가 너무 평범(?)했다는 후문이 있었다. 정범준 씨로서야 자존심이 약간 상했겠지만, 그 원고가 알렙 출판사에서 출간되게 된 사연이 그것이다.

평범 밋밋한 날 것 그대로

오르한 파묵의 <새로운 인생>에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라는 문장이 첫 구절에 나온다.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의 인생을 뒤흔들 뿐만 아니라, 한 세대와 세계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그렇다면 <마흔, 마운드에 서다>(알렙 펴냄)는 한 사람의 인생을 흔들 만큼 대단한 책일까 하면, 그렇지 않다고 먼저 깔아두는 게 나을 것 같다. 그러니까, '프레시안 books'에 소개되는 그 숱한, 인생의 지침서들, 사회의 모순을 고발하고 비판하는 책들, 통찰을 담은 고전들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 < 마흔, 마운드에 서다>(정범준 지음, 알렙 펴냄) ⓒ알렙
<마흔, 마운드에 서다>는 마흔에 이른 한 평범한 사내가 삶의 희열을 찾기 위해 비로소 어린 시절부터 하고 싶어 했던 야구에 도전한다는 이야기이다. 그 소재는 야구였고, 그의 자격은 생래적인 것, 즉 롯데자이언츠 창단 어린이 회원이었다. 내막이 있다면, 그가 <거인의 추억>이라는 책을 썼다는 것이며, 지침이 있다면, 프랑수아 트뤼포라는 영화감독이 "영화를 사랑하는 마지막 단계는 직접 영화를 만든 것이다"라고 말한 실언(?)이 그것이다.

이러한 복합적인 동기가 버무려져서 한 편의 원고가 완성되었다. 가볍게 보아도, 아니면 정색하고 무겁게 보아도, 이 원고는 그렇게, 그다지도, 평범했다. 아니, 적어도 <프레시안> 수준의 글을 읽는 독자라면 평범하거나 가볍다고 넘겨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간단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도대체 사회인 야구를 하는 사람 중에 이런 글을 쓸 만한 저자가 드물다는 것이다. 말장난 같지만, 이를 뒤집어보자. 글을 쓰는 저자 중에 사회인 야구를 하며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가이드북 같은 실용 서적이 아니라 사회인 야구 도전기를 논픽션으로 쓴 것은 이 책이 국내에서 처음이자 유일하다는 점도 밝혀두자.

때때로 '야구 책'을 소비하는 문화와 '야구 책'을 쓰는 저자의 역량이 시대적으로 잘 부합하여 걸출한 작품이 나오기도 한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같은 작품 말이다.

유명한 작품과 비교를 해서 송구하지만, <마흔, 마운드에 서다>는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논픽션 버전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나'는 인생 아등바등 살았지만 별거 없다는 인식에 도달한 반면, <마흔, 마운드에 서다>의 '나'는 뭐든 시작할 때 목표 세 가지를 세워 실천해나가는, 의식 있는 삶을 살게 된다. 내야 땅볼 쳐놓고, 1루까지 전력 질주하는 양준혁 선수처럼.

되짚어 보건대,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있을 법하기에 픽션으로 쓰였고, <마흔, 마운드에 서다>는 있었던 일이기에 논픽션으로 쓰였다. 그리고 그렇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독자들이 여간해서 드라마다운 극적 요소를 느끼지 못한다.

<마흔, 마운드에 서다>에는 포장하거나 디자인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이야기가 나온다. 어릴 적 가난 때문에 야구를 못한 것이 마음에 남아, 커서는 폼(form)나게 살아보고자 K드래곤즈를 창단했다는 원년 멤버들이 있다. 드래곤즈는 용띠 해에 태어난 동갑내기 다섯 때문에 그렇게 지었다는 거고, K는 월곡동의 이니셜이라 한다. 월곡동의 이니셜이 왜 W가 아니라 K일까 궁금했는데, 1970~80년대만 해도 달동네였던 월곡동을 줄여서 '곡동'이라 했다고 한다.

한창 잘 나가던 시절에 부상으로 야구를 접고 생업에 매달리다 뒤늦게 사회인 야구에 눈뜬 사람들, 아마추어든 프로든 야구라곤 한 번도 안 해봤지만 마흔이 되어 처음으로 도전해본 정범준 씨 같은 사람들, 50대의 최고령 투수이지만 20대 못지않게 공을 쌩쌩 던지는 문상남 씨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평범하디 평범했다. 비범한 점을 더 보탤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인생의 지혜나 통찰의 안내서도 아니지만, 이 책을 보면 '공감'하게 되는 점이 있다. 더도 덜도 아닌, 딱 <인생극장> 같은 데서 나올 법한 인물들, 평범한 우리 이웃들, '너'들, '나'들이 이 책에는 즐비하다. 아주 평범하고 밋밋하여 무료하거나 무가치하다 싶었던 일상들, 에피소드들, 보통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아등바등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논픽션다움'

이 책을 만들면서 야구 책을 여러 권 보았다. 야구 책이라면 <야구란 무엇인가>라는 스테디셀러와 <야구 교과서>라는 썩 훌륭한 책과 <야구의 추억>, <돌아오지 않은 2루 주자> 같은 아주 괜찮은 에세이 등이 유명하다. 이 책들은 모두 1990년대 후반에 소개되거나 출판되었는데, 유명하긴 했지만 당시만 해도 요새보다 많이 읽지는 않았던 것 같다.

10년대인 지금에 이르러서는, <야구 마스터 가이드>(리틀 야구부터 사회인 야구까지 모두에게 꼭 필요한 야구 교과서라는 설명과 김인식 전 한화 감독의 친필 문구 및 사인까지 수록), <바이오메카닉 피칭이야기>(마니아가 쓴 마니아를 위한 야구 이론서, 조용빈 지음), <열구>(그때 우릴 미치게 했던 야구, 장편소설), <필 코치의 필 꽂히는 야구>, <두산베어스 때문에 산다>, <김석류의 아이러브베이스볼>, <야구 아는 여자> 등이 눈에 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야구는 취미'인데, 그런 취미를 더 잘 즐기게끔 안내한 실용성 있는 책들이 대세이다. <2010 프로야구 스카우팅 리포트>라는 책도 독자들이 많이 찾았다. 물론 이 책들보다 야구를 소재로 한 스포츠 만화로서 '야구 책'을 소비하는 문화가 예나 지금이나 대세라고 할 수 있다. 가령, <공포의 외인구단>,

, <퍼펙트게임>, 등의 인기는 위의 모든 책들을 뛰어넘었다.

<마흔, 마운드에 서다>는 이런 책들의 분류 어디에 놓이기에 애매한 책이다. 하긴, <거인의 추억>(야구 선수 최동원 평전)을 정확히 분류하면 그게 야구 책일까? 업계 표준으로는 그걸 '인물 평전'으로 친다.

<마흔, 마운드에 서다>는 가령 <스물아홉, 드럼을 치다>, <열여덟, 춤판에 가다>가 각각 음악 책이면서 에세이거나 춤 책이면서 성공기이듯이, 야구 책이면서 논픽션이다. 다른 이에게 '드럼'이나 '춤'이 그렇듯, 정범준 씨에게 삶의 희열을 느끼게 하는 것, 도전해야 하는 것이 야구였다.

그러니까,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 책이 '야구 책'만으로 비치는 걸 경계하고자 했다. 이 책과 유사한 사례가 많이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나는 달린다>는 독일 외무상이었던 필자(요쉬카 피셔)가, 체중은 100㎏에 육박하고, 아내는 이혼을 선언하고,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려 있었을 때, '달리기'(도전)를 시작하여 인생을 바꾼 이야기이다. 이 책도 달리기 책이면서 에세이이다.

<나를 미치게 하는 정원이지만, 괜찮아>는 가드닝(정원)에 미친 한 중산층 사내가 겪은 좌충우돌 이야기인데, 거기에도 인생의 일정한 때에 뭔가에 미친다(도전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다. 정원 책이면서 에세이이다. 누군가는 나이 마흔에 '드럼'(도전)을 시작할 것이며, 누군가는 나이 칠십에 '스키'(도전)를 시작할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마흔, 마운드에 서다>는 야구 이야기면서 '도전' 이야기라는 전형성을 갖고 있는 셈이다.

덧붙이자면, 책을 만드는 편집자로서 나는, 이 책의 장점에 대해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 책의 보도 자료에도 쓴 말이다. "2년간의 기록과 일지 그리고 인터뷰로 완성한, 발과 땀의 논픽션." 발과 땀으로 쓴 논픽션이라는 표현인데, 제목으로 쓴다고 문법적으로 엉성하게 썼다.

이 원고를 처음 읽었을 때 느꼈던, '이 책이 논픽션다운 논픽션인 기준 혹은 수준'이 있다. 본인이 체험하거나 간접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쓴 것이 더 많으면 논픽션다운 것이고, 독서나 연구를 통한 습득 혹은 텍스트 인용이나 재해석 같은 것이 더 많으면 논픽션답지 않은 것이지 싶다. 예를 들어, <조선 팔도 노비님들의 밤일>이나 <왕님의 밥상>이라는 흥미로운 주제라도 그것이 논픽션이라고 부르기에 주저되는 것은, 필자의 "체험" 소지가 다분히 적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제서, 연구서로 분류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마흔, 마운드에 서다>는 2년간의 사회인 야구 체험과 인터뷰, 취재 등이 있어서 가능했던 책이라 더욱 논픽션다운 게 아닐까 싶다. 저자인 정범준 씨의 전작이 <제국의 후예들>, <이야기 관훈클럽>, <거인의 추억>, <작가의 탄생> 등 4권인데, 모두 발과 땀으로 쓴 논픽션들이다. 궁금하면 이 책들 중 어느 하나를 골라서 읽어보셔도 된다. 맨 첫 작품은 인문 논픽션, 두 번째는 한 언론인 단체의 역사서, 세 번째와 네 번째는 각각 야구 선수 최동원과 작가 이병주의 평전이다.

42.195㎞인 마라톤과 같은 인생

이 책을 출판하고 나서, 바보처럼 또 한 번 깨닫는다. 책 만드는 일을 하는 나 같은 사람이 갖게 되는 금과옥조가 있는데, 그것은, 독자가 책을 읽어야(사야) 하는 이유는 몇 가지에 불과하지만, 책을 읽지(사지) 않게 되는 이유는 구십 몇 가지나 된다는 점이다. 엄마 선물 사야 해서 책을 안 사고, 소풍 가야 해서 책을 안 산다. 비가 와서 책을 안 읽고 스마트폰의 게임에 빠져 책을 안 읽는다.

그런 이유와 상황에다 대고 일일이 뭐라 할 수 없다. 책 만드는 입장에선, 단 하나라도 책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 <시크릿 가든>에서 김주원(현빈)이 자주 하는 대사처럼,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해 책을 만들어야 비로소 독자들이 알아준다.

이 책을 출판하고 나서, 저자인 정범준 씨도 결심을 하나 했다. 마라톤이 42㎞ 되는데, 매년 한 권, 여력이 생기면 두 권 이상의 책을 내서 42권의 저서를 내겠다고 한다(이것은 그의 1차 목표라고 한다). 그중 하나가 TBC에 관한 것이다(여기서 공개해도 되려나 모르겠지만). 돌이켜 그의 저술 목록을 살펴보면, 이러한 기획이 과장되지 않은 것임을 알 것이다.

늙기 시작하는 나이, 마흔에 새삼 하나 더 배웠다. 누군가의 말처럼,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니까." 친구야, 우리 열심히 살자, 목표란 것도 정해보고. 그렇지만 인생은 마라톤이라잖나? 한 발자국씩 차근차근 내딛어야 해.

나는 상상해 본다. 6회 말 투아웃 만루 정도의 상황이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볼카운트는 아무래도 좋다. 직구든 변화구든 상관 않는다. 스트라이크라는 직감에 배트를 힘차게 돌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배트와 공이 충돌한다. 순간, 짜릿한 '손맛'이 느껴진다. 공은 좌중간으로 날아간다. 홈런이어도, 아니어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친 공은 펜스, 그 너머를 향해 아직도 날아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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