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사는 꺽다리 집>을 다 읽고 난 후 한동안 가슴이 먹먹해졌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극단적인 가난에 내몰린 어린 연재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작가의 체험이 묻어나는 사실적인 생활의 묘사는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1960~70년대를 자라난 우리가 익숙하게 들어온 언니 오빠 선배들의 이야기였다.
겨울이면 떠놓은 물이 꽁꽁 얼어버리는 방에서 이불을 둘러쓰고 공부를 했고, 새벽이면 신문을 돌렸다는 이야기, 시계가 없어 시간을 알지 못해 신문 배급소를 새벽 두시에 갔다는 이야기, 연탄가스에 중독이 돼 가까스로 살아나 병원에 실려 갔지만 정신을 차리고 오후에 다시 학교에 갔다는 이야기들처럼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삶의 자존심을 지켜온 똑똑하고 올곧게 자라던 강인한 선배 세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들이었다.
▲ <바람이 사는 꺽다리 집>(황선미 지음, 사계절 펴냄). ⓒ사계절 |
가난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배신감이다. 고향집에서 빚 정리를 하고 남은 전 재산이라 할 수 있는 쌀 스무 가마니까지 외삼촌이 거덜 내자, 돈이 얼마라도 좋으니 갚아달라고 애원하는 어머니를 향해 외삼촌은 뺨을 때린다. 그 광경을 우연히 엿본 연재는 자신의 죄를 모르는 외삼촌의 파렴치한 행위와 어머니의 나약한 모습에 분노로 온몸이 굳어진다. 어린 새처럼 팔딱이는 가슴으로 연재는 그 분노와 원망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아직 따뜻하구나. 낳은 지 얼마 안 됐어.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지. 내가 너를 품어 주마.무서워하지 마라"고 <마당을 나온 암탉>에서 초록머리를 감싸던 잎싹의 다정한 모습과는 다르게 고향집에서 새하얀 무명천을 빨아 널며 늘 상냥하기만 하던 어머니는 세상의 모진 풍파와 맞서느라 모질고 단단하게 변해간다. 가난한 삶 속에서 말뚝만큼 단단해져가는 어머니와 자신의 비극적인 운명을 감당하기에도 힘든 아버지를 지켜보며 아이들은 총명하고 굳건하게 자라난다.
어디 네 은행을 보여줘 봐.
여자의 말에 나는 양손을 펴 보였다.
물들여야겠구나. 색이 없으면 아무짝에도 못써
뽀얀 은행 몇 개를 눈으로만 보고 여자가 말했다. 내가 보기에도 뽀얗기만 한 은행은 밋밋 하고 눈에 쏙 들어오지 않았다. (109~110쪽)
연재의 꿈으로 보이는 형형색색의 은행 알처럼 연재가 가 닿고 싶은 세상은 아름답고 포근한 세상이다. 연재의 마음속에 자라는 분노와 미움, 원망과 배신감만으로는 아름은 세상에 닿을 수 없다. 가난한 삶이 가져온 위태로운 삶은 어둡고 슬픈 세상의 문을 쉽게 열어 보이지만 그것만으로는 한 개인은 온전해지지 않는다.
가난은 그 자체도 힘겹지만, 가난한 삶이 가져오는 치부에 익숙해져 버리는 것은 더 두려운 일이다. 낮이면 장마당에서 재미삼아 물건을 훔치는 놀이에 익숙해진 아이들, 밤이면 미군이 버린 쓰레기장을 더듬고 술집 작부의 교태를 배우고 즐기는 놀이에 익숙해져가는 아이들을 보며 연재 역시 욕설을 하고 더러운 물건을 줍고 싶은 욕망에 젖어드는 자신을 발견한다.
처음으로 미군 쓰레기더미를 뒤지다 오물에 더러워진 손을 씻는 것을 도와주는 병직이 삼촌은 거친 세상에서 다르게 살아가는 삶을 가르쳐준다.
"여긴 들개들이 사는 동네야. 굶주린 들개들."
"누구든 잡아먹든지. 잡아먹히든지 하겠지 아니면……."
"아니면 조용히 관찰하든지. 넌 뭐가 될래?" (74~75쪽)
자신의 삶을 관찰하고 관조할 수 있는 눈은 성숙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눈이다. 병직이 삼촌이 주고 간 국어사전을 보며 연재는 힘든 세상 속에서 자신을 지켜내는 꿈꾸는 법을 배워간다.
전작들에서 이미 발휘되었던 작가의 글 솜씨는 동화의 숨결을 넘어 청소년 소설에서는 극한적인 삶의 비극과 직접 맞닥뜨리게 한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마을길도 넓히고, 초가지붕 없애고…'의 새마을운동 구호가 현실이 되어 하루아침에 자신이 살던 초가지붕이 공권력에 의해 불타버린 것이다.
외삼촌이 반나절 만에 만든 꺽다리 집. 그건 집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우스꽝스러웠다. 그런데도 거기에 우리의 세간을 들여야만 했다. 초가지붕이 아무리 노래기 천지에 쓰러질 것 같아도 함부로 무너뜨리면 안 되는 거였다. 군수 아니라 누구라도 말이다. 우리에게는 집이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100쪽)
집은 삶을 품는다. 집은 사람을 품고 그 속에서 아이들은 뿌리를 내리고 자란다. 그런데 그 집을 지켜줘야 할 국가가 삶의 뿌리를 뒤흔들어 버린다. 겨울의 모진 바람 앞에 임시 판잣집에서 살아가던 가족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더 큰 위기를 맞게 된다.
그 속에서도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미워하기만 했던 외사촌 재순이의 열등감을 이해하게 되고 진심으로 친구가 없어 외로워하던 옥란이의 삶을 지켜내지는 못했지만, 우정을 이해해가는 연재는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벼락 맞은 대추나무'를 구하기 위해 재순이와 함께 뛰어 다니면서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법을 깨우쳐 간다.
새해다.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고 도심의 빌딩과 지붕위에서 햇살을 받고 있다. 겨울바람은 살을 에지만 때로는 잠자는 몸을 후려쳐 정신을 번득 들게도 해준다.
어린 연재는 '꺽다리 집은 바람에게'나 줘버리고 싶었지만, 어른들은 그 바람 속을 살펴야 할 일이 남았다. 더욱이 혹독한 바람 속을 살아왔다면 새로운 바람을 피하지 말고 직면할 일이 남았다.
삶은 기적이다
인간은 신비이다
희망은 불멸이다 (박노해, '그러니까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中)
전체댓글 0